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1화 (1/67)

❦제1화

“이제 그만하자, 우리.”

그건 갑작스러운 통보였다.

“주, 서훈?”

“헤어지자고, 우리 두 사람.”

“잠, 잠깐, 내가 자꾸 환청이 들리는 것 같거든? 그러니까.”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놀란 유진이 두 눈을 크게 부릅뜬 채, 앞에 선 오랜 연인을 빤히 주시했다.

“맞게 들었어, 헤어지자는 말.”

유진은 완성되지 못한 문장을 횡설수설하며 연신 허둥거렸지만, 돌아오는 건, 확인사살이 전부였다.

“어째서 그런, 아니 갑자기 무슨…….”

“이 정도면 질릴 만큼 만나지 않았던가, 내 말 못 알아들어?”

사실은 모르겠다, 그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도.

“끝, 우리 끝내자고.”

“네가, 주서훈 네가 어떻게, 아니 어째서?”

“이별에 무슨 이유가 필요한데?”

눈앞의 남자가 낯설었다. 늘 곁을 지키던 연인이 아닌, 유진은 그가 전혀 모르는 타인처럼 보였다.

그래서일까.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는데 자꾸만 입이 말을 듣지 않았다.

“뭐, 그래.”

“…….”

“지겨워서라고 치자.”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고, 무심히 뱉은 서훈이 불편한 듯 제 뒷덜미를 문질렀다. 이런 대화조차 피곤하다는 듯이, 마주한 그의 눈길은 짜증스럽게 구겨지고 있었다.

거리는 이제 막 시작하는 금요일을 즐기려는 인파로 복잡했다.

단지 두 사람만이 달랐다.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듯 유진은 시끌벅적한 소리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시야에는 삐뚜름하게 꺾여 올라간 그의 입매가 도드라져 보였다. 차게 식은 미소가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다.

지금의 그 얼굴은 희미함에 묻혀 잊고 지냈던 과거 어느 날인가의 기억과 꽤 닮아 있었다.

‘너 말이다, 제발 사람 좀 그만 귀찮게 해라.’

‘그만 귀찮게 하고 좀 꺼져.’

‘귀먹었냐? 안 들려? 좀 꺼지라고.’

그래, 딱 그때처럼.

서훈을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전학 온 날부터 사람 하나 잡을 것처럼 서늘하게 치켜뜬 눈매가 딱 그 시절의 주서훈이었다.

자신을 향한 눈동자까지도 판에 박힌 듯, 똑같았다.

무감정한 눈길에 담긴 짜증과 무심, 귀찮음. 너 따윈 관심도 없다 벽을 치던 열일곱의 상처 많은 그 감정들이.

“벌써 3년이야, 우리가 같이 산 시간이.”

“……그래서?”

“미안하다, 이런 식이라서.”

“하, 제대로 뒤통수네.”

“나도 어쩔 수 없더라,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래.”

지독하리만치 일방적인 이별이었다.

차마 수습하지 못한 감정을 억누르며 유진이 제 아랫입술을 억세게 질끈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니까, 그만해.”

이제는 다시 안 볼 사람처럼 서훈이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진아.”

“…….”

“나 없이도 꼭, 잘 지내라. 아프지 말고.”

“…….”

“짐은 본가로 보내 줘, 부탁한다.”

언제 빼 버린 걸까. 텅 빈 약지를 내려다보며 시선을 외면하듯 유진이 휙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가라는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쓰게 올라오는 설움이 어느샌가 숨통을 틀어막아, 한마디 뱉어 내는 것도 당장 유진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괜찮을 줄 알았다.

너무 익숙해진 곁이 허전해도, 다른 사람 만나면 그만이라고, 유진은 처참하게 밟힌 제 자존심을 끌어안았다.

“…주서훈, 이 나쁜 놈아… 그 세월이 몇 년인데…….”

하지만 아니었나 보다.

안 된다고, 가지 말라고, 온전히 완성되지 못한 말이 천천히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가슴 한쪽이 아릿하게 울렸다.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서훈의 등을 바라보며 유진은 언제부턴가 시야를 가린 물기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이젠 남이 된 연인을 의문 섞인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 *

‘분명히 그랬었는데.’

유진은 멍하니 넋을 놓고,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몇 번이고 쉴 새 없이 눈을 깜박여 봐도 여전히 시야에 담긴 광경은 그대로다.

미련이 너무 길어서인가.

쓰게 웃어넘기려는 찰나, 다정함이 담긴 목소리가 잔잔하게 귓가로 흘러들었다.

“뭐야, 왜 이렇게 멍하니 있어?”

“……?”

“…진, 유진아?”

누굴까, 저건 누구지? 상당히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마치 언제나처럼 그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래, 꼭 서훈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한 박자 늦게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던 유진의 두 눈이 시야로 가득 차는 누군가를 발견한 듯 크게 부릅떠졌다.

‘주서훈?’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주서훈이 서 있었다. 그가 환하게 웃는 미소 너머로 걱정스럽게 제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좋다고 들떠 있더니, 갑자기 이상하네.”

마주한 눈길엔 지겹다는 기색도, 귀찮다는 듯한 짜증도 더는 볼 수 없었다. 이건 절대로 꿈이, 아니었다.

“왜 그래? 너무 좋아서 긴장이라도 했어?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

“유진아? 진아, 서유진?”

“…어, 서… 훈아…….”

어렵사리 한마디를 뱉어 낸 뒤, 유진이 남몰래 제 이를 악물었다.

“진짜로 어디 아픈 거 아냐?”

“아냐, 그런 거.”

“영화는 내일이라도 다시 볼 수 있잖아.”

재차 고개를 내저으며 걱정스럽게 보는 그에게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조금, 아주 조금 복받치는 감정을 진정시키기 힘들 뿐이었다.

그걸 주서훈이 쉽게 믿을 리 없었다.

“얼굴까지 새하얗게 질려서 그 말을 믿으라고?”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아니라면서 갑자기 왜 울어, 사람 걱정되게.”

애써 표정을 다잡으며 유진이 천연덕스럽게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가만히 보던 서훈이 낮게 혀를 차며 뺨을 어루만지던 손길을 입술까지 미끄러트렸다.

“입술 깨물지 말고.”

그제야 질끈 깨물린 입술에서 옅은 통증이 퍼져 나갔다.

“아…….”

서훈이 재차 손가락으로 톡톡, 아랫입술을 건드렸다. 반응하듯 살짝 입을 벌리자 다시 또 물린 부분을 그가 손끝으로 가볍게 한 번 훑었다.

“늘 말하잖아, 이러면 상처 난다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말 나온 김에 좀 고치자, 너 멍할 때마다 이러잖아.”

걱정으로 서훈의 미간이 잘게 찌푸려졌다. 눈앞에 그를 두고도 유진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악마에게 홀렸든, 제 망상이든, 주서훈이 앞에 있으니까.

여전히 걱정스럽게 보는 그의 뺨으로 유진이 손을 뻗었다. 다신 느끼지 못할 줄 알았던 그의 온기가 뺨을 감싼 손바닥으로 생생하게 와 닿았다.

‘절대로 꿈이 아니야, 이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그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며 서 있었다.

이제 살았다. 꼬박 두 달이 넘도록 목을 옥죄던 고통이 사라지며 이제야 숨이 좀 쉬어지는 것만 같았다.

만약 또 꿈이면 어쩌지.

일부러 더 현실이라 단정 짓고 있었지만, 그래도 유진은 빌었다. 이게 꿈이라면 부디 오래도록 깨지 말라고.

“하여간 걱정도 많아, 그거 쓸데없다니까.”

“이게 왜 쓸데없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유진인데.”

가만히 듣던 유진이 희미하게 웃었다.

“별거 아니야, 진짜.”

“흐음…….”

“가끔 넌 그럴 때 없어? 이유 없이 멍해진다거나.”

자꾸 목 끝으로 차오르는 묵직한 덩어리를 삼키며 일부러 더 유진은 쾌활한 척 굴었다.

“네가 정 그렇다면 할 말은 없지만.”

“하나도 안 믿는 눈치잖아, 너도.”

“아픈 거 감추다가 걸리지만 마라, 그때는 나도 화낸다?”

“으으, 주서훈 잔소리.”

한참을 투닥거린 뒤에서야 유진은 차츰 주변을 가득 채운 공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독 어두운 조명과 매표소, 사방을 메운 대형 스크린 속의 포스터까지. 어딜 봐도 영화관임을 알 수 있는 공간을 곁눈질하며 유진이 좌우로 눈을 굴렸다.

그러다 휙 팔목을 잡아채는 손길에 놀란 듯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랐잖아, 갑자기 왜?”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따라 네가 영 불안해 보여.”

서훈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며 유진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 아픈 줄 아는 건가.

뜬금없이 왜 그러냐며 힘을 주며 버티는데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 단호한 시선을 마주하며 유진이 난감한 듯 콧잔등을 찌푸렸다.

“너 그거 오버라니까.”

“내가 널 몰라? 딱 봐도 평소하고 다른데.”

하여간 눈치 하나는 주서훈 따라갈 사람이 없다.

“트집은, 내 상태가 어떻다고.”

도대체 몰골이 얼마나 엉망이기에 저러지. 아니, 사실은 언제부터 넋 놓고 있었는지도 알 길이 없었지만.

“갑자기 넋 놓고 내 얼굴만 보지를 않나, 몰래 울지를 않나.”

“운 적은 없어.”

“그래, 몰래 울먹이기만 했지.”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 대충 좀 넘어가.”

일부러 보란 듯이 눈을 벅벅 문지르자 어이없다는 듯 서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더러 그걸 믿으라고?”

“왜 오버야, 네가 또 애냐고 놀릴까 봐 일부러 말 안 했는데.”

매번 사소한 걸로 놀리지 않았냐며 유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줄줄 늘어놓았다.

가만히 듣던 서훈이 한참 만에야 마음이 놓이는 듯 픽 웃으며 유진의 뺨을 꼬집었다.

“윽, 왜 꼬집어.”

“아주 사람을 갖고 놀아라,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별걱정을 다 해, 이 남자가.”

못 말린다는 듯 찡그리며 웃는 얼굴을 보며 유진이 따라 웃었다.

떨어질 줄 모르고 그를 곁눈질하던 그녀의 시선이 어느 한 포스터에서 멈춘 건, 그즈음이었다.

‘저건 3년 전쯤에 개봉한 영화인데?’

상당히 좋아하는 영화라, 착각했을 리 없다. 금세 희미해진 기억을 되짚으며 유진이 차츰 머릿속의 필름을 되감았다.

그날은 저 포스터 속의 영화가 개봉하는 첫날이었다.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라, 피곤하다는 서훈을 조르고 졸라 기어이 영화관을 데리고 왔었는데.

‘되돌려주지, 그 시간.’

누군가의 낯선 목소리가 일순, 유진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났다.

시간을 돌려준다고, 아니 계약이 어쩌고 했던 것도 같은데 이상하리만치 기억이 어두웠다.

뿌옇게 번진 잉크처럼 기억은 조각난 채, 그저 흐릿했다.

떠올리기를 포기한 듯 한숨을 쏟아 내며 유진이 그의 손에 들린 영화표를 낚아챘다.

“영화 몇 시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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