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어쩌다 보니,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본가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쉬워하는 기색을 드러내면서도 어머니는 차마 그들을 잡지 못했다.
사실 반쯤은 주하린의 짓이었다.
비밀로 하자는 서훈의 말을 무시하듯 그가 유진을 챙기는 사이, 실수인 척 그녀가 다친 유진에 관해 어머니에게 늘어놓은 것이다.
본가를 벗어나고 5분쯤 지났을까. 길게 뜸 들일 것도 없다는 듯 그는 유진이 궁금해하는 부분에 관해 먼저 말꼬를 텄다.
“그 여자, 사실 알게 된 지는 1년쯤 됐어.”
“어? 원래 알던 사이였어?”
“내 쪽은 아닌데 그 여자는 아는 모양이더라.”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서훈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게 뭐야, 못 알아듣겠잖아.”
“나도 처음 만난 기억은 없거든. 본인이 뱉은 말이야.”
생각만 해도 진저리난다는 듯 인상을 쓰는 연인을 보며 유진이 덩달아서 미간을 찡그렸다.
어쩐지 좋은 얘기는 아닌 듯했다. 게다가 한 번 겪어 본 과거에서도 이런 상황이 벌어진 기억은 전혀 없었다.
또 무언가 달라진 건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 여자가 상대로 찍은 사람은 나였을걸.”
“뭐? 너희 형이 아니라?”
유진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의문이거든, 뭔가 꿍꿍이가 있을 텐데.”
“하는 짓 보면 그런 타입이기는 하겠다.”
“다른 의미로 주서준도 만만치는 않을걸.”
하린의 뻔뻔한 모습을 떠올리며 유진이 수긍하자 가만히 듣던 서훈이 픽 웃었다.
“다른 게 어떤 의미인데?”
“뭐, 그 음흉한 속내로 비교를 해 보자면.”
서훈은 가족이면서도 자신의 형을 살벌하게 평가했다. 듣다 보면 이따금 가족보다는 원수처럼 느껴질 만큼 사이가 먼 것도 문제였고.
딱히 서준과 개인적으로 만날 일이 없었던 유진은 그 신랄한 평가에 의아하게 갸웃거렸다. 그러다 이내 이어지는 과거 얘기에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러니까…….”
주하린이란 여자는 서훈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자기 남편감으로 점 찍었단다. 그 기준점은 자기도 모르겠다며 서훈이 고개를 내저었다.
첫 만남도 어느 자선 파티라는데 서훈은 전혀 기억이 없다고.
두 번째로 서훈이 그 여자를 만난 날도 비슷한 자선 파티였다. 굳이 싫다는데 반 강제로 끌고 온 서준 때문에 유독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었는데.
‘어머, 우리 여기서 또 보네요?’
‘…죄송하지만 누구시죠?’
‘기억 안 나요? 우리 두 달 전 A그룹 자선 파티에서 인사도 나눴는데.’
‘글쎄요, 별로 기억이 없어서.’
‘뭐 상관없죠. 다시 인사하면 되니.’
자선 파티에서 하린은 연신 귀찮아하는 서훈의 곁을 맴돌며 말을 걸었고, 나중에는 짜증이 나서 그대로 거길 나와 버렸다.
‘주하린이에요. 이번에는 나 기억하죠?’
거기서 끝난 줄 알았지만, 아니었단다.
어떻게 알았는지 서훈에게 먼저 연락한 그녀는 사업 운운하며 정략결혼의 운을 띄우기까지 했다.
“그래서 넌?”
말없이 듣고만 있던 유진이 불쑥 서훈에게 물었다.
“당연히 바로 거절했지.”
“흐음…….”
“나한테 서유진이 있는데 그딴 미친 여자를 왜 만나?”
“말은 참 잘하지, 우리 주서훈 씨.”
퉁명스럽게 받아친 유진의 입가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미소가 도드라졌다.
서훈의 그 당연하다는 어조가 제법 기분이 좋았다. 나빠지려던 기분이 저 입 발린 몇 마디로 스르륵 풀려 버린 것이다.
어쨌거나 얘기는 끝이 아니었다.
하린은 그의 단호한 거절로 꽤나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문도 종종 퍼트렸다.
심지어는 공사 구분도 못 한다. 자기 아버지를 통해 서훈이 대표로 있는 회사에 압박을 가한 적도 몇 번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마다 도와준 게 바로 서준이었다.
물론, 이번 결혼도 그녀가 앙심을 품은 행동일 가능성이 컸다. 뻔히 알고도 무슨 생각인지, 서준이 수긍했다는 것이다.
“다 알면서 받아들인 거라고?”
“그래, 나한테 상담을 좀 받더니만, 그대로 오케이했더라.”
어째서냐는 눈빛으로 보자 서훈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머니의 반응으로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그러니 아직 예비 며느리인데도 저리 하린을 살뜰하게 챙기는 거겠지만.
“그런데 무슨 상담을 했는데?”
“별거 없었어. 저번에 네가 민석이한테 해 준 조언 그대로 말했으니까.”
“정답을 모르겠으면 그냥 눈 딱 감으라던 거?”
아파트로 들어선 차의 시동을 끄며 서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인상 깊었거든, 그때 그 말이.”
“그랬어? 별생각 없었는데.”
그저 후회하던 민석이 떠올라서 무심코 뱉은 말이었다. 서훈에게는 다른 식으로 그 말이 와닿은 듯했다.
“살다 보면 가끔 정답을 알 수 없을 때가 있으니까.”
그대로 핸들에서 손을 뗀 그가 시트로 깊이 기대며 한숨처럼 작게 내뱉었다.
“있지, 살면서 그런 순간이.”
“그래서 크게 와닿은 건지 모르겠다, 나도.”
“한 번쯤은 갖는 경험이니까.”
누구보다 그 경험을 제대로 겪는 사람은 나겠지만. 차오른 말을 삼키며 유진이 애써 무심하게 말했다.
혼란스러운 시선을 그에게서 숨기듯 투명한 유리 너머를 주시했다. 지하 주차장의 어두운 형광등이 짙은 잔상을 남기며 흩어져갔다.
각자 생각이 많아졌는지 대화는 그 상태로 더 이어지지 않았다. 이따금 데인 손은 괜찮냐는 물음이 끝이었던 서훈도 한참 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형도 생각이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거 좋아서 하는 결혼이 아니라는 거네, 결국은.”
복잡해 뵈는 상황에서도 유진은 그 하나의 결론이 뚜렷했다. 서훈도 아니라는 말 대신, 긍정하듯 기지개를 켤 뿐이었다.
어쩌면 이용하는 건, 서로가 마찬가지겠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 * *
집으로 돌아오고도 유진은 다른 날보다 유독 멍한 상태가 이어졌다.
정확하게는 생각이 많은 탓이었지만, 아까의 일 때문이라는 오해를 정정하는 대신, 유진은 쓰게 웃을 뿐이었다.
“너무 걱정이 과해.”
“쓸데없이 너무 멍하니까, 그렇지.”
“긴장이 조금 풀렸나 봐.”
본가에 찾아간 건 오랜만이지 않았냐. 걱정하는 서훈을 달래듯 받아치며 유진은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웃었다.
“거기서 괜한 여자한테도 휘말렸잖아.”
“아, 그 여자. 아직도 생각 중이야?”
“어쩔 수 없어, 네가 바로 내 앞에서 다친 거라서.”
“살짝 덴 건데, 뭘 그래.”
태연하게 구는 유진과 달리, 서훈은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그러지 말라며 한숨 섞인 부탁을 한 뒤, 일부러 그를 욕실로 떠밀었다.
타-닥.
문이 닫히자마자 유진은 지친 얼굴로 거실 바닥에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서훈 앞에서 계속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소파로 갈 정신도 없이 머릿속이 시끄럽게 윙윙 울렸다. 억지로 욱여넣은 숨을 뱉어 내며 화끈거리는 손을 위로 들었다.
“단순히 다친 거면 좋은데, 생각보다 이게 복잡하단 말이지.”
유진으로선 그저 단순히 주하린이란 여자를 가볍게 욕하면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모르는 척 눈을 감기에는 늦었을지도.
또 바뀐 현재.
여전히 바짝 곤두선 신경은 단 하나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다시 또 눈에 띄게 달라진 미래를 직접 겪고 있으니까.
가볍게 또 달라졌다고 여긴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심코 뱉은 자신의 한 마디였다.
그래, 비교하자면…….
“나비 효과인가?”
젓가락을 움켜쥔 채로 생각 없이 중얼거린 유진이 한 박자 늦게 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뭐야, 서유진.”
“…어?”
바로 앞에서 그가 테이블을 툭툭 치며 유진의 얼굴을 살폈다.
“밥 먹을 때까지 멍하고.”
“그러니까, 으음…….”
“흐음, 아까 진통제가 너무 독했나?”
“아냐, 그런 거.”
어색하게 웃으며 유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도 서훈은 못 믿겠다는 얼굴로 관찰하듯 그녀를 빤히 주시했다.
하여간 이 남자, 은근히 눈치 하나는 진짜 빠르다니까. 혀를 내두르며 유진이 자연스럽게 하소연처럼 이유를 주르륵 늘어놓았다.
“진짜 아니라니까. 급한 수정이 들어와서.”
“그 일도 징하다, 또 들어왔어?”
“비슷해, 그게 자꾸만 신경 쓰여서 더 그런가 봐.”
대충 생각나는 대로 일 때문이라 둘러댄 뒤, 무작정 젓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으로 밀어 넣었다.
“적당히 고민하고 먹어, 그러다 몸 축나겠다.”
가만히 보던 서훈이 낮게 혀를 찼다.
“먹고 있어, 걱정 그만하고 너부터 먹어.”
“그 와중에 서방이라고 나 챙겨 주는 거야?”
“하도 쳐다봐서 내 얼굴 뚫어질까 봐, 슬슬 무섭거든요.”
“흐음, 어쨌건 기분은 좋다.”
씩 웃는 서훈을 따라 입꼬리를 휘어 올리며 유진은 다시 또 조금 전으로 머릿속의 필름을 감았다.
분명 시작은 민석에게 던진 조언, 한마디였다. 그걸로 민석의 선택이 달라지면서 연우와의 인연이 새롭게 생겨났었다.
나비 효과와 같은 현상.
서훈이 다시 그 말을 형에게 조언이라며 건넸고, 과거엔 없던 서준의 정략결혼이 추가되면서 주하린이란 인물과 유진의 악연까지 연결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어디까지 뒤바뀌는지도 유진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되길 바라지만, 오늘 만난 하린만 봐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느 쪽일지도 미지수.
본색을 드러낸 여자에게선 분명한 적의가 느껴졌었다. 어쩌면 서훈에게 향한 앙심까지 고스란히 돌아오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진아, 아직도 그 상태야?”
“제대로 밥 먹고 있어, 보고도 몰라?”
“멍한 건 그대로인데.”
태연하게 젓가락으로 반찬을 짚으며 유진이 쓰게 웃었다. 어쨌거나 긴장한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조금 피곤해서, 나 오늘 긴장 많이 했거든.”
“천천히 먹어, 진짜 얹히겠다.”
어느샌가 식사를 끝낸 서훈이 감시하듯 가늘어진 눈으로 손등에 턱을 걸친 채, 그녀가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냐며 유진이 핀잔을 늘어놔도 소용없었다. 그는 요지부동으로 씩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