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훈아, 거의 도착했지?”
“음, 대충은. 5분쯤 남았는데 왜?”
“그냥 궁금해서.”
서훈의 대답처럼 차는 눈 깜짝할 사이, 연우가 사는 집 근처까지 접어들었다.
주차하는 사이, 유진은 미리 챙겨 온 모자를 꺼내 푹 눌러썼다. 금세 모자를 하나 더 꺼내 서훈에게 씌우자 의외인 듯 그가 픽 웃었다.
“모자는 또 언제 챙겼어?”
“현관 앞에서. 날이 꽤 뜨거울 것 같았거든.”
“우리 꼬꼬마는 참 센스도 좋아.”
“아부할 것 없어. 내 거 챙기면서 같이 넣은 것뿐이야.”
서훈에게 눈을 흘기며 유진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언제 도착했는지 멀리 민석의 차가 눈에 띄었다,
서훈과 함께 그쪽으로 갔지만, 이미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연우네로 먼저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이건 또 어디로 갔냐. 투덜거리는 서훈의 입을 틀어막으며 그녀는 곧장 민석에게 연락부터 했다.
“생각보다 빠르네, 더 늦게 올 줄 알았는데.”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민석은 바로 두 사람을 마중 나왔다.
“불렀으면 여기서 기다리던가.”
“미리 짐 싸는 것 좀 도와주고 있었다. 왜 시비야?”
“기껏 와 줬더니 부른 사람이 없잖아.”
만나자마자 두 남자는 다시 또 티격태격하며 날을 세웠다.
“하아…….”
저것들 또 시작이네. 짜게 식은 눈길로 그 광경을 심드렁하게 주시하며 이내 유진이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어떻게 매번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지 모르겠다. 도와달라고 불러 놓고는 짜증 내는 민석의 태도도 문제였지만, 서훈도 그녀의 눈엔 다를 게 없었다.
결국, 유진에게 두 남자는 각자 한마디씩 듣고 나서야 할 말이 없는 듯,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런데 왜 트럭은 없어?”
“안 불렀어, 상자 몇 개만 나눠 옮기면 끝나.”
“이사라며, 고작 그게 끝?”
“짐이 별로 없더라고.”
궁금해하는 유진에게 그는 간단히 설명했다. 담임과 쓰던 살림은 다 처분했고, 간단한 짐만 가지고 민석의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학생이면 책상 정도는 필요할 텐데.”
의아한 듯 유진이 갸웃거리자 민석이 나직하게 웃었다. 조립이라 적당히 차로 옮길 수 있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참 태평해서 좋겠다.
생경하고 낯선 민석을 주시하며 유진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과거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태도가 아닌가.
민석은 돈 많은 집안의 막내로 어려서부터 금지옥엽처럼 자랐다. 학생 때부터 자기중심적인 성향 때문에 유진과도 꽤 티격태격하는 편이었다.
재벌가에서 자란 서훈도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애인이니까.
꽤나 공평하지 못한 결론을 내린 유진은 한쪽으로 내놓은 상자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보다 더 적은 탓이었다.
“저게 끝이야?”
“트럭도 필요 없댔잖아. 내가 괜히 그 말을 한 게 아니라니까.”
민석이 차 트렁크로 상자를 옮기며 가볍게 받아쳤다.
차 두 대로도 충분하다더니.
확실히 이사라고 하기도 모호할 만큼 짐이 적었다. 덕분에 짐을 옮기기까지는 수월했지만, 예상치 않게 유진은 다시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온 김에 바로 집들이나 하자.”
그 말과 함께 민석이 한턱 쏘겠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 * *
오랜만에 본 민석의 집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쓸데없이 깨끗한 가구, 넓은 거실이며 슬리퍼 하나까지도.
마지막으로 와 본 게 언제였더라.
까마득한 기억을 되짚어가는 필름의 한 조각이 서훈과 헤어지기 몇 달 전쯤에서 천천히 멈춰 섰다.
‘그래, 딱 그때쯤이었는데…….’
거실 한편에 놓인 걸터앉으며 유진이 묘한 눈길로 주변을 훑어나갔다. 마치 여기만 모든 시간이 멈춘 것처럼, 기묘한 착각마저 들었다.
서훈과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도 민석의 집은 똑같았다. 그러니 더 묘할 수밖에.
애써 어지럽게 도는 감정을 흘려 넘기며 그녀가 태연하게 휙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데 웬일이야? 우리한테 밥을 다 사고.”
“뭐겠냐, 집들이 겸 도와준 답례지.”
“오, 나민석 인간 됐네.”
“싫으면 거절해도 상관없다만.”
웃기지 마, 어떻게 온 기회인데 이걸 날려. 나민석 같은 자린고비의 주머니가 열리는 날은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유진이 짓궂게 입꼬리를 휘어 올리며 잽싸게 서훈의 팔을 낚아챘다.
“그런 건 거절하면 안 되지, 그치, 훈아?”
“예의가 아니지, 친구 사이라도.”
팔을 뻗어 유진의 뺨을 쓸어내리며 서훈이 따라 웃었다.
“나민석 잘 들었지?”
“듣긴 뭘 들어, 둘이 만담하냐?”
“하여간 저 성질머리하곤.”
일부러 들으라는 듯 말하자 그가 유진을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굳이 꼬투리를 잡을 마음도 없었다. 대신 유진은 텅 빈 거실을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이유를 물었다.
“연우는 청소 중이고 민준이는 일 있다고 나갔다.”
“바쁘네, 민준이 언제 들어오는데?”
“저녁이나 돼야 들어오겠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복도 끝에서 연우가 나왔다.
“민준이하고는 만나 봤어?”
“네, 엊그제 따로 민석 형이 인사시켜 주셨거든요.”
“의외네, 쟤 성격에 인사도 다 시키고.”
대답이 못마땅한 듯 민석이 미간을 잘게 찡그렸다.
“자꾸 이상하게 사람 매도할래?”
“쓸데없이 오버하지 마, 그냥 내 생각인데.”
친절한 척 구는 친구의 낯선 모습이 유진에게는 제법 즐거웠다. 그래서 보란 듯이 내숭 떤다, 서훈에게 귓속말을 하며 키득거렸다.
말 그대로 장난이었다.
하지만 그 부작용은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뭐? 뜬금없이 무슨 선물?”
“이사했잖아. 집들이할 때 선물 주는 거 몰라?”
“이사 직후에 할 말은 아니지.”
“서유진, 뭘 그렇게 쪼잔하게 구냐.”
갑자기 심부름을 부탁하며 연우를 내보낼 때 뭔가 이상하더라니, 민석이 대뜸 선물을 달라 요구한 것이다.
“너 이거 노리고 집들이하자 그런 거지?”
당당한 태도를 보며 유진이 오만상을 썼다.
“친구끼리 사 줄 수도 있지.”
“이 새끼는 우리가 만만한가, 매번 왜 이래?”
그때까지 조용하던 서훈도 어이없다는 듯 짜증을 냈다.
“나민석한테 온종일 이용당한 기분이야.”
기껏 도와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심보가 아닌가.
유진이 삐딱하게 팔짱을 끼며 민석을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봤다. 뭐 저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녀에게도 방법은 있었다.
금세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민석에게로 유진이 손을 쭉 뻗었다.
“좋아, 그럼 너부터 내놔. 계산은 확실하게 해야지.”
“엉? 뜬금없이 무슨 계산?”
“너도 공짜로 훈이 부려 먹었잖아.”
제 곁의 서훈을 흘깃 가리키며 유진이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일당 받아 챙겨서 그걸로 선물 사 주면 땡이었다.
오랜만에 쉬는 서훈이 부려 먹는 것도 못마땅한 판국에.
“일당을 받아가겠다고?”
똑같이 요구하자 민석이 허를 찔렸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같은 거지, 도와준 우리한테 선물 내놓으라며.”
“우리 사이에 이러기냐.”
“내 말이, 친구끼리 진짜 이럴래?”
유진이 상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민석도 딱히 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괜히 장난이라며 말을 돌리는데도 유진은 시큰둥하게 알았다며 손을 내저었다.
‘누굴 바보로 알아, 다 보이는데.’
화제를 전환하려는 기색을 느끼고도 유진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미 옆에서 언제 끼어들까, 서훈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다시 두 남자의 2차전이 벌어지는 것만큼은 유진도 사양이었다.
* * *
칠흑 같은 어둠이 주변을 다 집어삼킨 공간.
그곳에서 허공 어딘가를 멍하니 주시하던 유진의 눈이 점차 놀란 듯 크게 부릅떠졌다.
‘이건 뭐지, 여기는 대체 어디야.’
낯선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상황이 당황스러운 듯, 유진이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확인했다.
“…어?”
보이는 게 없다, 아무것도.
몇 번이고 눈을 비벼도 전부 그대로였다. 시야에 들어오는 거라곤 밤하늘보다 까만 어둠이 끝이었다.
알지 못하는 낯선 공간은 마치 현실이 아닌 듯, 유진에게 생경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유진의 눈동자가 속내를 드러내듯 어지럽게 흔들렸다. 애써 긴장을 억누르며 그녀가 차분히 제 머릿속을 가라앉혔다.
‘이건 꼭…….’
그래, 이건 꼭 그때와도 비슷한 기시감이 들었다. 갑자기 삼 년 전으로 돌아온 날, 그 어슴푸레한 새벽처럼.
하지만 두 번째의 자신은 그때와는 달랐다, 아니 달라지고 있었다.
유진은 온통 시야가 막힌 어둠 속에서 긴장을 가라앉히며 이게 어떻게 된 건지 하나씩 되짚어갔다.
‘분명 연우가 이사한대서 짐을 옮겨 주러 갔었어, 그리고 또…….’
군데군데 끊어진 필름을 가까스로 붙잡으니, 기억의 끝은 거실이었다.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기억이 틀렸을 리가 없다.
“생각, 생각… 서유진 생각을 좀 해 보자, 생각을…….”
유진이 홀로 중얼거리며 손끝으로 이마를 쓱쓱 문질렀다.
이삿짐 도와준 답례랍시고 민석이 한턱 쏜다기에 반주 삼아 함께 술도 마셨다. 집에 와서도 피곤해서 곧장 침실로 들어갔는데.
‘설마 자각몽이라도 꾸는 건가?’
침실로 간 부분까지 기억을 더듬다 말고, 유진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바닥으로 철퍼덕 주저앉았다.
목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돌아와 보니 어때?”
“……!”
“이제는 그 간절함이 조금쯤 무뎌졌나?”
메아리치듯 울리는 이질적인 목소리가 허공을 잘게 진동시켰다. 귀가 아닌 머리로 파고드는 소리에 유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또렷한 각인처럼 선명하게 남은 목소리.
본능처럼 유진은 저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여전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바람처럼 흩어지는 묘한 소리였다.
“아… 아니, 아니지.”
연달아 머릿속으로 그 소리가 깊이 파고들었다. 두리번거리는 유진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두려운 마음이 먼저 앞섰다.
다시 서훈이 없는 미래로 돌아가라고 할까. 이제 꿈은 끝이라는 말을 들을까, 불안해진 마음은 옅어져 가던 그녀의 두려움까지 되돌리고 말았다.
“하긴, 벌써 무뎌질 인간이라면 보내 주지도 않았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