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다급한 유진에게선 호기심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지금껏 안개가 낀 듯 뿌옇게 흐린 기억이 싹 걷힌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어디, 어디에……!”
여전히 사방이 막힌 공간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섣불리 한 발 뻗지도 못할 공간에서 유진은 소리를 따라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고작해야 꿈이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겁부터 먹지?”
“…꿈?”
“그래.”
“이게, 꿈이라고?”
말도 안 돼. 꿈일 리가 없다,
이렇게 생생한데. 싸늘하게 식은 공기도, 소름 돋는 긴장감도, 저 메아리치는 목소리까지 또렷한데.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희미하게라도 앞이 보이는 게 정상일 터. 그렇다면 이건 비정상인 상황이거나 자신이 비정상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믿지 못할 소리에도 유진은 꿈이라는 단어를 동아줄처럼 붙잡은 채, 서서히 출렁임이 잦아들었지만.
“앞으로 닥칠 대가가 무서워지기 시작했어? 그게 아니면 다시 돌아가고 싶다거나.”
“아니, 아니요. 절대 그런 게…….”
그저 한 번쯤 저 목소리의 주인과 다시 만나기를 바랐다.
그래, 분명히 그랬는데.
유진은 계속 시야가 보이지 않는 이유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저 소리의 주인은, 제 앞에 나타날 생각이 전혀 없는 거다.
“과연 그 간절함이 사라지고 나면 넌 어떤 모습으로 망가질까.”
“…… 사라, 져……?”
사라진다고? 내가? 아니면 이 감정이?
“꽤 궁금하단 말이야, 기대되거든.”
저도 모르게 유진이 몸을 갑자기 움찔 떨었다.
“사람 감정이 쉽게 사라질 리가.”
“희망을 품어 보는 것도 괜찮지, 인간의 주특기니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며 유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매섭게 주인 없는 허공을 노려봐도 그녀의 시야에는 잡히지 않는 공허한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잊지 마, 인간.”
“…….”
“세상에 절대 영원한 건 없어. 그래서 더 기대 중이지.”
다시금 흘러나온 소리가 허공을 메아리쳐 울렸다.
본능적으로 두려워진 탓일까.
힘껏 움켜쥔 주먹에서 힘이 풀리며 이내 힘없이 그녀의 팔이 아래로, 툭 떨어져 내렸다.
너무 예민해졌다는 걸 알면서도 방법이 없었다. 저 목소리는 유진의 말 따위는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그때처럼 비웃고 있었다.
“하나만 묻자.”
하지만 그때, 날아온 목소리가 미묘하게 변했다.
시린 냉기를 담아 피부를 건드리던 소리가, 이제는 마치 따뜻한 봄날의 바람처럼 유진을 어루만지듯 찬찬히 스며들었다.
“그렇게 간절한 사람한테 보내 줬는데 넌 어째서 아직 불안해하지?”
“내가, 불안하다고?”
“그래, 위태로울 정도로.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렵고, 또 무서워하지.”
정곡을 찔린 듯 유진이 급히 헛숨을 들이켰다.
“인간의 온갖 마이너스한 감정이 너한테서 유독 강하게 흘러나오는데.”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유진은 한 가지 생각만을 하며 빌었다.
얼른 이 악몽에서 깨어나라고. 서훈이 곁에 있을 마지막 기억의 끝자락으로 돌아가라고.
“어쨌든 기대해 보지. 이제 곧 돌아올 대가를.”
하지만 점점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도 유진은 그 마지막 말을 의지와 상관없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 * *
암전된 의식의 끈이 현실로 돌아오는 감각은 한없이 나른했다. 마치 물 먹은 솜이 된 것만 같았다.
눈을 뜨고도 꿈과 현실의 구분이 힘들었다. 흐릿한 시야는 초점 없이 흔들렸고, 몽롱해서 정신이 없는 것과도 조금 다른 생경한 감각.
그래, 확실히 평소와는 달랐다.
유체이탈이라도 경험한 것만 같았다. 기이함을 느낀 유진이 눈을 깜박거리며 이게 뭘까, 고민했다.
그 찰나,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로 작게 흘러들었다.
“…ㅈ… ㅇ……?”
“…….”
“…지아, 서유진?”
서훈이었다.
“…주, 서훈……?”
한 박자 늦게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린 유진은 자꾸 무겁게 까라지는 눈두덩을 억지로 치켜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익숙한 벽지.
새파란 하늘 위로 듬성듬성 떠다니는 구름이 유진의 흐릿한 시야 너머로 가득 차올랐다.
좌우로 느릿하게 눈을 굴리다가 유진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반쯤 틀었다.
그제야 정말 여기가 자신의 집이라는 실감이 났다.
“이제 누군지 알아보겠어?”
“…어, 아, 응.”
대답하려고 입을 뻐끔거리던 유진이 갈라진 목소리에 놀란 듯 급히 제 목을 가다듬었다.
“피곤한데 깨워서 미안.”
서훈이 미안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유진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넘겼다.
“아냐, 괜찮아.”
“표정이 안 좋아서 깨웠어. 악몽이라도 꿨어?”
“모르겠어, 나도.”
정말로 꿈이었을까.
무서운 느낌이지만, 어찌 보면 또 악몽은 아니었다. 그저 부정당한 제 간절함이 괴로울 뿐이었다.
게다가 점점 흐릿해지는 기억.
유진은 멀어지는 신기루처럼 뿌연 안개가 머릿속으로 드리워졌다. 그런 제 상태가 의문인데도 애써 그녀는 서훈 앞에서 티 내지 않았다.
“피곤하면 더 잘래?”
“일어나야지, 지금 몇 시쯤 됐어?”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유진이 침대에서 제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이것도 잠이라고.
마음과 달리 전신이 영 무겁다. 뒤척이며 자다가 눈을 떴을 때처럼 전신이 축축 늘어지고 있었다.
“너 두 시간쯤 잤어.”
“어? 두 시간? 그거밖에 안 잤어?”
“새벽인 줄 알았어?”
“아, 으응. 그냥 기분이 새벽처럼 느껴져서.”
그런데 아직 저녁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잠결이라 더 그런 건가.”
“아마도.”
짧게 단답형으로 대답한 뒤, 잠을 깨우려는 듯 유진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길게 숨을 토해 냈다.
평소라면 그냥 더 자라고 설득했을 서훈이 오늘따라 조용했다. 심지어 웬만하면 일어나라는 식으로 그녀에게 시원한 냉수까지 한 잔 떠 주기도 했다.
이 남자가 어쩐 일인가 싶었더니만.
“아까 너, 수정하던 거 마무리 못 했어. 기억 안 나?”
“맞다! 수정!”
마감이었다.
아직 못 끝낸 걸 내버려 두고 그대로 뻗은 것이다.
“힘들어도 마저 다 끝내고 다시 자자, 응?”
경악하듯 벌떡 일어난 유진이 이어지는 소리를 듣고 눈살을 찡그렸다. 옆에서 재촉하니, 더 하기 싫은 탓이었다.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연인과 눈을 마주치며 그녀는 알겠다는 듯 설핏 웃었다.
꿈에서 들린 그 말조차 전혀 모른다는 것처럼.
* * *
가슴 한편으로 불안감을 떠안고도 나름 평탄하게 지내던 유진은 요 며칠, 부쩍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미래가 바뀐다고 해도 늘 변함없는 것도 존재했다.
예를 들자면 그녀의 직업이라든가, 여전히 하루가 멀게 날아오는 수정의 늪 같은 것들.
“아씨! 짜증나!”
돌연 소리를 지른 유진이 질끈 틀어 올려 묶은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쌓이는 짜증을 주체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제 막 씻고 거실로 나온 서훈이 그 소리에 의아하게 휙 고개를 틀었다.
“하, 진짜 못 해 먹겠네.”
“일이 잘 안 돼?”
“…훈아, 내가 이 짓을 지금 몇 시간째 하고 있게?”
작업실로 들어온 서훈을 보며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유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저건 물음이라기보다 혼잣말에 더 가까운 하소연이었다.
“아니, 아냐, 아니다.”
“…뭐가 아냐?”
멍하게 풀린 동공을 마주하며 그가 난감한 듯 미간을 탁 짚었다.
“당연히 알 리가 없지.”
“…….”
“그래, 그럴 거야. 내가 얘기한 적도 없잖아.”
물론, 유진에게는 그런 서훈의 걱정스러운 표정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을까.
과거로 돌아왔다고 해도 처음부터 변할 가능성이 제로인 걸 너무 간과해 버린 것이다.
다시 고개를 돌린 유진이 뚫어버릴 듯 모니터를 매섭게 노려봤다. 며칠을 시달리느라 바짝 날카로워진 연인을 본 미간으로 옅은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서훈은 굳이 그녀의 행동을 뜯어말리진 않았다. 이미 동거까지 하는 마당에 짜증의 원인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하아, 또 뭐가 문제인데?”
낮게 한숨을 쉬며 그가 유진에게로 걸어갔다.
“내가 직업을 잘못 고른 것 같아.”
“직업은 뜬금없이 왜.”
“그냥 회사원이나 할걸. 이 일은 최악이야.”
“듣는 회사원은 기분 별로네, 그 말.”
“일이 쉽다고는 안 했거든.”
마우스를 그러쥔 손을 딸깍거리며 유진이 연신 투덜거렸다.
그놈의 돈이 문제다.
입으로는 매번 불만을 터트리는데 본능처럼 움직인 손과 따라가기 바쁜 눈은 그대로가 아닌가.
이 정도면 확실히 직업병이었다.
“요즘 취업난 때문에 다들 난리야. 우리 회사만 해도…….”
“굳이 알려 주지 마. 그 정도는 알아.”
서훈이 슬그머니 꺼낸 말을 유진이 까칠하게 되받아쳤다.
누가 진짜 회사원이 되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느냐고. 그냥 몇 마디 거들어 주고 끝내면 될걸.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았어.”
괜히 헛기침을 하며 서훈이 급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사이, 뾰족해진 유진의 눈초리를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이런 상태일 땐 가만히 놔두는 게 상책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쏟아내는 하소연도 제법 잘 들어주는 연인이었고.
“미안해. 그냥 짜증이 좀 났나 봐.”
“지쳐서 그래. 번아웃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모르겠어, 그냥 멍해서.”
유진은 여러 업체에서 외주를 받는 프리랜서 삽화가다.
회사원 운운하기엔 벌이가 적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단기간 내로 수정 요구가 들어오면 통과될 때까지 시달리는 것도 일상이었다.
그나마 며칠 수면 부족은 예삿일이다.
이건 뭐,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마감에 히스테릭해지고, 지금만 해도 몇 번째인지 모를 수정으로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기본적인 본능이 채워지지 않으니, 절로 예민해지는 것이리라.
‘돈이라도 많이 받으면 덜 억울할 텐데.’
일반 사람보다야 많이 벌지만, 그건 수정이 거의 없을 때의 희박한 확률이었다. 그만큼 수정 없이 바로 통과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암, 커피가 아니라 에너지 드링크라도 마실까?”
피곤한 듯 유진이 작게 하품을 했다.
“그걸로 돼? 이 정도면 노동력 착취 수준 아냐?”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나마 서훈에게 쏟아 냈더니, 꽉 막힌 속은 한결 편해졌지만.
“우선 조금만 자자. 일어나서 마저 작업하면 되잖아.”
이 남자가 속 편한 소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