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서훈은 타고나길 건강체였다.
감기가 와도 웃어넘기기 일쑤였고, 그게 문제가 돼서 지금처럼 한 번에 몰아치듯 심해지는 경우가 아주 가끔 있었다.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몸살이었다. 올해 들어선 크게 아픈 적이 없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오늘로 날을 잡은 듯했다.
“하여간 이놈의 몸은 아픈 타이밍도 참 그지 같네.”
낮게 욕설을 짓씹으며 서훈이 바닥으로 내려간 제 얼굴을 손으로 푹 덮었다.
한참이나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던 서훈이 느릿하게 눈을 뜨며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찬 바람을 쐬니, 그나마 조금 숨통이 트였다. 재차 뜨거운 숨을 쏟아 낸 뒤에야 그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쯤이면 됐겠지.’
복용한 약이 퍼지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지만, 서훈은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빈소에 있을 유진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이런 곳을 싫어하는 여자가 아닌가. 잠든 걸 두고 나왔으니, 눈을 뜨면 크게 당황할 거다.
서유진이 어디 보통 성격이어야지.
자기 혼자만 두고 사라진 걸 알면 앞으로 그 일을 두고두고 우려먹을 게 분명했다.
“아으, 죽겠다.”
애써 삐걱거리는 통증을 무시하며 급히 빈소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약 기운에 조금 나아지는 듯하던 몸이 다시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이젠 두통에, 오한까지 몰려오는 듯했다. 서훈은 자꾸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손바닥으로 마구 문지르며 이를 악물었다.
‘그 녀석이 자고 있어야 할 텐데.’
그나마 빈소까지는 멀지 않았다.
아까도 급히 빠져나오느라 확실히 보진 못했지만, 비상구에서 제법 가까웠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하 1층으로 내려온 그가 막 복도로 나간 찰나, 어디선가 달려온 유진이 급히 서훈을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하아, 주서훈 드디어 찾았다.”
“서유진?”
옆에서 의아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그녀는 쉽게 서훈에게서 팔을 떼어 내지 못했다.
“왜 그래, 너.”
“…….”
“진아, 나 없어서 놀랐어?”
다행이다, 또 그때처럼 눈앞에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당연하지. 갑자기 어디 갔었어?”
“그게, 두통이 좀 심해서 바깥에 바람 좀 쐬러….”
덜컥 내려앉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유진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당장은 이 불안함이 먼저였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를 때가 더 나았다. 한 번 놓쳐 본 사람이기에, 유진은 사소한 상황마저 더 무섭게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는 미리 말이라도 하고 가, 깜짝 놀랐잖아.”
갑자기 네가 또 보이지 않으니까. 차마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유진이 조금 더 손에 힘을 실었다.
“진아, 유진아.”
재차 머리 위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냐는 듯한 손길이 천천히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바보, 주서훈. 이유도 모르면서 걱정스러워하고 있겠지.’
유진은 괜히 더 눈가가 시큰거렸다.
혹시라도 이런 얼굴을 들킬까. 유진이 그의 품으로 급히 제 얼굴을 푹 파묻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바람 냄새가 스치듯 코끝으로 흘러들었다. 천천히 속삭이는 서훈의 목소리가 심장을 타고, 유진에게로 그 울림이 직접 파고들었다.
“내가 미안해. 응?”
“…….”
“깨기 전에 들어오려고 했어.”
더 빨리 왔어야지. 내가 눈뜨기 전에, 더 빨리. 꺼내지 못할 대답 대신,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언제 일어났어?”
“너 없을 때.”
“나 없어져서 많이 놀랐나 보네, 우리 꼬꼬마.”
“누가 꼬꼬마야.”
“무섭다고 내 품에 파고든 여자?”
그제야 서훈이 가볍게 유진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 장난스러운 손길에 안심하듯 고개를 치켜들고서야 유진은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났다, 지금 여기가 장례식장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그, 그러니까, 사람 놀라게 사라지기는 왜 사라져서….”
일부러 틱틱거리며 유진이 애써 떨림을 감추듯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영 몸은 따로 논다. 태연한 미소와 달리 서훈에게서 쉽게 손을 떼지 못하는 탓이었다.
“으음, 많이 놀랐어?”
“당연하지, 갑자기 옆에 있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미안, 두통 때문에 바람 좀 쐬고 왔어.”
한 번 겪은 일은 되풀이된 과거에서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그건 꼭 지워지지 않는 흉이 생긴 것처럼, 그렇게나 유진을 불안하게 했다.
‘날 두고 어디를 다녀온 건지, 그때의 넌 또 어디로 사라진 건지.’
유진은 다시 버려질 미래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했다. 민석을 통해 미래가 바뀌었음을 확인하고도, 불안감은 그만큼이나 깊었다.
“잠깐, 서유진 너!”
어깨를 감싸 안으며 놀란 듯 서훈이 제 이름을 부른 건, 그때였다.
“……어, 어?”
“갑자기 왜 이렇게 떨어?”
미처 감추지 못한 떨림을 그가 느낀 듯했다.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며 유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다가 깨서. 그냥 좀 추운가 봐.”
“그렇다고 이렇게…….”
“누가 혼자만 사라지래? 긴장 풀린 거지, 뭐.”
태연하게 웃으며 유진은 그에게서 제 몸을 떨어트렸다. 변명거리가 있어서 다행이라 안심하면서도 금세 또 서훈의 팔을 붙들고 말았다.
텅 빈 곁이 그사이 너무 선명하게 와닿아서, 잠깐 무서워졌나 보다.
“뭐야, 이 손은?”
“너 또 말없이 없어질까 봐?”
일부러 유진은 진심을 티 나지 않게 장난처럼 툭 뱉었다. 그게 우스웠는지, 서훈이 어린애냐 놀리며 입매를 꺾어 올렸다.
“우리 꼬꼬마, 다 크려면 멀었네.”
“왜 맨날 꼬마래, 진짜.”
“몰라, 내 눈엔 평생 네가 꼬마로 보일 것 같거든.”
다정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부드럽게 쏟아져 내렸다.
“하여간, 주서훈 말이나 못 하면….”
괜히 눈을 흘기자 그가 씩 웃으며 언제나처럼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쓱쓱, 부드럽게 박자를 맞추는 손길이 익숙했다. 불안함이 차츰 진정되고 있었다. 요동치던 것들이 그 익숙함을 따라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금세 유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너무 제 감정에 휩쓸려, 서훈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그보다 너 왜 이래? 몸 안 좋은 거지?”
“으음…….”
서훈의 손을 잡아 내리며 유진이 반대로 그의 이마를 제 손으로 덮었다.
“열 있네, 맞지?”
재촉하듯 되묻자 서훈이 난감하게 눈살을 찡그렸다. 체온이 높다 싶었더니, 역시나다.
“조금, 감기 기운이 있긴 해.”
“요즘 무리했나 보다, 잘 아프지도 않던 남자가.”
“연중행사야, 너도 알잖아.”
연중행사는 무슨.
서훈의 뺨을 아프지 않게 죽 늘리며 유진이 은근슬쩍 타박했다.
“대신 더 지독하게 아프니까 문제지.”
별걱정을 다 한다는 뉘앙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부러 제 앞에서 괜찮은 척하는 티가 나는데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다.
도대체 몇 년을 지켜봤다고 생각하는 거야.
남몰래 한숨을 삼키며 유진이 그의 뒷덜미로 손을 내렸다. 뜨거운 온기가 손바닥으로 확 옮겨져 온다.
미열은 아니었다. 당장 병원부터 데리고 가야겠다. 급히 서훈을 부르려는데, 그가 한 박자 더 빨랐다.
“민석이는?”
“아, 맞다. 걔 오늘 여기서 밤샐 거라던데?”
그제야 잠시 잊고 있었던 민석의 말이 떠올랐다. 빈소가 있을 방향을 가리키며 말하자 이번에는 서훈도 유진만큼이나 의외라는 기색이었다.
“걔가 뭐하러?”
“으음, 글쎄….”
유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왜 여길 남겠다는 거지. 서훈과 마찬가지로 유진에게도 그런 민석은 조금 의문이었다.
* * *
한가한 주말이었다.
창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도 포근하고, 집에서 느긋하게 뒹굴기 딱 좋은 날이었다.
이런 날 데이트라도 하면 좋을 테지만, 오늘따라 유진은 외출도 영 내키지 않았다.
한창 지루한 시간을 죽이며 습관처럼 리모컨을 누르던 찰나였다. 갑자기 리모컨이 먹통이 되며 멈춰 버린 화면에서 어느 강의가 흘러나왔다.
‘상대를 어느 정도까지 믿을 수 있죠?’
물론, 처음부터 두 사람이 그 강의를 유심히 보진 않았다.
“윽, 짜증 나!”
“갑자기 왜 그래?”
불만스럽게 입술을 툭 내민 유진이 투덜거리며 인상을 썼다.
짜증 나서 못 살겠다, 정말. 심심하면 한 번씩 먹통이 되는 리모컨 때문에 거의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급기야 리모컨의 끝을 유진이 쾅 내려쳤다.
유진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던 서훈은 시야가 요동치자 책을 내려놓으며 유진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뭐야, 그거 또 먹통이야?”
“몇 번째인지 모르겠어, 짜증 나.”
“조만간 리모컨부터 새로 바꿔야겠다.”
“모르겠네, 얘가 바꾼다고 해결이 되기는 할까?”
끝내 고치기를 포기한 듯 리모컨을 구석으로 휙 던지며 유진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면 되게 해야지.”
그 와중에도 내려놓은 책을 확인하며 그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읽던 책 사이로 꼼꼼하게 끼워 넣은 책갈피가 보였다.
“그 상황에 책갈피까지 끼어 놓은 것 봐, 주서훈.”
“어? 아, 봤어?”
“하여간, 진짜 자기밖에 몰라.”
누군 열 받아서 리모컨하고 씨름 중인데.
“에이, 또 거기서 그 말이 왜 나와.”
“고쳐 줄 생각이라도 하시죠?”
따갑게 노려보며 유진이 괜히 더 큰 동작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아픈 곳을 찔렸다는 듯 서훈이 다시 또 큭큭거리며 크게 웃었다.
“내가 이런 남자를 데리고 살아요, 앞날이 걱정이다.”
장난처럼 그가 화면을 가리키며 유진에게 넌지시 물었다.
“우리 이참에 TV나 새로 바꿀까?”
“뭐? 갑자기 그건 왜 바꿔?”
“산 지 몇 년 됐잖아, 그냥 겸사겸사 바꾸는 거지.”
자꾸 먹통이 되는 리모컨으로 짜증 난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한 농담이겠지만.
“우리가 그럴 돈이 어딨어?”
“음, 내가 있는데…….”
“주서훈, 지금 나한테 돈 많다고 자랑하세요?”
“그게 아니라, 요즘은 싸고 쓸 만한 게 많더라고.”
“오호라, 그건 또 언제 보셨어?”
어색하게 웃는 서훈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유진이 새초롬하게 실눈을 떴다.
어쩐지 마음에 안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