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18화 (18/67)

❦제18화

생각지도 못한 방문객의 정체는 민석이었다. 서훈의 부모님보다 이 집에 올 확률이 더 낮은 사람 중 하나였다.

연우까지 옆에 끼고서 현관으로 들어선 그를 보며 서훈이 어이없다는 듯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어쩐 일이냐, 네가 우리 집을 다 오고.”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어?”

민석의 천연덕스러운 태도를 본 서훈이 떨떠름한 표정을 잘게 구겼다.

생전 한 번을 찾아오지 않던 민석이니, 유진이라고 반응이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반가운 것과 별개로 의아함이 더 컸다.

“너한테는 여기가 못 올 데인 줄 알았는데.”

“이건 왜 얼굴 보자마자 시비야?”

“매번 우리만 보면 욕하던 놈이 누구보고 시비래.”

밖에서도 괜히 두 사람만 보면 쌍심지를 켜고 타박하던 민석이 아닌가.

“그건 너희가 볼 때마다 솔로 염장 지르니까 그런 거고.”

“지금은 전혀 안 날리냐?”

서훈이 말끝마다 칼을 물고 받아쳤다.

“적당히 좀 해라?”

“내가 늘 하고 싶었던 말이다만.”

주방에서 커피를 준비하며 거실을 힐끔거리던 유진이 그 꼴을 보며 또 시작이냐는 듯 혀를 찼다.

연우까지 보고 있는데 둘 다 저러고 싶을까.

하여간 지겹다며 혼자 툴툴거린 그녀가 두 사람이 또 실랑이를 벌일까, 큰 쟁반에 커피를 담아 거실로 나갔다.

“솔직히 우리 집들이할 때 말고는 생전 안 온 것도 사실이잖아.”

곧장 둘 사이로 끼어들며 유진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잘라 버렸다. 민석도 딱히 싸울 생각은 아니었는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와 봤다. 어릴 때 생각도 좀 나고 해서.”

“진짜 웬일이야, 나민석답지 않게.”

일순, 유진의 눈가로 스치듯 호기심이 차올랐다.

“간밤에 예전 꿈을 꿨거든.”

“우리 고등학교 때?”

“어, 네 말대로 답지 않게 그 시절이 그립더라고.”

“하긴 그럴 때가 있지. 알 것 같다.”

확실히 최근 들어서 그는 유진이 기억하는 민석과 약간 달랐다. 장난처럼 답지 않다며 놀릴 정도로.

하지만 그 원인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한 그때부터, 변한 미래에 맞춰 민석의 성격도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그래서 온 이유가 뭔데?”

커피가 미적지근해질 즈음에서야 유진은 그에게서 찾아온 이유를 듣고, 서훈과 함께 헛웃음을 흘렸다.

그냥 좀 어이가 없었다. 나민석이 진짜 약이라도 잘못 먹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갑자기 무슨 노래방을 가?”

“가끔이야 뭐, 너희도 가본 지 꽤 되지 않았어?”

“그거랑 이건 다르지.”

기껏 마음잡고 다시 일하려는데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노래방이나 가잔다. 그 말을 듣고 황당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유진은 근래 들어서 민석에게 제법 불만이 많았다. 바쁜 민준 대신 놀아 줄 사람이 생겼다고 대놓고 연락이 뜸해진 탓이었다.

지금껏 커플 사이에 낀 솔로의 애환이 많았을 거라 짐작하고 넘겼지만, 유진도 마냥 기분이 좋진 않았다.

“저기 나민석아, 너 약 잘못 먹었어?”

유진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뜬금없이 뭔 소리야.”

“다시 말해 줘? 이상한 약이라도 먹었냐고.”

진심으로 걱정 비슷한 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는 아무거나 함부로 먹지 말라며 그에게 당부까지 덧붙였다.

이건 또 뭔 소리인가, 말없이 듣고만 있던 민석이 와락 인상을 썼다.

“넌 노래방 가면 약 처먹은 거냐?”

“사람마다 다르지. 게다가 넌 나민석이고.”

“지금 장난하냐, 서유진?”

급기야 날을 세우며 그가 유진의 말을 되받아쳤다.

“한창 바빠 죽겠는데 진짜 무슨 바람이야?”

“가끔은 스트레스도 풀고 그러자고, 너도 괜찮지?”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리며 묻는 민석에게 연우는 난처한 듯 웃으며 수긍했다.

‘저거 웃겨, 민준이하고도 안 저랬는데.’

새로 생긴 막내가 그는 어지간히도 귀여운가 보다. 가늘게 실눈을 뜬 채, 유진은 그런 두 사람을 신기한 듯 빤히 주시했다.

굳이 귀찮게끔.

둘이 놀아도 될걸. 여기는 왜 쳐들어와선. 이미 그에게는 서훈이나 유진의 의견 따위는 안중에 없어 보였다.

“거봐라, 얘도 괜찮다잖아.”

“퍽이나 가고 싶겠다, 너 그거 협박으로 보이거든요.”

연우에게 어깨동무하는 그를 보며 유진이 작게 콧방귀를 꼈다.

난감하게 웃는 연우의 모양새가 딱 봐도 개운치 않다. 진짜 좋아서 끄덕인다기보다 대충 분위기 때문에 장단을 맞추려는 것처럼 보였다.

“흐음…….”

어떻게 된 게 나이를 먹을수록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유진은 나날이 달라지는 민석이 마냥 낯설게 느껴졌다.

“그럼 이유라도 말해 봐.”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유진이 다시 물었다.

솔직히 다짜고짜 노래 타령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뭐 때문에 갑자기 쳐들어온 건지도.

“무슨 이유를 말해?”

“갑자기 여기 쳐들어와서 노래방 타령하는 이유.”

뻔뻔하게 웃으며 그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글쎄, 친구니까? 딱히 이유 없는데.”

“미친놈 아냐, 이거.”

“누구보고 미친놈이야, 주서훈 주제에.”

“그럼 아니었냐?”

유진만큼이나 뜬금없기는 서훈도 마찬가지였다. 황당하게 민석을 쏘아보는 서훈 곁에서 그녀가 팔짱을 낀 채, 덩달아 추임새를 넣었다.

“내 말이. 쟤 좀 이상하지?”

“조금이 아니라 오늘 좀 맛이 가 보여.”

“에이, 그래도 그 말은 좀 그렇다.”

민석은 그게 또 거슬리는 표정이었다.

“커플이라고 이럴 때까지 꼭 티를 내야겠냐.”

은근히 눈을 치켜뜬 민석이 짜증스럽게 두 사람을 번갈아 쏘아봤다.

“어차피 못 나가, 지금 수정중이거든.”

“뭐야? 수정을 또 해?”

“…어, 며칠째 계속.”

그 말과 함께 유진의 고개가 급격하게 쳐지다 이내 바닥까지 곤두박질칠 기세였다. 조금 나아진 기분이 잠깐 사이, 다시 가라앉은 탓이었다.

유진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왜 갑자기 쳐들어와서 겨우 풀어 놓은 기분 망쳐?”

그때까지 심드렁하게 서 있던 서훈의 눈매가 그 반응을 보며 매섭게 눈이 치켜 올라갔다.

“내가 뭘 어쨌다고.”

“으으, 됐어. 둘 다 그만해. 안 그래도 죽기 직전이란 말이야.”

그제야 서훈의 팔을 잡은 유진이 고개를 내저으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시베리아 벌판처럼 싸늘하게 변한 분위기로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듯 민석이 급히 헛기침을 했다.

“크, 크흠! 그건 내가 미안하다.”

“…….”

“생각이 짧았네, 컨디션도 바닥일 텐데.”

“알기는 하냐? 하여간 나민석 진짜.”

유진의 만류로 입을 닫은 서훈이 이를 갈며 그를 책망했지만, 가뜩이나 싸한 분위기는 한층 더 무거워질 뿐이었다.

낭패감을 느낀 민석이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찰나, 의외로 구원 타자는 곁에 있었다.

“그, 그냥요!”

대뜸 입을 연 소년에게로 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갑자기 자신에게 시선이 다 쏠리자 연우가 당황한 듯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게요, 저기.”

“둘 다 눈 풀어라. 지금 애 당황한 거 안 보여?”

쭈뼛거리는 모양새를 보며 민석이 혀를 찼다. 그에게서 조금 전까지의 미안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보면 막둥이 아들인 줄 알겠다.

기가 막히는 모습을 내보이며 그는 한순간에 유진과 서훈의 어이를 어딘가로 날려 버리고 말았다.

* * *

“그, 그게요. 스트레스는 술로?”

연우는 소심 발언을 시작으로 덩달아 술을 외친 유진과 함께 거실에선 때아닌 술 파티가 벌어졌고, 그게 슬슬 한 시간을 채워가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유진을 뜯어말리려던 서훈도 어느 순간, 포기한 듯 함께 잔을 기울였다.

생각보다 일이 너무 커졌다.

끝나지 않는 술자리에 지친 듯 연우가 옆을 곁눈질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민석마저도 집에 돌아갈 생각 자체가 없어 보였다.

그중에서도 연우를 제일 당황시킨 사람은 유진 앞에서만 다정해지는 서훈의 태도였는데.

“…행복하겠지만 너를 위해 기도할게. 기억해, 다른 사람 만나도 내가…….”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가 음악도 없이 노래를 작게 흥얼거렸다. 허밍처럼 들리는 가사는 알 길 없는 서글픔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거의 끝부분에 가서야 그녀는 서훈을 따라 노래를 따라 부르며 옅은 미소를 드러냈다.

“매번 느끼는 건데 가사가 참 슬퍼.”

“맞아, 게다가 주서훈이 부르면 목소리가 또 찰떡이지.”

“그래서 들을 만은 하셨고?”

“응, 완전.”

연우가 민석과 함께 살기 시작하고도 시간이 꽤 흘렀다.

지금까지 그들과 몇 번이나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유독 서훈과는 말을 섞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타인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인 성격이었다. 게다가 민석과도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탓에 더 친해지기가 어려운 탓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연우의 머릿속에 남은 서훈의 이미지는 확고했다. 과묵한 사람이라고 정의 내려져 있는 것처럼.

‘그래, 분명히 그랬는데…….’

술에 취한 채, 유진에게 팔을 걸치고 연신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은 소년에게도 제법 새로웠다.

그중에서도 두 사람의 거리낌 없는 애정 표현이 무엇보다도 연우는 당황스러웠다.

“오, 서유진 나한테 다시 반했어?”

“완전 홀딱 반했지.”

“진짜 대답할 줄은 몰랐는데, 이거?”

“방금 거 진짜 잘 불렀거든.”

짜증스럽게 인상을 쓰며 민석이 들으라는 식으로 불만을 늘어놓을 만큼 그들은 자기들의 세계에 빠져들고는 했다.

“아씹, 저것들 또 둘이 좋다고 속닥거리고 있네.”

말 그대로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고 할까.

“하나 더 불러 줄까?”

“그럼 이번에는 이거 불러 봐, 뭐냐면…….”

“음? 뭐라고? 너무 작아서 무슨 말인지 안 들렸는데.”

“그러니까, 무슨 노래냐면…….”

아직 십 대인 연우는 술 대신 콜라를 마시는 척 화기애애한 두 사람을 곁눈질로 힐끔거리며 살폈다.

여전히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서슴없이 귓가에 속삭이고, 볼을 꼬집기도 하며 타인의 눈도 의식하지 않았다.

유진이 장난처럼 씩 웃으며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자 서훈이 곤혹스럽게 미간을 찡그린 뒤,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윽, 그 노래는 힘들어.”

“괜찮아, 네가 불러 주는 건 다 좋거든.”

“뭐, 네가 그렇다면야.”

들어주기 힘든 부탁인 듯했지만. 장난처럼 팔을 붙잡은 연인에게 서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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