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 할래?”
뜨끔해진 속내를 감추기 위해 유진이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뚝 뗐다.
“조금 전에도 부르니까, 너 놀랐었잖아.”
“그냥 좀 힘들어서 그래. 결혼하기도 전부터 막 부려먹고.”
“윽, 화살이 왜 그쪽으로 튀어.”
서훈이 자꾸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나중에서야 포기한 듯 벽지를 보느라 그랬다, 반쯤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때처럼 서훈도 바뀐 천장의 벽지가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아주 조금의 불만이 남긴 했지만.
“내가 직접 해도 저만큼은 해.”
“예, 예, 그러시겠죠.”
이미 서훈의 도배 실력을 3년 전에 본 유진이었다. 진짜라고 우겨도 그게 먹힐 리 없다.
“진짜라니까 또 안 믿네.”
유진이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도배는 기억에 남은 그때와 달리, 수월하게 끝났다. 다시 고생하기 싫었던 그녀가 그를 설득해, 고집대로 업체를 부른 탓이었다.
“너무 급하게 정리하는 거 아냐?”
멀지 않은 거리에서 그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열심히 정리하는 사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저렇게나 불만이 가득하다.
“괜히 왜 시비야?”
넌지시 한마디를 던지자 서훈에게서 알게 모르게 뿌듯한 기색이 풀풀 날리고 있었다. 그사이 못을 다 박은 듯했다.
저 눈은 또 뭐야.
쓸데없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모양새가 얼른 칭찬해 주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못은 다 박았어?”
유진은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뗐다.
“당연하지. 내가 금방 한다고 했잖아.”
“으음, 그걸 금방이라고 하기엔 좀 오래 걸리던데.”
서훈은 연신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어쩔 수 없이 고생했다는 말을 덧붙이며 유진은 백기를 들었다.
어른스러운 남자가 가끔 저렇게 애처럼 군다. 행동은 또 얼마나 재빠른지 올라선 스툴은 벌써 제자리로 돌아갔고, 망치도 쥐고 있지 않았다.
이래서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다시 돌아온 일상이 마냥 좋다가도 어느 순간, 예전처럼 사소한 일로 투닥거리니 말이다.
“어라, 우리 꼬꼬마. 오늘따라 꽤 얌전하다?”
금세 곁으로 다가온 서훈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자꾸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그래, 우리 꼬꼬마.”
“누가 들으면 내가 한참 연하인 줄 알겠다.”
웃으며 반박하는 사이, 마지막 상자까지 다 내린 서훈을 보며 그녀가 입을 떡 벌렸다.
저렇게 빠른 줄 알았으면 게으름 좀 피울걸.
“빨리도 했다, 상자들 엄청 무겁던데.”
“으음, 책이 좀 많아서.”
“본인도 그거 알고는 계셨어요?”
상자를 휙 둘러본 그가 낮게 혀를 차며 쳐다봤다.
“어쩌다 그렇게 됐어, 그보다 이걸 혼자 정리하려고 했어?”
그냥 좀 기다리지, 왜 사서 고생하느냐는 뉘앙스가 아닌가.
“그냥 뭐, 누구든 빨리 정리하면 되니까.”
괜히 민망해진 유진이 뒷덜미를 쓸어내리며 작게 웅얼거렸다.
“다음부턴 좀 기다려, 그러다 몸살 나면 어쩌려고.”
조금 섭섭했다.
혼자 힘들게 일하는 모습 보기 싫어하는 서훈을 아는데도,
유진은 이제 그가 조금이라도 화를 내는 게 싫었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자존심을 내세우기에 급급했고, 매번 사소한 걸로 서훈과 티격태격하는 날도 많았는데, 이제는 그냥 싫다.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놓치고 있던 부분이 사실은 가장 알기 쉽다는 것을.
너무 익숙해져서, 당연하지 않은 것들인데 그걸 당연하게 여긴 결과였다.
“유진아?”
앞으로 손을 뻗으며 서훈이 한숨처럼 제 이름을 불렀다.
“그 말 때문에 삐졌어?”
자연스럽게 내려앉은 그의 손이 익숙하게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 잔잔한 미소가 유진에게로 박히듯 스며들었다.
“진아, 대답 좀 해 봐, 응?”
“…갑자기 왜…….”
어쩐지 이유 없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애써 쏟아지려는 울음을 삼키며 그를 따라 웃었다.
“우리 이제부터 같이 살 거잖아, 그렇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길이 부드럽게 유진을 간지럽혔다. 투박한 손이, 서훈의 미소가 좋아서 유진이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어, 같이… 사는 거지.”
그래, 이제부터 꼬박 3년은 같이 살겠지.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면,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그가 사라진 시간은 고작해야 몇 개월이었다.
짧고도 긴 그 몇 달을 웅크리고 지낸 버릇처럼, 유진에게는 그때가 희미한 과거인 동시에, 그다지 멀지 않은 어제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천천히 하자.”
“…….”
“내가 도망이라도 가? 왜 그렇게 급하게 정리를 해.”
유진은 허를 찔린 사람처럼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내가… 그랬… 어……?”
서훈에게는 그렇게 보였던 걸까. 자각하지 못한 모습을 그는 주의 깊게 살펴본 듯했다.
“기다렸다가 나랑 느긋하게 정리해도 되잖아.”
“책부터 얼른 정리 끝내려고.”
당혹감을 감추듯 넌지시 책이 가득한 상자를 가리키자 별안간 그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 그거.”
“한두 박스로 끝날 것 같지도 않고.”
“미안, 책이 좀 많기는 하지?”
그래도 책이 많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다. 덕분에 대화는 자연스럽게 화제가 뒤바뀌었다.
“적당히 집에 좀 놓고 오지, 바보.”
유진이 놀리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과연 서훈이 가져온 책은 상자의 몇 퍼센트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솔직히 웃어넘기기엔 그 양이 확실히 좀 많았다.
“다른 짐은 설마, 이게 끝?”
“어? 으음, 아마도?”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서훈을 보며 유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 남자가 진짜 책만 다 싸 짊어지고 왔네.”
정말로 책만 다 가져왔다는 소리가 아닌가. 서훈의 짐은 옷과 신발처럼 흔해 빠진 일상품이 얼마 없어서, 더 특이했다.
‘과거에도 짐이 이랬었나?’
유진은 잠시, 막 동거를 시작했을 과거를 곱씹다가 기억을 흐트러트렸다. 자꾸 떠올려서 좋을 건 없는데 그만큼의 후회들도 남았다.
짐 정리는 대부분 서훈의 몫이었다. 그래서 짐이 대부분 책이라는 것도 유진은 오늘에서야 알았다.
조금만 신경 쓰면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함께 살면서 늘어난 책장 속의 책들은 제가 아닌, 서훈이 주인이었던 모양이다.
“콜록! 콜록!”
그때, 남은 상자를 정리하던 유진이 휙 고개를 돌리며 크게 기침을 했다. 허공으로 날린 먼지가 상당한 탓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이거 도대체 뭔데 콜록, 열자마자 먼지가, 콜록콜록.”
“잠깐, 내가 먼저 열어 보고… 어라?”
놀란 듯 서훈이 급히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러다 이내 반가운 듯 그가 커다란 책을 꺼내 유진에게로 쓱 내밀었다.
“뭐길래 그래?”
“기억 안 나? 우리 고등학교 앨범.”
* * *
서훈과 민석, 유진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이제는 1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녀는 서훈과의 첫 만남을 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가 언제쯤이더라. 아마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시기였던 것 같다.
여름 방학이 코앞인 무척이나 더운 날, 가장 먼저 기억나는 건 날씨였다.
“으윽, 진짜 너무 더워.”
책상에 풀썩 엎드린 유진이 불만을 투덜거리며 휙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놈의 학교는 공부하라는 건지, 땀을 빼라는 건지도 모를 만큼 교실의 습도가 높았다.
“어이, 서유진.”
“서유진 없어, 더워서 이미 죽었어.”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옆 분단에 앉은 민석이 어이없는 시선을 던졌다.
“됐어, 공부나 하셔.”
하지만 더는 말 섞을 기운도 없다는 듯 유진은 책상에 뺨을 붙일 뿐이었다.
“진짜 날씨가 참. 좋네, 좋아.”
습도 때문인지 저절로 몸이 늘어지고 있었다. 해가 비치는 창가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그녀가 눈을 감았다.
“야, 야, 서유진.”
“쓸데없이 너무 좋아서 아주 사람을 잡을 것….”
“야, 그만 좀 일어나.”
유진의 실없는 한탄을 팔로 툭툭 치며 민석이 잘랐다.
“또 왜―에.”
이번에는 또 뭐야, 귀찮게. 느릿하게 눈을 뜬 유진이 흔들리는 제 팔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담임 올 시간 거의 다 됐다고.”
“벌써? 알았어, 일어날게.”
쉬는 시간은 참 빨리도 지나간다. 느긋하게 상체를 들어 올리던 유진이 팍, 하고 문이 열리자 별안간 허리를 곧게 세웠다.
“윽, 진짜 바로 왔네.”
문 너머로 진짜 담임이 들어오고 있었다. 설마 오겠냐 여기던 유진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하여간 친구지만, 이런 타이밍 하나는 진짜 예술이다. 곁눈질로 옆을 보자 민석이 그것 보라는 듯 씩 웃었다.
그즈음이었다.
불만을 삼키던 유진의 시야에, 키가 작은 담임의 머리 뒤로 살짝 튀어나온 낯선 얼굴의 주서훈이 보인 것은.
“설마 전학생?”
어정쩡한 시기엔 전학을 오는 학생도 드물었다.
“이제 곧 방학인데 지금 오냐.”
“어디서 온 거지? 이 시기에 전학생은 드물잖아.”
“이 근방은 아닌 것 같은데?”
낯선 인물의 등장으로 교실은 금세 호기심으로 시끌벅적해졌다. 유진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탁! 탁!
“다들 조용조용!”
시끄럽다며 담임이 힘껏 교탁을 내려쳤다. 갈수록 어수선해지는 분위기 때문인지 담임의 얼굴 위로 언제부턴가 짜증이 가득 차올랐다.
열여덟 살의 유진은 그렇게 서훈을 처음 만났다.
막 전학 왔을 때의 그는 뭐든지 다 거칠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일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살갑지 못한 성격은 벽이 너무 높았다.
“있잖아, 이름이 주서훈이야?”
그런 서훈에게 서슴없이 다가간 사람은 교실에서 단 한 명, 유진뿐이었다.
“으음, 너 말이야, 너.”
“…….”
“곧 방학인데 이 시기에 전학은 왜 왔어?”
몇 번을 물어도 묵묵부답.
“혹시 다니던 학교에서 대형 사고라도 쳤어?”
유진은 대답 없는 서훈을 빤히 쳐다보며 이런저런 질문을 건넸고, 저 홀로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주로 오랜 단짝인 민석과 어울리던 유진은 전학생에게 무시당하면서도 수시로 말을 걸었다.
이유라면 의외로 단순했다.
순수한 호기심과 함께 하필이면 서훈의 자리가 그녀의 바로 옆 분단이라는 것도 있었다.
“진도는 잘 맞아? 모르는 거 있으면 부담 없이 물어봐.”
“…….”
“뭐, 싫으면 말고.”
그렇게 꼬박 5일째던가.
멀뚱히 구경하며 반의 모두가 그 일상에 익숙해질 즈음, 드디어 주서훈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