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2화 (2/67)

❦제2화

나란히 시선이 부딪치자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쨌건 돌아왔다.

아직 행복하게 웃을 수 있던 시간으로,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던 그때로, 유진에게 진실은 그 하나면 충분했다.

갑자기 바뀐 상황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자꾸 딴생각에 빠지는 탓일까. 관찰하는 듯한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해 유진이 먼저 옆으로 휙 고개를 틀었다.

“얼굴 뚫리겠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뭐라고 할까, 오늘따라 진짜 좀 이상해 보이는데.”

“윽, 또 그 소리야?”

의심스럽게 쳐다보던 서훈이 끝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여전히 조금 의심스러운 눈길.

네가 오늘따라 이상한 거야. 시치미를 떼며 실없이 웃어 보지만, 그의 시선은 한층 더 짙어질 뿐이었다.

“주서훈, 내가 이 영화 얼마나 기다렸는지 잘 알지?”

이걸 어떻게 넘겨야 할까. 난감하게 혀를 차다가 대뜸 서훈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뭐, 하도 들어서 잘 알지.”

“솔직히 조금 감격스럽잖아, 이런 날은.”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마지막이라 나도 모르게 울컥한다는 거지.”

거짓 속에 진실을 담았어도 유진은 마냥 다 감격스러웠다. 다시 보게 된 영화가 아닌, 곁에서 웃는 주서훈의 모습이.

“그래서 수시로 울컥하셨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유진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못 산다, 진짜.”

아마도 그는 모를 거다.

헤어지자며 휙 사라져 버린 그 행동으로 남은 한 톨의 희망까지 부서진 제 모습을. 과거의 그는 알 수도 없고, 이젠 알 필요도 없는 비밀이었다.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며 유진은 그의 손바닥 위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가득 찬 온기를 느낀 입가에는 웃음이 먼저 올라왔다.

“꼬마도 아니고. 이 시리즈가 그렇게나 보고 싶으셨어?”

“어.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만큼…….”

네가 보고 싶었어.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유진이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하아, 왠지 영화에 질투해야 하는 현실이 슬퍼진다만.”

“삐지지 마, 그래도 영화보단 네가 더 좋으니까.”

“당연한 걸 되새겨 줄 필요 없어.”

미묘하게 어긋난 대화에도 두 사람의 얼굴은 꽤 밝았다.

그건 유진이 기억하는 과거와 같았지만, 미세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새로운 현실이기도 했다.

* * *

서훈이 사라진 후, 단조롭기만 하던 일상은 많은 것들이 달라졌었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보이는 천장의 하늘 벽지도, 그녀에게는 서글픈 통증으로 변해 있었다.

막 동거를 시작했을 때 장난처럼 서훈과 천장에만 바른 벽지였다.

욕실의 샴푸도, 싱크대의 그릇들도, 아예 없었던 사람처럼 도려내기엔 이미 서훈과의 추억이 너무 많았다.

‘전부 잊어버리면 좋을 텐데.’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이라면 차라리 다 사라져 버리라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던 그때, 유진은 문득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해 주신 말이 떠올랐다.

‘아가, 사람이 간절해지면 말이다. 가끔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기도 한단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꿈.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다고 모든 게 이루어지진 않는다. 이미 지나간 서훈과의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유진은 모두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여겼던 것도 같다.

하지만 어슴푸레한 새벽녘, 어둠을 뚫고 나타난 정체불명의 존재로 인해 유진은 지금까지의 생각이 와르르 다 무너지고 말았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나를 다 불러냈을까, 고작 인간 주제에.’

놀란 듯, 눈을 부릅뜨며 유진이 본능처럼 주변을 곁눈질로 살폈지만.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눈앞의 존재가 비죽 웃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왜, 도망이라도 가려고?’

‘다, 당신 누, 누군데 남의 집에…….’

‘과연 누구일까, 난.’

모든 걸 꿰뚫는 듯한 시선을 마주하자 유진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밧줄에 칭칭 동여매진 것처럼.

‘그렇게 슬프던가. 어차피 지나고 나면 찰나인데.’

최면에 걸린 듯 그 말을 따라 읊조린 유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찰나……?’

‘그래, 고작해야 스쳐 지나는 찰나이지 않나.’

어떻게 그 몇 년의 시간이 찰나일 수 있을까. 해일처럼 크기를 불려 덮치는 회오리에 유진이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되돌려주지, 그 시간을.’

칼날처럼 시린 목소리가 달콤하게 변해 귓가로 흘러들었다.

할아버지의 말처럼 인간은 가끔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바란 제 소망을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들킨 것만 같았다.

‘되돌… 린다고…?’

‘못 할 것도 없지. 대신 넌, 뭘 내놓을 수 있지?’

마치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속삭이던 파우스트의 유혹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인 줄 알면서도 거절하기엔 너무 달콤한 제안이었다.

‘말도 안 돼.’

어차피 허구의 이야기가 아닌가. 유진은 마치 저 검은 그림자가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처럼 보였다.

이성이나, 무언가를 계산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저 돌아갈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과 헛된 희망.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 남은 건, 그것뿐이었다.

* * *

‘되돌려주지, 그 시간을.’

‘되돌… 린다고…?’

‘못 할 것도 없지. 대신 넌, 뭘 내놓을 수 있지?’

아무리 기억을 곱씹어 봐도 생각나는 건, 몇 가지의 대화가 전부였다. 온통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흐려서, 다른 건 기억나지 않았다.

두 시간 내내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었다. 멍하게 앞을 보던 유진이 한 박자 늦게 엔딩 크레딧을 확인하며 당황한 듯 서훈에게 휙 고개를 틀었다.

“생각보다 꽤 볼 만했어, 이번 시리즈는.”

어두운 조명 때문인지 그는 평소와 다른 제 상태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이라, 안도하며 유진이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분명히 몇 번이나 다시 볼 만큼 좋아한 영화인데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제 상태를 알아차리며 혀를 차는데 불쑥 옆에서 그가 불만을 터트렸다.

“뭐야, 서유진 또 넋 놓고?”

“내, 내가 또 언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당황하며 옆을 보자 예상과 달리 짓궂게 웃는 서훈의 미소가 눈에 띄었다.

“영화가 너무 감동적이었어?”

“어? 아, 으응. 확실히 마지막이라 더 재미있더라.”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쳤지만, 그게 서훈에게는 다른 의미로 해석된 모양이다.

“얼마나 재밌기에 부르는 것도 몰라? 못산다, 내가.”

“엔딩 생각하느라, 미안.”

“그래, 그래, 어련하시려고.”

괜히 더 속이 따끔하게 찔렸다. 그래서 기억도 희미해진 내용을 들먹이려는 찰나, 어느샌가 일어난 그가 불쑥 앞으로 제 손을 내밀었다.

“그만 일어나자, 우리 빼곤 거의 다 나갔어.”

가만히 손을 내려다보던 유진이 이내 웃으며 그 위로 제 손을 살포시 겹쳐 잡았다.

당황하고 놀란 감정이 앞서, 잠시 잊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제겐 다정했던 주서훈이란 남자를.

갑자기 눈가가 시큰거리다 기어이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혹시라도 맺힌 물기를 보이기라도 할까, 유진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우리, 저녁은 뭐 먹어?”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는데 햄버거로 때울까?”

“햄버거는 좀, 그래도 데이트잖아.”

“이야, 우리 꼬꼬마 오늘 데이트 기분 좀 내고 싶으셨어?”

이거 영광인데. 너스레를 떨며 짓궂게 말했지만, 서훈의 입가에는 미처 다 감추지 못한 웃음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덩달아 제 기분까지도 좋아졌다.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유진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내저으며 살짝 휘어진 입가를 한층 더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결국, 햄버거 대신 저녁은 근처 한정식집에서 해결했다. 그 뒤엔 잠깐 서점에 들렀다가 공원을 몇 바퀴나 돌고서야, 유진은 다시 혼자 남았다.

그때까지도 유진은 멀어져 가는 서훈의 뒷모습을 그저 조용히 좇았다. 우연히라도 그가 돌아봤을 때, 엉망인 제 얼굴을 볼까, 두려웠다.

하지만 시야에서 그가 완전히 사라진 순간, 겨우 지탱하고 있던 정신력이 투둑, 소리와 함께 그대로 잘려나가고 말았다.

“하아, 하아…….”

현관을 들어서기 바쁘게 유진은 급히 어딘가에 있을 달력부터 찾았다. 어떻게 들어온 건지 모를 만큼이나 정신이 없었다.

영화 포스터로 시기가 언제쯤인지는 대강 깨달았다. 그런데도 유진은 미처 다 지우지 못한 불안감으로 괜히 더 마음이 급했다.

“이상하다, 분명 이쯤 어딘가에 있을 텐데.”

연초마다 챙겨 놓는 달력이 도통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벽에 걸어 둘 만큼 그녀가 꼼꼼한 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며칠이나 됐는지, 확신이 필요했다. 집안을 온통 다 헤집어 놓고서야 유진은 화장대 한 편에서 탁상용 달력을 하나 찾아냈다.

달력을 뒤로 넘기며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던 유진은 기어코 힘이 풀린 듯 바닥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하, 진짜… 야……?”

맞다, 진짜 3년 전이다.

이미 한 번 겪어 본 과거가 아닌가. 그사이, 서훈과 그녀 사이에서 변한 건, 고작 몇 가지뿐이었다.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것과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동거가 3년 뒤엔 막을 내렸다는 것 정도.

“할아버지가 맞았어, 할아버지의 말이…….”

너무 간절해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거라고, 유진은 허공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거실 한쪽을 바라보며 유진이 잘게 인상을 썼다. 조금만 움직여도 흔들리는 작은 스툴 의자에 올라선 서훈이 영 못마땅했다.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대충 좀 하라는데 통 말을 듣질 않았다. 보는 사람이 더 불안해 죽겠다, 투덜거려도 별 소용이 없었다.

주서훈 예전에도 저랬었나? 막 동거를 시작하던 시기를 더듬어 가던 유진이 금세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를 게 없다. 그때의 서훈도 지금처럼 못과 망치를 들고, 지금처럼 벽과 사투를 벌이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좀 하자.”

“금방 하니까, 잠깐만 기다려 봐.”

그 말만 지금 몇 번째인지도 기억 못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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