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그녀는 아들보다 유진을 더 각별히 아껴 주는 분이셨고, 서훈의 결혼 상대로서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일등 공신이기도 했다.
“어머니, 전 안 보이세요?”
“넌 하루 이틀 보니? 알아서 앉아.”
뒤따라 들어서는 아들은 이미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누가 보면 장모님한테 밉보인 사위인 줄 알겠네,”
“됐어, 별소리를 다 해.”
옆에서 듣던 유진이 민망했던지 보이지 않게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태도가 익숙한 듯, 서훈은 별다른 반응도 없이 곧장 소파로 갔다.
금세 유진도 그를 따라 소파로 이동했다. 그때까지는 가끔 본가에서 함께 식사하는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머, 맞다! 내가 한 사람 더 불렀는데, 깜박했네.”
그건 유진의 안일한 생각이었다.
“…네? 다른, 사람이요?”
“갑자기 부른 거라 말해 줄 틈이 있었어야지, 내가.”
보일 듯 말 듯 유진의 콧잔등이 잘게 찡그려졌다.
“그러… 셨어요……?”
미안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웃는 어머니를 본 유진이 차마 울 수도 없어, 그냥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저희하고 같이 식사하자더니.”
“넌 좀 빠져. 유진이랑 지금 얘기중이잖아.”
“하아, 어머니.”
“이렇게 다 큰 놈이 눈치가 없어.”
당황한 유진 대신, 서훈이 항의 섞인 목소리를 높였지만, 눈을 흘기며 어머니는 그를 타박할 뿐이었다.
약간 답답하다는 뉘앙스였다.
쓸데없이 나서지 말라는 듯 재차 서훈을 흘겨본 뒤, 어머니는 부드러운 어조로 달래듯 유진을 설득했다.
“해가 될 사람이야 내가 불렀을까. 괜찮지?”
“아, 네. 그럼요.”
“다행이다. 저 녀석보다 네가 당황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제 손을 잡고 토닥이는 어머니에게 유진은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며, 언제나처럼 미소 지었다.
솔직히 좋진 않았다.
본가라는 것도 불편한데, 제삼자라니. 누굴 불렀는지도 알 길이 없으니, 조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몇 년을 왕래하면서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애써 태연하게 웃으며 신경 쓰지 마시라 넘겼지만, 반대로 신경이 쓰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넌 참아.’
짜증스럽게 구겨진 서훈의 표정을 보며 은근슬쩍 얼굴 펴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나마 이곳에서 저 남자까지 짜증을 내면 가시방석인 사람은 유진, 자신뿐이었으니 말이다.
* * *
‘그래도 이건 좀…….’
설마하니 한 명 더 불렀다는 사람이 서훈의 큰 형수가 될 여자인 줄은 몰랐는데.
하필이면 제일 껄끄러운 상대가 아닌가.
현관으로 들어서는 낯선 여자를 보며 유진은 차마 드러내지 못한 곤혹스러움을 삼켰다.
“타이밍이 좋네, 서훈이 짝은 처음 보지?”
“네, 오래 사귄 연인이 있다는 말은 서준 씨한테 들었어요.”
“우리 서준이가 그런 소리를 했어?”
그녀가 제법 놀란 듯 말꼬리를 높이 올렸다.
“약간만 들려줬어요, 동생 일이라.”
“어머, 무뚝뚝한 녀석이 너한테는 잘하나 보다.”
거실로 들어서며 그녀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 모습이 몇 년을 알고 지낸 유진보다 더 친근해 보였다.
“서준 씨가 은근히 자상하더라구요.”
“내 여자다 싶어서 그런 거야. 다른 사람한테는 얼마나 쌀쌀맞은데.”
손을 내저으며 어머니는 기분 좋은 듯 방긋 웃었다.
나란히 앉은 유진은 반대로 더 불편해지는 것만 같았다. 서훈도 이 상황이 거슬리긴 마찬가지인 듯, 곁눈질로 본 표정이 썩 좋진 않았다.
입장이 달라서일까.
알고 지낸 시간과 비례하기엔 위치가 너무 달랐다. 저쪽은 곧 며느리가 될 사람이 아닌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유진과 달리 꽤 여유로워 보였다.
차라리 최대한으로 날짜를 더 미뤄 볼 걸 그랬다. 유진은 반가워하는 하린을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가시방석이 된 상황을 후회했다.
“주하린이에요, 얘기는 많이 들었었어요.”
“아, 서유진이라고 해요.”
먼저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친절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괜찮으니까, 말 편하게 놔요.”
“그래도 초면이라서.”
“뭐 어때요, 나중에 동서지간 되면 자주 볼 얼굴인데.”
어색해하는 유진과 달리 그녀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끌어내며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예의 바르게 웃는 시선 너머로 유진이 잘 정돈된 하린을 탐색하듯 남몰래 훑었다.
심플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투피스와 세팅된 웨이브의 긴 헤어스타일, 차분한 말투만 들어 봐도 좋은 집안에서 잘 배운 티가 났다.
“너희도 몇 년 안에는 식 올려야지.”
“어머니는 왜 사람 불러 놓고 재촉을 하고 그래요.”
예고 없이 두 사람에게로 튄 불똥을 느낀 서훈이 미간을 잘게 찡그렸다.
“더는 서준이 때문에 미룰 필요도 없잖니.”
“아직 형 날도 안 잡혔어요.”
“이제 잡을 거다, 상견례도 끝났고.”
결혼을 재촉하듯 어머니가 그의 말을 잘랐다. 그 은근한 재촉을 알고도 난처해진 유진은 그저 생각해 보겠다며 웃을 뿐이었다.
식사하는 내내 가시방석은 그대로였다. 어머니와 주하린까지 함께인 식사 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하린이는 찬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다.”
“맛있어요. 아주머니 솜씨가 좋은 것 같아요.”
“다행이다, 주 회장님댁 아줌마가 솜씨가 좋대서 걱정했는데.”
“어머, 그런 소문이 났어요?”
눈앞에서 즐겁게 얘기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유진은 씁쓸함을 삼켰다.
집안 운운하는 대화에 끼어들 수도 없었다.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밥을 넘기며 유진은 얼른 이 불편한 자리가 끝나기를 바랐다.
주하린은 성격도 꽤 좋아 보였다.
못마땅해 했던 서훈을 떠올리며 유진은 서훈이 무언가를 잘못 알고 있으리라, 가볍게 흘려 넘겼다.
착해 보이는데. 괜히 본인도 모를 오해를 다잡으며 유진은 그녀에게 조금 늦은 미안함을 느꼈지만 그것도 오래지 않아, 착각임을 깨달았다.
하린이 실수인 척 유진의 손등으로 뜨거운 물을 쏟아 버린 것이다. 아니, 처음에는 고의인 줄도 몰랐다.
“앗! 뜨거!”
“어머, 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워서.”
놀란 유진이 급히 차가운 물로 손등을 가져가며 통증을 참듯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아윽, 괘, 후, 괜찮아요.”
“이걸 어째, 많이 쓰라릴 텐데.”
“약간은, 참을 만해요.”
식후 차를 준비하겠다는 하린을 따라 들어온 주방이었다. 유진은 고심해서 직접 선물한 차를 하린이 자기 것처럼 만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같이 만들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다.
“그거, 진짜로 괜찮아요?”
“네, 그럭저럭.”
“…그래요?”
“찬물에 식히면 돼요. 그보다 차 먼저 부으셔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횡설수설하며 데인 손등을 식히는 찰나, 뒤에서 툭 튀어나온 중얼거림을 유진은 확실하게 들었다.
“뭐야, 듣던 것보다 약골이잖아.”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하린의 그 한마디를.
이건 또 무슨 어이없는 소리야. 손등으로 차가운 물을 끼얹던 유진이 일순, 그녀에게로 휙 고개를 돌렸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네?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하린이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뚝 뗐다.
“분명 약골이 어쩌구 하셨잖아요.”
“잘못 들었겠죠, 내가 그런 말을 왜 해요?”
“내가 바보로 보여요?”
괜히 거실까지 대화가 새어나갈까, 유진이 소리를 죽이며 하린을 매섭게 노려봤다.
“하아, 나 참.”
이미 다 들켰다고 여긴 탓일까. 본색을 드러내듯 팔짱을 끼며 주하린이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겨우 그런 걸로 엄살은.”
“엄살? 이봐요, 지금 말이면 다 되는 줄 알아요?”
“없는 것들이 꼭 눈치만 빨라서는.”
사람이 어이없어서 말문이 막힌다더니, 그게 이런 상황에 쓰는 말인 모양이다.
“……이 여자가 진짜!”
뻔뻔해도 저렇게 뻔뻔할 수가 없다. 그녀를 보며 유진은 기가 막혀서 손등의 쓰린 통증마저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제야 확실하게 알아차렸다. 이 여자 실수인 척 유진에게 일부러 뜨거운 물을 끼얹은 것이다.
“그쪽이 내 손등에 뜨거…….”
“뭐야, 서유진 너 손등 왜 이래?”
그때였다, 중간에서 말을 자른 서훈이 놀란 듯 유진에게로 달려왔다.
“어? 아, 훈아.”
“다쳤어? 손등이 왜 이래?”
“별거 아냐, 그냥 좀.”
한 박자 늦게 유진이 뒤로 손등을 감췄지만, 이미 서훈에게 들킨 뒤였다.
“나랑 장난해? 별거 아닌데 이렇게까지 벌게져?”
“조금 데었어. 그보다 여긴 왜 왔어?”
“뭘 왜야. 네가 통 나올 생각을 안 해서 들어왔지.”
벌겋게 달아오른 유진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며 그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됐어, 살짝 덴 거라니까.”
“그러니까, 주방엔 뭐하러 따라와서 다쳐, 속상하게.”
혹시라도 대화를 들었을까. 곁눈질로 서훈을 살폈지만, 그는 둘밖에 없다는 듯 온 신경을 다친 손등에 쏟았다.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주하린이었다.
“서훈 씨, 죄송해요.”
“뭐가 말입니까.”
소름 돋게도 그녀는 다시 아까의 그 태도로 돌아가 있었다. 미안해 죽겠다는 목소리가 선뜩하게 와닿았다.
“제 실수로 데었는데 유진 씨가 계속 괜찮다고 하셔서.”
이미 냉동실에서 얼음까지 꺼낸 채, 하린은 다친 유진이 걱정되는 듯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면서.
“그러지 말고 유진 씨, 얼음찜질이라도 좀 하자.”
“…하, 기가 막혀서…….”
이건 누가 봐도 미안해하는 하린을 그녀가 스스로 쳐 낸 상황이 아닌가. 유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가 할 테니 어머니께나 가 보세요. 이 일은 제가 알아서 하죠.”
“그래도 저 때문인데.”
“미안하시면 비밀로 하죠, 우리끼리 묻고.”
하린의 말을 냉정하게 자르며 서훈이 곧장 그녀를 주방에서 내보냈다. 마치 무언가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저기, 나 괜찮으니까.”
“하나도 안 괜찮은 거 알아.”
“…….”
“그것 봐, 내가 저 여자 거슬린다고 했잖아.”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서훈이 혀를 찼다.
“어떻게 된 건지 아는 눈치네.”
“그러고도 남을 여자야, 미리 알려 줄걸, 내가 실수했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유진은 직감했다.
그나마 안심한 듯 표정을 풀며 이유를 넌지시 물었지만, 오히려 그는 덴 손등을 얼음으로 찜질하며 거실을 흘깃거릴 뿐이었다.
“여긴 좀 그러니까, 이따 가는 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