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그만-!”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며 뱉은 그 한마디엔 짜증이 가득했지만, 유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 말했다.”
“너 말이다, 제발 사람 좀 그만 귀찮게 해라.”
“어? 귀찮았어?”
“몰라서 묻냐?”
서훈도 더는 침묵하지 않았다. 대신 귀찮게 구는 유진을 짜증스럽게 노려볼 뿐이었다.
“민석아, 얘 드디어 말한다.”
“…기어이 성공했냐.”
“진짜 목소리 듣기 힘들다, 얘도.”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는 유진을 보며 민석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퍽이나 좋겠다.”
“나쁠 건 없잖아, 안 그래?”
항상 교실에서 서훈은 투명 인간처럼 조용했고, 수업이 끝나면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게, 바람처럼 사라지고는 했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매번 무시하는 서훈에게 유진은 누가 이기나 해 보자는 식의 오기가 발동한 것은.
가까워진 계기는 사소했다.
어릴 때부터 심하다 싶을 만큼 책을 좋아하던 유진은 고등학생이 되고도 변한 게 없었다. 게다가 유독 고집스럽게 고전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친구들에게 유진의 특징을 물으면 모두가 입 모아 책벌레라고 외칠 만큼, 그녀의 책 사랑은 남달랐다.
2학기가 끝나 가던 날도 그랬다.
유진은 여느 날처럼 집에서 챙겨 온 책을 꺼냈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본 민석이 익숙하다 못해 지겹다는 얼굴로 손등에 턱을 걸쳤다.
“뭐냐, 그 책은 또.”
“보면 몰라? 오랜만에 책이나 좀 읽으려고.”
“그 나이에 어린 왕자로?”
유진이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민석이 자꾸 트집을 잡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민석, 왜 자꾸 시비야?”
“쯧, 집에서도 매일 끼고 사니까 그렇지.”
책을 싫어하는 탓인지 민석은 심심하면 한 번씩 유진에게 시비를 걸곤 했는데, 지금이 딱 그런 경우였다.
괜히 시비 걸지 마. 단호하게 선을 그으려는 찰나, 유진은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책, 좋아하냐?”
주서훈이었다.
유진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그나마 한 번씩 말을 걸면서 좀 친해졌지만, 그때까지도 서훈과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내가 말 안 했어? 책 좋아하는 거.”
“못 들은 거 같은데.”
“미안, 다들 알아서 너한테도 말한 줄 알았지.”
웬일로 먼저 말을 다 걸었지? 유진이 의아하게 제 뺨을 긁적이며 서훈과 나란히 시선을 마주했다.
만사가 다 귀찮아 보이던 기색이 없다. 오히려 서훈의 눈동자엔 호기심과 비슷한 감정마저 작게 일렁이고 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좀 다르네?’
서훈은 표정 변화가 극히 적었다. 2학기가 끝나갈 때까지도 늘 그런 식이었는데 갑자기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확실히 조금 달랐다. 그 미묘한 변화가 신기해서 유진은 본격적으로 서훈에게 온갖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혹시 너도 책 좋아해?”
“어? 어, 뭐….”
“어떤 거? 난 장르보단 문학 쪽을 더 좋아하는 편이거든.”
“나도 그냥 문학.”
평소에는 귀찮아하던 대답도 서훈은 딴청을 부리면서도 곧잘 받아 주곤 했다.
그게 또 유쾌해서, 유진은 눈을 빛내며 연신 질문을 건넸다.
“작가 누구 좋아해?”
“뭐, 그냥 유명한 작가들.”
“그러니까 누구?”
“헤르만 헤세나 셰익스피어, 톨스토이도 보고.”
껄렁하고 사나운 겉모습과 달리, 대답하는 취향은 딱 고전 타입이 아닌가.
가만히 듣던 유진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리며 어느덧, 기분 좋은 미소를 만들어 냈다.
“리어왕은 어때? 난 특유의 분위기가 좋더라.”
“으음, 글쎄….”
“비극은 별로야?”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유진은 리어왕과 코델리아의 마지막이 너무 처참하지 않느냐며, 물 만난 고기처럼 조잘조잘 제 생각을 늘어놓았다.
유독 말수가 적은 서훈 때문인지, 그 후로도 두 사람의 대화는 늘 유진의 주도하에 흘러가고는 했다.
학년이 바뀌고도 세 사람은 단짝이라기엔 조금 모호한 친구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게 틀어지기 시작한 건, 다시 또 찾아온 초여름의 어느 한 사건 때문이었다.
“다른 애들처럼 수다를 좀 떨어라.”
“쓸데없는 참견하지 마시지?”
“누가 보면 너 왕딴 줄 알아, 못 느껴?”
민석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유진은 평소처럼 벤치에 앉아 느긋하게 독서 중이었다.
하지만 그때.
“야! 야! 서유진!”
“어어? 피해!”
불현듯 사방에서 유진을 크게 불렀다.
“뭐, 뭐야, 갑자기 다들?”
짜증스럽게 인상을 쓰며 고개를 휙 들어 올리던 찰나, 무언가가 그녀의 머리를 세게 강타했다.
타-앙!
‘……어, 어라?’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유진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생애 처음으로 말로만 듣던 기절을 경험하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유진이 제일 먼저 떠올린 것도 기절했구나, 정도.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린 유진은 이마가 아픈 듯, 잘게 인상을 썼다.
“으, 으윽.”
분명 벤치에서 고개를 치켜들었고, 날아오는 공이 보였다. 그게 끝이었다. 기억은 거기에서 뚝 끊겨 있었다.
나머지는 백지라는 소리.
‘뻔하네, 그대로 기절했겠지.’
기절한 뒤의 일들을 대강 짜 맞추며 천장을 빤히 응시했다. 누가 던진 건지 두고 보자며 유진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맞다, 내 책.”
한 명쯤은 챙겨 놨겠지.
쓰게 웃으며 유진이 주변을 살폈다. 늘 교실에서 보던 익숙한 천장인데도 특유의 약 냄새가 자꾸만 코를 찔렀다.
온 김에 잠이나 자다 가야겠다며 유진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감긴 눈이 다시 번쩍 떠졌다.
“하아, 기다리다 잘 뻔했네.”
“……?”
놀란 듯 눈을 깜빡이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유진이 휙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였는데.
누군지 얼굴이나 보자는 마음으로 기다리자 어느 순간, 옆으로 확 커튼이 젖혀지며 시야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무려, 주서훈이.
* * *
앙숙으로 시작해, 다음에는 친구로, 마지막에는 어쩌다 흐르고 흘러 연인으로까지 발전한 관계가 아닌가.
이제는 진짜 까마득한 기억이었다.
“그리운데? 이게 도대체 언제 적이야?”
학생 때를 떠올리며 유진이 잔잔하게 웃었다.
“글쎄, 나도 까마득해서.”
“우리도 나이를 먹긴 하나 봐, 그렇지?”
서훈은 대답 대신 나직하게 웃으며 유진의 어깨를 제 팔로 감싸 안았다.
“그런데 이거 보니까, 괜히 좀 욱한다?”
나긋한 목소리와 달리 앨범을 툭 튕겨 내는 유진의 손길은 영 불만스러워 보였다.
“갑자기 또 왜.”
“전학 왔을 때 너, 나 엄청 무시했잖아.”
“그건 개인적으로 사정이 좀…….”
가만히 듣던 서훈이 곤란한 듯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은근슬쩍 눈치를 보는 모양새가 예전 일을 기억은 하는 모양이다.
저럴 거면서 뭐 좋다고 앨범까지 꺼내서 추억에 젖어.
“게다가 성격도 엄청났었어.”
도로 집어넣으려는 앨범을 낚아챈 그녀가 서훈에게 보란 듯이 활짝 펼쳤다.
“저기, 진아….”
“도대체 언제부터 성격이 바뀐 걸까?”
그런데 정말 언제부터 성격이 바뀐 거지. 그녀가 서훈을 보며 모르겠다는 듯 갸웃거렸다.
아직도 좀 의문이다.
생각해 보면 3학년 초반까지의 서훈은 꽤 까칠했었다. 그 모난 부분이 서서히 없어지더니, 졸업할 즈음엔 거의 지금처럼 바뀐 것도 같았다.
“지금은 제법 둥글둥글해졌어, 우리 주서훈 씨.”
급기야 유진이 장난치듯 서훈의 팔을 툭 쳤다. 은근한 원망을 알아차린 듯, 서훈이 싱겁게 픽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칫, 웃기는.”
“그럼 대성통곡이라도 할까?”
그냥 좀 성격이 좋아졌다기보다, 능글맞아진 건가?
“그때 친한 척이라도 안 했어 봐. 우리 길 가다 마주쳐도 모를 남남일걸.”
이래서 타인에게 무조건 까칠하면 안 된다. 사람의 인연은 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는 법이었다.
몇 년이 지나, 지금처럼 연인이 될 수도 있고, 다른 방식으로 재회할지 모르는 게, 사람의 인연이었다.
“지금도 나 성격은 별로 안 좋을걸?”
“설마 자폭이야?”
“뭐, 나름 사실이니까.”
언제부터 다정해진 건지 의문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확실히 서훈이 변한 경계는 조금 모호한 감이 있었다.
서훈이 바닥을 청소하는 사이, 유진은 남은 상자를 구석으로 밀어 넣고서 뻣뻣하게 굳은 허리를 폈다.
까맣게 변한 손바닥은 이미 본래의 색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함께야, 적어도 당분간은.’
그 생각을 곱씹으며 개수대에서 손을 씻는 유진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헤어지고도 꼬박 몇 달간, 서훈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이 현실이 아득한 신기루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녀에게는 어쩔 수 없었다.
“왜 여기서 씻어, 찾았잖아.”
커다란 팔이 뒤에서 익숙하게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뒤늦게 상념을 떨쳐내며 유진이 그에게로 반쯤 고개를 틀었다.
“샤워 다 했어? 조금 전에 들어갔잖아.”
“대충 물만 끼얹었어.”
바짝 밀착된 서훈에게서 은은한 샴푸 향이 풍겼다.
“초스피드네, 아주.”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유진이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추억이 밀려드는 향은 기억보다 더 달콤했다. 그리웠던, 체향과 뒤섞인 향은 서훈에게서만 풍기는 독특한 향이었다.
“조금만 기다리지, 샤워하는 것도 금방인데.”
“손이 너무 더러워서.”
남은 거품을 마저 씻어 낸 유진이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내리눌렀다.
“손 조금 더러운 게 어때서.”
“그냥 찝찝하잖아.”
유진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서훈은 연신 장난을 쳐 댔다.
“우리 꼬꼬마, 은근히 예민하다니까.”
목덜미로 제 입술을 문지르며 그가 허리를 감은 손으로 간지럽게 골반을 훑어 내렸다.
“…읏, 뭐하는 거야.”
“성격만큼이나 몸도 예민하고.”
얇은 천 너머로 그의 손길이 생생하게 닿았다.
“갑자기 자극하지 마, 손도 더러운데.”
놀란 유진이 허리를 뒤틀자마자 서훈이 짓궂게 씩 웃었다.
“흐음, 다 씻고 나서는 해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