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맞다, 어머니가 조만간 얼굴이나 좀 보자더라.”
한창 스테이크를 씹다가 놀란 유진이 그대로 꿀꺽 삼킨 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머니가 너를? 아니면 날?”
“누구겠어, 우리 둘 다.”
“갑자기 왜, 아니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대?”
불쑥 되묻다가 급히 손을 내저으며 유진이 질문을 달리했다.
“무슨 이유가 있겠어, 그냥 핑계야.”
“핑계라니, 무슨.”
“약혼 말이야. 만나면 그 얘기부터 할걸?”
“아, 그거…….”
뒤늦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차린 유진이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본의 아니게 당황한 것이다.
이미 서훈과는 동거 중이었다.
그 애인의 어머니가 한번 보자는 말이 편하게 들릴 여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갑자기 보자니, 어디론가 사라진 긴장이 바짝 차오를 수밖에.
이미 유진의 반응까지 예상한 듯, 서훈이 물을 건네며 긴장할 것 없다고 가볍게 웃었다.
차라리 간단하게 시킬 걸 그랬나 보다. 괜히 맛있게 먹던 스테이크가 저 말을 듣고 났더니, 가슴에서 끅 얹히는 것만 같았다.
‘가만, 내가 긴장할 걸 몰라서 저 남자가 약혼을 말했을 리가.’
무언가 찜찜해진 유진이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가만히 주시했다.
부모님에 관한 얘기엔 늘 긴장하는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남자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혹시 너…….”
“이런, 바로 눈치챈 거야?”
역시나 그가 장난스럽게 눈꼬리를 착 접었다.
“설마가 진짜였어?”
“한 번씩 옆구리라도 안 찌르면 네가 통 반응을 보여야 말이지.”
“조만간 보자는 것도 거짓말이었어?”
“그건 진짜야, 네가 이를까 봐 무서워서 거짓말은 안 해.”
하여간 이 남자, 못하는 말이 없다. 누가 누구한테 이른다고.
“깜짝 놀랐잖아. 약혼 당기자는 줄 알고.”
“왜, 나랑 약혼하기 싫어?”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 바보야.”
휘둥그레진 눈을 찡그리며 유진이 테이블 위로 올라온 서훈의 팔을 꽉 꼬집었다.
“윽. 진아 좀 아픈데.”
“장난해? 아프라고 꼬집는 거야.”
“그거 말고 있잖아.”
“또 뭐, 왜.”
“이왕이면 다른 쪽으로 아픈 게 더 좋은데.”
뜬금없이 툭 뱉으며 그가 유진의 얇고 가느다란 목덜미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다른 쪽 어디?”
“글쎄, 입술보다 조금 더 아래…….”
“윽, 진짜 못하는 말이 없어.”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힌 유진이 딴청을 부렸지만, 상대는 주서훈이 아닌가.
“뭐 어때, 내 거한테 침 흘리는데.”
“누가 네 거야?”
“이 아가씨가 또 튕기네.”
민망해하는 그녀를 보고도 서훈은 모리는 척 시치미를 뗐다. 한껏 진득해진 시선은 이미 그녀의 얇은 옷 위를 어지럽게 배회하기에 바빴다.
“매번 말하지만 네 거 아니거든요, 착각은 자유겠지만.”
“정 싫으면 내가 서유진 거 하고.”
그 불만조차도 가볍게 웃어넘긴 서훈이 느릿하게 제 아랫입술을 핥았다.
갈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그의 손끝이 여린 살결을 어루만지듯 유리의 표면을 문질렀다.
“밖에서 그런 장난하지 말라니까.”
“집에서는 해도 돼?”
“나도 몰라. 그 음흉한 눈이나 어떻게 좀 해 봐.”
어째서 잠깐 사이에 대화가 이런 식으로 달라지는 건데.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유진이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물 잔을 쥔 서훈의 손은 언제부턴가 그녀의 손바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쓸데없이 무언가 적나라하다.
피부를 타고 퍼져 나가는 감각을 느낀 듯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가 졌다, 진짜.”
담백하게 생긴 남자가 가끔 저런 식으로 그녀에게 마구 돌진하고는 했다.
이미 익숙한 장난이었다.
흘깃 아래를 내려다본 그녀가 손바닥 위를 돌아다니는 서훈의 검지를 제 손가락으로 꽉 움켜쥐었다.
“벌써 항복이야?”
“웃기지 마, 내가 항복할 성격으로 보여?”
“뭐, 서유진이라면…….”
당당히 턱을 치켜든 채로 유진이 잡은 손을 테이블로 내렸다.
“적당히 건드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래?”
“흐음, 내가 좀 급해서.”
서훈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유진에게 잡힌 손가락을 확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입술을 꾹 찍어 누르며 재촉하듯 작게 속삭였다.
“진아, 안 돼?”
이 남자를 어떻게 이겨. 기가 막힌 듯 서훈을 보며 유진은 은근슬쩍 눈을 흘길 뿐이었다.
“뭐, 생각해 보고.”
“오케이, 얌전히라는 거지?”
말없이 끄덕이자 그가 다시 한번 꾹 누른 입술로 장난치듯 손등을 핥고서야 잡은 손을 놔주었다.
어쨌거나 얌전히 기다리겠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끝냈지만.
“뭐? 갑자기 드라이브?”
저 반응을 보니, 그의 얌전히는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닌 모양이다.
“아까 데이트하자면서.”
“내가 한 말이긴 한데, 그것보다 우리…….”
“여기서 서해까지는 좀 먼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유진은 중간에서 그의 말을 잘랐다.
서훈은 어떻게든 자신을 설득해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다.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며 그의 허벅지로 슬쩍 제 손을 뻗었다.
“네 생각은 어때?”
“어쩌겠어, 서유진이 가고 싶다는데.”
본능처럼 잡힌 근육을 움찔거리면서도 그는 포기한 듯 쓰게 웃었다. 조금 더 놀리고 싶은데 기운 빠진 걸 보니, 그게 또 유진은 영 거슬렸다.
“알아서 가,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기어이 더 안쪽까지 손을 밀어 넣으며 은근히 그를 재촉했다.
“…어디든 상관없어?”
“그래, 설마 날 팔아먹기야 하려고.”
이번에는 봐줬다.
원래 짐승을 길들일 땐 적당히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써야 효과가 좋은 법이 아닌가.
물론,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가 짐승은 아니었지만, 어떤 의미에선 그보다 더 다루기 힘든 짐승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 * *
서훈의 도착지는 예상 그대로였다.
얼마나 급했는지, 체크인을 끝낸 서훈의 발이 날개라도 달린 듯 갈수록 점점 더 빨라져만 갔다.
답지 않게 바로 호텔이라니.
이 남자가 어지간히 급하긴 했나 보다. 그 아이 같은 충동을 보며 유진은 자꾸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억눌러야만 했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서훈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며 그녀는 곁눈질로 제 연인을 살폈다. 잽싸게 문을 닫는 손길이 제법 초조하게 보였다.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뚝 뗐다. 그러나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더는 참지 못한 서훈이 제 품으로 그녀를 확 끌어당겼다.
“윽, 깜짝이야.”
“혼자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내 남자지만 참 알기 쉽다 싶어서.”
“오랜만이잖아, 데이트 삼아 괜찮지 않아?”
“얼씨구, 돈 많다고 자랑하지?”
유진이 픽 웃으며 팔을 툭 치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팔을 꽉 잡아챘다.
“가끔은 애인 노릇 좀 하게 해 줘.”
“스위트룸이 애인 노릇이야?”
“색다르니까, 집에서 못 해 본 것도 즐기고.”
느릿하게 입술을 할짝거리며 서훈이 눈을 위험스럽게 빛냈다.
“저것 봐, 주서훈 눈 반짝이는 거.”
“예리하네, 우리 꼬꼬마.”
“내가 음식이지? 왜 자꾸 사람 보면서 입맛을 다셔?”
눈을 흘기며 그녀가 서훈의 옆구리를 대놓고 푹 찔렀다.
“어떻게 비교를 해, 적어도 마약 정도는…… 윽.”
“말 한번 참 예쁘게도 하지.”
이 남자가 입맛 다시지 말랬더니, 마약이란다.
“방금 건 아프다, 진아.”
“아프라고 때렸어, 누굴 마약에 비교하고 있어.”
어이없다는 듯 받아치자 오히려 그는 보란 듯이 찔린 옆구리를 쓸어 올리며 유진에게 더 바짝 자신을 밀착시켰다.
그러더니 대뜸 한다는 말이…….
“내릴 때까지는 안 돼, 조금만 참아.”
“……뭘 참아?”
“지금 나 위험 수위야.”
저런 헛소리였다.
“나랑 장난하세요?”
“진심인데?”
그 말을 증명하듯 그녀의 손을 잡아 올린 서훈이 굶주린 짐승처럼 살짝 핥다가 잘근잘근 씹었다.
“으읏, 너.”
갑자기 박힌 자극에 놀란 유진이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짓궂은 손길이 곧게 뻗은 그녀의 척추뼈를 따라 훑어 내려갔다.
마치 이 정도는 괜찮지 않냐 허락이라도 구하는 듯했다. 꼭 평소에는 안 그랬던 것처럼.
“올라가서 같이 목욕이라도 할까?”
귓가에 바짝 붙은 입술이 뜨겁게 속삭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민망한 줄도 모르고.”
“우리밖에 없어, 걱정 마.”
“주서훈, 매번 그 입은 청산유수지.”
얄밉다는 듯 고개를 뒤로 빼며 유진이 그의 입술을 꾹 눌렀다. 역시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겸사겸사 기분 전환이지. 요즘 마감하느라 힘들었잖아.”
“뭐, 사실 좀 갈리기는 했는데.”
“내가 푹 쉬게 해 줄게.”
나직이 속삭이며 서훈이 그녀의 뒷덜미를 자극하듯 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간지러운 듯 유진이 허리를 뒤틀었다. 그러고는 하지 말라며 서훈의 어깨를 꾹 밀었지만.
“그냥 간지럽기만?”
“오늘따라 너무 짓궂어, 좀 참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몸이 영 말을 안 듣네.”
“어쭈, 나 도로 내려간다?”
일부러 다가오는 서훈의 얼굴을 꾹 잡고 유진이 뾰로통하게 말했다.
이미 흐트러진 열기가 옳아, 눈까지 달아올랐지만, 그녀는 서훈보다 이성적이었다. 그가 짐승처럼 밀어붙여도 조련할 사람 또한 자신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내리자마자 유진의 팔을 낚아챈 그가 스위트룸에 들어서기 무섭게 그녀의 입술부터 찾았다.
주변을 살필 정신 따윈 없었다.
품으로 끌어당긴 연인의 체향이 그녀에게로 한가득 덮쳐들었다. 금세 힘없이 뒤로 넘어가 버린 유진의 등으로 보드라운 시트가 닿았다.
다급한 키스였다.
잔뜩 굶주린 짐승이 기다리던 먹이를 낚아채듯, 정신없이 그가 유진을 헤집었다. 손길을 느낀 그녀가 본능처럼 서훈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건 꼭 온도에 따라 수축하는 풍선처럼도 느껴졌다. 한껏 고조된 열기가 적정 온도를 넘긴 듯 진득하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여전히 적극적이야, 우리 진이.”
“하루 이틀이야? 말만 앞서면 재미없다?”
본능만 남은 짐승 버전의 서훈을 향해 그녀가 눈꼬리를 야릇하게 착 접어 내렸다.
“원하신다면 재밌게 해 드려야지. 누구 명령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