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17화 (17/67)

❦제17화

이런 상황에 잠이 다 뭔가.

꼬박 며칠을 내리 한숨도 자지 못한 정신은 흐리멍덩하다 못해, 이젠 샛노랗게 변할 지경인데.

“훈아, 내 핸드폰 한번 켜 볼래?”

“갑자기 왜?”

의아한 듯 묻는 서훈에게 그녀가 마우스 옆에 놔둔 핸드폰을 가리키며 쓰게 웃었다.

“보고 나면 너도 그 말, 쏙 들어갈걸.”

“도대체 뭐가 있길래.”

“한 번 보기나 해. 가장 상단에 있는 방이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서훈이 곧장 유진의 핸드폰을 켰다. 그러고는 메신저를 확인한 직후,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이거 뭐하자는 거냐.”

“보면서 뭘 물어.”

“누가 보면 사람이라도 죽인 줄 알겠다.”

동의한다는 듯 유진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잘 수가 없다니까, 그거 때문에.”

사람을 좀 괴롭혀야지.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기는커녕, 꿈에 나올까 무서울 정도였다.

그림을 틱 던져 주면서 빨리 수정해 달라 줄기차게 외치는 통에 유진은 이제 눈을 감고도 그림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생각할수록 짜증 나네. 서 팀장 그 개새끼를 내가.”

“어이, 서유진 괜찮냐니까?”

대화 도중, 다시 수정에 집중한 건지, 유진은 연신 서 팀장을 씹으며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인데. 잠을 좀 자게는 해줘야 할 거 아니냐고.”

“하아, 서유진 멘탈 어디로 이사 갔냐.”

이미 밤샘이 며칠 째인지 유진의 두 눈은 퀭하다 못해, 하루가 다르게 다크서클이 짙어져만 갔다.

“아니다. 이참에 확 그냥! 그 회사 불질러 버릴까?”

“어? 유진아, 그건 좀…….”

“과거의 내가 원망스럽다. 서유진아, 도대체 거기 도장은 왜 찍었니.”

보다 못한 서훈이 정신 차리라며 유진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지만.

“진아? 서유진?”

화면으로 꽂힌 시선이 고정된 듯 멈춰 있었다. 이번에 새로 계약한 곳의 외주 담당자가 상당히 피곤한 사람인 모양이다.

어지간해서 저런 상태까지는 가지 않는데. 낮게 혀를 차며 서훈은 누군지 모를 서 팀장에게 이를 갈았다.

‘도대체 애를 얼마나 괴롭혔으면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이를 가느냐고.’

연인이 일 때문에 다 죽어가는 몰골로 저러고 있으니, 진심으로 깽판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일감이 다 끊겼다고 울어버리면 곤란하니까.

애써 그가 넘어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그런 뒤, 유진을 팔로 감싸 안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달래듯 속삭였다.

“그 팀장, 내가 혼내 주러 갈까?”

“어? 방금 뭐라고?”

“네가 말한 서 팀장, 대신 혼내 주러 간다고.”

물론, 반쯤은 장난이었다.

어떻게든 유진은 저 작업을 다 끝내야 편히 잘 수 있었다. 그렇다면 기분이라도 조금 좋아지게 하려는 거였다.

막말로 잠은 재워야 할 거 아닌가.

벌써 며칠째 휘청거리며 카페인으로 버티는 모습이 서훈에게는 영 위태로워 보였다.

“뭐야, 서유진 대답 안 하네?”

“어, 으음…….”

“왜, 그건 또 싫어?”

“그건 아니고. 으음, 웬만하면 나 몰래 불 질러 줄래?”

처음에는 약간 당황하던 유진도 어느 순간, 마음을 바꾼 듯 간절한 소망 하나를 툭 내뱉었다.

그런데 이 남자, 바로 또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오케이, 그 말 접수한다.”

미쳤어, 설마 진짜로 불 지르려고?

“설마하니, 너…….”

“설마 뭐?”

한 번 한다면 그는 진짜로 하는 성격이었다. 슬슬 유진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진짜로 불 지르게? 장난이지?”

놀란 듯 유진이 휙 고개를 젖히며 물었다. 그러자 마주치는 서훈의 얼굴에는 거꾸로 봐도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었다. 두근거리는 박동이 등을 타고 퍼져나가며 지금껏 뾰족하게 날 선 짜증이 스스륵 가라앉았다.

사람의 마음이 참 묘하다.

스치듯 마주친 서로의 시선만으로도 기분이 확 좋아지는 걸 보면 유진은 그게 참 묘하다고 생각했다.

“어라, 서유진 내 말 안 믿네?”

“믿기엔 너무 과한 대사긴 했지, 방금 건.”

“흐음, 과연 그럴까?”

일부러 더 기분을 풀어 주려는 속셈인지,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서훈이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서훈의 저런 행동이 마냥 낯설게 느껴지는데도 마음은 또 그게 아니다. 기분만은 꽤 좋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 달래주려고 하는 말이잖아, 바보야.”

웃음기 섞인 말과 함께 유진이 손을 내저으며 그를 제지했다. 이제 말장난은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퉁한 표정을 드러내며 그가 팔짱을 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서훈이 통 말이 없었다.

“왜 말이 없어?”

빤히 올려다보며 묻자 대답 대신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토닥이는 손길이 기분 좋은 듯, 한층 더 부드러워진 눈길로 유진이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서서히 곡선을 그리며 휘어져 올라간 서훈의 입술이 돌연, 짓궂게 한쪽으로 비틀렸다.

‘갑자기 왜 저렇게 웃지? 괜히 찝찝하게.’

무언가 찝찝한 듯 유진이 그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표정으로만 봐선 당장에라도 엄마 몰래 말썽을 부리려는 아이처럼도 보였다.

“진아, 너도 한번 들어 봐.”

“그러니까, 뭘?”

다시 입을 연 서훈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뒤에서 유진에게로 상체를 숙였다. 드러난 어깨에 슬그머니 턱을 걸치고도 크게 불편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 뾰족한 턱에 오히려 유진이 불편했다. 아프다며 투덜거리자 서훈이 다시 자세를 고친 뒤, 턱을 걸치며 작당이라도 하듯 작게 속삭였다.

“우선 말이야. 밤에 그 회사로 몰래 찾아가는 거야.”

“회사? 거기엔 가서 뭐 하려고.”

“뭐겠어. 네 말대로 불이나 조금 질러 주는 거지.”

별거 없다는 듯 대답하는 서훈에게 휙 고개를 돌린 유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지르려고?”

지금 이 남자가 무슨 헛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거야. 아무리 여기가 우리밖에 없는 집이라도 그렇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남의 회사를 방화하겠다는 말을 서훈은 저리 거리낌 없이 꺼냈다.

“그건 약과고, 다음부터가 문제인데.”

유진이 다시 허공에서 그와 시선이 부딪쳤다. 그러자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서훈이 무언가를 고민하듯 턱을 매만졌다.

“뭔데, 뭐가 또 있어?”

“다음엔 자꾸 너 괴롭히는 서 팀장이라는 사람, 집이라도 갈까?”

“헐… 주서훈 미쳤나 봐, 진짜.”

농담으로 하는 말인 줄 아는데도 무섭다.

꼭 영화에서 보면 공포나 스릴러에 그런 애들이 종종 있었다. 항상 무슨 짓을 벌이기 전에 지금처럼 태연하게 구는 케이스.

“흐음 아니면 서 팀장 집 우편함에 커터 칼이라도 몇 개 넣을까?”

“윽, 왜 하필 커터 칼이야?”

“그건 별로야? 간단해서 좋은데.”

고민하듯 중얼거리며 그가 다시 고민하며 뒤에서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서훈의 몇 가지 안 되는 버릇 중 하나였다. 유달리 좋아하는 행동이라, 언젠가 유진이 먼저 그에게 이유를 물어본 적도 있었다.

‘혹시 모르잖아, 사람 일이라는 게.’

‘대답이 애매하잖아.’

‘나중엔 안고 싶어도 못 안을까 봐. 갑자기 다칠 수도 있고.’

그때 실없이 웃으며 말하던 서훈이 기억 저편에서 흐릿하게나마 떠올랐다.

이게 언제쯤의 기억이더라.

시기는 확실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꽤 오래된 기억인지 안개가 낀 것마냥 흐릿했기 때문이다.

잠시 떠오른 예전 기억을 머리에서 지워버리며 유진이 그의 가슴에 편히 기댔다.

“뭐가 좋으려나, 그래도 명색이 우리 진이 복수인데.”

서훈의 혼잣말을 들으며 이내 못 말린다는 듯 유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런 얼굴로 말을 하니, 진짜로 무슨 일 저지를까, 무섭다는 걸 알기나 할까. 장난인데도 어째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 귀가 유진은 난감했다.

“주서훈아…….”

급기야 난감하게 눈을 굴리며 유진이 그를 나지막이 불렀다.

그러다 일 모조리 끊겨. 유진이 한숨 섞인 말을 툭 내뱉었다. 그게 문제가 된 건지 등에서 자꾸 움찔거리는 떨림이 느껴지는 듯했다.

자꾸만 신경 쓰이는 탓에 돌연, 유진이 뒤로 휙 고개를 틀었다. 대강 예상은 하고 돌아봤지만, 이 남자 대놓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제대로 속았다.

일부러 그가 웃음을 참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눈이 마주치자마자 유진이 오만상을 팍 구기고 말았다.

“하하, 서유진 아직 어리네.”

“…알고 있었거든?”

괜히 더 날을 세우며 유진이 말을 되받아쳤다.

“설마 진짜로 할 줄 알았어?”

“아니거든. 네가 하도 진지하게 구니까 그렇지.”

그런다고 눈 하나 깜짝할 주서훈이 아니었지만.

“큭큭, 내가 못 산다.”

금세 웃음기를 삼킨 서훈이 인상을 쓴 연인도 예뻐 보이는 듯, 유진에게로 연신 제 입술을 들이밀었다.

“씨이! 입술 안 치워?”

“그러지 말고. 두 번만, 아니 다섯 번만 더.”

이미 콩깍지가 씐 서훈이 까칠한 연인도 귀엽다는 듯 쉴 새 없이 제 입술을 부딪쳐 왔다.

언제 심각했었냐는 듯 뒤바뀐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음을 참으며 그가 유진의 뒷덜미로 제 얼굴을 푹 묻었다.

유진도 그냥 푸스스 웃고 말았다.

매번 알면서도 홀라당 속아 넘어가는 기분이지만, 그냥 서훈의 가슴으로 머리를 쿵 박으며 작게 불만을 표시할 뿐이었다.

“으윽. 진아, 진짜 아픈데.”

“엄살은, 뭐가 아파?”

“내가 알기로 네가 생각보다 돌머ㄹ…… 읍?”

일순, 그녀가 서훈의 입을 손으로 확 틀어막았다.

“너 자꾸 옛날 일 들먹일래?”

“으으읍? 읍읍.”

싸늘한 유진의 협박에도 그는 동그랗게 뜬 눈꼬리를 착 접어 내리며 막힌 입을 손으로 툭툭 쳤다.

“읍? 읍으… 읍으읍읍?”

이것부터 놓고 말하자, 정도의 해석이겠지만.

“진짜로 화내는 수가 있다, 주서훈 씨?”

“크큭…….”

“어? 너 지금 웃은 거지? 한번 해 보자고?”

유진의 구박에도 그의 웃음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서훈은 품에서 그녀를 놔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잔소리를 경청했다.

싸우다가 웃고, 다시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장난을 쳤다.

어쨌거나 그가 원하는 대로 유진의 날카로운 신경은 일시적으로나마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다시 후련한 마음으로 유진이 막 작업에 몰두할 즈음, 고요한 집 안으로 불쑥 인터폰이 울리며 두 사람의 의아한 시선이 현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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