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10화 (10/67)

❦제10화

주서훈 지금 돈 많은 거 티 내는 거다. 생각을 바로 실행에 옮기듯 그녀가 대뜸 제 연인의 코를 장난처럼 죽 잡아당겼다.

“악, 서유진이 서방님 잡네.”

“겨우 이걸로?”

“아파. 윽, 진짜 아프다니까”

“무슨 남자가 이렇게나 엄살이 심해?”

잡고 비틀기나 했으면 몰라.

살짝 잡아당겼는데도 서훈은 괜히 더 엄살을 부리며 아프다고 낑낑댔다.

“으이그, 이 남자를 내가 할리우드로 보냈어야 하는데.”

유진은 들으라는 것처럼 일부러 더 크게 투덜거렸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어?”

“꿈보다 해몽이 좋다. 지금은 그 뜻이 아니거든.”

“뭐, 그래도 내가 최고잖아?”

“웃겨, 너보다 잘생긴 사람 TV만 틀어도 널렸어.”

서훈의 연기력은 나날이 선수급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솔직히 예전에는 진중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좀 반대로 역행하는 느낌이기는 했다.

자기 사업하는 남자의 이미지가 있을 텐데도 오래 사귄 탓인지 유진에게는 그런 멋들어진 느낌도 존재하지 않았다.

‘확실히 외국에선 먹힐지 몰라, 저런 연기력이면.’

남우주연상까지는 무리겠지만, 뭐 나쁘지 않다. 저 정도면 조연상까진 어떻게든 노려 볼 수 있는 연기력인 것 같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결국, 한참이 더 지난 뒤에야 화면으로 시선을 넘겼다. 거기엔 아직 기억에 관한 그 의사의 강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럭저럭 지루함을 날리기에는 괜찮았다. 강의가 쓸 만했던지, 두 사람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눈앞에서 속여도 믿는다고? 솔직히 저거 난 이해가 안 가.”

“아마 겪어 본 적이 없어서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꽤 크지, 다쳐 본 사람과 못 다쳐 본 사람의 차이처럼.”

의사는 제법 맛깔나게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별생각 없이 듣기 시작한 그녀도 어느샌가 서훈과 믿음이라는 주제로 진지하게 대화를 했다.

“여전히 모르겠어, 난.”

끝까지 상대를 믿으려는 본능.

머리로는 알 것 같은데도 실감이 나지 않아, 얼마나 무서운지도 확 와닿지 않았다.

이래서 경험의 차이는 컸다. 알 것 같은데도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없으니까.

“유진아, 만약에 말야.”

서훈이 다시 말을 꺼낸 건, 그즈음이었다.

“저 내용처럼 이유도 없이 버리면, 넌 끝까지 날 믿을 수 있겠어?”

가만히 듣던 유진은 진심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예를 들어도 꼭 저렇게 찝찝한 상황이라니.

“주서훈, 예를 들어도 꼭 그런 찝찝한 말을 해.”

허를 찔린 듯 주춤거리던 그녀가 못마땅하게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어? 이건 좀 그런가?”

“당연한 말을 해, 이 남자가.”

“하하하, 미안.”

입술을 삐죽거리며 노려보자 아차 싶었는지, 은근슬쩍 장난을 치며 서훈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저기, 유진아.”

그가 품으로 끌어당기며 유진을 작게 불렀다.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제 이름이 새삼, 그녀는 듣기 좋은 노랫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딱히 할 말은 없어 보여, 대답하는 대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랬더니, 그가 두 번째는 성까지 붙여가며 제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서유진.”

그제야 왜 자꾸 녹진하게 부르나, 의아해져서 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너무 진지하게 부르는 거 아냐?”

“그랬나? 오늘따라 네 이름이 입에 착착 감겨서.”

구박을 받으면서도 그는 연달아 그녀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고, 다시 또 불렀다. 의아하던 시선이 거둬질 때까지.

‘그때는 왜 몰랐을까. 돌이켜 보면 이상한 점이 보였을 텐데.’

습관처럼 후회를 곱씹는 순간, 유진은 자각하고 말았다. 이게 언젠가의 기억이자 반복되는 꿈이라는 사실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정신이 차츰 또렷해지자 유진이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 채, 느릿하게 눈을 떴다.

깜박. 깜박.

잠이 깨고도 쉽게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유진은 흐릿하게 풀린 눈을 깜박이며 차츰 또렷해지는 현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아… 꿈…….’

창 너머의 빛이 자꾸 따갑게 눈을 찔렀다. 서훈이 출근하고서 조금만 더 쉬자며 잠시 누웠건만, 그사이 곤하게도 잔 모양이다.

그래, 이건 꿈이었다.

아마도 그와 행복했던 시절의 꿈.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는 정신을 느끼고도 유진은 넋을 놓은 사람처럼 천장을 응시할 뿐이었다.

천장의 파랗고 하얀 벽지가 유달리 눈에 박혔다. 끝없이 넓게 펼쳐진 구름이 그녀에게 평온한 공허를 지배적으로 떠안긴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당연한 줄 알았던 온기와 공간이 사라지고서야 깨달았던 그때의 자신, 두 번째의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까지도.

어지러이 떠다니는 구름이 소리 없이 내려와,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넌 이걸로 만족하냐고, 이제 다시 그를 붙잡을 수 있겠느냐고.

언제나 결론은 똑같았다.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민석의 일로 유진은 미래가 다른 식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지만,

“아직도 난 네가 사라진 이유를 모르겠어, 훈아.”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그녀가 허공으로 혼잣말을 읊조렸다.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돌아온 과거에서는 또 다른 불안이 유진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건 미래를 아는 사람만이 느끼는 불안감이었다. 언젠가 헤어질 줄 알면서도 짐작하지 못해서, 또 다른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인연의 끝을 안다는 게 사람을 이렇게나 지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서훈과 함께일 때면 느끼지 못한 공허함이 사무치게 유진을 찾아들었다.

마치 재생 불가능하게 깨지고, 망가져 가는 유리를 아슬아슬하게 맞춰 놓은 것만 같다.

또다시 혼자 남은 유진이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서훈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온 한숨이 침묵에 잠기듯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 * *

정신을 차린 유진은 샤워한 직후, 그대로 집을 나섰다.

어쩌면 더 이상 혼자 남겨지기 싫은 이기심일지도 모른다. 곤란할지 모르는데도 무작정 택시를 잡아탄 것도.

‘그런데 내가 예전에도 회사를 종종 찾아갔던가?’

이제는 습관이라도 된 듯, 지난 기억을 곱씹어 보며 그녀가 창 너머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기억이 영 가물가물하다.

빠르게 사라지는 길가의 가로수와 함께 흐릿한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어렴풋이 떠올랐다.

‘오늘 회사로 나올래? 데이트하자.’

‘안 갈래, 집에서 푹 쉬고 싶어.’

‘너 이틀 동안 나간 적도 없잖아. 그러다 몸 상해.’

‘마감 끝나고 이틀째야. 아직 나가기 싫어,’

역시나 지금하고 달랐다. 오히려 그땐 서훈이 먼저 손을 내밀어도 피곤하다며 거절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만큼 유진도 일이 벅찼다. 프리랜서로 외주를 받아 작업하는 일상의 반복 때문인지, 여유가 생겨도 늘 부족한 잠을 채우기에 더 급급했다.

‘컨디션은 어때?’

‘나쁘지 않아, 갑자기 왜?’

‘애인이 하도 안 놀아 줘서 진상 부리려고.’

‘웃기지 마. 집에서 맨날 보잖아, 안 놀아 주기는.’

‘지금 너 일하는 중이거든요?’

‘어쩔 수 없잖아. 그런데 넌 회사 안 바빠?’

‘괜찮아, 이번 달은.’

‘대표라고 너무 설렁설렁한 거 아냐?’

오히려 그는 장난을 치듯 그녀의 건강까지 염려하고는 했다. 주서훈까지 모두 그대로인데 변한 건, 역시 자신뿐이었다.

기억을 되살리는 사이, 벌써 시내였다. 택시에서 내린 유진은 가방에서 꺼낸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복잡한 듯 눈살을 찡그렸다

“지금쯤 바쁘려나?”

어쩐지 더 생각이 많아졌다. 대뜸 연락해서 회사 앞이라고 해도 그 남자는 분명 기분 좋게 반겨 주리라.

주서훈은 그런 남자였다.

유진은 누구보다 제 연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지간해서 찾아오는 일이 드문데, 약간의 투정인 셈이다.

―근처에서 약속 있었어?

“없어, 그냥 너 보려고 잠깐 들렀어.”

―일부러 나 보려고?

역시나 그에게선 피곤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연락을 받고 회사를 나선 서훈은 오히려 다른 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쩐 일이야. 서유진이 예쁜 짓도 다 하고.”

“네 말대로 예쁜 짓 좀 해 봤어.”

그의 대사를 따라 읊으며 장난처럼 유진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밥은? 오랜만에 데이트할까?”

“일하는 중이잖아, 연락부터 해 보고 얘기하시죠?”

“누구한테?”

“김 비서님. 괜히 미움받기 싫어.”

“절대 그럴 일 없어, 걱정은.”

서훈은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네 생각이지. 아버님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아버지가 널 뭐하러.”

부루퉁해진 유진의 뺨을 장난처럼 쓱 건드리며 서훈이 손을 내저었다.

“딱 봐도 내가 불러낸 티 나.”

“걱정도 많다. 나보다 더 예뻐하는데, 뭘.”

“또 모르잖아, 그런 건.”

그래도 입장이라는 게 있다. 그 과한 믿음이 언젠가는 깨질 날이 오겠지만, 어쨌거나 유진은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서훈의 부모님과는 벌써 몇 년째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각자 집안 차이가 심한데도 그의 집에선 유독 그녀를 딸처럼 예뻐하셨다.

이유가 없진 않았다.

사고 치고 전학을 온 서훈은 쉽게 마음을 잡지 못했었다. 한껏 날카로워져 있는 그를 붙잡고 앉혀, 공부시킨 사람이 유진이었다.

당시의 그는 유진과 같은 대학에 가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어른들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그러니 마냥 유진이 예뻐 보였으리라.

끝내 서훈은 투덜거리면서도 그녀가 시키는 대로 비서에게 곧장 연락했다. 금세 핸드폰을 내린 그에게 유진은 궁금한 듯 물었다.

“김 비서님이 괜찮대?”

“소리 안 들렸어? 실수했네, 스피커로 돌릴걸.”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할래?”

못 말린다는 듯 유진이 팔짱을 꼈다. 그러자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그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 정도는 대표 특권으로 충분히 뺄 수 있어.”

매번 돈 많은 티 내지 말라 구박한 탓일까. 그는 자기가 말해 놓고도 은근히 곁눈질로 제 기색을 살폈다.

이젠 구박도 적당히 좀 해야겠다. 쓰게 웃으며 유진이 그를 따라서 회사 로비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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