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어느샌가 셔츠를 걸친 서훈이 여유롭게 식탁으로 오자 놀란 듯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밥 먹으려고?”
“어, 늦은 김에 하루쯤 먹고 갈래.”
뭐라도 먹고 가겠다는 서훈을 보며 유진이 기가 막힌 듯 어이없게 웃었다.
“설마 너, 시간 못 봤어?”
유진이 거실 벽을 가리키며 묻자 서훈이 셔츠 소매의 단추를 채우며 픽 웃었다.
“알아, 나 늦게 일어난 것도.”
“지각인 거 아는데 왜 이렇게 태평해?”
“내가 대표니까 괜찮아.”
장난처럼 툭 뱉은 말인 줄 알면서도 유진은 짐짓 불쾌한 듯 얼굴을 싹 굳혔다.
대표라서 조금 늦어도 괜찮다니. 그런 경우가 어디 있냐. 따져 묻는 시선이 제법 날카로워져 있었다.
“권력 남용을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거 아냐?”
“뭐, 가끔은 대표 특권이지.”
“웃기지 마, 그거 그냥 갑질이라니까.”
그 진심 어린 반응을 본 서훈이 한 박자 늦게 아차하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야, 김 비서한테 미리 연락했어.”
“뭐라고 말했는데?”
되묻는 시선이 영 믿지 못하겠다는 티가 났다.
“사정 생겨서 오늘만 좀 늦는다고.”
“그거 진짜야?”
“못 믿겠으면 지금이라도 다시 연락해?”
당장에라도 연락할 듯 서훈이 손에 쥔 핸드폰을 들었다.
“주서훈 성격하고는.”
그걸 보고서야 유진이 됐다면서 그를 만류했다. 스르륵 풀린 눈매가 짓궂다는 듯 은근히 그를 나무랐다.
가만히 듣던 서훈이 픽 웃으며 살짝 변명을 늘어놓았다. 늘 외주에서 갑질을 당해서인지 그녀는 사소한 부분에서도 꽤 예민해지고는 했다.
“어쨌든 아침부터 먹자, 토스트 어때?”
“난 아직 입맛 없는데.”
“없어도 먹어, 그러다 위 다 망가져.”
일어나려는 유진을 도로 앉히며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금세 대화가 다시 원점이었다.
“이따가 아점으로 챙겨 먹을게.”
“내가 서유진을 몰라? 퍽이나 잘 챙겨먹겠다.”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서훈이 턱을 휙 치켜들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커피나 몇 잔, 출출하면 당 보충한다고 초코바나 먹겠지.”
“뭐야, 어디 카메라 숨겨 둔 거 아냐?”
“굳이 볼 필요가 있어? 서유진 패턴이야, 뭐.”
안 봐도 훤히 보이지 않나.
적나라하게 짚으니, 딱히 유진도 받아칠 말이 없었나 보다. 이젠 별걸로 다 구박이라며 그녀가 못마땅한 듯 입을 툭 내밀었다.
“갑자기 뭔가 기분이 나빠졌어.”
그 어설픈 애교도 서훈에게는 마냥 예뻐 보여서 문제였지만.
“귀여운 척해도 안 봐줘.”
“내가 또 언제 귀여운 척을 했다고.”
“아, 콩깍지 때문인가?”
이게 좀 오래가더라, 벌써 몇 년째인지 모르겠네. 장난치듯 짓궂게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서훈이 혀를 찼다.
연인의 그 천연덕스러운 연극을 보며 유진이 잘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 * *
서훈이 늦게 출근한 만큼 오전 회의도 자연스럽게 밀렸다.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았던 직원들은 호출을 받고, 저마다 회의실로 한 명씩 나타났다.
“다들 미안해요, 개인 사정으로 좀 늦었습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직원들에게 먼저 사과를 건넨 뒤, 서훈이 몇 시간이나 늦은 회의를 시작했다.
내용은 평상시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꾸준히 돌아가는 시장 반응과 부정적인 의견, 바꿔야 할 보완점 같은 것들이었다.
“확실히 인터넷 리뷰를 무시할 수는 없겠더라구요.”
“흐음, 평이 많이 안 좋습니까?”
“다른 업체처럼 알바를 쓰지 않는 한, 저희도 어쩔 수 없죠.”
늘 좋은 말만 올라올 수는 없다. 시장 조사를 도맡아서 한 직원이 한숨처럼 쉽게 바뀌지 않을 결론을 냈다.
“알바는 대강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거죠?”
“우선 저희가 제품과 함께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합니다.”
“그러고 나선?”
“뭐 비슷해요, 개인 블로그나 SNS에 리뷰를 올리는 식이니까.”
말없이 볼펜을 탁탁 두드리며 서훈이 고민하듯 손등 위로 제 턱을 걸쳤다.
“흐음, 상품 리뷰라…….”
“대표님이 반대하셔서 입 닫고 있었지만, 요즘엔 필수예요.”
가늘어진 시선이 손에 쥔 서류로 내려갔다. 시장반응을 통계치로 만든 자료였다.
이미 서류가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서훈이 고민스럽게 턱을 문지르며 탐탁지 않은 듯 재차 서류를 훑어내렸다.
아르바이트를 쓴 업체와 그렇지 않은 업체와의 차이. 그동안의 성장체가 통계치만으로도 눈에 띌 만큼 도드라지게 차이가 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건가, 통계치도 있고.”
의견을 묻는 것처럼 넘긴 시선에 직원들이 저마다 쓰게 웃으며 비슷하게 끄덕였다.
한참 만에야 서훈은 직원들보다 먼저 회의실을 나섰다. 다른 날보다 늦게 끝나서인지 이미 점심이 코앞이었다.
“다들 식사해요, 난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대표실의 문을 열던 서훈이 입구에서 비서팀을 향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서준에게 연락이 온 타이밍은 그가 막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이 시간부터 무슨 일이야?”
피곤한 듯 넥타이를 끌러 내린 서훈이 느릿하게 고개를 젖히며 한 마디를 툭 뱉었다.
―잠깐 통화 좀 하자.
“그러던가. 어차피 막 회의 끝나고 쉬던 중이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스피커 너머 무심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관자놀이를 꾹 짚었다.
어쩐지 듣기 전부터 골이 아팠다. 저 인간이 동생한테 안부나 묻자고 이 시간부터 대뜸 연락할 성격이 아닌 탓이었다.
―내일쯤 물밑으로 찌라시가 하나 돌 거다.
역시나 서훈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특유의 무심함으로 그가 본론을 툭 꺼냈다.
“무슨 찌라시?”
―몰라서 물어? 그 반응은 또 뭐고.
“진짜로 그걸 이용할 줄은 몰랐거든.”
서훈의 반듯하게 펴진 눈썹이 짜증스럽게 팍 구겨졌다.
―발 뺄 이유 하나쯤은 줘야지.
“냉정하기는, 반년을 같이 살아 놓고서.”
서훈이 픽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단지 그 여자와의 이혼을 위해 서준이 그렇게까지 움직일 리도 없을 테니까.
어느 정도는 예상한 상황인 듯 서훈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침음을 삼켰다.
주하린이 얌전히 이혼 도장을 찍어 주지는 않을 텐데.
‘어머, 우리 또 보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뭐… 결혼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유진 씨도 얼른 도련님하고 식 올려야죠.’
작정하고 화상 입힐 때는 언제고, 유진에게 태연히 축하 인사를 받던 주하린을 떠올리며 서훈이 얼굴 가득 오만상을 썼다.
확실히 이 바닥에서도 보통보다는 쓸데없이 잔머리가 잘 굴러가는 타입이기도 했다, 그 여자는.
“그래서 뿌릴 내용은 뭔데?”
―적당히 섞인 작품, 진짜가 구분 가지 않게끔.
진짜를 교묘하게 섞은 가짜를 퍼트리겠다는 건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라…….”
―누구든 진짜라고 믿기만 하면 그만이다, 이쪽에선.
“무섭네, 그건 그거대로.”
서훈이 진저리를 쳤다.
어지간히도 그 여자가 싫은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서훈이 모를 개인적인 원한이 깊다거나.
지금 서준은 아예 함정까지 파며 주하린을 매장할 생각인 거다.
―안 죽으려면 먼저 죽일 수밖에.
“그래도 아직 부인이잖아, 적당히만 하지?”
―언제 또 뒤통수칠 줄 알고.
“으음…….”
중간에서 냉정히 말이 잘렸다. 괜히 겸연쩍어진 서훈이 재차 핸드폰을 고쳐 잡으며 마음대로 해라, 쓰게 웃었다.
그래도 결혼까지 한 여자가 아닌가.
서훈이야 지긋지긋할 수밖에 없지만, 그의 입장은 달랐다. 굳이 결혼까지 해 놓고 척을 지려는 서준을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구? 주하린?’
‘어, 자꾸 들러붙길래 쳐냈더니 골 아프게 됐네.’
‘그래서 어쩔 생각인데.’
‘머리를 써 봐야지, 아직 신생이라 타격이 없진 않으니까,’
‘도와주마, 너보단 내가 낫겠지.’
언젠가 그 여자가 크게 벌여 놓은 사건을 해결할 때도 그랬다. 주하린의 이름을 들은 직후, 이상하리만치 서준이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매번 비슷한 패턴이었다.
그건 꼭 동생을 위해서라기보다 주하린을 엿 먹이고 싶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도대체 주하린을 왜 그렇게 싫어하는데?”
문득, 궁금해져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지만.
―쓸데없이 그건 또 왜 물어.
“아주 질색하니까, 누가 보면 원한이라도 있는 줄 알겠어.”
―글쎄, 원한이라……
설마 제대로 짚어 낸 건가. 서준의 반응이 예상 밖으로 묘했다.
“뭐야, 진짜로 나 모르는 원한이라도 있어?”
―없다고는 못하겠다. 갚아 줄 게 있긴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흘려 넘기듯 말한 서준에게서 묘한 뉘앙스를 느꼈지만, 굳이 서훈은 그것까지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그만큼 피가 섞였다고 해도 남보다 못한 가족이 아닌가. 형제라고 서로 걱정하는 애틋함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아무튼 넌 유진 씨나 잘 챙겨.
“그건 걱정 마시고. 뒤탈 안 생기게 마무리나 잘해.”
―너나 쓸데없는 관심 끊어.
어쨌거나 이런 부분에서 형제라 죽이 꽤 잘 맞기는 했다.
핏줄은 핏줄이라는 건가.
하여간 시답잖은 생각이 다 든다, 픽 웃으며 서훈이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였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뒤늦게 생각난 듯 서준이 재차 그를 불렀다.
“또 뭐, 할 말 남았어?”
―창립 기념회 얼마 안 남았다, 빠질 생각하지 말고.
그제야 떠오른 듯 서훈이 반듯한 눈가를 파싹 구겼다. 한동안 기억에서 지운 본가의 피곤한 행사가 남은 것이리라.
“그거 우리도 꼭 참석해야 하나?”
―당연한 소리를 하냐.
“솔직히 큰 메리트도 없잖아. 매번 욕밖에 더 먹냐고.”
물론, 항의는 서준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유진 씨까지 부르기 전에 알아서 와.
“거기에 진일 왜 불러. 우리가 결혼이라도 했어?”
한층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 서준에게로 향했다.
―알면 튀어 오라고.
솔직히 친척들이 다 모이는 가족 모임과 비슷한 자리가 아닌가. 거기다 서유진을 데려다 놓고 어쩔 건데.
기분이 나빠진 듯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서훈이 누가 안 간다고 했냐, 되물었더니.
―그래야 네가 움직일 거 아니냐.
스피커 너머 주서준은 그럴 줄 알았다며 코웃음을 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