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서준은 카페를 나설 때까지도 유진에게 깍듯했다. 서훈처럼 약간 타고난 성정인 것 같았다.
무심한 표정으로도 말 한마디도 함부로 내뱉지 않았고, 대놓고 남을 자신의 밑으로 깔아보지도 않았다.
‘형제가 생긴 건 비슷한데 참 다르네, 진짜 묘하다니까.’
유진은 조금 전의 만남을 곱씹으며 새삼 본가의 어머니가 마음고생이 적지 않으셨겠구나,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아들 한 명은 제멋대로라 골치 아프고, 나머지 한 명은 딱 봐도 냉정한 데다 인간미도 없어 보이는 완벽 주의로 보였다.
그런 형 밑에서 주서훈이 꽤 피곤했을 것 같다. 팔이 안으로 기울어서 그런가.
“…훈이한테나 가 볼까?”
괜히 짠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면서 결론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 생각을 유진은 행동으로 옮겼고, 어느샌가 정신을 차렸을 땐 서훈의 회사 근처로 가는 버스 안이었다.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그녀는 한 박자 늦게 아차 싶었다. 무작정 생각 없이 움직이고 있음을 스스로가 느낀 탓이었다.
대표실은 꽤 오랜만이었다.
입구에서 만난 김 비서에게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금세 얼굴을 알아본 듯 깐깐해 보이는 남자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사엔 거의 안 오시더니.”
“잠깐 들렀어요, 안에 있죠?”
겸연쩍은 듯 어색하게 웃으며 유진이 대표실 문 너머를 흘깃 가리켰다.
“예, 지금 계십니다.”
“다행이네요, 사실 좀 걱정했는데.”
“오히려 타이밍 좋게 잘 오신 듯합니다.”
“네? 무슨 타이밍을…….”
“대표님이 제 말은 통 듣질 않으시니, 난감하던 참이었거든요.”
한숨 섞인 불만을 토로하는 김 비서의 표정은 딱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있었다.
피곤해 죽겠으니 도와줘.
소리 없이 건넨 시선을 느낀 유진이 눈살을 찡그린 채, 가볍게 수긍하듯 끄덕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김 비서는 특정하게 무언가를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바꿔 말하자면 일 때문이 아니라는 뜻일 테니까.
주서훈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든가, 아랫사람만 아는 그런 고충일 터.
“제가 도움될 게 있을까 모르겠네요.”
“들어가면 아실 겁니다, 제 말뜻을.”
어색하게 웃으며 대표실로 간 유진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멀리서도 책상에 팔을 걸친 채, 반쯤 늘어져 있는 서훈이 눈에 띄었다.
‘저럴 줄 알았어, 내가.’
아실 거라더니만. 유난히 반겨주던 김 비서를 떠올리며 그녀가 한쪽으로 입술을 비틀었다.
뒤늦게 기척을 느낀 듯 입구를 본 서훈이 놀란 듯 늘어트린 상체를 곧장 일으켜 세웠다.
“서유진?”
“하아, 참 빨리도 눈치챈다.”
“미안, 전혀 몰랐어.”
대답과 함께 일어나려는 서훈에게 그냥 앉아 있으라며 유진이 휙 손을 내저었다.
“그보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야?”
서훈이 도로 앉으며 물었다.
“뭐, 그냥.”
“단지 그냥?”
“나한테 무슨 소리가 듣고 싶어서.”
“듣고 싶은 소리야, 많지.”
생전 나오라는 말을 듣고도 한 번을 찾아오지 않던 연인이 아닌가. 불쑥 찾아온 유진이 그는 무척이나 반가운 눈치였다.
“사실은 일 잘하나 궁금해서 왔어.”
“그거 말고.”
“뭐, 보고 싶기도 했어.”
유진이 픽 웃으며 선심 쓰듯 말했다.
설마 농땡이 부리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들으라는 듯 불퉁하게 덧붙이며 그녀가 책상 가까이 다가갔다.
“놀다가 딱 걸렸네, 어쩌나.”
서훈이 투정 부리듯 웃으며 유진에게 두 팔을 뻗었다. 금세 가까워진 허리를 낚아챈 그가 기분 좋은 얼굴로 나직하게 숨을 내뱉었다.
“하아, 그래도 좀 살 것 같다.”
“언제는 죽을 것 같았고? 하여간 엄살은.”
우스운 듯 유진이 작게 목을 울리자 그가 끌어안은 허리에 제 얼굴을 간지럽게 비볐다.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지.”
“입 바른 소리하네, 혼날까 봐 선수 치는 거지?”
“아냐, 그런 거.”
“됐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은근히 눈을 흘기며 유진이 눈꼬리를 착 접었다. 생전 집에서도 잘 부리지 않는 연인의 어리광이 마냥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긴 서훈의 사무실이 아닌가.
신경이 자꾸 굳게 닫힌 대표실의 입구로 향했다. 안 되겠는지 혀를 차며 유진이 그의 이마를 장난처럼 꾹 밀어냈다.
당연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구 들어오겠다, 그만 좀 놔.”
“조금만 더.”
답지 않게 투정을 부리며 서훈이 끌어안은 팔을 더 꽉 조였다.
하여간 남 곤란하게 만드는 재주는 타고난 남자라니까. 나름대로 힘을 조절하는 것 같기는 한데.
“언제까지가 그 조금인데.”
허리가 불편한 듯 유진이 미간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으음, 백 프로 충전할 때까지?”
“무슨 충전을 해?”
“배터리. 지금 서유진 에너지 바닥이라 충전 중이거든.”
허리에 반쯤 파묻힌 고개를 치켜들며 서훈이 짓궂게 웃었다.
“왜? 아예 늘어져 있던 것도 나 때문이라고 하지?”
“그건 안 되지, 절대.”
마누라 욕 먹이는 짓은 안 한다며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으이그, 말이나 못 하면.”
“말 잘하면 더 예쁘게 봐주나?”
“웃겨, 내가 왜?”
농땡이 부리다가 걸려 놓고도 주서훈은 그녀가 어이없을 만큼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이왕이면 예쁘게 봐줘. 서방님인데.”
“할 말 없으면 맨날 예쁘게 봐달라고 하지, 주서훈.”
“아냐, 누가 할 말이 없대?”
오히려 너무 많아서 말을 못 하는 거라며 그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다.
예쁘기 봐주기는.
여기서 더 예쁘게 봐줬다가는 조퇴 못 하게 해서 회사 때려친다고 할까, 그거 더 무서운데.
“서방도 난 능력제라 안 돼.”
예쁘게 봐주기는. 단호하게 말하며 유진은 재차 품으로 파고드는 얼굴을 힘껏 밀어낸 뒤, 서훈에게서 쏙 빠져나왔다.
* * *
회사로 찾아가는 일이 드문 탓인지, 서훈은 돌아가려는 유진을 고집스럽게 붙잡았다.
“대신 농땡이 안 부릴 거지?”
“원래부터 안 부렸어, 김 비서가 일부러 나 엿 먹이는 거야.”
“갑이 을의 고충을 알 리가 없지.”
서훈의 반박은 유진에게 별 소용이 없었다. 들어와서 본 상황으로 김 비서의 말이 신용도가 확 높아진 탓이리라.
그렇게 사무실의 널찍한 소파 한편에 앉아, 유진은 제 연인이 일하는 모습을 본의 아니게 지켜볼 수 있었다.
‘꽤 근사하네, 주서훈 저런 모습도.’
드레스 셔츠의 소매를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채, 서류를 보는 서훈을 보며 유진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하나씩 따지고 보면 서훈도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깎아지르는 콧대와 짙은 눈썹, 남자다운 턱선도 크게 뒤떨어지는 외모는 아니었다.
꾸준히 운동한 몸도 제법 탄탄했다. 얇은 셔츠 너머의 탄탄한 몸을 떠올리며 유진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짓궂게 눈을 빛냈다.
“김 비서, 오전에 준 디자인팀 서류. 처음부터 다시 해오라고 전해요.”
한참이나 서류 하나를 뒤적이던 서훈이 돌연, 내선 전화를 꾹 눌렀다.
“가볍게 넘어가기엔 좀 심해. 그래요, 다음 주까지.”
밖에서 대기 중인 김 비서에게 그는 몇 가지를 지시한 뒤, 미간을 찡그리며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았다.
묘하게 각이 잡힌 모습이 꼭 그의 형인 서준과 겹쳐 보였다. 저럴 땐 은근히 빼다 박은 느낌이기는 했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사실 두 남자의 외모는 형제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았다. 지금껏 전혀 다른 성격이라, 아예 분리해서 본 것뿐이다.
그래도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은 건지, 아까 김 비서가 곤란해 보이던 것치고 서훈은 제법 열심히 일을 했다.
대표가 열심히라고 해 봤자 아래 직원들만 하겠냐만, 각자의 기준점이 다를 테니까. 적어도 유진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저 정도면 믿어 줘 볼까.
홀로 곱씹으며 농땡이 부린다는 생각을 정정하려는 찰나, 그가 서류에 박힌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진아, 기다리기 안 지루해?”
“의외로 괜찮아. 네가 일하는 것도 볼 수 있고.”
“흐음, 조금 마음이 놓이네.”
넌지시 묻던 입매가 유진의 말을 듣고서 안심한 듯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하여간 걱정도 많다, 투덜거리며 그에게 장난처럼 되물었다.
“지루할까 봐 걱정돼?”
“어쩔 수 없잖아. 간다는 사람 붙들어 놨는데.”
“뭐, 틀린 말은 아닌데.”
치켜뜬 눈이 자신에게 집중된 연인의 시선과 부딪치며 사르르 기분 좋게 녹아내렸다.
“얼른 일이나 해. 딴짓 그만하고.”
서훈이 다시 손을 놔버릴까, 괜히 유진은 딴청 부리듯 화제를 전환했지만.
“급한 건 대충 끝났어. 거기서 다 봐놓고선.”
“나야, 잘 모르니까.”
이미 끝났다니 딱히 대답할 말도 없었다. 애써 민망함을 감추듯 그녀가 태연하게 씩 웃었다.
“구박할 땐 언제고, 웃긴.”
“내가 또 언제 구박을 했어. 말은 바로 해야지.”
“조금 전까지 일 안 한다고 구박해 놓고.”
곧장 받아치는 서훈의 목소리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꽤 억울했는지 책상 너머 소파로 다가오며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또 처진 걸 보는 마음이 좋진 않았다. 유진은 책상을 한 번 흘깃 보고서야 제 곁으로 온 서훈의 손을 가볍게 토닥였다.
“알았어, 우리 주서훈 씨 고생했어요.”
“뭐야, 그걸로 끝?”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본 유진이 빼뚜름하게 눈을 치켜떴다.
“여기서 뭘 더 바라는데.”
“너무 인색해, 하다못해 뽀뽀라도 한 번 해…….”
“사무실에서 뭐하는 거야, 이 남자가.”
급기야 입술부터 들이밀려는 서훈을 피해 유진이 뒤로 고개를 쭉 뺐다.
“안 들어와, 김 비서가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
“지금 김 비서님이 문제가 아니잖아!”
매섭게 쏘아붙여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멀어진 만큼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유진의 허리를 휙 낚아챘다.
“뽀뽀만 하자.”
“네가 퍽이나 뽀뽀로 끝내겠다.”
“약속한다니까?”
“못 믿어, 네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고.”
소용없다는 듯 유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주서훈이 뽀뽀만으로 끝낼 리가 없었다.
진짜 김 비서가 문이라도 두드리면 어쩌려고.
걱정스레 입구를 흘깃거리는 유진의 걱정과 달리 서훈은 아쉽다는 듯 뻔뻔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