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우선 30분만 좀 쉬고 할까요?”
이번에는 정신 바짝 차리고 들을 테니 좀 쉬어라, 호언장담하며 서훈이 그를 밖으로 잠시 내보냈다.
자꾸 의식이 엄한 곳으로 흘러가니, 김 비서가 짜증을 낼 수밖에. 홀로 수긍하며 손에 쥔 서류를 그가 책상으로 툭 던졌다.
며칠째 이 상태가 아닌가. 그 새벽에 본 유진의 낯선 모습이 어지간히 뇌리에 강하게 남은 모양이다.
일하다가도 자꾸 곱씹느라 놓치기 일쑤였다. 골이 아픈 듯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서훈이 나직하게 숨을 쏟아 냈다.
“하아…….”
멀뚱히 올려다본 천장이 유독 더 하얗게 눈에 박혔다. 마치 피로감을 한층 더 짓누르는 것처럼.
모르겠다, 그 녀석은 상자에서 뭘 그렇게 찾고 있었던 걸까.
다이어리며 앨범, 작고 오래된 액자, 그냥 얼핏 봐도 상자에 든 물건은 전부 낡고 오래된 것들뿐이었다.
‘맞아, 꼭 누군가의 유품처럼.’
서훈은 한참 만에야 마침표 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잘라 내며 반쯤 늘어진 상체를 곧게 세웠다.
“이어서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죠, 나도 날아간 정신 확실히 돌아왔으니까.”
다시 들어온 김 비서는 미묘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알아차린 듯 금세 본론으로 넘어갔다.
다행히 거래처 대표와의 만남은 별문제 없이 잘 끝냈다. 오찬을 가장한 딜도 김 비서의 조언을 참고하며 무난하게 풀린 참이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는 내내 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서훈은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서고 나서야 꽉 닫힌 입을 열었다.
“김 비서, 사람이 자다 뭔가가 떠올랐다고 막 찾는 경우가 흔하진 않죠?”
“예? 자다가 불쑥 말입니까?”
“으음, 설명하자면 긴데 예를 들자면.”
대답이 난감한 건지 서훈은 고민하듯 미간을 잘게 찌푸리며 대답했다. 유진을 언급하는 대신, 가볍게 얼버무린 것이다.
“확실히 흔해 보이진 않습니다만.”
가만히 듣던 김 비서가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런가.”
“보통은 어딘가에 적어 두던가, 나중으로 미루죠.”
“말 그대로 보통이라면 그게 맞는데.”
그날, 서유진은 달랐으니까.
“잘 때는 무의식이잖습니까, 모두가.”
“그래서 묻는 겁니다. 본능처럼 눈을 뜰 정도라면…….”
“사람마다 그럴 때가 있기는 하죠.”
“…….”
“워커 홀릭이라던가, 일중독이 심한 케이스도 그렇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서훈의 뒤를 쫓아 복도를 가로지르며 김 비서가 조용히 말했다.
“워커 홀릭이라…….”
마감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일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쭉 유진의 곁을 지켰다, 그 정도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서훈은 마치 상관없는 얘기를 하는 듯 가벼운 어조였다. 애써 차오르는 웃음을 삼키며 그가 곁에 선 김 비서를 곁눈질했다.
누구보다 워커홀릭인 그가 할 말은 아닐 텐데. 정작 김 비서는 자기가 그 케이스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때.
“가장 큰 가능성은 따로 있겠죠.”
재차 흘러나온 말과 함께 대표실로 가던 서훈이 그 자리에서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가능성이라, 확실히.”
“이미 알고서 제 의견을 물으시는 것도 압니다.”
“…….”
“그건 곧 다른 문제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이미 다 알지 않느냐는 시선이 적나라하게 얼굴로 파고들었다.
뭉뚱그려 던진 주제인데도 김 비서는 핵심을 푹 찌르며 서훈을 직시했다 누구의 문제인지도 알겠다는 듯이.
가만히 입을 닫은 채, 서훈이 그와 나란히 시선을 부딪쳤다. 그러다 이내 조용히 대표실로 들어갔다.
고개를 돌린 서훈의 눈가가 한층 더 짙어졌다는 사실은 김 비서조차 느끼지 못할 찰나였다.
* * *
그날부터 꼬박 또 며칠.
서훈은 자다가도 새벽이 되면 한 번씩 일어나고는 했다. 깊이 자는 것도 아니라 티 나지 않게 쌓이는 피로감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대놓고 물어보지 않는 한,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지는 직접 확인하는 게 더 빨랐다.
그래서 다시 또 서훈은 어제처럼 무거워진 눈을 떴다. 잠시 어둠 사이로 잠든 연인을 살펴보려던 것뿐이었지만.
“……!”
불현듯 옆을 더듬으며 잠든 유진이 두 눈을 번쩍 떴다.
“뭐야, 주… 서훈……?”
“…어? 어, 진아. 갑자기 왜 깼어.”
동요를 감추려는 듯 서훈이 그녀에게로 팔을 뻗었다. 반 이상 베개에 파묻힌 뺨을 감싸자 빤히 올려다보는 동공이 나른하게 착 내려갔다.
손끝으로 닿는 체온이 기분 좋은 모양이다. 유진이 그 손바닥으로 몽롱한 듯 제 뺨을 문지르며 기댔다.
“하암, 몇 시나 됐어?”
잠결이라 자꾸만 눈이 감기는 모양이다. 억지로 눈을 부릅뜨며 유진이 작게 하품을 했다.
“글쎄, 안 봐서 잘 모르겠다.”
“새벽 아니야? 꽤 깊이 잠들었던 것 같은데.”
“맞을걸. 대충 두세 시쯤 됐으려나.”
칠흑 같은 창 너머를 보며 서훈이 어림잡아 시간을 계산했다.
“그것밖에 안 됐어?”
“음, 아마도.”
서훈은 그러려니 넘기는 눈치였지만, 유진은 아니었다. 계획보다 너무 빨리 일어난 모양이다.
하긴 그럴 만했다.
일상이 제법 규칙적인 그와 달리 밤낮이 불규칙한 그녀에게는 푹 자는 날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뭐야, 다섯 시도 안 됐잖아.”
“아침인 줄 알았어?”
“기분으로는. 지금은 일어나기도 애매하고.”
아직 잠에 취한 듯 유진이 짜증스럽게 인상을 썼다.
“그러니까 조금 더 자.”
“말이야 쉽지, 이미 잠 다 깨 버렸는데.”
유진의 눈가가 찡그려졌다가 도로 펴지기를 반복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그 표정이 제법 선명하게 보였다.
“눈 감고 있어 봐, 금방 잠들겠지.”
흐트러져 얼굴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주며 그가 더 자라, 유진을 달래듯 살살 토닥였다.
오히려 그 태도가 이상하게 보인 걸까. 손길을 느낀 눈동자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너 요즘 이상해, 그거 알아?”
“음? 내가?”
“밤마다 통 잠을 못 자잖아. 모를 줄 알았어?”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서훈에게 유진은 태연하게 최근 그의 행동을 꿰고 있는 말투로 받아쳤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지적이었다.
놀란 서훈이 애써 무너지려는 표정을 다잡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랬었나, 내가?”
“모르는 척은, 밤마다 뒤척이던데.”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훈은 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아, 자세가 좀 불편해서.”
약간 핀트가 어긋나서 망정이지, 몰래 보던 걸 그대로 들킨 줄 알고 서훈은 깜짝 놀랐다.
게다가 새벽마다 깬 것 또한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역으로 날아오는 걱정을 마주하며 오히려 그는 꽤 당황하고 말았다.
“나야, 수면 패턴이 늘 바뀌니까 상관없는데 넌 아니잖아.
“괜찮아, 나도 최근엔 일이 많아져서 그래.”
“정말로 그것뿐이야?”
“뭐가 더 있겠어, 네가 예민한 거야.”
걱정할 필요 없다는 데도 지그시 쳐다보는 시선은 이미 그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 때문이면 말해 줘, 그래야 미리 조심하지.”
괜히 자신으로 인해 불면증이라도 왔을까, 걱정하는 티가 났다.
잠결에도 곁이 허전하면 알 수 있다면서 유진은 솔직하게 털어놓으라, 서훈의 팔을 쿡쿡 찔렀다.
“그런 거 아냐, 서유진 오버하지 말고.”
“오버가 아니라 나는…….”
“진짜라니까, 너무 피곤하면 오히려 자주 깨더라고.”
태연하게 말해 놓고도 서훈은 아플 리 없는 가슴 어딘가가 따끔거렸다. 아무래도 어딘가 사라졌던 양심이 지레 찔리는 것 같았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여자라니까. 남몰래 혀를 차며 서훈이 아직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심해지면 말할게, 걱정말고 더 자.”
“너, 그거 약속한 거다?”
뾰로통하게 되물었지만, 사실 유진의 눈가는 한층 느슨하게 풀렸다.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서서히 뺨을 감싼 손바닥으로 무게가 실리며 유진이 눈을 감았다. 성질내던 모습이 무색할 만큼 금방 잠들어 버린 것이다.
“빨리도 자네, 서유진.”
“…….”
“그래, 불안하지 않게 지금 그대로만 있어라.”
얕은 숨을 내뱉는 연인을 보는 서훈의 눈이 부드럽게 착 휘어졌다. 지금껏 쌓인 고민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며칠을 지켜본 결과, 유진에게서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과민했던 걸지도.
그날 우연히 본 유진이 너무 낯설어서, 숨겨진 문제가 있을 거라고.
“오히려 예민했던 건 나인가?”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서훈이 픽 웃었다.
너무 과민하게 굴다 오히려 걱정을 끼친 꼴이었다. 뒤늦게 차곡차곡 쌓인 의심을 거둬들이며 잠든 유진을 그가 품으로 끌어안았다.
이제라도 얼른 자야만 했다. 여기서 더 버티면 내일 늦잠은 확정이라며 서훈은 애써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 * *
언제나 그렇듯이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지금껏 잘 버티던 그가 이번에는 한 시간이나 늦게 일어난 탓이었다.
잠결에 먼저 깬 유진이 시간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서훈을 마구 흔들었지만.
“훈아! 주서훈!”
“…하아, 진아… 나 5분만 더…….”
흔들리는 손을 서훈이 본능처럼 잠결에 확 끌어당겼다.
“5분은 무슨, 너 지각이라니… 앗!”
“알았으니까, 조금만 더.”
“지각이라는데 이 남자가 진짜.”
품에 꼭 안긴 유진이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가볍게 문질렀다.
누구 애인인지 잠결인데 힘도 참 좋다.
“…자, 잠깐, 너 설마?”
“…….”
당황한 듯 유진이 휙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언가 조금 이상했다.
“훈아? 이보세요?”
“…….”
“진짜로 잠들었어? 야, 주서훈?”
“…….”
“끄응, 내가 미쳐.”
그놈의 설마가 사람을 또 잡았다.
익숙한 체향이 기분 좋은 듯 만족스럽게 웃던 서훈이 고요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다시 잠든 것이다.
물론, 마음이 급한 사람은 서훈이 아니었다.
“얼른 일어나라고, 이 바보야!”
유진은 이를 악물고 자는 서훈을 깨웠다. 그러고는 반 강제로 일으켜, 욕실까지 등 떠밀었다.
‘진작 좀 잘 것이지, 쯧!’
그제야 한시름 놓은 듯 유진이 주방에서 커피를 내릴 때였다.
어느샌가 셔츠를 걸친 서훈이 여유롭게 식탁으로 오자 놀란 듯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