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23화 (23/67)

❦제23화

시선을 견디다 못해 유진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꼭 감시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아, 몰라. 어차피 매일 보는 얼굴인데 마음대로 하세요.”

“걱정 마, 절대 질리는 일은 없으니까.”

“사람 일이야, 두고 봐야 알지.”

“너무 부정적인 거 아냐?”

불만인 듯 비스듬히 고개를 꺾으며 서훈이 받아쳤다.

“속담에도 있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정확하지 않은 정보야. 그런 건 신용하지 않는 게 좋아.”

누가 회사 대표 아니랄까 봐.

“먹고 얹히면 다 주서훈 탓이야.”

“설마, 이 서방님이 널 아프게야 할까. 안 그래?”

무심히 반찬을 집어 올리던 유진의 팔이 그 순간,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방금 건 느끼했어, 너도 알지?”

눈을 치켜뜨며 그에게 되물었다.

어릴 땐 과묵했는데. 느끼한 멘트를 줄줄 늘어놓는 서훈이 그녀는 가끔 신기했다.

“흐음, 나름대로 진심이었는데.”

“가짜라고는 안 했어.”

“내가 널 아프게 할 일이 뭐가 있다고 예민하게 굴어.”

이미 아프게 했어, 너만 모르는 거지. 씁쓸하게 삼킨 뒷말과 함께 어딘가에 남은 흉터가 도드라지게 존재를 드러냈다.

더는 안 될 것 같다.

서훈에게 대강 배불러서 못 먹겠다 얼버무린 뒤, 유진이 다시 작업실로 발길을 돌렸다.

바쁘다는 말 때문일까. 연신 곁에 붙어서 장난을 치던 남자가 작업실로 간다니, 더는 붙잡지 않았다.

‘그래도 일이 변명거리가 되는 날이 있긴 하네.’

쓰게 웃으며 작업실로 간 그녀가 문을 닫으며 지금까지 참았던 숨을 단번에 쏟아냈다.

“하아…….”

미간을 찡그리며 유진이 제 손등을 위로 들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벌겋게 부어오른 피부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손끝으로 덴 부위를 조심스럽게 건드리다 이내 유진이 낮게 신음했다. 서훈이 걱정할까, 일부러 감추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통증이 심한 탓이었다.

* * *

시간이 지나고도 통증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곧 나아질 거라, 여겨서인지 날이 갈수록 통증이 심해졌고, 나중에는 작게 물집까지 잡혔다.

서훈의 눈을 피하는 것도 며칠이 끝이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그가 상처를 살피려고 하자 유진은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언제 이 지경까지 됐어?”

“며칠 안 됐어, 곧 괜찮아질 줄 알았지.”

“이게 어디를 봐서.”

뒤늦게 물집 잡힌 걸 본 서훈의 반응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됐어, 괜찮다니까.”

“안 되겠다, 당장 병원부터 가자.”

연락하지 그랬냐고, 차마 유진을 끌어당기지도 못한 채, 서훈은 전전긍긍했다.

“그냥 뭐, 죽을 정도는 아니었어.”

“혼자라도 병원을 가던가. 이걸 왜 이제야 말해.”

“지금처럼 네가 걱정할까 봐.”

물집이 잡힌 손등을 내려다보는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서훈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물집 위를 쓰다듬으며 작게 혀를 찼다.

“약은? 사다 발랐어?”

“응, 약사가 병원까진 갈 필요 없다길래.”

약간의 거짓말을 보태며 유진이 잡힌 손을 자연스럽게 빼냈다.

약은 사다 발랐고, 병원은 가는 게 좋다고 했으니 적절히 섞은 하얀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가자, 내일이라도.”

“굳이 뭐하러. 병원까지 안 가도 된다니까.”

“그냥 가, 덧나면 어쩌려고 그래.”

하지만 그는 영 안심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유진이 쓰게 웃으며 수긍하듯 끄덕였다.

“알았어, 조만간 아는 병원으로 예약 잡자.”

“굳이 조만간 일 필요는 없지.”

내일이라도 당장 가자는 서훈에게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약도 없이 가면 오래 기다려야 하잖아.”

“큰 병원으로 갈 거야, 걱정 마.”

“바로 예약이 되려나. 안 되는 경우도 많던데.”

동네 의원은 시끄러워서 싫다는 뜻이었지만, 걱정할 것 없다며 서훈이 돌연 씩 웃었다.

저건 또 무슨 의미야.

도무지 의미를 모르겠다. 의아하게 빤히 쳐다보자 서훈이 대뜸 손에 쥔 핸드폰을 위로 들었다.

“인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그렇게 다음 날 아침부터 서훈과 함께 온 병원은 집에서도 꽤 멀리 떨어진 시 외곽의 큰 대학 병원이었다.

인맥이 어쩌고 한 말은 농담이 아니었는지, 이미 유진의 이름으로 전산엔 예약이 올라가 있었다.

서훈의 말로는 간단한 신상만 읊어 주고, 이곳에서 의사를 하는 친구에게 예약만 대신 부탁했단다.

뭐, 그 정도는 나쁘지 않다.

갑질 소리 들을 정도의 일이었으면 한 소리 늘어놨을 텐데. 말 그대로 순수한 인맥이었던 모양이다.

“서유진 씨.”

금세 간호사의 호명을 듣고,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그림자처럼 곁에서 따라 일어나는 서훈에게로 그녀가 반쯤 고개를 틀었다.

“갑자기 왜? 얼른 들어가자.”

“혼자 들어가도 돼. 내가 꼬마야?”

한숨을 푹 내쉬며 유진이 그의 팔을 꾹 잡았다.

“같이 들어가도 상관없잖아, 내가 보호자고.”

“주서훈 씨, 나 중병 환자야?”

“의사 얘기 들으려고, 네가 제대로 말 안 해 줄 거 뻔하니까.”

하여간 핑계도 참 가지가지다. 보통 커플은 이 만큼 사귀면 척, 하면 척이라고 하던데.

이런 남자한테 왜 그렇게 목을 매나. 우스운 생각을 흘려 넘기며 기어이 그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갔다.

“끓는 물을 쏟으셨다고 했죠?”

의사는 얘기를 다 듣고 난 뒤, 유심히 손등을 살피다가 확인차 되물었다.

“네, 화기 식히려고 얼음으로 찜질도 했어요.”

“흐음, 처치는 꽤 잘하셨는데.”

“괜찮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물집까지 잡혀서.”

“열탕 화상이라 그럴 겁니다. 물집은 터진 뒤엔 조심하셔야 하고,”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가 연고를 잘 발라서 크게 덧나진 않을 거라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화상이 심한 겁니까?”

그때 의사의 말을 자르며 서훈이 불쑥 끼어들었다.

“글쎄요, 2도 화상치고는 약한 편이긴 합니다만.”

“흉이 지거나 하진 않겠죠?”

“아마 환자분의 상처 관리가 한몫하지 않을까요?”

조용히 상담하는 유진과 달리, 서훈은 연신 요란스럽게 질문을 던지며 그녀를 난감하게 했다.

적당히 그의 질문을 받아 준 뒤, 의사는 친절하게 몇 가지를 더 당부하며 간호사 호출 버튼을 눌렀다.

금세 간호사를 따라 나와, 손등의 처치를 끝냈다. 반창고를 감고 나오는데 손등을 본 건지, 놀란 듯 서훈이 급히 다가왔다.

“다 끝났어? 통증은 좀 어때?”

“괜찮았어, 이제 처방전만 받으면 끝인가?”

반창고를 붙인 쪽의 팔을 부축하는 서훈을 보며 유진이 포기한 듯 웃고 말았다.

“간호사가 별다른 말은 없었어?”

“응, 처방전 받아서 가시면 된다고 하던데.”

“대학 병원 서비스가 왜 이래?”

“그러려니 해, 딱 봐도 피곤해 보이잖아.”

괜히 간호사한테 따지러 갈까, 유진은 급히 반대 팔로 서훈을 잡아채며 얼른 수납이나 하러 가자, 그를 재촉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별거 아니라는 의사의 태도가 유진을 안심시켰다. 통증이 적지 않아서 긴장한 데다 일하면서도 지장이 컸기 때문이다.

그사이, 서훈의 고집도 한풀 꺾인 티가 났다. 함께 병원을 나선 유진은 그런 연인이 또 안쓰러워서 일부러 투정 부리듯 그의 팔을 붙들었다.

“배고프다,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뭐가 됐든 누구보다 자신을 먼저 챙기고 걱정해주는 남자가 아닌가. 가끔은 귀찮아도 이런 것 또한 나쁘지 않았다.

* * *

과거로 돌아왔다고 해도 큰 틀이 달라졌을 뿐, 모든 프리랜서가 그렇듯 유진의 일상은 언제나처럼 단조롭게 흘러갔다.

점심쯤 일어나서 간단히 씻고, 밥 대신 습관처럼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멍한 정신을 깨우는 일종의 자극제였다.

그렇게 한두 시간쯤 거실을 뒹굴고서야 유진은 작업실로 가서 전날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며 작업을 다시 이어나가는 식이었다.

오늘이라고 딱히 다를 건 없었다.

“으음, 저기선 이게 아니라, 조금 더 길게 하고.”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유진이 연신 들어줄 사람도 없는 혼잣말을 되뇌며 이내 뒷머리를 헝클었다.

헐겁게 묶은 머리카락이 그 거친 손길에 몇 가닥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게 귀찮은지 유진이 제 목덜미를 털어냈지만.

“아, 진짜 왜 이러지?”

화면을 주시하는 표정이 한층 더 짜증스럽게 구겨졌다.

여름이라 늘어져서 그런가. 이번 주 들어 작업할 때마다 영 그림이 마음에 차게 그려지질 않으니, 짜증이 적지 않았다.

테블릿 위로 움직이던 손이 몇 번이고 다시 멈추기를 반복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탓인지, 유진이 연신 제 입술을 짓씹었다.

‘오늘 파업할까, 며칠 동안 정신이 안 차려지네.’

그림 작업이 매번 그렇다. 사소하게 무언가 눈에 밟히기 시작하면 몇 십 번을 반복해서 고쳐도 영 성에 차지 않고는 했다.

유진에게는 이번 주가 유난히 그런 상황이었다. 최근에 일을 몰아서 했더니 번아웃이라도 오나.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지쳐 있었다.

서훈에게서 연락이 온 시기는 그 짜증이 거의 맥스치에 다다를 즈음이었다.

“오기만 해 봐, 이번엔 나 진짜로 화낸다?”

―혹시 기분 안 좋아?

유진이 이를 악물며 음산하게 말하자 스피커에서 그가 당황한 듯, 어색한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그럼 또 조퇴하니까, 좋다 이럴까?”

―난 저번에 네가 다치기도 했고, 일도 빨리 끝나서…….

“멀쩡하거든, 그게 언제 적인데?”

벌써 까마득하게 지난 일을 들먹이는 서훈이 그녀는 영 못마땅했다. 그 손등의 화상도 거의 다 나았으니, 그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없었다.

‘어디서 자꾸 약을 팔아, 이 남자가?’

일찍 오는 게 싫어서가 아닌 건 맞다. 따지고 보면 서훈이 없을 때마다 찾아오는 공허함도 못 견디게 힘들었다.

하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가 아닌가. 그 과정에서 엄하게 눈총을 받는 상황이 싫은 거라, 홀로 곱씹으며 유진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뱉었다.

“훈아, 나 김 비서님한테 자꾸 눈치 보여.”

―…어? 김 비서?

“이번 주에만 그 사람 우리 집에 몇 번 온 지는 기억해?”

급기야 쌓인 진심을 유진이 슬쩍 드러냈지만, 이런 부분에서 그는 은근히 둔했다.

―아, 그거 때문이었어? 집으로 오지 말라고 할까?

“그 말이 아니잖아, 이 웬수야.”

그래, 주서훈한테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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