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거침없이 달려든 그가 유진을 허공으로 번쩍 안았다. 마치 원하는 걸 행동으로 직접 보여 주겠다는 것처럼도 보였다.
일순, 그녀의 머릿속으로 강렬한 빛이 번쩍이며 크게 내리쳤다. 자극이 너무 강했다.
“아으, 읏…….”
깊이 파고드는 열기에 버티지 못한 그녀에게서 앓는 듯한 신음이 작게 새어 나왔다.
서훈이 그 소리를 따라 크게 움직였다. 달아오른 체온이 한층 더 자극적으로 그녀를 몰아붙이며 그가 새하얀 목덜미를 입술로 문질렀다.
흔들리는 열기에 쌓인 채, 허공이 잘게 떨렸다. 연신 거칠어진 숨을 쏟아내며 서훈은 하나처럼 유진과 열기로 뒤섞였다.
“후, 조금만 더.”
“진짜 너, 끈질… 기다니까…….”
“서유진한테 미쳐서 그래, 한두 번이야?”
아니지, 더 미칠 것도 없을지도.
들릴 듯 말 듯 귓가에 속삭이며 서훈이 치켜 들린 유진의 턱을 핥아 올렸다.
나른하게 퍼진 말캉하고 야릇한 촉감은 유진의 달아오른 뺨과 입술, 다시 또 귓가로 쉴 틈 없이 퍼부어지기를 반복했다.
“진짜, 읏, 너무 집요하다니까.”
그 깨작거리는 감촉이 간지러운지, 반쯤 고개를 비틀며 유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 * *
손을 욕조에 담근 서훈이 물의 온도를 먼저 확인했다.
적당히 따듯한 걸 확인하고서야 선반에서 꺼낸 버블바스를 풀고, 가볍게 몇 번 휘저었다.
“흐음, 이 정도면 됐으려나?”
거품이 가득 찬 욕조를 보던 시선이 어느샌가 반쯤 열린 입구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지친 유진에게로 온통 신경이 다 쏠린 탓이었다.
‘너무 과하게 몰아붙였나.’
서훈이 난감한 듯 느릿하게 제 턱을 문질렀다. 장소가 바뀐 탓인지, 유달리 자제하지 못하고 욕심껏 안아버린 후유증이었다.
심지어 동거 중이었다.
아무리 좋았어도 적당히 끝냈어야만 하는데. 미친놈처럼 달아올라서 정신없이 덤벼든 탓이었다.
평소라면 자기가 먼저 씻으러 들어갔을 여자가 아닌가. 어지간히 녹초가 되지 않으면 저리 늘어져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이걸로 기분이라도 풀리면 좋겠다.
말 그대로 유진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의도가 먼저였지만, 너무 지친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흐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는데.”
설핏 웃으며 그가 거품이 가득 찬 욕조의 수도꼭지를 다시 잠갔다.
확실히 평소보다 불타오른 감이 없진 않았다. 유독 끈질기게 괴롭혔으니, 그만큼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금세 욕실을 나온 서훈이 아직 침대에 늘어진 채, 자신을 보는 유진과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이제야 나와? 샤워가 꽤 기네.”
“몸 좀 담가, 샤워하면서 욕조에 물 받아 놨어.”
역시나 유진은 피곤한 듯 작게 웅얼거리며 베개에 반쯤 얼굴을 파묻었다.
“으음, 씻긴 해야겠는데 귀찮다.”
“피곤해도 씻자.”
“씻을 거야, 조금만 더 쉬고.”
설핏 웃으며 곁으로 간 그가 유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그대로 잠들 것 같은데?”
“뭐, 나른해서 잘지도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유진이 그를 보지도 않고 허공으로 손을 휙 내저었다. 알아서 할 테니 놔두라는 듯이.
서훈의 가늘어진 눈매가 기분 좋게 풀어지며 투정 부리는 연인을 다정하게 내려다봤다.
“그러지 말고, 진아.”
달래듯 내린 손으로 유진의 뺨을 가볍게 건드리며 서훈이 그녀의 상체를 억지로 일으켰다.
“으, 주서훈 진짜 피곤하다니까.”
“들어가기만 해, 내가 다 씻기고 닦아줄 테니까.”
가만히 듣던 유진의 눈이 커졌다. 그러다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서훈을 주시하며 픽 웃었다.
“됐거든요, 짐승을 뭘 믿고?”
“나중에는 먼저 끌어당겨 놓고선,”
“자극받았잖아. 이건 누구한테나 본능이거든?”
어디서 그런 비교를 해, 이 짐승아. 서훈을 바라보는 유진의 시선에는 딱 그런 불신의 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건 뭐, 지은 죄가 있어서 더 할 말이 없다. 작게 한숨을 내쉰 서훈이 오늘은 더 이상 안 들이대겠다며 재차 유진을 설득했다.
“귀찮으면 안아서 옮겨 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는 아기에게 하듯 피곤하다는 제 연인을 달랬다.
서훈의 말투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사심으로 드라이브하자는 연인을 호텔까지 데리고 온 미안함이 그 사이로 언뜻 묻어나는 듯했다.
“주서훈, 이럴 때만 다정하지?”
“흠, 난 서유진 한정으로 늘 다정하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겠지, 오히려 괴롭히는 타입이잖아.”
미간을 찡그리며 서훈이 난처한 듯 되물었다.
“내가, 그랬던가?”
“몰랐어? 아까도 날 그렇게 괴롭혀 놓고?”
말도 안 된다, 투덜거리면서도 유진은 익숙하게 서훈의 어깨 위로 두 팔을 둘렀다. 피곤하니 알아서 데리고 가라는 뜻이었다.
이따금 지칠 때면 그렇게 다 맡기고 오늘처럼 한없이 늘어지는 날이 있었다.
“그래도 우리 주서훈, 양심은 남아서 다행이야. 내가 인간 만들었지.”
“하, 누가 들으면 내 엄마인 줄 알겠다?”
“엄마 같은 애인님이지. 몸소 운동까지 시켜 주고.”
그에게 반쯤 안긴 채, 욕실로 간 유진은 장난을 치다 말고, 거품 가득한 욕조를 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건 또 언제 받았어?”
놀란 듯 묻자 어깨를 으쓱이며 서훈이 픽 웃었다.
“말했잖아, 기분 전환 시켜 주겠다고.”
“그냥 수발이나 들어주려는 줄 알았지.”
“내 이미지가 그 정도밖에 안 돼? 조금 섭섭한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할 말이 없는 듯 거품으로 제 몸을 푹 담그며 유진이 한층 누그러진 시선으로 콧등을 찡그렸다.
“흐음…….”
“표정 풀어, 안 어울리게 삐지지 말고.”
젖은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기며 유진이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톡톡 쏘기 바쁘던 아가씨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은근히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매번 장난인 줄 알면서도 진심으로 받아치는 연인이 그는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본인이 아니라고 우겨도 뻔히 속내가 보이는데, 모를 리가. 유진을 흘깃 내려다보며 서훈이 간질거리는 웃음을 억눌렀다.
유진은 목 끝까지 거품에 파묻힌 상태였다. 나른하게 풀린 표정이 보였다. 지쳐 보여서 신경 쓰였는데, 기분이 제법 좋아진 모양이다.
“물 온도는 어때”
“으음,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아.”
“너무 뜨겁진 않아?”
“아냐, 따뜻해서 딱 좋아.”
대답을 듣고서야 그가 유진의 기색을 살피다가 넌지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쨌든 수발들긴 할 거야, 욕조에서.”
“무슨 욕조? 어, 너 지금…….”
“같이 하자고. 밖에서도 미리 말했잖아?”
당연하다는 듯 말하며 서훈이 욕조로 발을 뻗으려고 했다. 그때, 눈을 치켜뜨며 유진이 대뜸 그에게 거품 섞인 물을 튕겼다.
“윽, 서유진, 너…….”
“엉큼하게 어딜 들어오려고?”
눈 깜짝할 사이, 서훈은 반쯤 젖은 생쥐 꼴로 변했다.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그가 억울하다는 듯 유진에게 시선을 던졌다.
* * *
서훈은 반쯤 젖은 채로 욕실을 나서야만 했다. 축축해진 가운을 벗어 던지며 그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좋게 말해서 편히 쉬라며 자리를 비켜준 거고, 나쁘게 보면 짐승이라는 이유로 그냥 유진에게 쫓겨난 셈이었다.
‘내 입으로 뱉은 말은 지켜야겠지.’
오늘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겠다고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소파에 걸친 셔츠를 집어 들며 서훈이 소리 죽여 픽 웃었다.
“짐승이라…….”
멀리 베란다 너머 어두워지는 하늘이 눈에 띄었다. 서훈은 다시 한번 유진이 있을 욕실을 확인한 뒤, 급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더 늦기 전에 다녀와야겠다.
룸서비스와 곁들일 디저트를 제 손으로 직접 골라올 생각이었다. 유진이 목욕하는 사이 다녀오려면 얼른 서두르는 게 좋을 듯했다.
금세 1층으로 내려온 그가 깜박했다는 듯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회사를 일찍 나선 탓인지, 역시나 김 비서한테 부재중이 들어와 있었다.
호텔 로비를 가로지르며 서훈이 곧장 부재중이 찍힌 김 비서의 번호를 길게 꾹 눌렀다.
―아, 대표님 혹시 바쁘십니까?
“지금은 괜찮아요. 그보다 부재중이 꽤 많이 왔던데.”
―시급한 일은 아닙니다만.
어쩐지 조금 난처한 뉘앙스였다. 서훈은 내려가는 핸드폰을 다시 고쳐 잡으며 로비 한쪽의 베이커리로 향했다.
“말해 봐요, 뭔지 몰라도.”
―정 비서가 보고드린 일정에 착오가 좀 있었습니다.
정비서라면 아직 3개월 차 신입이 아닌가.
두 비서를 떠올리며 그가 잘게 인상을 썼다. 분명 김 비서가 사수로 일을 가르치고 있을 텐데. 착오를 알아차리자마자 바로 연락한 모양이다.
‘하여간 저 성격하고는.’
서훈이 못 말린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저리 빡빡하니 미운털이라도 박힐까, 유진이 더 바짝 그를 신경 쓰는 것이리라.
자초지종을 듣고 난 뒤, 서훈이 귀찮은 듯 미간을 찡그렸다. 사실 김 비서의 반응치고 정 비서의 실수도 별거 없었다.
내일 오전부터 잡힌 종합 검진의 날짜를 착각했다는 것. 당연히 저녁부터 금식인 것도 전혀 몰랐지만, 서훈은 크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매년 서훈의 집안에서 연례행사처럼 치르는 일이 아닌가. 그게 뭐라고 저리 기겁하며 연락한 건지.
“난 또 뭐라고. 한두 번 빼먹는다고 큰 병 걸리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회장님께서…….
“됐어요. 아버지한테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 올해는 그냥 넘깁시다.”
대강 넘어가자며 김 비서를 설득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곧장 매장으로 간 그는 직원에게 후식으로 먹을 디저트의 포장을 부탁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부탁합니다. 시럽은 하나만 넣고.”
매장을 나서고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훈은 내내 손에 쥔 핸드폰을 힐끔거렸다. 유진이 벌써 나왔을까, 괜히 더 초조해진 탓이다.
이 정도면 중증이다. 이미 10년 가까이 벗어나지 못한 콩깍지가 서훈은 꽤 기분 좋았다.
‘이러니까, 매번 나민석이 우리만 보면 짜증을 내나?’
홀로 곱씹으며 서훈이 돌연, 핸드폰을 위로 들었다. 예상보다 유진의 목욕이 더 빨리 끝난 모양이다.
말도 없이 나갔다고 잔소리 좀 할 텐데. 난처하게 웃으며 서훈이 곧장 전화를 받았지만.
“어, 진아. 목욕 다 했어?”
스피커 너머로 들린 유진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