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3화 (3/67)

❦제3화

“…금방은 무슨.”

자꾸만 스툴 위에서 휘청거리는 다리가 아슬아슬하다. 조금만 삐끗해도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만 같았다.

“그거 제대로 박히기는 해?”

“당연한 소리를 해. 서유진, 나 못 믿어?”

“믿고 못 믿고는 별개잖아.”

“아냐, 어차피 다 같은 거야.”

쓸데없이 우기기는.

“벽이 단단해서 드릴 없이는 무리라니까.”

웃음 반, 걱정 반으로 서훈을 향해 은근슬쩍 불만을 늘어놓던 유진은 끝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서훈의 모양새가 우스웠다. 스툴이 흔들릴 때마다 놓친 중심을 다잡느라,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제법 볼만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다 큰 어른이 저게 뭐하는 짓이야?’

누군 웃느라 죽겠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재차 금방 한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벌써 30분째.

적당히 하고 좀 내려오지. 이제는 본인보다 보는 유진이 더 답답할 지경이었다.

“시도하다 안 되면 대충 포기할 것이지, 하여간 저 고집은.”

워낙 하나에 꽂히면 포기할 줄 모르는 남자가 아닌가. 그 성격을 잘 알기에 반쯤 포기하고서도 유진은 괜한 걱정이 앞섰다.

“으이그, 주서훈 저 멍청이 말미잘 똥개.”

괜히 들으라는 듯 투덜거리고도 유진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드러냈다. 가볍게 스쳐 지나는 찰나의 소중함을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그사이 한 달이 훌쩍 지났는데도 유진은 다시 또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이것 또한 과거의 한 부분이니까.

헤어지는 미래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비슷하면서 다른 현재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며 유진은 며칠 전부터 서훈과 동거를 시작했다.

시기는 3년 전과 같았다.

눈앞에서 그가 사라진 뒤로 차라리 함께 사는 게 아니었다고, 수없이 후회하던 유진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었다.

“후우, 이거 슬슬 열 받는데.”

팔짱을 끼고 서훈을 지켜보던 유진이 그의 투덜거림에 재차 아까와 같은 말을 던졌다.

“그만 포기하라니까, 사람 말 진짜 안 들어.”

“잠깐만 좀 있어 봐.”

“그 잠깐이 몇 분째인지는 아세요, 주서훈 씨?”

“이번엔 진짜 성공할 수 있다니까?”

아주 벽에 들어가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집중한 모습을 보니, 한숨만 흘러나왔다.

“정말, 하아…….”

그 순간, 뒤로 휙 고개를 돌린 서훈을 보며 유진이 경악하듯 떡하니 입을 벌렸다.

흔들리는 스툴 위에서 그가 망치를 든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게다가 이 남자, 한다는 말이 이번에는 감이 좋단다.

벽에 못 하나 박는데 무슨 감이 더 필요한 건데.

말을 잃은 유진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푹 덮었다. 뒤늦게 포기한 듯 유진이 손을 치우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느샌가 벽으로 몸을 돌린 서훈이 마지막이라 중얼거리며 망치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탕-!

탕탕-!

다시 또 시작된 망치 소리가 좁은 공간을 시끄럽게 울리며 끊임없이 사방으로 메아리쳤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하세요.”

탕-!

“어차피 내 말은 듣지도 않을 거면서.”

탕탕-!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파고드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유진이 참을 인을 새겼다.

해볼 만큼은 해야 내려올 게 분명했다.

서훈의 고집이야, 동거하는 내내 수두룩하게 겪어 본 유진이었다.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걱정할 시간에 그냥 상자나 정리하는 게 낫겠다며 시선을 내린 그녀가 이내 낮게 혀를 찼다. 내려다본 상자가 온통 다 책밖에 없는 탓이다.

‘윽, 이건 또 뭐야?’

설마하니 줄줄이 책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이게 다 몇 권이야. 한 움큼씩 책을 바닥으로 꺼내 놓으며 유진이 천천히 숫자를 헤아려 봤다.

“셋, 넷, 다섯… 여덟?”

이 남자가 짐으로 책만 바리바리 싸 짊어지고 왔나.

생각보다 많은 권수에 기함하던 유진이 옆으로 살짝 고개를 틀었다. 뜯지도 않은 상자들이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흐음, 이건 햄릿이고 저건 어린 왕자가 몇 권이야?”

하여간 누가 책벌레 아니랄까 봐, 못 말려. 쓸데없이 책은 참 열심히도 챙겼다며 투덜거린 유진이 소리 없이 작게 웃었다.

연인과 함께 사는데 싫을 리 없다.

동거한다고 짐을 챙겨 온 것까진 좋은데 본가에 놔둬야 할 책까지 다 챙겨 온 게 문제였을 뿐.

덕분에 정리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게 유진은 못내 불만스러웠다. 평생 살려고 온 사람처럼 짐은 풀어도 끝이 없었다.

‘그렇게 매몰차게 떠날 땐 언제고, 나쁜 놈.’

문득, 모래라도 씹은 듯 입안이 까끌까끌하니, 쓰게 느껴졌다. 애써 차오르는 원망을 몰아내며 유진이 손에 들린 책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어린 왕자라…….”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어릴 때부터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책 중 하나였다.

뭐,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잠시 표지를 훑어보다가 페이지를 한 움큼 뒤로 넘겼다. 금세 하얀 종이 위로 익숙한 그림이 하나 큼지막하게 나타났다.

소행성에 있을 제 장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왕자였다. 하지만 책 속의 그를 유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왕자는 그걸 정말로 몰랐을까?’

저렇게 그리워할 거면서 그는 왜 장미를 버린 채, 소행성을 떠났을까. 매일 잡초를 뽑아 주지 않으면 바오밥 나무로 인해 결국 소중한 장미도 죽어 버릴 텐데.

유진도 그 물음이 틀렸다는 걸 안다.

떠나기 전까지 그는 장미의 소중함을 전혀 몰랐으니까. 깨달았을 땐 이미 소행성을 떠나, 그는 지구에서 사막 여우와 함께 있었다.

지금의 서유진과 어린 왕자의 차이점은 뭘까. 다시 돌아온 과거는 많은 생각의 변화를 가져왔고, 유진은 그것들을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끝내 그리움을 견디지 못한 어린 왕자는 소행성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돌아가기를 원했고, 책은 그렇게 결말이 열린 상태로 끝났다.

지나치는 모든 것에도 추억이 스민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책을 덮은 유진이 쓰게 웃으며 저 홀로 남은 의문을 되뇌었다.

* * *

유진이 한 번 겪었던 기억에서 동거의 시작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보단 서훈의 고집으로 시작된 셀프 도배가 원인이었다.

그러니까, 그때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풀이 발라진 벽지를 바닥으로 내려놓는 서훈을 보며 유진이 혀를 내둘렀다.

‘이, 이걸, 우리 둘이서 다?’

‘괜찮아, 금방 할걸.’

‘…과연, 우리가 금방 할 수 있을까?’

초보자가 벽에 붙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천장이라니. 유진은 마냥 그런 서훈의 태도에 기가 막혔지만.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넌 옆에서 받쳐 주기만 해.’

‘어쩐지 영 믿음이 안 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서훈은 ‘이 오빠만 믿어.’라는 포스를 팍팍 풍겨 댔다.

벽지 붙이는 건 처음인데 뭘 보고 믿으라는 거야. 유진이 헛웃음을 흘리자 서훈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와, 서유진 너무하네.’

‘누가 너무한데, 저걸 어떻게 붙이겠다고 그래.’

몇 초 전까지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서훈은 꼬리를 축 늘어트린 모양새로 서운한 티를 팍팍 냈다.

‘이 서방님 좀 믿어 주면 안 되냐?’

딱 비 맞은 강아지 꼴이다. 누가 보면 어지간히 구박당한 줄 알 거다.

‘알았으니까, 얼른 도배 시작이나 해.’

‘이제 믿어 준다고?’

‘풀 다 마른다고, 바보야.’

나중에서야 유진은 반 강제로 서훈의 등을 떠밀어 일으켜서 겨우 도배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그 말을 고스란히 따라가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그게 쉬울 리 없었다.

‘이상하다, 이거 왜 이렇게 안 붙지?’

‘거봐, 쉽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집주인한테 사다리를 빌린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정작, 도배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문제의 연속이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도배지는 미리 풀이 발라져 있었다. 그 탓에 무겁게 축 늘어져서 천장에 붙이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잠깐만, 다시 올라갈게.’

서훈이 다시 또 사다리 위로 올라갔다. 벌써 한 시간째 작업 중인데도 넓지 않은 거실의 천장은 아직 반도 채워지지 않았다.

늘어지는 벽지를 최대한 조심스럽게 붙이고, 울지 않도록 골고루 펴 줘야 하는데 서훈은 어떻게든 붙이기에 바빴다.

‘밀대로 쭉쭉 좀 펴 봐, 거기 울퉁불퉁해.’

‘어디에? 여기 맞지?’

‘아니, 조금 더 옆에.’

‘옆이면 이쪽?’

‘어, 맞아. 거기, 거기에.’

일일이 알려 주는데도 서훈의 도배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유진은 슬슬 욱신거리는 팔을 느끼며 벽지를 곧장 바닥으로 내렸다.

‘나 힘들어, 그만할래.’

‘어? 이제 겨우 반절했는데?’

옆에서 벽지 올려 주고 거드는 것도 한두 번이지. 예상보다 더딘 속도에 인상을 쓰자 서훈이 곁눈질로 제 눈치를 살폈다.

이럴 줄 알았다.

돈 조금 쓰더라도 그냥 전문가 부르자니까. 하여간 사람 말 진짜 안 듣는다.

‘지금이라도 업자 부르자, 응?’

‘됐어, 벌써 반이나 했는데 돈 아깝잖아.’

‘아깝긴 한데 작업도 더디고.’

각자의 의견을 밀어붙이며 유진은 한참이나 서훈과 투닥거렸고, 그들의 첫 셀프 도배는 그날 저녁이 되고서야 끝이 났다.

‘후, 이제야 천장이 좀 볼만하네.’

‘유치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붙이고 나니까 예뻐.’

‘거봐, 내가 예쁠 거라고 했잖아.’

천장을 가득 채운 벽지는 서훈이 원하는 대로 푸른 하늘이었다. 분명 실내인데도 올려다보면 가슴이 탁 트이는 듯했다.

‘그래, 진짜 예쁘긴 하다.’

그 한마디에 많은 뜻을 담았다.

하늘 아래 있는 듯한 느낌이 좋았고, 곁에 서훈이 함께여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아마도 그래, 눈앞에서 사라진 그가 더 미웠던 것도 매일 눈을 뜰 때마다 저 하늘을 통해 기억을 더듬을 수밖에 없어서일지도.

“……진아? 또 무슨 생각해?”

별안간 들린 목소리에 한창 언젠가를 곱씹다가 놀란 듯 유진이 휙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 나 불렀어?”

“흐음, 서유진 요즘 진짜 이상하단 말이지.”

“또 뭐가.”

“너 자꾸 멍한 거 알아? 정신이 다른 곳으로 가 있는 사람처럼.”

서훈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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