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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앓다-20화 (20/67)

❦제20화

서훈의 본가에서 행사가 있었다. 그의 형인 서준의 상견례가 저녁으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자리가 늦어지는 건지, 서훈에게 통 연락이 없었다. 모니터에 적힌 시계를 보며 유진이 현관으로 시선을 던졌다.

본능처럼 연신 손을 움직이면서도 그림이 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신이 좀 산만한 모양이다.

“왜 이렇게 늦지?”

아까 길어지더라도 열 시까진 들어오겠다고 했는데.

괜히 초조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다시 작업에 몰두하는 사이, 멀찍이 현관에서 도어락 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일순, 모니터로 향한 유진이 휙 고개를 치켜들었다. 거의 밤 열 시가 코앞이 아닌가. 이제야 서훈이 돌아온 것이다.

“왜 이렇게 늦었어, 걱정되게.”

작업실을 나선 유진이 거실로 들어서는 서훈에게로 다가갔다.

“어머니가 자꾸 붙들더라. 밥은?”

“나야 뭐, 대충 배달로.”

“잘했어, 귀찮아도 챙겨 먹어야지. 몸 축나.”

정말 칭찬이라도 하듯 그녀의 머리 위로 서훈이 손을 푹 얹었다.

“뭐야, 애도 아닌데.”

“칭찬이지, 서유진 어린이 잘했어요, 같은.”

가볍게 농담을 툭 던진 뒤, 서훈이 꽤 피곤한 듯 재킷을 벗자마자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털썩 앉았다.

쪼르르 옆에 따라 앉는 유진을 보며 서훈이 넥타이까지 쭉 끌어 내렸다. 그에게는 상견례 자리가 어지간히도 불편했던 모양이다.

“피곤해 죽겠다는 얼굴이네.”

“하아, 정답. 격식 차리는 건 딱 질색이라서.”

“주서훈답다고 할까.”

평소에도 회사가 아니면 그런 격식 갖추는 자리는 싫어하는 남자가 아닌가.

그래도 형 상견례라고 나름 잘 버텼네. 그러려니 수긍하며 유진이 주방에서 시원한 냉수 한 컵을 따랐다.

“상견례는 어땠어?”

“비슷하지, 뭐.”

금세 가져온 냉수를 건넨 뒤, 옆에 앉으며 유진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뭐야, 궁금했는데 감상은 그게 끝?”

“어차피 형식상으로 만든 자리잖아, 알면서 그래.”

“그런가? 하긴 결혼까지 얘기 끝냈다고 했었지?”

며칠 전, 그에게 미리 들었던 집안 상황을 떠올리며 유진이 수긍했지만, 그는 무언가가 영 거슬리는 눈치였다.

“형수로는 별로야, 그 여자 인성도 안 좋고.”

“으음, 그 정도야?”

“뭐, 본인이 직접 골랐으니 별수 없긴 하지만.”

말 그대로 정략결혼이었다. 당사자끼리 좋아서 날을 잡은 것도 아니고, 적당히 예의를 차리기 위한 형식상의 자리인 셈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가족 다 모인 자리였을 텐데.

서훈의 태도가 영 심드렁했다. 형과 친하지 않은 탓이겠지만, 그가 본가를 다녀올 때면 유진은 그 태도가 마음에 걸리고는 했다.

“그런데 꽤 오래 걸렸네, 상견례 얘기 나온 건 제법 되지 않았어?”

“형한테 개인 사정이 좀 있어서.”

예상보다 시기가 늦어서 의아했는데 다른 사정이 있었던 건가. 무슨 사정이냐, 더 물으려던 유진은 그냥 조용히 입을 닫았다.

어차피 한 다리 건너가 아닌가.

서훈의 부모님과 왕래하는 사이라고 해도 꼬치꼬치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잘 끝나서 다행이다.”

“그럭저럭은.”

“형이거든? 남의 일처럼 말하긴.”

픽 웃으며 유진은 쓸데없이 말이 길어질까, 씻고 나서 쉬라며 그를 재빨리 욕실로 들여보냈다.

“아후, 모르겠다. 일이나 마저 하자.”

욕실의 문이 닫힌 걸 확인한 뒤에야 유진이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이며 작업실로 들어갔다.

어떤 여자길래 저렇게 질색을 하지.

괜히 유진은 자신까지 덩달아 심란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하던 작업은 마무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샤워를 끝낸 서훈은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무언가 할 말이 남은 눈치였다.

“나한테 따로 할 말 있어?”

작업하던 손을 멈추며 유진이 비스듬히 고개를 틀었다.

“그냥 어머니가 전해 달래서.”

“어머니가?”

느슨하게 풀어진 채로 서훈을 올려다보던 유진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상체를 곧게 세웠다.

갑자기 어머니가 무슨 일이시지. 괜히 따끔해진 심장이 긴장한 듯, 마구 날뛰었다.

“뭘 긴장을 해,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그거야 네 입장이지, 내가 아니라.”

아직도 어렵다고. 입술을 쭉 내밀며 유진이 고백하듯 작게 투덜거렸다.

아마도 지레 찔려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조만간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말을 듣고도 이래저래 바빠서, 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탓이었다.

“얼른 얘기나 해 봐, 어머니가 뭐라셔?”

“아, 그거. 이번 주말에 본가에서 같이 식사나 하자더라.”

“설마, 이번 주 주말?”

유진이 당황한 듯 되묻자 서훈이 끄덕이며 쓰게 웃었다. 반가운 소식이 아님을 아는 탓이리라.

“미안, 본 지 오래됐다고 자꾸 널 찾으시더라.”

“오히려 감사해야지, 예뻐해 주시는데.”

“감사까지 할 필요도 없어.”

“그래도 그게 아니지. 집안도 내가 한참 밑지잖아.”

유진이 별생각 없이 말하며 어머니의 편을 들었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반듯한 눈썹이 위로 휙 치켜 올라갔다.

그러더니 돌연, 서훈이 그녀의 턱을 휙 잡아챘다.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랬지?”

“사실이긴 하잖아, 뭘 일일이 예민하게 굴어.”

“네가 어디가 어때서.”

시선이 꽤 날카로웠다, 화가 난 것처럼.

“뭐, 집안 차이도 큰 편이고.”

“우리 집도 방계라 돈 많아도 친척들이 다 무시해.”

그런 생각 따위는 하지 말라는 듯 서훈의 목소리가 제법 단호했다.

“알았어, 그 말 백번쯤 들은 거 알지?”

유진은 조심스럽게 제 턱을 쥔 서훈의 손으로 제 손을 겹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끄덕였다. 스스로를 낮추는 말이 그의 화를 부추긴 듯했다.

“불편하면 대신 바쁘다고 연락할게.”

“됐어, 따로 할 말 있으신지도 모르는 건데.”

서훈은 신경 쓰지 말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게 쉬울 리 없다. 통 소식이 없으니 답답해서 아예 날을 잡으셨을 테니까.

* * *

일이 많아서인지, 의외로 일요일까지는 눈 깜짝할 사이였다. 이미 점심은 본가에서 어머니와 점심 약속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외출 준비를 서두르는 서훈과 달리, 유진은 아까부터 계속 무언가를 하듯 손에서 핸드폰을 통 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으음, 여기가 괜찮으려나?”

연신 핸드폰으로 괜찮은 가게를 검색하며 유진은 어머니께 선물할 디저트를 찾는 중이었다.

마카롱. 푸딩. 터키쉬딜라이트. 화과자. 크로칸슈. 파이.

세상엔 먹어 보지 못한 디저트가 참 많기도 하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블로그를 뒤적거리는 손길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두 곳 다 들리면 오래 걸리나?’

유진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나갈 시간이 다가올수록 긴장되는 건지, 괜히 더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만 같았다.

“진아, 나갈 준비 안 해?”

“어? 이제 입어야지. 그보다 넌…… 벌써 다 했네.”

준비를 끝낸 서훈을 본 유진이 난처하게 웃었다. 너무 이쪽으로만 신경이 쏠린 모양이다.

하긴 핸드폰만 죽어라 보고 있었으니, 의아해 보일지도. 이럴 땐 쉽게 고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제 성격도 크겠지만.

“아까부터 뭘 그렇게 찾아?”

궁금한 듯 서훈이 손에 든 핸드폰으로눈짓을 했다.

“그냥 빈손으로 갈 순 없잖아.”

“지금까지 선물 찾았어?”

“응, 몇 개 찾기는 했어. 이거 괜찮아 보이지 않아?”

화면을 가득 채운 디저트 가게 리뷰를 슬쩍 보여주며 유진이 되물었다.

“화과자라, 무난하긴 하다.”

“역시 무난한 게 제일 낫겠지?”

“아무래도 그렇지 않나, 선물용이니까.”

“오케이, 그럼 출발해서 여길 먼저 들렀다 가자.”

결정한 듯 웃으며 유진이 곧장 손에 든 핸드폰의 화면을 껐다.

“처음 인사 가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이것도 마음이잖아, 빈손은 좀 그래.”

한숨 섞인 말을 뱉어내며 유진이 자리에서 곧장 일어났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서훈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 양해를 구한 뒤, 재빨리 꺼내놓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선물은 미리 캡처한 가게를 들러, 디저트와 차를 준비하면 될 거고. 이동 거리와 시간을 가늠해 본 유진이 거실로 급히 나갔다.

“늦어서 미안, 얼른 가자.”

두 사람은 그녀의 의견을 따라 캡처해 둔 가게를 먼저 들렀다. 오래 고심한 만큼 디저트의 질도 좋고, 제법 쓸 만한 가게였다.

유진은 제 무릎에 놓인 선물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듯 미소 지었다. 운전 중이던 서훈이 그 모습을 곁눈질로 힐끗 살폈다.

“마음에 들어?”

“응, 솔직히 뭘 사나 고민했거든.”

“그래서 고른 게 디저트야?”

“다른 건 많을 테니까. 이건 가볍게 먹기 좋잖아.”

딱히 이해한 눈치는 아니었지만, 서훈은 네가 좋으면 된다는 식이었다. 유진도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선물은 그 마음이 중요하니까.

물론, 상황에 따라 좀 다르기는 했다. 디저트는 서훈의 부모님이 당뇨가 없으셔서 가능한 선물이었으니 말이다.

“차가 안 막혀서 금방이네.”

“그러게, 주말인데도 도로가 어쩐 일로 뻥 뚫렸던데.”

“우리 빼고 다른 커플은 죄다 시외로 놀러라도 갔나?”

“으이그, 시간이 일러서겠지.”

서훈과 키득거리는 사이, 골목으로 접어든 차가 고급스러운 전원주택 앞에서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여전히 거대하다, 늘 그의 본가를 올 때면 유진은 생각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서훈은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대신, 입구에서 차를 세웠다.

“왜 여기서 멈춰? 안 들어가?”

“아직 시간이 이르잖아, 미리 말해 둔 시간도 좀 남았고.”

일부러 그녀에게 긴장 풀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지만, 굳이 서훈은 그녀에게 콕 짚어서 알려주진 않았다.

일찍 도착했다는 것만큼 보기 좋은 핑계도 드물었다. 덕분에 도착하고도 서훈의 차는 무려 30분이 더 지난 뒤에야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자주 놀러와, 이러다 얼굴 다 잊어버리겠다.”

“그동안 너무 뜸했죠? 죄송해요.”

“됐어, 죄송은 무슨. 저 녀석보다 네가 더 살가워서 그러지.”

집 안으로 들어선 유진에게 본가의 어머니는 반가움과 동시에 자주 찾아오지 않는 서운함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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