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26화 (26/67)

❦제26화

퇴근 후, 오랜만에 저녁 데이트를 즐겼다.

서훈의 추천으로 간 코스 일식집은 유진의 입에도 잘 맞았다. 적당히 배를 채우고서야 두 사람의 발길은 언제나처럼 근처 서점으로 향했다.

식사와 서점, 드라이브 혹은 산책, 가끔은 영화 한 편 정도가 늘 비슷한 그들의 데이트 코스였다.

“요즘 에세이가 인기 많네, 사방으로 쫙 깔렸어.”

“흐음, 입구부터 그렇긴 하더라.”

서점 한편을 바라보며 거슬린다는 듯 유진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적당히 배치 좀 하지. 저게 다 뭐야.”

“그만큼 사는 게 팍팍하잖아.”

“뭐, 듣고 보니까. 영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끝을 길게 늘이다가 돌연 유진이 기겁하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진아? 갑자기 왜 그래?”

“으, 갑자기 마감 시기에 막 쪼이던 게 떠올랐어.”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진다는 듯 유진이 인상을 쓰며 곁에서 보던 서훈이 덩달아 못마땅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 정도면 강박증이라니까.”

“나도 알아, 못 고치는 고질병인 것도.”

그래도 직업병이라 어쩔 수 없어. 일부러 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유진이 대화를 잘라내며 서훈을 앞질러 걸어갔다.

사회인이라면 누구라 하나쯤 갖는 직업병이 아닌가. 괜히 마감으로 대화가 길어져봤자 좋은 소리가 나올 리도 없었고.

서훈과 미리 장소를 정하고 데이트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신 누군가 내키는 곳이 생기면 늘 그쪽으로 방향을 정하는 식이었다.

그래서일까. 한 번 나오면 그는 꼭 본전을 뽑으려고 드는 경향이 강했는데.

“…자동차 극장?”

“우리 그동안 자동차 극장은 한 번도 안 가 봤잖아.”

“딱히 갈 필요가 없으니까.”

“지금이라도 한번 가 보자는 거지.”

이런 날이라고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됐어, 뜬금없이 거긴 뭐하러.”

“한 번쯤 구경삼아. 괜찮은 영화가 걸렸을지도 모르고.”

책을 산 뒤, 드라이브 삼아 나오고부터 서훈은 저런 식이었다. 그렇다고 자동차 극장이 무작정 툭 튀어나온 것도 아니었다.

지금껏 함께 가보지 못한 장소를 언급하다가 스치듯 서훈에게 자동차 극장 표지판이 보인 게, 이 대화의 원인이었다.

“차라리 거기보다 방 탈출 카페는 어때?”

뒤늦게 몇 가지의 이색 카페를 떠올리며 유진이 그에게 반쯤 고개를 틀었다.

“방 뭐? 방 탈출 카페?”

“설마 주서훈, 거기 들어 본 적 없어?”

“몰라, 생전 처음 들어 보는데.”

무심히 대답하는 서훈을 보며 보일 듯 말 듯 유진이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뭐야, 주서훈 벌써 아저씨 같아.”

“거기서 대뜸 아저씨 소리가 왜 나와?”

불현듯 그가 팍 인상을 썼다. 가볍게 던진 장난인데도 꽤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요즘 핫하잖아, 집에서 안 나가는 내가 알 정도로.”

“관심이 없는 거지, 나이랑 상관없어.”

“장난이야, 나도 이쪽 업계 애들이 알려줬어.”

갈수록 싸해지는 분위기를 느낀 유진이 장난이었다며 웃었다. 하지만 곁눈질로 본 서훈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아저씨라는 말이 그렇게 충격이었나. 하긴, 자신이라도 아줌마 소리 들으면 기분이 좋을 것 같진 않았지만.

“훈아, 너 설마 삐졌어?”

뻔히 보이는데도 유진은 운전 중인 서훈의 팔을 건드리며 시치미를 뚝 뗐다.

“뭐, 됐다.”

“에이, 장난이라니까?”

일부러 간드러지게 부르며 옆구리를 쿡쿡 찔러서일까. 기분 나쁘다는 듯 굳은 얼굴이 조금이지만 살짝 누그러들었다.

결국, 차가 멈춰 선 곳은 서훈이 먼저 말을 꺼낸 자동차 극장이었다. 뒤늦게 유진이 생각을 바꾼 탓이었다.

별거 아닌 장난으로 기분이 상한 서훈을 풀어줄 겸, 그녀가 중간에서 노선을 확 틀어버린 것이다.

“의외로 분위기가 좋다.”

“쓸 만해 보여?”

“생각보다는. 차가 꽤 많을 줄 알았는데.”

솔직하게 말하며 유진이 제법 큰 스크린과 넓은 공터 사이사이로 멈춰선 차를 구경하듯 눈으로 빠르게 훑어나갔다.

다만 고를 수 있는 영화가 많지 않아서 아쉽기는 했다. 보통의 극장처럼 상영작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있지 않으니, 선택의 폭이 꽤 적었다.

“시작한 지 꽤 지난 거 아냐?”

“아냐, 10분쯤 지났나? 타이밍 괜찮게 들어왔어.”

자동차 극장은 유진의 예상보다는 좋았다. 분위기도 괜찮았고, 주변 의식할 필요 없이 대화를 나누며 볼 수 있는 것도 편했다.

한창 영화를 중간쯤이나 봤을까.

유진은 점점 몰려드는 수마를 이기지 못한 채, 앞으로 향한 고개가 자꾸 맥없이 꺾여 내려갔다.

“많이 졸리면 자, 억지로 보게 할 생각은 없어.”

보다 못한 서훈이 늘어지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 제 어깨로 기대게 기울였다.

“…으음, 그래도 아직 반이나…….”

“됐어, 다 끝나면 깨워 줄게.”

그 말이 기폭제가 된 것처럼 유진은 가물거리는 의식의 끈을 그대로 놔 버렸다. 아니, 제대로 놓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아직 적응하면 곤란하지, 인간. 미래를 벌써 잊었어?’

저 소리를 듣기 전까지.

* * *

민석에게 연락이 온 시간은 점심 직전이었다.

사무실이 밀집한 거리는 점심만 되면 매일 북새통을 이뤘다. 서훈은 따로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그를 데리고 근처의 한 식당으로 갔다.

“넌 돈도 많은 새끼가 꼭 이런 가게를…….”

“이런 가게가 어떤 곳인데?”

“너무 복잡하잖아. 정신 사나워서 밥이 넘어는 가겠냐?”

빈자리도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테이블을 보며 민석이 눈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가라.”

서훈이 무덤덤하게 대답하자 민석이 짜증스럽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게 가자, 이 사람 많은 가게에서 싸우자고?”

“누가 할 소리인데.”

“그래, 그래. 내가 말을 말아야지.”

“우선 먹기나 해, 나민석.”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고서도 그는 섣불리 입으로 넣지 않았다. 먹을까 말까, 신중히 고민하는 모습처럼도 보였다.

이유인 즉, 자주 얹히는 위가 문제였다.

최근 들어서 조금 더 심해지기는 했다. 덕분에 서훈은 점심마다 식욕이 돋는 대신 그나마 남은 입맛도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여긴 갑자기 웬일이냐?”

잠시 잊었다는 듯 건너편을 보며 서훈이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질문을 받은 민석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식당 끌고 온 뒤엔 바로 그거냐?”

“생전 안 오던 놈이 나타나서 그런다.”

“뭐, 틀린 말은 아닌데.”

“그동안 진이 없이 우리가 몇 번이나 만났다고.”

그들에게는 당연하다는 듯 유진이 없는 관계는 묘한 어색함이 감돌았다. 어쩌면 이 묘한 트라이앵글이 유지되는 것도 신기할 수밖에.

한 명은 친구, 또 한 명은 연인.

유진이 그와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알기에, 서훈도 묵인하며 이 관계를 동조하는 것뿐이었다.

“아무튼, 뭔데?”

얼른 본론이나 꺼내라는 듯 젓가락을 놀리며 그가 민석을 눈짓으로 재촉했다. 따로 할 말 있어서 찾아온 게 얼굴만 보고도 대충 감이 오는 탓이었다.

생전 서훈에게 먼저 찾아오지도 않는 놈인 것도 사실이고, 언제쯤 말을 꺼낼지 타이밍을 보는 민석의 태도도 그랬다.

하긴 민석과 둘이 얼굴을 마주 보고 밥을 먹은 날이 그동안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으니. 어색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만.

“별건 아냐, 심각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 별거 아닌 게 뭐냐니까.”

“왜, 걱정되는 거라도 있냐?”

시비라도 걸듯 민석이 제 몫의 밥을 삼킨 뒤, 젓가락을 위로 휙 들어 올렸다.

“나민석, 진짜 시비 걸자고 왔어?”

“성질머리하고는. 그 표정부터 풀고 묻던가.”

물론, 본심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금껏 나민석이 저런 식으로 서훈을 찾아왔을 땐 그때마다 공통적인 이유가 몇 가지 있었으니 말이다.

“뭐, 그냥…….”

“그냥?”

서훈이 들리는 말을 고스란히 따라 읊었다.

저게 뭘 잘못 먹었나. 게슴츠레해진 시선이 나민석을 미친놈 보듯 말없이 주시했지만.

“그냥 네 놈이 사는 밥이나 얻어먹으려고?”

“…씹, 나민석 진짜!”

일순, 삼키려던 음식이 목에 탁 걸리자 서훈이 반사적으로 욕부터 쏟아냈다.

“와, 이거 봐라.”

“또 뭐.”

“지금 서유진 없다고 욕부터 하냐?”

“가뜩이나 속도 안 좋은데 왜 너까지 지랄이야.”

민석의 반응 또한 서훈의 신경을 건드리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일부러 저러는 거 아냐?’

가뜩이나 소화도 안 되는데 저건 왜 자꾸 사람 인내심을 테스트해. 서훈은 진심으로 울컥하고 말았다.

웃기고 앉아 있다. 저런 얼굴로 같이 밥이나 먹으러 왔다는 말을 누가 믿어. 사이라도 좋으면 모를까.

“하, 진짜 먹다가 얹히겠네.”

“서유진 닮아 가냐, 꼬맹이처럼 바로 얹히고.”

“꺼져, 여기서 그 말이 왜 나와?”

서훈이 이를 갈며 물컵 한 잔을 다 비워냈다. 어제도 점심부터 얹혀서 고생했으니, 신경이 바짝 곤두선 것이리라.

그런데 또 오늘은 불쑥 나타난 민석이 밥 먹는 내내 서훈의 속을 저런 식으로 살살 긁어대니, 좋게 보일 리가.

‘또 얹히면 그냥 내과에 가고 말지.’

짜증스럽게 인상을 쓰며 서훈은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래봤자 일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가 원인이지 싶었다.

“아직도 내가 온 이유 모르겠냐?”

“물밑으로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졌냐, 저번처럼?”

얼마 전, 유진에게 말한 것처럼 몇 년 전쯤, 주하린이 엄한 소문을 퍼트린 적이 있었다.

그때도 꽤나 골치 썩었던 것 같은데.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 서훈이 무려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유진 몰래 한동안 병원까지 다니며 약을 먹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다 눈치채고 있었으면서 뭘 자꾸 캐물어.”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지.”

“그래도 주서훈, 감은 안 죽었네.”

서훈이 가늘게 눈을 좁혔다.

“너 자꾸 사람 인내심 테스트할 거냐?”

기어코 서훈이 신경질적으로 손에 쥔 젓가락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렸다. 어지간히 뜸 들였으면 그만 뱉으라는 재촉과 함께.

“알았다, 그래도 친구라고 나도 걱정돼서 온 거다.”

어차피 더 먹긴 글렀다. 나민석이 뜸 들이는 걸로 봐서 이번엔 주하린도 제법 머리를 굴린 모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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