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지금은 안 돼.”
“뭐, 안 되면 내가 되게 만들면 그만이겠지만.”
자꾸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그가 뒤에서 바짝 제 몸을 밀착했다.
“너 진짜, 간지럽다니까.”
“간지럽기만 해? 감상이 부족한데.”
이 남자가 진짜, 청소하다 말고 왜 혼자 흥분하는 건데. 한숨을 푹 내쉬며 유진이 팔꿈치로 그를 쿡 찔렀다.
반쯤 장난이었던 듯, 간지럽게 위로 올라가던 손을 그제야 서훈이 뚝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아쉽다는 듯 재차 허리를 안고 제게로 꽉 당겼다.
“이것 좀 그만 풀어 봐.”
“싫은데?”
“네가 샤워하라며.”
이 상태로 무슨 샤워를 해. 재차 허리를 감은 서훈의 팔을 툭 치며 유진이 콧잔등을 잘게 찌푸렸다.
장난을 치면서도 서훈은 끌어안은 채, 쉽게 유진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할 것 없다는 둥, 이상한 말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뜬금없이 무슨 걱정?”
“이런 사소한 이유로 내가 널 소박이야 놓겠어?”
손의 물기를 닦아 내던 유진이 어이없게 서훈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인 줄 알지? 소박은 무슨.”
“어차피 결혼, 나랑 할 거잖아?”
“그거야, 이제부터 너 하는 거 보고.”
퉁명스럽게 던진 말에 늘어져 내린 서훈의 눈매가 돌연, 휙 치켜 올라갔다.
아무래도 괜히 장난을 친 모양이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길게 말끝을 늘이던 그가 갑자기 유진의 허리를 확 끌어당기더니, 그녀의 여린 목덜미를 아프도록 콱 깨물었다.
“윽! 깨물지 말라니까?”
“이런 건 싫어?”
“당연하지, 너도 한번 물려 볼래?”
인상을 쓰며 유진이 그를 마구 밀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물린 목덜미를 서훈이 천천히 핥아 올렸다.
연이어 부드럽게 닿는 감촉이 생생하다. 깨물린 곳을 건드리는 입술이 간지러워서 유진은 자꾸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그러면 이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유진이 곤혹스럽게 눈썹을 찡그렸다.
“…으읏.”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이런 장난이라니, 어디서부터 장단에 맞춰야만 하는지도 난감한 탓이었다.
“입술 깨물지 말라니까, 또 그런다.”
“장난 좀 그만 쳐, 진짜.”
입술을 꾹 누르는 손가락을 툭 치며 유진이 제 어깨에 턱을 걸친 서훈에게 눈을 흘겼다.
귀여운 척해도 안 어울려.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가 옆에서 낑낑거린다고 귀여워 보일 리가.
서훈의 장난이 싫은 건 아니었다. 곧 나갈 시간인데 외출 전부터 이런 끈질긴 스킨십은 유진의 입장에서는 조금 곤란했다.
오랜만에 민석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래서 자꾸 쳐 내는 게 서훈은 조금 섭섭했던 모양이다.
“뭐야, 서유진 딴 놈이라도 생겼어?”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이상한 소리라니. 네가 나 버릴까 봐, 긴장하는 거지.”
“주서훈 씨, 썰렁한 거 알죠?”
“끙, 전혀 안 통하네.”
유진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라며 서훈에게 못을 박았다. 그러고는 재차 팔을 밀어내는데, 이게 영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혀서.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유진을 알아차린 듯, 그가 못마땅하게 인상을 쓰며 버티고 있는 탓이었다.
정말 이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고집스러운 연인의 심통도 나름대로는 유쾌했지만, 내내 그 장단을 맞춰 줄 수는 없었다.
“이 미련 곰탱이야.”
“또 뭐, 왜.”
“그걸 말로 해야 알아듣지?”
“이거 풀라고?”
곧장 받아치는 서훈의 목소리가 아직도 영 삐딱하다.
확실하다, 약속을 전혀 기억 못 하는 눈치가 아닌가. 제 뒤에 바짝 붙어선 그를 유진이 가늘게 뜬 눈으로 주시했다.
“너 오늘 약속 있는 거 잊어버렸지?”
“약속? 그런 게 있었던가?”
“오늘 민석이랑 만나기로 했잖아, 이 바보야.”
허리를 감싼 팔뚝을 짝, 소리가 나게 때리며 유진이 한숨을 길게 쏟아냈다.
“아, 그놈이랑 약속했었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서훈에게서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못 살아, 진짜 잊고 있었어?”
“이래저래 바빴잖아, 이사한다고 정신도 없고.”
“이럴 줄 알았어, 으이그.”
반응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그게 이사 때문인지, 고의로 흘려 넘긴 건지는 알 수 없겠지만.
이미 유진에게는 익숙했다.
벌써 민석과 친구로 지낸 시간이 몇 년인데, 서훈의 심드렁한 태도는 매번 그대로였다.
“그놈 꼭 만나야 하나?”
“또 이런다. 정 싫으면 나 혼자 가고.”
“지금 장난해?”
날카롭게 눈썹을 치켜올리는 서훈을 보며 한숨을 삼킨 유진이 은근슬쩍 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너만 친구야? 나도 걔 친구거든.”
가끔은 친구인지, 앙숙인지도 헛갈리는 지경이 아닌가. 하루 이틀도 아니라 대강 넘기지만, 짜증이 날 때도 있었다.
따지고 보면 유진이 더 오래 알고 지낸 사람도 서훈이 아닌, 민석이었다. 그게 저 남자의 신경을 자극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 * *
서훈만큼 오래간만에 본 민석의 반응도 여전했다.
“다른 거 시켜 줘?”
“아냐, 이거면 나도 충분해.”
유진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아서 수저를 놓고, 물을 따라 주는 서훈을 보며 민석은 짜증스럽게 인상을 썼다.
아무리 오랜 친구라지만, 민석의 저런 태도를 볼 때마다 유진도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야, 너희 좀 떨어져.”
급기야 고기를 굽던 집게로 둘 사이를 갈라놓듯 허공을 휙휙 내저었다. 한마디로 심사가 뒤틀린 것이다.
“갑자기 뭐야, 왜 시비인데?”
“솔로 심정이 서글퍼서 그런다, 내가.”
투덜거리며 서훈은 괜히 솔로 앞에서 염장 지르지 말라며 두 사람을 흘겨보기도 했다.
“적당히 해, 그게 우리 탓도 아니고.”
손에 쥔 젓가락으로 민석의 집게를 막으며 서훈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으르렁거렸다.
유진의 존재도 잊은 채, 두 사람은 서로를 살벌하게 노려보며 유치한 말싸움을 시작했지만.
“식당에서 닭 털 날리지 말라는 거다.”
“젓가락 놔 준 것도 문제냐, 시비는 누가 걸었는데.”
“걔가 애기냐? 멀쩡히 손발 다 있거든?”
저러면서도 친구로 지내는 게 용하다.
더 구경할 것도 없다는 듯, 유진은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둬들여 이내 불판 위의 고기를 홀로 뒤집었다.
“하아, 또 시작이네.”
먹어야 힘내서 치고받고 싸우지. 비싼 돈 주고 시킨 고기를 자기들끼리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 고스란히 태울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사소한 걸로 으르렁거리느라 바빴다.
저런 상태에서는 옆에서 말려 봤자 별 소용도 없었다. 안 봐도 펼쳐질 상황이 뻔히 보인다.
“친구끼리 매번 왜 우리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난리야.”
“그럼 너희는.”
“부러우면 능력껏 애인이라도 만들던가.”
가만히 듣던 유진이 한심하다는 듯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저런 단순한 주제로 매번 싸우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으음, 고기 다 탈 것 같은데.”
난감한 듯 유진이 불판으로 시선을 내렸다. 한참 전에 다 구워진 고기가 한가득 얹어져 있었다.
“하여간 재수 없는 놈.”
“누가 할 소리를.”
여전히 두 남자는 대치 상태였다. 보다 못한 유진이 한숨을 쏟아내며 서훈의 소매 끝을 슬쩍 잡아당겼다.
“하, 진짜 피곤하게.”
이 정도면 중재할 때도 됐다.
그만 끝내라는 듯 세게 신호를 보냈더니, 서훈이 날카로운 눈매를 내리며 그녀에게로 시선을 맞춰 온다.
“갑자기 왜?”
그 다정한 시선에 짜증스럽던 유진의 마음이 금세 녹진하게 풀렸다.
그래, 이런 남자였다. 주서훈은.
“그만 좀 싸우라고, 사람들 다 쳐다보겠다.”
“진아, 그게 아니라…….”
“이것 봐, 고기 다 익었잖아.”
저거 다 식으면 누가 먹을 건데. 불판을 가리키며 괜히 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 고기.”
“장난하냐, 서유진?”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서훈이었고, 민석의 삐딱한 말투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이거 듣다 보니까, 약간 기분이 상하는 것도 같았다. 타기 전에 먹으라고 알려 줬더니, 민석은 왜 방해하냐는 눈초리다.
“싸우려고 만났어? 탈까 봐 알려 주는데 왜 성질이야?”
“내가 또 언제 성질을 냈다고 그래.”
짜증스럽게 팔짱을 끼며 유진이 건너편을 쓱 가리켰다.
“너 말고 쟤 말이야, 나민석.”
지레 찔렸던 걸까. 서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잽싸게 고기 한 점을 제 입으로 밀어 넣었다.
민석이 그 모습을 보며 나직이 혀를 찼다.
“저거 쩔쩔매는 거 봐라, 서유진 또 삐쳤냐?”
“삐치긴 내가 뭘 어쨌다고.”
“넌 뭘 그렇게 맨날 삐치냐, 애처럼.”
과거로 돌아오고 민석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유진은 곧 깨달았다. 약간 다르지만, 여전히 반복되는 시간을.
늘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도 그대로였고, 막 동거를 시작한 시기도 그때와 거의 엇비슷했다.
여긴 자신이 겪은 과거이며 또 다른 현재인 거다.
‘어쨌거나 좋다.’
가볍게 결론을 내린 유진이 입꼬리를 둥글게 휘어 올렸다. 옆에서 제 표정을 살피던 서훈이 의외인 듯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장난을 친다기보다 뜬금없이 웃는 이유가 궁금한 얼굴이다.
“어라, 너 웃어?”
“매번 얼굴만 보면 싸우니까 좀 웃겨서.”
슬쩍 가까워진 얼굴을 밀어내며 유진이 대답했다.
“흐음.”
힘없이 뒤로 밀려나는 서훈의 눈이 스치듯 가라앉았다. 무언가 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유진은 알아차리고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건너편에 앉은 민석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너희 회사, 요즘 비상이라며.”
“하아, 말도 마라. 그것 때문에 아주 내 정신이 아니다.”
“그 정도로 바빠?”
“이러다 쓰러지면 노동청으로 가야지.”
이를 악무는 민석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한편, 유진은 언제부턴가 조용한 제 연인을 곁눈질로 힐끔힐끔 살폈다.
사귄 지가 벌써 몇 년째다.
서훈은 은근슬쩍 화제를 전환해버린 유진을 알아차리고도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낼 뿐, 별말이 없었다.
“아무튼, 너흴 보자고 한 건 다른 이유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게 일이라기보다는, 좀…….”
진중해진 얼굴로 민석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다 이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그가 넌지시 물었다.
“혹시 너희는, 예전 담임 기억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