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진짜 불려 주려고? 역시 내 애인이야.”
“그래서 애인 마음에 들어?”
“당연한 걸 물어, 마음에 쏙 드니 데리고 있지.”
“우리 서유진 기분 좋은가 봐. 칭찬도 평소보다 후하고.”
유진을 바짝 끌어안은 채, 기분 좋은 듯 목덜미에 얼굴을 문지르며 서훈이 소리 내어 웃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스킨십은 점점 더 진해졌다. 아마도 얼큰하게 오른 술기운으로 평소처럼 치는 장난인데도 더 과한 것이리라.
여태껏 장난처럼 짜증 난다는 민석의 불만을 자주 듣기는 했다. 그래도 저렇게까지 둘만의 세계에 푹 빠진 모습은 연우에게도 거의 처음이었다.
“뭐야, 너희끼리 뭘 자꾸 속닥거리는 건데.”
불만에 찬 시선으로 민석이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썼다.
여전히 무언가 거슬리는 듯 그들에게서 휙 고개를 돌려 버린 민석이 손에 쥔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징글징글한 것들, 매번 저러지.”
“나민석 조용히 해봐. 다시 노래 부른다잖아.”
“뭐? 방금 불러 놓고 또 불러?”
미간을 찡그리며 민석이 되물었다.
“내가 듣고 싶으니까, 또 불러 주는 거지?”
“몰라서 물었겠냐, 내가.”
취기로 이미 얼굴까지 붉게 달아오른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듣고 싶은 거랑 대신 불러 주는 게 무슨 상관이냐는 눈이다.
하지만 그 떨떠름한 표정도 관심 없다는 듯 술잔을 들어 올린 유진이 민석에게 먼저 줄줄이 이유를 늘어놓았다.
“이거 마시고, 나 다시 밤샘이거든. 그만 일해야지.”
“그랬냐? 많이 남았어?”
“조금, 그래서 나 죽을까 봐 쟤가 응원가 한 곡 뽑는 거.”
그렇게 왁자지껄한 가운데 서훈이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잔을 밑으로 내렸다.
이번에도 그가 부르기 시작한 노래는 가사가 꽤 슬픈 발라드였다. 부탁한 유진의 취향이 담긴 것 같았지만.
“하아, 저 노래도 꽤 오랜만에 듣는다. 어릴 때 진짜 좋아했는데.”
그 순간, 스치듯 연우는 볼 수 있었다.
감탄하며 웃는 미소에 가려진, 왠지 모르게 서글픈 기색으로 연인을 바라보는 그녀의 알 길 없는 눈동자를.
* * *
거실은 사소한 잡음을 빼면 대체로 사방이 고요했다. 게다가 사실 잡음이라고 해 봤자 별거 없었다.
마우스 딸깍거리는 소리와 펜 움직이는 소리, 거실에서 독서 중인 서훈이 책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조금만을 중얼거리는 유진의 애원이 고작일 뿐.
“으으, 여기만 더 하면…….”
그녀가 다시 작업에 몰두한 뒤로 적당히 술이 깬 민석은 알아서 연우와 돌아갔다.
서훈은 배웅하는 대신, 눈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것 또한 그들에게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일상이었다.
매번 만날 때마다 티격태격하고, 으르렁거리는 사이라고 해도 오래된 친구라는 건 이렇게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이리라.
“으아! 드디어 끝났다!”
불현듯 유진이 고함을 내지르며 두 팔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쳤다.
놀란 듯 허공에서 그의 손이 뚝 멈춰 섰지만, 금세 읽던 곳까지 책갈피를 끼운 뒤에야 서훈이 작업실로 넌지시 고개를 돌렸다.
“죽다 살아난 목소리네, 완전히.”
유진에게 매번 구박받는 서훈의 고질적인 버릇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세세한 부분이었다.
어느 순간이라도 읽던 페이지를 꼼꼼하게 체크하는 일.
그렇지만 대충 덮어 놨다가 나중에 읽던 곳을 찾지 못하면 꽤 번거롭다는 걸 서훈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난 거야?”
작업실로 간 서훈이 반쯤 늘어진 유진의 어깨를 손으로 꾹 누르며 물었다.
“맞아, 진짜로 이제 끝!”
“며칠 동안 고생 많았다, 우리 꼬꼬마.”
“진짜 죽다 살아난 기분이야.”
들리는 그대로였다. 며칠 만에야 겨우 수정을 끝낸 유진의 컨디션은 지금 최상이었다.
요청 온 부분이 끝난 거겠지만.
단순하게 생각을 정리한 그가 생글생글 웃는 유진을 보며 덩달아 미소 지었다.
‘내가 원래는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서유진 애인 시작하고부터 갈수록 망가져 가는 제 모습을 느낀 듯, 서훈이 씁쓸함을 삼켰다.
뭐, 이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니 크게 상관은 없다. 사람 좋아해서 변하는 마음이야, 인력으로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이제 당분간은 좀 편하려나?”
“음, 재수정이 들어올 것 같진 않으니까 아마도.”
장난처럼 건넨 질문에도 그녀는 마냥 좋아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말끝이 흐지부지 흩어졌다,
저거 누구 여자인데 저렇게 귀여워. 그런 유진을 보며 서훈이 배를 잡고 웃었다.
하는 짓만 보자면 아직 열여덟의 서유진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서훈이 작게 큭큭거렸다.
“어째 너, 대답이 조금 애매하다?”
“하, 하, 글쎄. 저걸로 팀장이 바로 오케이하면 좋긴 하겠다.”
유진도 할 말이 없어졌는지 뒷덜미를 매만지며 괜히 딴청을 부렸다. 눈을 도르륵 굴리는 모양새가 본인도 확답을 내리기는 힘든 모양이다.
어른스러운 척해도 역시 열여덟이 분명하다. 어쩌면 그때보다 조금 더 나이가 하향 곡선을 타고 있을지도.
밀려오는 졸음 때문인지, 반쯤 감긴 채로 모니터를 보던 유진의 눈은 언제부턴가 강한 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참, 진아.”
“응? 갑자기 왜?”
“별건 아니고 방금 수정한 거.”
“방금 수정한 거 뭐?”
“그거 업체에 메일까지 다 보낸 거 확실하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냥 생각나서 물어본 거였다.
워낙 덤벙거리는 성격이 아닌가. 곁에서 직접 챙겨 주지 않으면 며칠 밤낮으로 작업해 놓고, 메일 보내는 걸 잊어버리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아, 그거.”
“솔직히 너 가끔 잊어버리잖아.”
생글생글생…… 뚝.
걱정스러울 만큼 환하게 웃던 유진의 표정이 삽시간에 정색하듯 굳으며 서훈을 빤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언제 웃었냐는 듯 싸늘하게 돌변하는 모습이 가히 신기할 지경이었지만.
“저기, 진아.”
그제야 서훈은 깨달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말을 잘못 꺼냈음을.
“주서훈, 너…….”
“노려보지만 말고, 좀.”
실수했다, 이거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쁜 애인 낙인이라도 찍힐 분위기가 아닌가.
“너는 이 상황에 꼭 그걸!”
“설마 아직도 안 보냈어? 다 했다며.”
“…….”
재차 확인하듯 묻자 유진이 연신 조잘거리던 입을 꾹 닫아버렸다.
뒤늦게 난감해진 서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제 손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이 눈치 없는 남자야.”
원망 가득한 눈길을 마주하자니, 괜히 더 곤란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아, 난 그게 아니라 걱정이 돼서…….”
“이럴 때 산통을 깨야겠어?”
금세 시무룩해진 유진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그에게 못 됐다고 마구 투덜거렸다,
저럴 거면 차라리 대놓고 불만을 쏘아붙이는 것도 괜찮을 것을.
생각보다 마음이 쓸데없이 여린 서유진은 주서훈에게 투덜거리면서도 크게 화를 내진 못했다
쯧, 그냥 알아서 하게 둘 걸 그랬나.
서훈이 낮게 혀를 찼다. 은근히 자주 잊어버리는 성격이라 물어본 건데, 타이밍이 영 나빴다.
“뭐, 어차피 지금 새벽이고.”
“미안, 미안. 기분 망칠 생각은 아니었어. 다시 가라앉았어?”
다시 웃기를 기다리는데 표정이 영 별로다. 뒤늦게 그가 은근슬쩍 달래듯 유진의 기색을 살폈다.
“아예 바닥 쳤어요, 애인님아.”
가늘게 실눈을 뜬 유진이 그를 지그시 노려보며 툭 한마디를 뱉었다.
“이런, 너무 대놓고 들으니까 좀 마음 아프다.”
“됐어, 퍽이나 아프겠다.”
유진이 입매를 비틀었다.
다시 나빠지려는 기분을 드러내려는 것 같았지만, 서훈에게 비친 연인은 장난처럼 심술을 부리는 걸로 보일 뿐이었다.
“그냥 너 혼자 노세요.”
“에이, 서유진 왜 또 그러냐.”
몇 년을 사귄 연인인데 그거 하나 못 알아챌까.
“어쨌든 조금 더 좋아하다가 메일 쏠래.”
“그건 또 왜?”
“무섭잖아, 바로 재수정 들어오면 이제는 파고 들어갈 땅도 없어.”
벌써 며칠째 보냈다가 다시 수정하고, 또 보내고, 또 재수정하고를 유진은 끊임없이 반복하는 중이었다.
다 끝냈다고 만세를 외치면서 보내도 저쪽에서 재수정 요구가 들어오면 해줘야지, 유진이라고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뻔히 알기에 서훈은 더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참에 메일 보내지 말고, 먼저 하루 푹 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보내기 전에 실수로 휴지통에 넣지 말고?”
서훈은 괜히 더 장난스러운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후우, 주서훈 오늘 좀 맞을까?”
“…큭큭.”
“웃는 것 봐. 아주 재밌어 죽겠지?”
말없이 손을 내저으며 서훈이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아직도 엉망으로 뻗친 머리카락을 부스스 흐트러트렸다.
스르륵.
허공에서 부스러지는 파도처럼 손길로 닿는 머리카락이 산산이 부서지는 감각이 눈이 아닌 손으로 느껴졌다.
이런 게 좋다.
손끝으로 닿는 머리카락의 부드러운 감촉, 늘 같은 샴푸를 쓰는데도 유독 달콤한 향을 풍기는 유진만의 향기도 그는 모두 만족스러웠다.
“재수 없는 주서훈, 매번 나 놀리는 재미로 살지.”
“어라, 그거 어떻게 알았어?”
“웃지 말랬지? 난 기껏 고생고생해서 일 끝냈는데.”
“하하! 우리 마누라 진짜 귀엽다니까.”
머리 위에서 머무르던 손을 밑으로 내려 그가 유진을 끌어안은 채, 크게 웃었다.
아, 진짜로 좋다.
사귄 지가 몇 년째인데 갈수록 좋아져서 어떻게 하지. 은은하게 풍기는 익숙한 향이 피부로 스며드는 것처럼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이렇게 쭉 너랑 함께하겠지.’
서훈은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믿고 있었다.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어린 날의 상처들도 돌이켜 보면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고, 아주 가끔 생각하고는 했다.
“그만 화내고. 배고픈데 내가 김치볶음밥이라도 해줄까?”
“김치… 볶음밥……?”
“저번에 본가에서 가져온 김치 아직 남았더라고.”
귀가 솔직해지는 제안에 유진의 뾰로통한 기세가 한결 누그러졌다. 오늘 식사 당번은 서훈이 아닌, 그녀였기 때문이다.
“뭐, 본인이 직접 하겠다면야.”
“베이컨도 조금 넣을까?”
“어? 뭐, 넣으면 좋고. 마음대로 해.”
조금 전까지 얼굴 팍 꾸기고 투덜거리더니, 금세 또 좋단다. 김치볶음밥에 홀랑 넘어간 연인을 보며 서훈이 소리 죽여 웃었다.
하여간 단순한 것도 귀엽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