소설리스트

남녀역전세계의 실업자-63화 (63/64)

〈 63화 〉 소원

* * *

시상식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내려왔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앉아서 박수만 쳐주면 되는 것이다.

나는 신인상을 보며 샐쭉샐쭉 웃기도하고, 쓰다듬기도 하며 여운을 즐겼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걸림돌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 … 야.”

쿡쿡. 등을 계속 찌르는 느낌이 났다. 나는 돌아볼까 말까 생각하다, 계속 무시하기로 했다.

“ 이 새끼가…”

최지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내 몸을 만지작댔다.

하지만 분위기를 이미 잡아버렸는데, 뻘줌하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치고 나갈 타이밍을 놓쳤다. 학교에서 자다가 남이 내 얘기를 하면 자는 척 하면서 듣는 것과 비슷했다.

또한, 두 달 동안 쌓인 업보가 많았다.

최지현의 문자를 씹었던 것도 마음에 걸렸고, 이런저런 핑계로 무시한 것이 많았다. 그러면서 유지영의 문자는 꼬박꼬박 답해줬으니, 최지현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못 참는 것이 당연했다.

나름의 이유를 내 놓는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나름의 이유였다. 최지현이 납득할 리가 없겠지?

또 그 이유를 대려면 내 심리상태까지 전부 말해 줘야 하는데, 그래서야 손해 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웃음을 참았다.

‘ 그건 그렇고.’

최지현이 몸을 쿡쿡 찌른다. 나는 문득 경찰서에 갔었던 기억을 떠 올렸다. 형사들이 전부 여자여서 적잖이 당황했었지.

“ 그만 만져요. 미치셨나.”

원래라면 성희롱으로 신고 할 수 있는거 아닌가? 물론 내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라도 남한테 이러지는 않겠지?

나는 애써 더 노골적이 되어가는 최지현의 쓰다듬을 견뎠지만, 손이 귀 부근으로 왔을 때는 참지 못했다.

오소소. 등을 손톱으로 쓰다듬는 느낌.

나는 간지럼에 약한 편이다. 내 입에서 꼴사나운 소리가 나오기 전에 의자를 앞으로 끌었다.

“ 그동안 톡 왜 씹냐?”

“ 손가락 아파서.”

“ 지랄.”

…내가 생각해도 구차한 핑계였다. 나는 그냥 아무 말이나 뱉었다.

“ 마음에 안 들어서죠 뭐.”

“ … 너 개새끼냐..? 그럴거면 왜 …! 안 우웁....”

최지현이 콧김을 뿜었다. 망부석처럼 있던 나는 최지현의 폭탄 발언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손으로 짓눌러버렸다.

동네방네 소문내자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시상식이 소란스럽다고 해도 들릴 여지는 있었다.

“ 우웅우웁!!”

내가 조금 세게 틀어막자, 최지현은 발작을 일으키며 나를 죽일 듯 쏘아봤다. 문제는 그 다음.

따듯한 혀가 뱀처럼 움직였다.

‘ 유혹하는건가.’

따듯하고 축축하면서 말랑했다. 지그시 혀로 내 손을 핥고 있는 최지현을 바라본다. 딴에는 이것이 나를 골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우쭐한 표정과, 점점 더 과감해지는 표정이 그 반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손을 떼어내고 반들반들 빛이 나는 침을 뻔히 봤다. 먼저 든 생각은. 어떤 냄새인지 맡아 볼까였다.

그게 눈앞의 최모씨를 골려주는데, 제 격일 것 같은데.

뭐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맡거나 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다리만 과하게 내놓고 다녀도 호들갑을 떠는 세상 아니던가.

진짜 그런다면 정신 나간 놈으로 보겠지.

나는 듣는 사람이 진정할 수 있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를 짜냈다.

“ 그런거 아니니까.”

“ 그럼 뭔데.”

최지현은 정말 처음 보는 표정으로 입술을 삐쭉였다. 난감하다.

나와 달리 최지현은 쉬이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마치 맹수처럼 집요하게 내가 곤란해하는 요점을 짚었다.

테이블에는 권아름도 있어서 약간 거시기한데.

나는 옆에서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는 권아름을 등지고, 비치된 물을 마셨다. 속이 탄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최지현을 끌고, 잠시 밖으로 향했다.

“ 일단 이것만 물어볼게요. 아직도 마음 안 바뀌었어요?”

끄덕.

무심한 눈빛이다.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이. 내가 마음정리를 했듯, 둘 도 나름대로 마음정리를 한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이 말을 한 다음에도 저런 무심한 눈빛이 유지될까. 내가 들어도 어이가 없을것 같은데.

“ 저, 제가 좀 이상한 건 알거든요?”

“ 그래. 너 이상한 거 누가모르니. 한 명 답은 전부 씹고. 한 명은 꼬박꼬박 해주고. 빨리 말해. 안 되면 깔끔하게 마음정리 할 테니까.”

난들 이렇게 여자 복이 터질 줄 알았나. 원래 나는 꿈도 희망도 없이, 단기적인 목표만 바라보며 살아왔던 놈인데.

생각 해보면 많이 컸다. 인생사 어떻게 될 줄 모른다더니. 아니 애초에 이렇게 작위적으로 고백을 박는 게 맞나?

자연스럽게 … 자연스럽게 … 말 안 해도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흘러가는 줄 알았는데.

“ 그러니까 그..”

“ 아니, 그냥 빨리 말해! 둘중에 한 년만 골라. 이미 지영이랑 얘기 끝냈으니까.”

최지현은 단호한 투로 말했다. 성격이 너무 한결 같은 것이 문제다.

“ 두 둘.. ”

“ 둘?”

“ 둘 다요 …”

“ 미친 새끼.”

최지현의 얼탱이가 빠졌다.

**

ㅡ 네~ 이제 시상식이 끝나고 2부. 파티가 시작됩니다! 많이 즐기고들 가주세요~

짝 ㅡ! 짝 ㅡ! 짝 ㅡ!

박수가 쏟아지고, 유지영은 뿌듯함을 느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시상식 준비가 무탈하게 끝났고, 이지훈과도 좋게 좋게 해결된 것 같았다. ‘ 마음정리’ 라는 말이 뇌에 계속 박혀 있었지만, 서두를 것은 없었다.

“ 후 힘드네.”

느낌상 거대한 돌덩이가 종아리에 틀어박힌 것 같았다. 유지영은 종아리를 억세게 주무른 뒤 구두를 벗어던졌다.

이제야 좀 살만했다. 그녀는 준비해온 파티 의상 2를 꺼낸 뒤,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잘 다려진 흰색 와이셔츠에, 멜빵 슬렉스가 그 의상이었다.

거울을 보니,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세삼 즐거운 기분으로 파티 스테이지로 향했다.

뚜벅뚜벅.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가죽 구두가, 소리를 낼 때였다.

저 너머에 멍한 표정의 최지현과, 죄인마냥 끌려오고 있는 이지훈이 보였다. 그는 테이블에 머리를 긁적이며 착석했고, 최지현은 어딘가 급한 걸음으로 유지영의 앞에 섰다.

“ 야 지영아.”

“ 어 왜?”

“ 이지훈이 마음 정리를 끝냈대. 그래서 내가 그 답을 들었거든?”

뭐라 했게? 최지현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유지영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자만 최지현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건 존나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지라. 쇼크가 왔다고 봐도 무방했다.

“ 둘다래. 둘다.”

“ … ?”

유지영은 이해 못 하겠다는 듯 큰 눈을 부풀렸다. 그녀는 말의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최지현은 그런 유지영을 보며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 그리니까 너랑. 나. 둘?”

끄덕.

“ 미친 새 아니, 미…쳤네...?”

유지영은 약간의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내심 고릴라와 경쟁을 펼친다면, 자신이 우세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실제로 최지현과는 그럴만한 낌새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지훈의 줏대도 없었다.

“ 자자. 가자고 뭐.”

반면 최지현은 담담했다.

최지현에게는 아쉬울 게 없었다. 그녀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 어차피 나중에는 결국 한명이 될 거 아니야?’

스타트라인이 같아졌다. 이제부터가 진짜 제대로 된 경쟁이 아닐까.

**

우리는 파티를 즐기지 않았다. 근 2달간 미루고 미뤘던 만남이다보니, 다른 스트리머들과 교류 할 틈이 없었다.

친목은 파티 전에 실컷 해뒀다. 우리는 여느 푸티의 술자리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시청자들에게도 양해를 구한 뒤, 거리로 나왔다.

특별히 뭘 한다거나, 먹을 것을 먹지도 않았다. 가볍게 산책을 하는 것처럼 걸었다.

아무 말 없는 고요한 적막이 일행을 휘감았다. 다만 우리 중에 아무도 먼저 그 적막을 깨지 않았다.

나는 그 속에서 천천히 일행의 얼굴들을 번갈아 보았다. 예쁘게 분칠 된 얼굴들을 보니, 한 가지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 사진이나 한 컷 찍을까요?”

뚱한 유지영. 엄청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는 최지현. … 싸움에 휘말려서 고생했을 권아름.

문득 사진을 찍고 싶었다. 대답을 듣지 않는 대신, 뚱한 유지영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동무를 걸쳤다.

남은 것은 또 최지현이었다.

최지현은 놀려야 제 맛이지.

“ 모여봐요. 사진 찍게.”

“ 남자들은 사진 찍는 거 좋아한다더니..”

최지현은 자꾸 내 신경을 긁는 듯한 말을 하며 툴툴 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처음엔 질색팔색 하더니 내 주위로 하나둘씩 작달만한 머리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나는 제각기의 표정들을 담으려 노력했다.

한창 그런 던 때였다. 권아름이 흥분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 저거 별똥별 아니야?”

“ 이왜진?”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본다. ‥분위기에 맞게 별이 너울거리고 있진 않았다. 그 대신, 아스라한 달빛이 등불처럼 밝게 빛났다.

나는 눈을 감는다.

오랫동안 이 기억을 남길 수 있도록. 앞으로도 행복할 수 있도록. 하렘의 무게를 견딜수 있도록 ..? 먼 미래지만, 이지은이 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도록.

빌 수 있는 소원은 다 빌었다.

“ 야 빨리찍어.”

“ 화면 포커싱도 안 잡혔어요.”

“ 여기 역광인 것 같은데..?”

“ 지훈아 신인상도 잘 안 보이는 것 같은데.”

“ 이럼 됐나?”

“ 아니. 똑같은 것 같아.”

“ 아 그냥! 빨리찍고 가자고! 뭐 똑같구만.”

“ 지현아 화 좀 내지 말고~”

꾸역꾸역 좁은 화면에 얼굴들 전부를 전부 담았다. 유지영은 내 어깨에 손을 더 올리며 내 쪽으로 밀착했다.

최지현은 눈에 불을 켜고 이를 빠득 갈았다.

“ 자자 싸우지 말고.”

나는 긴 팔을 이용해 최지현까지 어찌저찌 내 쪽으로 당겼다. 이상야릇한 냄새가 솔솔나는 얼굴에 내 얼굴을 들이댔다.

권아름이 슬쩍 빠져 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 …”

이미 미소로 점철된, 얼굴로 모두를 돌아보며 말한다.

“ 웃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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