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핸드폰을 붙든 채, 유진은 불안함을 삼키듯 정신없이 마구 거실을 돌아다녔다.
‘곧 들어온다고 했어.’
애써 마음을 다잡아 봐도 그사이, 눈덩이처럼 커진 불안감이 자꾸 예전처럼 유진의 목을 옥죄는 것만 같았다.
“서유진 괜찮아, 금방 온다잖아. 네가 쓸데없이 예민해진 거야.”
최면을 걸듯 중얼거리며 유진이 연신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텅 빈 거실, 어디에도 없는 주서훈은 마치 3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제대로 닦지 못한 머리카락의 물기가 바닥을 적시는 것도, 흐트러진 가운도 지금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를 봐야만 할 것 같았다.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놀라서, 나오니까 네가 없어서.’
‘뭐야, 그거 때문이었어?’
어이없다는 듯 스피커 너머까지 들린 서훈의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유진은 아차 싶었다.
아무래도 마감한다고 너무 예민해진 것 같다. 멍하게 그를 따라 웃으며 얼른 들어오라는 닦달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아무리 그가 함께 있어도 절대 알지 못한다. 이 감정은 그 누구에게도 공유할 수 없는, 온전히 혼자만의 몫인 것이다.
한참 정신을 놓은 채로 입술을 짓씹으며 입구를 힐끔거리던 유진이 돌연, 낮게 신음했다.
“아…….”
아랫입술 사이로 살점이 콱 찍혀 들어갔다. 짙게 퍼지는 통증을 느끼고서야 유진이 놀란 듯 깨문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러던 찰나, 입구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 유진의 시야로 급히 들어오는 서훈이 두 눈에 가득 차올랐다.
“서유진!”
“…훈, 아…….”
여기까지 뛰어온 건지, 서훈이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한달음에 안으로 들어왔다.
“너, 하아, 하아, 아무 일 없는 거지?”
“…….”
“도대체 무슨 일이야?”
놀란 서훈에게 두 팔이 붙들린 채, 유진이 안도하며 남몰래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까지… 뛰어, 왔어……?”
“보면 몰라? 전화 받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서훈을 주시하는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시선 끝으로 디저트와 커피를 본 유진이 턱을 치켜들었다.
“이거 사러 갔었어?”
고작 저거 사자고 날 두고 나갔어? 이 넓은 곳에? 차오른 말 대신 유진은 화를 참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룸서비스 후식은 별로잖아, 여기 호텔.”
“나한테 말이라도 하고 갔어야지.”
어깨를 쥔 손으로 그가 달래듯 유진의 팔을 쓸어내렸다.
“의외네, 그렇게 많이 놀랐어?”
“…그냥 갑자기.”
“1층이라서, 너 여기 디저트 좋아하잖아.”
그 말과 함께 서훈이 눈앞으로 커피를 들고, 살짝 흔들었다. 꼭 화내지 말라는 듯 작게 웃으면서.
하지만 정반대였다.
오히려 누그러지려던 유진의 예민해진 신경이 그걸로 인해 더 자극된 것이다.
“…누가, 이런 걸…….”
앞에서 흔들리는 아이스커피를 유진이 짜증스럽게 손으로 탁, 쳤다.
쏟아질 듯 흔들리는 커피를 내린 서훈이 놀란 듯 미간으로 짙은 주름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얼굴이었다.
“진아, 너 왜…….”
“필요 없어, 누가 사 달라고 했어?”
앞선 행동을 뒷받침하듯 날 선 말들이 서훈에게로 쏟아졌다.
“서유진. 그래도 이건 아니지.”
“…….”
“거슬리면 그냥 말로 해.”
유진이 이를 꾹 물었다.
“기껏 사 왔는데 여기다 화풀이하지 말고.”
“화풀이가 아니라!”
“이게 화풀이가 아니면 뭔데?”
스치듯 그의 얼굴로 감추지 못한 짜증이 스쳐 지났다.
“아냐, 그게 아니라 나는…….”
뒤늦게 입을 연 유진의 발밑으로 반투명한 액체가 점점이 흩뿌려져 있었다.
생각 없이 툭 쳐 낸 커피가 반 이상 쏟아진 탓이었다. 뒤늦게 흥건해진 바닥을 보며 그녀가 서훈의 눈치를 살폈다.
제 잘못이었다.
서훈이 재빨리 균형을 잡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다 엎질러졌을 게 아닌가.
“진아, 서유진?”
“…….”
“화내려는 거 아냐, 대답 좀 해 봐.”
말과 달리 서훈은 답답한 듯 그녀의 어깨를 힘껏 움켜쥐다가 도로 손에서 힘을 뺐다.
소리 없이 닿는 감정을 느낀 유진이 예민하게 날 선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쓰게 웃었다.
“미안, 내가 쓸데없이 또 예민해져서.”
“잘 가라앉혔어. 화가 난 이유를 천천히 얘기해 봐.”
괜찮다는 그 다독임을 들으며 그녀가 긴장으로 굳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나왔더니, 텅 비어서.”
“뭐가?”
“무서웠어. 갑자기 네가 없어져서, 그냥 다…….”
끝내 쏟아 내지 못한 말을 삼키며 유진이 그냥 입을 닫았다. 마주 보는 서훈의 눈동자가 걱정스럽게 구겨진 것도 보기 싫었다.
괜한 말을 꺼낸 것 같았다.
어쩌면 그건, 과거엔 하지 못했던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3년 전에는 묻지 못한 미련이 남은 것이리라.
“신경과민이야, 널 두고 어딜 가.”
“마감 직후라 그런가 봐.”
“걱정 마, 앞으로도 내가 널 버리는 일 따윈 절대 없으니까.”
유진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기며 서훈이 다독이듯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래도 넌 이미 날 버렸잖아.
끄집어내지 못할 진실을 삼킨 대신, 그녀는 소리 없이 그의 옷깃을 살짝 움켜잡았다.
진실이되 허구인 기억이 아닌가. 새롭게 바뀔 미래를 꿈꾸듯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그녀가 서훈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 * *
흐르는 물을 인력으로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모두에게 시간은 매정하리만치 잘도 흘러갔다.
그사이 장례식도 무사히 끝났고, 연우도 조금이나마 현실을 받아들이며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의외라면 민석이 발인까지 그 곁을 지켰다는 것과 아직 고등학생인 연우를 동생처럼 직접 보살피겠다는 뜻밖의 소식이었다.
“네가 데리고 있겠다고?”
“뭘 그렇게 놀라?”
그간의 자초지종을 듣게 된 유진은 저도 모르게 드러낸 속내를 재빨리 다잡았다.
“그냥 좀, 생각지도 못해서.”
조금 전에는 너무 과민했다. 이제부터는 충분히 바뀔 수 있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적응은 쉽지 않았다.
서훈이 없는 것도 그녀의 예민함을 부추기고 있었다. 스케줄이 맞지 않아서 민석의 연락을 받고도 함께 나오지 못한 탓이었다.
“갈 데가 없다잖냐. 그 나이에 고아원이라도 가리?”
“그렇다고 네가 데리고 있을 필요는 없지. 친척 없어?”
“그쪽이 좀 그래, 걔도 사정이 있어.”
대충 대답을 흘려 넘긴 민석이 괜히 말을 돌리듯 제 앞의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가만히 지켜보며 유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스치듯 친척이란 말을 듣자마자 민석이 욕을 삼키는 티가 났다.
“언제부터야?”
“또 뭐가.”
“연우 말이야, 너희 집으로 이사한다며.”
답답한 듯 인상을 쓰며 유진이 되물었다.
“아, 그거? 다음 주로 잡았어.”
“번갯불에 콩 볶아 먹어? 민준이는 괜찮대?”
민석은 몇 살 터울인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벌써 대학생이라 크게 부딪힐 일은 없겠지만, 알지도 못할 새 동거인이 반가울 리 없었다.
사정 모르는 민준에게는 황당한 상황일 텐데.
유진은 그의 동생인 민준이 더 걸렸다. 그 걱정도 알고 있다는 듯 민석은 이미 동생과도 얘기를 끝냈다며 태연하게 웃었다.
하긴 동생이라면 끔찍한 나민석이 아닌가. 연우가 안쓰럽다고 해도 민준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런 결정을 했을 리가.
“이렇게 된 거 네가 잘 챙겨 줘.”
“그건 연우가 알아서 해야지. 내가 도와주는 것도 여기까지고.”
“솔직히 좀 의외긴 해. 나민석답지 않아.”
유진이 픽 웃으며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다 그런 거지. 어디 인생에 정해진 답이 있기는 하냐?”
“정답이라, 진짜 그럴까?”
“왜 이렇게 진지하게 듣냐? 요즘 무슨 일 있냐?”
“그냥. 요즘은 나도 좀 궁금해져서.”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모르는 척 유진이 잔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처럼 작게 읊조렸다.
오히려 그 태도가 민석의 묘한 촉을 더 자극한 모양이지만.
“흐음, 저번부터 너 조금 이상하다?”
이래서 오랜 친구가 가족보다 무섭다.
“…내가 그랬나?”
“매번 주서훈이 찰싹 붙어 있어서 못 묻기는 했는데…….”
뒷말을 삼킨 듯 조용히 입을 닫으며 그가 유진에게 소리 없는 대답을 재촉했다.
“그냥 좀…….”
“…….”
“생각이 많아졌나 봐. 요즘엔 나도.”
몇 분이 더 지난 뒤에야 그 한 마디를 중얼거리며 유진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늘 꿈에서 살 것 같은 녀석이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
“너만 나이 먹어? 혼자 어른인 척은.”
유진이 혀를 차며 민석을 노려봤다. 그러면서 자꾸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려는 그에게 은근슬쩍 서훈을 거론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이번 일, 훈이가 알면 나보다 더 어이없어 하겠네.”
역시나 반응 하나는 확실했다.
“지가 어이없어 봤자지, 누굴 욕해?”
“하여간 둘이 하는 짓 보면 똑같다니까.”
“웃기지 마, 걔보다는 내가 인성은 좋다.”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유진이 반쯤 남은 아이스커피를 마저 다 들이켰다.
하지만 여유 넘치는 말투와 달리 유진은 꽤 놀랐다. 미묘하게 바뀌는 미래가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인데?”
“글쎄, 우선은 졸업할 때까지 두고 보려고.”
넌지시 묻자 민석은 쓰게 웃으며 뒷덜미를 매만졌다.
“나민석, 생각이란 건 하고 살지?”
유진이 못마땅하게 인상을 썼다. 설마 했는데 진짜 뒷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넌 임마, 네가 물어봐 놓고 왜 시비야.”
“졸업까지 족히 2년은 남았어.”
“막내 하나 더 생겼다고 치지, 뭐.”
얼핏 보기에도 민폐 끼치기 싫어하는 성격 같아 보이던데. 저 눈치 빤한 민석이 모를 리 없었다.
“퍽이나 좋아하겠다, 연우가.”
비아냥거리며 웃어넘겼지만, 유진은 점점 또렷해지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한 번 더 인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미래는 그때와 다른 제 행동으로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을.
분명 시작은 작은 돌 하나였다.
그게 파생되며 퍼진 파도가 어느 순간, 큰 해일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앞으로 민석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유진은 이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걸 보면서 기대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민석만 가능한 게 아니라, 서훈과 자신 또한 그렇게 변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그녀는 한껏 차오르는 불안을 내리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