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24화 (24/67)

❦제24화

유진이 와락 인상을 썼다. 서훈은 그녀가 김 비서와 부딪치는 자체만으로 그냥 불편함을 느끼는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일할 때는 안 저러는데 가끔 보면 생각이 참 단순할 때가 있었다. 모니터를 뒤로한 채, 그녀가 다시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김 비서님이 날 뭘로 보겠어.”

―뭘로 보다니, 그런 사람 아닌 거 너도 알면서.

“그건 네 입장이고. 내 입장은 다르지.”

꼬맹이 걱정하듯 과한 걱정만 할 줄 알았지. 이런 부분에서 그는 영 타인의 상황을 이해할 줄 몰랐다.

타고난 성향이라기보다 그런 환경에서 배려받으며 자랐으니 그럴 수밖에. 유진은 알 것 같은 상황을 떠올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요즘 들어서 일찍 퇴근하는 날이 많았잖아.”

―별로, 그렇지도 않은데.

“원래 갑의 시선하고 을의 시선은 다를걸. 안 그래요, 갑님?”

―묘하게 찔리는 말이네, 그거.

일부러 찔리라고 던진 말이야, 이 남자야. 애써 간질거리는 말을 삼키며 유진이 소리죽여 웃었다.

“한번 생각해 봐, 너도.”

―…어떤 걸?

“맨날 아프다고 내가 너한테 조르는 것처럼 보일 거 아냐.”

짜증을 내기보다 유진은 그가 알아듣게끔 설명했다. 그러고는 골이 지끈거리는 듯 미간을 꾹 누르며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를 탁 끊었다.

“하아… 오죽했어야지, 내가.”

천장을 빤히 올려다보며 유진이 미간을 잘게 구겼다. 푹 파인 미간으로 언제부턴가 짜증과 답답함이 가득 차올랐다.

그럴 수밖에.

솔직히 유진도 처음에는 그가 반쯤 고의로 저러는 줄 몰랐으니 말이다.

‘어? 이 시간에 웬일이야?’

‘가끔 퇴근이 빠를 때가 있잖아, 일 바빠?’

‘나야 늘 비슷하지, 뭐.’

대뜸 연락도 없이 퇴근한 연인이 그냥 반가웠던 것 같다. 그만큼 일찍 들어오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먹고 싶은 건 갑자기 왜?’

‘퇴근할 때 사 갈게. 배달보단 그게 낫잖아.’

‘으음, 그렇긴 한데…….’

‘아버지가 자주 가시던 한정식집 있거든. 거기서 보양식이나 사 갈까?’

‘거기 포장이 되긴 하는 곳이야?’

‘당연하지. 원래 인맥이 좋은 거라니까.’

전화를 끊은 뒤, 그는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양손 가득 포장된 보양식을 든 채로 퇴근했다.

아마도 그때가 오후 네 시쯤.

유진은 일찍 들어온 서훈에게 오늘은 또 어쩐 일로 퇴근이 빠르냐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얼렁뚱땅 포장된 음식을 들이밀었다.

그게 몇 주 넘게 수시로 반복되며 유진이 이상함을 느끼는 찰나, 급한 서류를 들고 김 비서까지 집으로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그 피곤해 죽겠다는 시선이라니.

유진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더 김 비서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웃으면서 넘기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김 비서로 인해 가뜩이나 바짝 곤두선 유진의 신경은 나날이 예민해져만 갔다.

나중에는 아예 서훈을 직접 붙잡고 물었더니, 대답은 더 기가 막혔다.

‘저번에 다친 이후로 네가 영 눈에 밟히더라고.’

고작해야 저 말이 끝이었다. 본가에 가 있는 것도 아닌데. 눈에 밟히는 것도 많다.

핑계 한번 좋다는 생각과 함께 그때부터 유진은 그가 퇴근하려는 낌새만 보였다 하면 지금처럼 바짝 날을 세우고는 했다.

“하여간 진짜 과하다니까.”

저 홀로 투덜거리는데, 다시 또 책상에서 핸드폰이 잘게 울렸다. 아직 미련을 못 버렸나 봐. 인상을 쓰며 유진이 짜증스럽게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가 아닌 메시지였다.

의아하게 눈을 치켜뜨며 메시지를 연 유진의 손이 내용을 확인한 순간, 당황한 듯 허공에서 뚝 멈춰서고 말았다.

주서준입니다. 좀 뵙고 싶은데 시간 나실 때 이쪽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화면엔 장난스러운 서훈의 메시지 대신, 딱딱한 존칭과 함께 낯선 번호가 찍혀 있었다.

서훈의 형, 주서준이었다.

* * *

카페 귀퉁이에 앉아, 유진이 차가운 커피가 담긴 잔을 만지작거리며 연신 입구를 흘깃거리며 살폈다.

유진에게는 본가의 부모님과는 다른 의미로 불편한 사람이 그의 형이었다. 늘 무심히 굳은 시선을 기억하는 탓이었다.

이유를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주서준도 만만치 않다던 서훈의 말이 떠올라서인지, 그의 이미지도 썩 좋지 않았다.

도대체 뭘까, 주서준이 직접 연락까지 한 이유가.

서준과는 이미 지나온 미래에서도, 다시 돌아온 이곳에서도 큰 접점이 없었으니, 더 의아할 수밖에.

생각을 곱씹는 사이, 낯선 발소리가 점점 더 유진에게 가까워졌다. 이내 고개를 들자 익숙한 듯 낯선 얼굴이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늦었군요,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저도 이제 막 온 참이라.”

어색하게 웃으며 유진이 손을 내젓자 알겠다며 그가 자연스럽게 양해를 구한 뒤, 호출 버튼을 눌렀다.

“주문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굳이 대답을 원한 건 아닌 듯, 곧장 호출한 직원에게 서준은 커피 한 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냉정해 보이는 남자였다.

깔끔하게 잡힌 주름이 그대로인 블랙의 스트라이프 재킷만 봐도 서준의 성정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유진은 어렴풋한 서준의 기억을 떠올렸다. 날카로운 시선과 은테 안경, 슈트만으로도 기억과 전혀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타-닥.

목을 축이듯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에야, 서준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선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네? 갑자기 무슨 사과를 하신다는 건지.”

불쑥 쏟아진 사과에 당황한 건 오히려 유진이었다.

“서훈이한테 대강의 얘긴 전해 들었습니다.”

“……?”

“제 불찰입니다. 그 여자가 유진 씨한테까지 손을 뻗칠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웬 사과를 하나 싶었더니만, 예상외로 가장 먼저 튀어나온 화제가 주하린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 서준은 곧 결혼할 상대인데도 하린을 가리켜 그 여자라고 대놓고 지칭했다.

결혼은커녕, 오히려 진저리치는 뉘앙스가 아닌가.

유진은 그 이유를 스스로가 깨달았다. 그 여자가 깽판 친 서훈의 회사 뒷수습을 형이 도와줬다니, 진절머리가 날 만도 했다.

“이제 상처는 좀 괜찮으십니까?”

“네? 아, 이거…….”

무심코 손을 들어 올린 유진이 잘게 미간을 찡그렸다. 저도 모르게 그때가 떠오른 탓이었다.

뒤늦게 이젠 다 나았다며 손을 내린 유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큰 탈이 아니라서.”

“걱정하셨나 보네요, 별일 아닌데.”

“서훈이 녀석이 하도 난리를 쳐서, 골이 좀 아팠죠.”

그랬었냐, 쓰게 웃으며 유진이 잔을 들어 올렸다. 괜히 겸연쩍으니 절로 손부터 나갔다.

“그런데 연락처는 어떻게 아셨어요?”

“실례인 줄 알지만, 어머니께 부탁 좀 드렸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하다고 덧붙이는 소리에 아니라며 유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거고.”

“그 말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서훈이 형님이시잖아요, 기분 나쁠 리가 없죠.”

끄덕이며 조용히 잔을 내린 서훈이 돌연, 테이블에 놓은 핸드폰으로 눈을 내렸다.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미간이 깊게 파이는 걸 보니, 꽤 바빠 보였다. 역시나 얼른 대화를 끝내려는 건지, 그는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사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저한테요? 무슨 부탁을?”

“별건 아닌데, 서훈이 녀석 말입니다.”

유진이 불편함을 감추듯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휙 고개를 치켜들었다.

“서훈이요?”

“예, 최근에 김 비서와 통화를 좀 했는데 뜻밖의 말이 들리더군요.”

어쩐지 무슨 얘기가 나올지 대충 짐작이 갔다. 요즘 툭하면 조퇴하는 주서훈의 행동, 그거밖에 없었다.

재빨리 눈치챘어야만 하는데.

너무 늦게 알았다. 서훈의 농땡이를 자신이 덤터기 쓰는 느낌이 들자 유진은 괜히 더 억울했다.

“트집 잡을 생각은 없습니다만, 가운데서 조율을 약간 해 주십사.”

“조율이라면 어떤 식으로…….”

“아무래도 회사는 보는 눈이 많잖습니까?”

“그렇죠, 심지어 대표니까.”

유진이 애써 표정을 유지하듯 파들파들 떨리는 뺨 근육을 다잡았다.

“유진 씨에게 부탁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어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기분 탓이겠지만, 그 조율이라는 말이 좋게만 들리지 않았다.

듣기에 따라 너니까 부탁한다는 뉘앙스일 수도 있고, 너 때문이니 해결하라는 식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 아닌가.

“혹시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절대 아닙니다. 제가 그 녀석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혹시 몰라서 물었더니, 오히려 뜯어말렸을 유진의 행동까지도 그는 꿰뚫어보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일은 제대로 하더군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저도.”

“아버지 귀에 나쁜 소문이 안 들리는 것도 그 이유겠죠,”

급기야 서준보다 더 골치 아픈 듯 유진이 나직하게 숨을 내뱉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꼭 반절쯤 제 탓처럼도 느껴졌다. 그동안 너무 나 몰라라 한 건 아닐까 싶었다.

그때 서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김 비서는 원래 아버지의 수행 비서였습니다.”

“네? 김 비서님이요?”

놀란 듯 유진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그가 알려 주듯 말했다.

“물론, 서훈이도 잘 알고 있죠.”

“그런데도 회사를…….”

“자기 멋대로 구는 대표처럼도 보일 수 있겠고.”

시작은 서훈의 독립이었다.

자기 사업하겠다는 아들을 걱정한 아버지가 수행 비서 중 하나를 그쪽으로 보내며 그의 보필을 부탁한 것이다.

재벌가에선 그런 식으로 자식에게 직원을 보내기도 하는 건가. 그 부분에서 유진은 꽤 놀랐다.

수긍보다 지켜보겠다는 의미가 더 커 보였다. 그래서 영 개운치 않은데도 서훈은 별 상관이 없는 듯했다.

‘그러니 김 비서를 대놓고 집안까지 들였겠지.’

상황을 파악한 듯 인상을 쓰며 유진이 혀를 찼다. 손끝이 저도 모르게 자꾸 쓸데없이 찻잔으로 향했다.

마치 감춰 둔 속내처럼 눈앞의 서준도, 미묘하게 거슬리는 기분까지 은연중에 드러나듯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