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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앓다-14화 (14/67)

❦제14화

유진은 해가 꺾이고서야 민석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쉬는 날이라며 연우까지 카페로 불러들인 그의 만행 때문이었다.

“오는 중이야? 난 이제 현관인데.”

―많이 늦었네, 그 녀석이 재밌게 놀아 줬어?

“재밌기는, 얘기하자면 길어.”

통화를 끝낸 유진이 현관으로 들어섰다. 자기만 쏙 빼고 만났다고 서훈의 신경이 꽤 날카로워져 있었다.

누가 보면 바람이라도 난 줄 알겠다. 홀로 투덜거리며 시간을 보니, 슬슬 그가 퇴근할 시간이기는 했다.

“하아, 피곤해.”

금세 유진이 늘어지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것도 외출이라고 이제야 피로가 몰려오는 모양이다.

‘저번엔 감사했어요.’

‘감사는 무슨, 내가 한 것도 없는데.’

‘그때 같이 온 형이랑 저 대신 빈소도 지켜 주시고.’

‘그럴 것 없다니까.’

과할 정도로 예의 바른 연우를 떠올리며 그녀가 피곤한 듯 인상을 썼다.

아직 어린데 뭐가 그렇게 깍듯하던지. 대뜸 고개부터 숙여서 꽤 당황했지만, 민석은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미리 얘기라도 해 줬으면 덜 당황했을 텐데. 하여간 예전부터 민석은 약간 자기 멋대로인 경향이 있었다.

“갑자기 걔는 왜 불러선.”

뒤늦게 솟구치는 짜증을 민석에게 돌리며 책상으로 간 유진이 곧장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부팅이 끝나자마자 마우스를 쥔 손이 자연스럽게 몇 가지의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작업 도중에 나갔으니, 얼른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한창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욕실의 문이 열렸다.

“언제 왔어? 전혀 몰랐는데.”

“좀 됐어. 바빠 보이길래 조용히 씻으러 갔지.”

놀란 듯 바라보자 서훈이 머리카락의 물기를 벅벅 닦으며 반쯤 열린 작업실로 다가왔다.

“마무리하느라 못 들었나 봐.”

“그럴 것 같았어. 도둑 들어도 전혀 모르겠던데?”

“뭐야, 마중 안 해 줘서 삐졌어?”

서훈의 목소리가 약간 삐딱해져 있었다. 괜히 찔려서 그에게로 휙 돌아서 물었지만.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 내가 좀생이라.”

서훈은 예상보다 더 뻔뻔했다. 미안해서 그냥 던진 말인데도 문가에 기댄 채, 그가 당당하게 팔짱을 꼈다.

아주 대놓고 서운하다는 뉘앙스다.

표정 관리라도 좀 하던가. 기분 좋게 풀어진 얼굴을 보며 장난을 받아치듯 일어난 유진이 그의 엉덩이를 가볍게 툭툭 쳤다.

“어이구, 그래서 속상했어요?”

“달래 주는 거면 위치가 빗나갔네, 한 번 더.”

물론, 잽싸게 손을 잡아 내리는 서훈이 한 수 위였다.

“이 남자가 뭘 한 번을 더 하래, 엉큼하게 진짜.”

“아무것도 안 했다, 나는?”

“그래, 그래. 앞으로도 아무것도 안 하면 돼.”

누가 주서훈 아니랄까 봐.

혀를 차며 유진이 못마땅한 듯 입술을 비틀었다. 시선 끝으로 갈증을 억누르듯 입술을 핥는 서훈의 속내가 뻔히 보였다.

누굴 속이려고 들어. 분명히 삐졌다는 핑계로 얼렁뚱땅 베드인할 작정인 거다.

“너무하네, 방해 안 하고 얌전히 씻었잖아.”

아무리 봐도 노린 건데.

“…노린 거 아니고?”

“날 뭐로 보고.”

복 서훈에게 잡힌 손을 흘깃거리며 유진이 가늘어진 시선으로 제 연인을 주시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딸려 내려간 손이 적나라하게 서훈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손끝으로 닿는 열기가 뜨겁다 못해 데일 것만 같았다.

“당연히 짐승으로 보지.”

묻기는 뭘 물어, 당연한 걸.

“인정하면 그대로 다 맞춰 주나?”

“내 애인은 참 꿈도 커.”

“원래 꿈은 클수록 좋다잖아, 초등학교 때 배웠어.”

게다가 받아치는 것도 이제는 청산유수가 따로 없다.

“반복되는 학습도 배워야지, 진짜 짐승은 아니잖아?”

“으음, 아무래도 난 짐승인가 봐.”

“가볍게 인정하지 마.”

“어쩔 수 없어. 본능이 영 자제가 안 되거든.”

서훈이 겹친 손 위로 제 손을 움직이며 감질나는 듯 아랫입술을 축였다. 유진이 통 반응이 없으니, 스스로가 해결하겠다는 것처럼.

“고생이네, 어차피 더 참아야 할 텐데.”

인내심도 기를 겸 조금 더 참아 봐. 장난처럼 덧붙이며 유진이 그에게 잡힌 손을 잽싸게 빼냈다.

“서유진, 나랑 장난하지?”

“장난 아닌데? 난 아직 퇴근 전이거든.”

유진에게는 그 열기도 소용없었다.

프리랜서에게 본능보다 중요한 건, 마감이 아닌가. 마무리가 코앞인데 서훈의 본능이 눈에 들어올 리가.

“하…….”

“어쩔 수 없어, 나도 오늘치 막바지였단 말이야.”

역시나 그가 어이없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녀는 서훈의 넓은 가슴팍을 가볍게 훑어, 달래 주고서야 책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 *

유진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컴퓨터를 붙잡고 있어야만 했다. 꼬박 한 시간이 넘게 흐른 뒤에야 작업실을 나서며 그녀가 길게 두 팔을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으으, 허리 아파 죽겠다.”

이제야 좀 살겠다는 듯 힘없이 몸을 늘어트리다 시야로 서훈이 들어온 것도 그즈음이었다.

놀란 유진이 뒤늦게 주방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금세 휘둥그레진 눈이 텅 빈 식탁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찡그려졌다.

“설마, 너…….”

“일하느라 네가 굶는데 혼자 먹을 순 없잖아.”

별거 아니라는 듯 서훈이 읽던 책을 덮으며 일어났다.

“얘기라도 하지. 그럼 더 서둘렀을걸.”

“괜히 방해라도 할까 봐.”

“이럴 땐 융통성을 발휘해야지. 언제 나올 줄 알고 마냥 기다려.”

괜히 미안해서 투덜거리며 유진이 쓰게 웃었다.

하긴 주서훈이라면 설마가 종종 사람을 잡기는 했지만. 저 홀로 수긍하며 그녀가 벽으로 흘깃 고개를 치켜들었다.

시간은 여덟 시를 넘어선 지가 오래였다.

이제 와서 차려 먹기도 난감한 시간이 아닌가. 게다가 냉장고에는 이렇다 할 찬거리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저녁은 어떻게 할까?”

다시 서훈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글쎄, 난 아무거나 상관없는데.”

“으음, 그럼 오늘은 배달 시켜 먹을까?”

차라리 잘 됐다는 듯 유진이 손에 든 핸드폰을 살짝 흔들었다.

“만사가 귀찮구나?”

“냉장고가 텅 비어서. 외출했더니 피곤하기도 하고.”

“그러게, 약속 미루라니까 말 좀 듣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며 석민이 픽 웃었다.

“피곤할 일이 있었어.”

“무슨 일?”

되묻는 서훈에게 이따 말하겠다며 손을 내저은 뒤, 그녀가 다시 핸드폰을 위로 들었다. 우선 저녁부터 시키자는 뜻이었다.

다행히도 이럴 땐 두 사람이 꽤 잘 맞는 편이었다. 큰 고민 없이 유진은 중식으로 메뉴를 골랐고, 시간이 늦어서인지 배달은 제법 빠르게 도착했다.

“그런데 피곤한 일이 있었다는 건 무슨 말이야?”

“연우까지 불렀더라고, 민석이가.”

“그때 그 고등학생?”

“맞아, 빈소 지키던 담임 아들.”

궁금한 듯 묻는 서훈에게 그녀는 함께 만난 연우를 언급했고, 자연스럽게 화제는 그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된 상황까지 흘러갔다.

물론, 서훈도 거기까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듯했다.

“답지 않게 웬 오지랖이야?”

“나도 모르지, 말로는 안쓰러워서 도와주고 싶었다더라.”

아까 민석에게 들은 그대로를 서훈에게 말하며 유진이 모르겠다는 듯 손등 위로 제 턱을 걸쳤다.

확실히 민석과 담임 아들인 연우의 조합은 그녀로서도 의외이기는 했다.

“지가 언제부터 남을 불쌍히 여겼다고.”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그거 통보하려고 거기까지 불렀고?”

“으음, 그건 아니었는데.”

그래, 나민석이 친구에게 일일이 제 사정을 알릴 만큼 좋은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아까만 해도…….

‘이삿날 왜 우리를 불러? 너 돈 많잖아. 이삿짐 불러.’

‘업체 부르기엔 짐이 적은 걸 어쩌냐.’

‘우리 훈이는 한가해? 그나마 쉬는 날인데.’

‘친구끼리 이럴래? 너무하네.’

‘웃겨, 이런 순간에만 친구세요?’

‘너도 생각을 해 봐. 업체까지 부르면 애가 부담 느낄 거 아냐.’

연우가 부담이라도 느낄까, 어울리지 않게 부탁까지 했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불러낸 이유도 그것 때문일 거다. 뻔히 속셈이 보이는데도 유진은 자꾸 민석이 물고 늘어지는 통에 귀찮아서 그냥 수긍해 버렸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말하지. 분명히 저 성격으로는 다시 거절한다며 민석에게 전화하려고 할 텐데.

“누굴 부려 먹어, 걔 미쳤대?”

“그래도 친구잖아, 부탁하는데 거절하기도 조금…….”

“친구 좋아하네, 매번 짜증만 내는 놈이?”

예상대로 그의 부탁을 듣자 서훈이 안색을 굳히며 젓가락까지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급기야 일어나려는 서훈을 급히 잡아챈 유진이 놀란 듯 그를 반 강제로 끌어 내리며 도로 앉혔다.

“괜히 욱하지 말고 좀!”

“알았어. 우선 들어는 볼게.”

“진작 그러던가.”

괜히 젓가락을 깨작거리며 유진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제야 날 선 표정을 누그러트리며 서훈이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뒤늦게 자신이 너무 과했다고 느낀 모양이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뭐긴, 사정하길래 그냥 알았다고 했지.”

어쩔 수 없다는 듯 유진이 한숨 섞인 대답을 했다. 그 대신 민석에게 받기로 한 조건에 관한 내용만 쏙 빼놓고서.

* * *

이삿날은 유독 내리쬐는 빛이 강했다.

뉴스에서도 올해 들어서 가장 무더운 날이라고 강조했으니, 단순히 개인적인 느낌만은 아닐 것이다.

“날을 잡아도 하필이면 이런 날이야.”

“일기 예보엔 저번 주까지 흐리다고 나와 있었는데.”

불쾌지수가 제일 높아진 건, 서훈이었다.

“하아, 그놈의 기상청.”

“우리나라 기상청이 매번 그렇잖아.”

“반대로는 잘 맞추지 않나?”

핸들을 반쯤 돌리며 서훈이 들을 리 없는 기상청 직원에게 온갖 짜증을 퍼부었다.

“큰일이다, 오후엔 국지성 소나기도 온다던데.”

“그 녀석 일 처리가 그렇지, 뭐.”

“트렁크에 우산 있어?”

“걱정 마, 예비용으로 한두 개 넣어 놨을 거야.”

서훈은 말 그대로 그는 민석이 관계된 건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유진이라고 계속 듣는 짜증이 반가울 리 없었다. 듣다 못 해 그만 좀 하라고 잔소리를 늘어놓고서야 그나마 서훈의 날 선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이사를 도와주는 것보다 나민석이라서 더 저러는 거겠지만, 어쨌거나 유진에게는 그게 그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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