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간단하게 말해서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좋아한 거다. 그중 선택받지 못한 서준이 곁에 남았고, 여자는 다시 혼자가 된 셈이었다.
옆에서 몇 년을 지켜본 건지 모르겠다. 이미 고백할 타이밍도 서준은 손에서 놓쳐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 놓고는, 쯧.”
다시 생각해도 기분 나쁜 듯 코웃음을 치며 그가 서준의 조언을 곱씹었다.
‘유진 씨는 그 소문, 전혀 모르냐?’
‘알 수가 없지. 그 바닥하고는 연이 없는 애잖아.’
‘글쎄다, 사람 인연이 그렇게 만만하던가.’
‘됐어, 그딴 건 모르는 게 약이야.’
서준은 그 여자가 퍼트린 소문을 장본인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며 먼저 운을 띄웠고, 서훈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매번 유진 씨 모르게 다 막겠다고?’
‘나민석은 폼이야? 둘이면 충분하고도 넘쳐.’
자꾸만 서준이 건넨 훈계가 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상대가 아무것도 모르게 눈을 가리는 쪽은 오히려 서준이 아니던가.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다.
특히 주 씨 형제는 그 정도가 심했다. 그 냉정한 인간이 친구의 죽음 뒤로 그녀의 곁을 맴도는 걸 보면.
한참을 잡다하게 곱씹는 사이, 금세 아파트 앞이었다, 괜히 한 번 더 표정을 가다듬고서야 그는 익숙하게 유진이 있을 집으로 들어갔다.
“빨리 왔네? 설마 또 조퇴한 건 아니지?”
“오늘은 다른 이유로 했어, 아까…….”
“뭐? 또 조퇴야? 이번에는 무슨 이유를 갖다 붙이려고?”
대답을 다 듣기도 전에 유진이 와락 인상을 쓰며 서훈을 몰아붙였다.
“진아, 우선 들어 봐, 좀.”
느슨하게 풀린 눈가로 곤혹스러움이 스쳐 지났다. 이유도 말하지 못한 채, 농땡이 친 사람 취급을 받으니 난처해진 탓이다.
양치기 소년이라도 된 기분이다. 쓰게 웃으며 그가 못마땅한 듯 팔짱을 낀 유진과 나란히 시선을 마주 부딪쳤다.
“개인적인 일로 형 만나고 왔어.”
“…너희 형?”
“아까 전화 왔었어. 밖에서 잠깐 좀 보자고.”
그제야 매섭게 날 선 눈매가 누그러지며 그녀가 콧잔등을 잘게 찌푸렸다.
“그것부터 말하지, 괜히 또 오해할 뻔했잖아.”
“됐어, 그동안 자주 조퇴한 벌이려니 반성 중이니까.”
우스갯소리처럼 뱉은 말이 오히려 민망함을 부추긴 듯했다. 들릴 듯 말 듯 미안하다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영 힘이 없었다.
서훈은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내저은 뒤, 유진을 뒤에서 끌어안고 어깨에 턱을 걸쳤다.
“어? 갑자기 웬 한숨이야?”
“그냥, 형이랑 오래 있었더니 좀 피곤해서.”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한숨이 안쓰러웠던지, 유진이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형제면서 만날 때마다 그러더라.”
“그 인간이 나랑 상극이거든, 어쩔 수 없어.”
“또 그런다, 그래도 형이잖아.”
“그렇긴 한데…….”
“이제라도 형한테 마음을 좀 여는 건 어때?”
넌지시 건넨 제안을 듣자마자 서훈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상상만 해도 아주 질색이라는 듯이.
지금만 해도 피곤한데 무슨 마음을 더 열어.
형제면서도 어릴 때부터 그는 서준과 늘 정반대의 성향이었고, 어떤 의미로는 거의 상극에 가까웠다.
매번 서준이 언급되면 그녀는 서훈보다 형의 편을 들었다. 그게 또 못내 거슬려, 심술부리듯 그가 거칠게 목덜미에 제 얼굴을 마구 비볐다.
“앗, 간지러워. 그만 좀, 읏.”
금세 품 안에서 유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싫어, 삐졌으니까 얼른 달래줘.”
“꼬마도 아니고 그런, 으읏, 간지럽다니까.”
“몰라, 하나도 안 들려.”
뻔뻔하게 구는 서훈을 피해 그녀가 허리를 뒤틀며 이리저리 달아났다.
“내가 주서훈 때문에 못 살아, 진짜.”
“그래도 난 좋은데, 왜.”
척추를 훑어 내려간 손이 유진의 얇고 가느다란 허리를 어루만졌다. 간지러운지 하지 말라며 유진이 연신 서훈의 등을 때렸다.
“거실에서 이게 뭐야, 그만 좀 놔.”
“왜, 그럼 방으로 갈까?”
“하여간 저놈의 입, 말은 아주 청산유수지.”
삐딱한 말과 다르게 힘이 실리지 않은 손길은 가벼운 자극이었다. 아플 리 없는데도 서훈은 일부러 엄살을 부리며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다 불쑥 고개를 치켜들며 서훈이 제 얼굴일 바짝 들이밀었다.
“저, 진아.”
간드러지는 부름에 놀란 유진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뒤로 쭉 뺐다.
“뭐,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같이 목욕이나 할까?”
“윽, 됐거든? 너 오기 전에 샤워 다 했어.”
꿈도 꾸지 말라는 듯 유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음, 빠르네. 미리 날 위해서 준비라…….”
“망상 불태우지 마, 이 남자야.”
물론, 주서훈도 만만치 않은 남자라는 게 문제겠지만.
“원래 나이가 들면 남자는 다 느끼해져, 언제는 또 아저씨라며.”
“그걸 또 기억하고 있었어?”
“당연하지, 잊기엔 나도 상처가 심했다고.”
그게 무슨 상처냐면서 유진이 황당하게 웃었다. 받아치는 대신, 서훈은 그 미소를 기분 좋은 듯 바라보기만 했다.
사실 서유진의 매력이야, 냉정하고도 통통 튕기는 저 성격이 아닌가.
어차피 그 여자와 서준의 이혼을 지금 유진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소리는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뜻일 테니까.
‘뭐, 어련히 그 인간이 알아서 할까.’
서준이 한 말을 곱씹으며 끌어안은 여린 몸을 그가 짓궂게 더 꽉 조였다.
“주서훈, 나 터트리려고?”
“에이, 설마.”
“조금 더 힘주면 터져, 바보야.”
픽 웃으며 서훈이 본능처럼 입술을 스친 귀를 덥석 물었다. 그러고는 장난처럼 귓가에 유혹하듯 나직이 속삭였다.
“어쩌면 배가 고픈 것도 같아, 진아.”
* * *
그대로 저녁까지 거른 채, 그는 침대에서 유진과 한참 뒹굴며 놀다 잠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억이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눈을 뜨니 서훈은 덩그러니 홀로 누워 있었다. 어디 갔는지 유진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지?’
서훈이 눈에 힘을 주며 흐릿한 초점을 맞추자 어디에선가 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시선이 멈춘 곳은 문 앞이었다.
마감 급하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그사이 연락이라도 온 건가. 가늘어진 눈으로 열린 문틈을 주시하던 그가 늘어지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
그러다 돌연, 서훈이 배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썼다. 위염 때문에 생긴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딱히 통증이 느껴진 것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지난 밤, 유진과 장난치느라 약 복용을 깜박 잊고 그대로 잔 모양이다.
“의사가 당분간은 잘 챙기랬는데 정신하고는.”
뒤늦게 협탁에서 꺼낸 약을 서훈이 마시다 남긴 생수와 함께 입으로 털어 넣었다.
이렇게 정신머리가 없다.
침대를 벗어난 그가 문고리로 손을 뻗다가 돌연, 허공에서 팔을 주춤 멈췄다.
“…하아, 진짜 어딨는 거야 그게.”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유진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무언가 조금 초조한 사람처럼도, 약간 답답해 보이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거실 한복판에서 왜 저러고 있어, 딱 봐도 새벽인데.’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서훈이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한 상자로 시선을 옮겼다.
“이상하다, 여기 어딘가에 있을 줄 알았는데.”
저건 이사할 때 유진이 가져온 상자 중 하나였다. 시선이 한층 더 가늘게 좁혀졌다.
낡고 작은 상자는 입구가 활짝 열려 있었고, 유진은 무언가를 찾는 듯 거기서 꺼낸 다이어리를 연신 넘기기에 바빴다.
“착각이었나? 그럴 리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분명 그 얘기를…….”
한참을 뒤적거리다 포기한 듯 유진이 다이어리를 힘없이 내리며 알아듣기 힘든 혼잣말을 중얼중얼 읊조렸다.
연인의 낯선 행동을 보며 서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할까. 지금껏 꽁꽁 숨겨 놓은 유진의 어두운 단면을 본 것만 같았다.
‘…진아.’
허공에서 멈춘 팔을 힘없이 툭 떨어트리는 서훈의 눈길에는 생경한 고민의 흔적이 엿보였다.
소리까지 죽이며 몰래 뒤질 정도면 일하고는 상관이 없을 거다. 게다가 보고 있자니 스치듯, 묘한 기시감도 들었다.
이따금 그는 유진의 묘한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었다.
언제쯤이더라, 꼼꼼하게 감긴 필름을 되돌리며 서훈이 미간에 옅은 주름을 잡았다.
‘너무 좋아서 긴장이라도 했어?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
‘유진아? 진아, 서유진?’
‘…어, 서… 훈아…….’
예전 언젠가 극장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반쯤은 멍한, 무언가 낯선 유진의 행동을.
‘잠깐, 서유진 너!’
‘……어, 어?’
‘갑자기 왜 이렇게 떨어?’
‘자다가 깨서, 그냥 좀 추운가 봐.’
‘그렇다고 이렇게…….’
‘누가 혼자만 사라지래? 긴장 풀린 거지, 뭐.’
민석과 함께 간 담임의 장례식 때도 다른 듯 비슷했다. 확실히 언제부턴가 사람이 약간 바뀐 듯한 묘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아주 가끔이지만, 익숙하면서도 낯설 타인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 때가.
* * *
한창 김 비서가 일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곧 있을 거래처 대표와의 오찬에 관한 내용인 듯했지만.
“적당히 알아 두시면 저희한테도 나쁠 건 없습니다.”
“…흐음.”
이미 서훈의 정신은 다른 곳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말이 식사지, 저쪽에서도 타이밍을 볼 겁니다.”
“…….”
“아마 제 생각에는 먼저 운을 떼는 쪽이…… 대표님?”
뒤늦게 김 비서의 목소리가 들린 듯 서훈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아, 미안합니다. 그래서 어디까지 했죠?”
미안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서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어디부터였더라, 듣기는 했었는데. 아마도 김 비서의 말을 삼분의 일쯤 지났을 때부터인가.
그가 늘어놓은 설명을 되짚으며 눈치껏 서류를 들어 올렸지만, 오히려 팔을 내린 김 비서는 더 이상 설명할 기운도 없어 보였다.
“제 설명 듣고는 계셨습니까?”
“당연하죠, 잠깐 생각이 딴 곳으로 넘어가서 문제지.”
“딴생각을 하신 겁니까?”
싸늘하게 식은 김 비서의 표정이 오늘따라 한층 더 공포스럽게 굳었다.
“고의는 아닙니다, 머리가 조금 복잡해서 그렇지.”
“공사 구분은 확실하게 해 주십시오.”
밑의 직원이 몇 명인지는 아느냐. 이제는 숫제 싸우자는 식으로 그가 서훈에게 대놓고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동안 몇 번은 웃어넘기더니, 오늘쯤에선 김 비서도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