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8화 (8/67)

❦제8화

‘정 마음에 걸리면 그냥 선생님 한번 찾아가 보자.’

‘어? 찾아… 가라고…?’

‘어차피 고민하다가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니까.’

후회가 남지 않게끔, 이번에는 유진도 마음을 달리 먹은 것이다.

‘고민이라, 하아…….’

‘정답을 모르겠으면 그냥 눈 딱 감고, 갔다가 와.’

‘그럴까? 가도 되겠지?’

의외인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갑자기 왜 저래. 딱 그런 느낌의 두 시선이 유진의 뺨을 동시에 찔렀다.

물론, 조언을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빈소를 갔던 3년 전, 한 번은 들러 볼 걸 그랬다며 후회하는 소리를 들었기에, 그래서였다.

“너희가 여기 잠깐만 좀 봐라.”

“우리 둘이?”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유진이 가까이 다가온 민석을 보다 곁에 선 연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얘 내내 굶었을 거야, 밥 좀 먹이고 올게.”

“그래, 뭐라도 좀 먹이긴 해야겠다.”

“미안하다, 얼른 돌아올게.”

“느긋하게 많이 먹여라, 애 쓰러지겠다.”

서훈을 따라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어린 소년의 안색은 지치다 못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을 만큼이나.

괜찮다며 버티는 연우를 민석은 억지로 잡아당겨, 빈소에서 데리고 나갔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어린 소년은 두 사람에게 연신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까지도 서훈의 곁에 선 채로 그녀는 주변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관찰하듯, 바뀐 점을 확인하는 것이리라.

‘이상해, 고작 그거 때문일 리가 없는데.’

원인을 제공했다고 쳐도 예전과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러나 유진을 괴롭히던 의문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진아.”

“…….”

“서유진?”

불현듯 곁에 선 그가 제 이름을 불렀다. 그 다정한 목소리에 시선은 자연스럽게 서훈에게로 향했다.

“…어? 나 왜 불렀어?”

“갑자기 왜 또 멍해져 있어.”

“내가 그랬어?”

장소 때문이겠지. 빈소를 둘러보는 척 대답하며 유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늘 말하지만, 어디 안 좋으면 바로 말해라.”

“으이그, 네가 예민한 거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별로야, 이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일부러 장례식이란 단어는 쓰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장소 특유의 음울함을 감상처럼 입에 올렸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었지만, 편할 리 없다. 이미 유진의 머릿속은 꼬인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었다.

달라진 현실.

미묘하게 바뀐 관계.

아는 사람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 그 생각이 번뜩이자마자 유진은 지금까지 거의 느끼지 못한 위화감이 들기 시작했다.

‘미래가 변하면 우리 두 사람도?’

헤어지는 미래에 다른 선택지가 생겼다. 오늘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 반갑기보다 유진은 오히려 더 무서워졌다.

어쩌면 지레 겁을 먹은 건지도 모른다. 상황이 달라지면 다시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아무것도 모른 채 또 그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탓이었다.

* * *

식당으로 가는 내내 연우는 바닥에서 한 걸음 떼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위태로운 모습을 보는 민석의 미간 위로 기어코 옅은 주름이 잡혔다.

저 정도일 줄 알았으면 빨리 와서 뭐라도 진작 챙겨 먹일걸.

그나마 다행이라면 연우가 그에게만은 날카롭게 가시를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 좀 괜찮아?”

테이블에 앉은 민석이 조심스럽게 묻자 오히려 연우는 괜찮다는 듯 쓰게 웃었다.

“아니, 아니다. 질문이 잘못됐네. 몸은 좀 괜찮냐?”

“그냥, 뭐….”

“너 지금 그냥 툭 쳐도 쓰러질 것처럼 보여.”

저 공허한 눈이 민석은 자꾸 눈에 밟혔다. 겨우 고등학생이 아닌가. 그런데 저 눈빛은 세상사에 지친 사람처럼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우선 좀 먹어, 먹자.”

민석이 재촉하듯 국그릇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국 다 식겠다, 얼른 먹어.”

“…저기 형.”

연우는 민 음식을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그가 직접 수저를 손에 쥐여 주었다.

“싫어도 먹어. 너 무조건 먹어야 해.”

억지로 쥔 수저를 보던 연우가 이내 힘없이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죄송해요, 진짜 입맛이 별로 없어요.”

“그러지 말고.”

“죄송해요, 신경 쓰이게 해서.”

사그라질 듯 희미하게 대답한 연우가 돌연, 복받치는 감정을 삼키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가만히 보던 민석이 인상을 쓰며 연우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트렸다. 굳이 괜찮은 거냐, 소리 내서 물을 수조차 없었다.

“생각 없어도 먹어, 이대로 굶어 죽을 작정이야?”

연우가 조금 진정된 뒤에야 손을 거두며 민석이 재차 단호하게 말했다.

“형, 저는…….”

“안 넘어가는 것도 알아.”

그에게도 저 또래의 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독 더 마음이 쓰였고, 상처받은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혼자 아등바등 키워 준 아버지가 아닌가. 그 속이 오죽할까. 차마 그 슬픔의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억지로라도 밀어 넣어.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다.”

하지만 이미 문드러져 있을 속내를 알고도 그는 더 냉정하게 굴었다.

“산… 사람…….”

“그래, 산 사람.”

그 한마디에 연우는 그를 멍하니 보다 이내 수저를 있는 힘껏 쥐었다.

“형도 참, 잔인한 말을 하시네요.”

그때부터였다.

연우는 잘 넘어가지 않는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밥 한 번과 물 한 모금, 다시 또 밥 한 번에 물 한 모금.

그릇이 텅 빌 때까지 움직이던 연우의 손은 한참 만에야 수저를 내려놓았다.

“있잖아요, 형.”

“그래, 듣고 있으니까 말해.”

“밥이… 맛, 있어요.”

고개를 든 연우가 그 한마디를 꺼내며 흐릿하게 웃었다.

“연우야.”

“진짜 맛있는데요, 그런데…….”

제 딴에는 미소라고 지은 표정으로, 그렇게 어린 소년은 소리도 없이 울고 있었다.

참 서럽게도 운다.

말라서 더 나올 것도 없어 보이더니.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연우의 눈에선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작해야 두 달 전에는 알지도 못했을 소년이 그는 생판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어요.”

연우는 끝없이 흐르는 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손등으로 쓱쓱 닦으며 웃었다.

* * *

조용한 빈소에서 잠든 유진의 눈꺼풀이 조금씩 위로 말아 올라갔다. 반쯤 늘어진 몸을 일으켜 세운 그녀가 싸한 느낌에 곧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서훈 나 혼자 두고 어디 간 거야.’

졸면서도 옆이 허전하더니, 역시나 서훈이 곁에 없었다. 놀란 유진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목을 길게 뺐다.

어디 갔는지 그는 머리카락 한 올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제 빈소에는 들어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으, 왜 이렇게 썰렁하지?”

괜히 오싹해진 유진이 손바닥으로 팔을 문지르며 불현듯 입구로 휙 고개를 틀었다.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제 표정을 다잡았다. 은사의 빈소가 아닌가. 함부로 헤실거릴 만큼, 생각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민석을 본 유진이 금세 시무룩하게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서훈이 아니었다.

“어라? 주서훈은 어디가고 너 혼자냐?”

“모르겠어, 갑자기 사라져서.”

민석도 혼자 있는 유진이 의외이긴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래? 어디 간다는 말도 없었고?”

유진이 난감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차마 연우 앞에서 졸다 깼더니 애가 없어졌노라, 말할 수는 없었다.

“흐음, 이건 또 의외인데?”

“뭐가.”

“구박해도 맨날 징글징글하게 붙어 있더니만.”

이 와중에도 삐딱하게 구는 민석을 노려보며 곁에 선 연우를 살폈다. 하여간 못 하는 말이 없다.

“야! 넌 말을 해도 애가 듣는데.”

“틀린 말도 아닌데, 뭘 그렇게 정색이야?”

“하여간 너나 주서훈이나.”

“비교를 해도 왜 또 주서훈이냐, 기분 나쁘게.”

그렇게 민석과 투닥거리는 사이, 말없이 서 있던 연우가 불쑥 유진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제 제가 있을게요, 오신 김에 뭐라도 좀 드세요.”

민석을 따라 나갈 때보다 연우는 혈색이 조금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어지간히 굶고 있었다는 게 티가 났다.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었던 건가. 유진이 의아하게 보자 민석이 어깨를 으쓱이며 쓰게 웃었다.

“얼른 서훈이나 찾으러 가. 너희도 밥 못 먹었을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어차피 난 종일 있을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 당연하다는 말투에 도리어 놀란 사람은 유진이었다.

“계속 있으려고? 여기에?”

“얘 혼자잖아, 아까 나올 때 회사엔 전화해 놨어.”

민석이 그 정도로 담임하고 친분이 좋았었나?

몇 시간 자리를 지키다가 돌아가도 괜찮을 텐데. 저도 모르게 유진은 그런 의문이 먼저 차올랐다.

제자로서 예의상 온 문상이었다.

그의 태도는 분명 과거와는 눈에 띄게 달랐다. 미래의 한 귀퉁이가 조금 전의 일로 다시 또 바뀌었다는 소리였다.

“연우랑 마무리할 얘기도 남았고. 알아서 갈게.”

“그럴… 래……?”

나갈 때보다 한층 더 진하게 풍기는 기묘함을 내리누르며 유진이 빈소 밖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 * *

가까스로 버틴 인내심이 바닥난 듯 서훈이 근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애써 태연한 척 구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하필이면 이럴 때 몸살이라니.

혀를 차며 재차 서훈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정신을 다잡아 봐도 쉽지 않았다.

“하아…….”

떨어트린 손으로 그가 이마를 살짝 덮었다. 역시나 조금 뜨겁다. 확실히 느껴지는 열감은 단순한 그의 착각이 아니었다.

“이 정도는, 후… 괜찮겠지.”

차라리 일하던 중에 아프면 서유진 몰래 병원이라도 갈 텐데. 목이 부은 걸 보면 계절 감기인 것도 같고, 몸살인 건가.

스스로의 증상을 대강 곱씹으며 떠올리던 서훈이 별안간 웃고 말았다. 이 와중에도 유진이 걱정할까, 제 증상을 확인하는 꼴이 마냥 우스웠다.

‘주서훈, 언제부터 이렇게 팔불출이 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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