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33화 (33/67)

❦제33화

늘 그렇듯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자리였다. 홀을 가득 채운 익숙한 친척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서훈이 몰래 혀를 찼다.

본가의 창립 기념회는 초대장을 받고 온 손님만큼이나 서훈의 집안사람으로 쫙 깔려 있었다.

물론, 피곤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서준이가 이혼했다는 말이 들리던데.”

“그 좋은 집안이랑 사돈 맺더니, 쯧.”

걱정을 앞세운 내 식구 돌려 까기라,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에서 못 들은 척 서훈이 느릿하게 와인 잔을 위로 들었다.

“흐음, 결혼하고 겨우 반년이나 갔던가?”

“내 그럴 줄 알았지. 너무 수월하게 식까지 흘러갔잖소.”

“쯧쯧, 내가 창피하구먼.”

서준은 제법 빠른 속도로 주하린과의 이혼을 마무리했다. 적당히 파 놓은 함정에 그 여자가 고스란히 발을 담근 탓이었다.

수면 아래에선 재산 분배처럼 다른 부분이 켜켜이 쌓인 듯했지만, 그건 둘째 치고 집안으로도 이미 그 소문이 다 퍼진 것도 문제였다.

‘본인 자식들이나 신경 쓸 것이지, 하여간 저놈의 노친네들은.’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듯 서훈의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는 반쯤 채워진 잔이 교묘하게 가려 주고 있었다.

“어쨌거나 아쉽게 됐지. 서혁이보다 잘난 놈이라 기대했는데.”

“또 모르지. 그 집안 딸이 원인을 제공을 했다잖나.”

집안 어른들의 대화는 서훈을 비롯한 주 씨 집안의 사촌들이 매번 물망에 오르고는 했다. 안줏거리 삼아 씹는 재미가 톡톡한 모양이다.

아쉽게도 이번 창립기념회의 주제는 단연코 서준이었다. 이제 막 이혼했으니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저 정도면 너무 단순할 지경이었다.

‘누가 수월해, 설마 저 주서준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어이없게 웃으며 그가 반대편으로 힐끔 시선을 돌렸다. 그는 초대장을 받은 손님들과 한창 대화 중이었다.

역시나 주서준은 포커페이스였다.

그 와중에도 한 번씩 눈이 마주치는 집안 어른들에게 마주 인사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서훈은 할 말이 없었다.

자기 욕하는 것도 뻔히 알 텐데.

서준은 작정하고 집안사람은 적당히 걸러 냈다. 그리고 자신에게 메리트가 있을 손님을 골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부러 모든 걸 구경하듯 뒤로 물러선 채로 서훈은 이곳에서 언제쯤 빠져나가야 할까, 조용히 타이밍을 엿볼 뿐이었다.

어차피 그 누구라도 서훈은 별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까지 서준처럼 일하고 싶지도 않고, 그저 이 번잡한 자리를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가려던 찰나, 운 나쁘게도 병원장인 큰아버지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요즘 회사는 잘 굴러가고?”

“예, 그냥 딱 망하지 않을 정도로는 버티는 중입니다.”

“제법이구먼, 생전 사업은 관심도 없더니.”

제법이란다, 네가 사업이랍시고 해 봤자지. 비웃고 있을 그 시커먼 속이 뻔히 다 보이는데.

겸손을 가장하며 서훈이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제가 뭘 알겠어요, 경험 삼아서 하는 거죠.”

자신이 듣는 줄도 모르고 연신 서준을 입에 올리던 집안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데 너, 이번 검진은 안 했던데.”

“하하, 그게 좀 바빠서…….”

“변명할 걸 해라, 얼마나 걸린다고 그걸 빼 먹어?”

난감한 듯 대답하는 그의 시선이 멀리 떨어진 부모님에게로 향했다. 괜히 어머니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게 없는 화제인 탓이리라.

“올해는 이왕 넘겼으니 좀 봐주세요.”

“네놈 검진이지, 내 몸이냐?”

“내년에는 일찍 가겠습니다.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좀 곤란해서.”

이쯤 되면 큰아버지도 말뜻은 알아듣고도 남았을 터.

역시나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인 큰아버지가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네가 정 그렇다면야.”

“하하, 사정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훈이 단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집안에서는 그나마 큰아버지가 무난한 성격이라 말이 통한 것이다

그래 봤자 모두 그 나물의 그 밥이겠지만, 이럴 때는 꽤 편했다. 방계라 쓸데없이 날을 세우며 공격적으로 구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서훈의 머릿속으로 묘한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검진 빠진 걸 어떻게 아셨지?’

언제나처럼 한발 늦게 찾아드는 묘한 찝찝함을 뒤로 넘긴 채, 우선 큰아버지에게 일을 핑계로 물러섰다.

누군가의 입김이 없었다면 그의 검진까지 알 수는 없을 터. 금세 반대로 돌아선 그의 눈가로 진득하게 의심이 내려앉았다.

* * *

짜증이 슬슬 맥스치로 치닫고 있었다.

애써 들끓는 짜증을 갈무리하며 서훈은 스리슬쩍 주변의 눈을 피해서 홀을 벗어났다.

“후우, 무슨 말들이 그렇게나 많은지.”

뒷문으로 나온 서훈이 피곤한 듯 투덜거리며 목을 옥죄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끌어 내렸다.

그놈의 창립기념회가 뭐라고.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노릇도 슬슬 한계였는데 호텔 뒷문이 타이밍 좋게 눈에 띈 것이다.

“원래 그런 자리인 거 모르고 왔냐.”

그렇게 안심하는 사이, 어딘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뭐야, 언제 나왔어?”

벽으로 기댄 서훈이 놀란 듯 그쪽으로 휙 고개를 틀었다.

“오히려 그건 내가 할 말이다만.”

“뭐, 좀 불편해서.”

“피차일반이겠지, 여기도.”

언제 나왔는지 멀지 않은 거리에서 주서준이 삐딱하게 서 있었다.

“빠르기도 하지, 아까 보니까 바빠 보이던데.”

“설마 너만큼이나 하겠냐.”

곧장 서준에게서 약간 뒤틀린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손님 운운하는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무심하게 돌려서 까는 비아냥거림이라니. 큰아버지한테서 용케도 빠져나왔다는 칭찬을 가장한 무시임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장난해? 알면 좀 도와주던가.”

“내가 뭐하러.”

“성격 한번 참 좋네, 뉘집 핏줄인지.”

내가 저 인간한테 바랄 걸 바라야지. 부모 자식 사이에도 자기한테 올 메리트부터 찾는 타입인데.

“그 핏줄, 너한테도 흐를 텐데.”

“알아, 누가 모른대?”

“그래도 다행이군, 알고는 있어서.”

“적당히 합시다, 오늘은 싸울 힘도 없으니까.”

와락 인상을 쓴 서훈이 포기한 듯 나직하게 숨을 쏟아 냈다.

“다시 말하지만 피차일반이다.”

“말꼬리도 잡지 말고.”

괜히 짜증이 난 서훈이 삐딱하게 팔짱을 끼며 몇 걸음 사이의 형이라는 작자를 삐딱하게 주시했다.

일부러 주하린과의 이혼을 대놓고 자극하듯 입에 올리면서.

“형이야말로 용케 도장은 찍었던데.”

“약점을 쥐고 있으니까.”

주하린의 약점이라, 제법 솔깃한 단어가 아닌가.

확실히 만만치 않은 집안의 딸이었다. 그러니 사방팔방 진상 부리고 다녀도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는 거겠지만.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걸 알고 벌이는 짓이라, 죄질이 더 나쁜 거였다, 주하린이라는 여자는.

“그것만으로 도장을 찍어줬을 리는 없고.”

“글쎄다, 과연 그걸로 내가 끝낼지는 두고 봐야겠지.”

상당히 자신감에 차 있는 말투였다.

“도대체 그 찌라시 말고 무슨 짓을 벌이는 건데?”

“쯧, 사업한다는 놈이 그것도 질문이라고.”

“당연히 모를 수밖에. 나랑 같이 작당한 것도 아니고.”

이건 사업적인 수완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걸 간파할 머리였으면 벌써 후계자 노릇이라도 했을 거다, 어이없다는 듯 서훈이 덧붙였다.

그러고 보면 서준도 딱히 그 여자를 욕할 처지는 아니었다. 자기중심적인 성격이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남 깎아내리는 것도 빼다 박았다.

‘동류라는 건가, 그런 것치곤 꽤 적대시하던데.’

서준을 곁눈질하며 그 여자와의 공통점을 찾던 서훈이 돌연, 미간을 찌푸리며 제 명치를 꾹 눌렀다.

바늘로 쿡쿡 쑤시는 듯한 통증이 짧게 퍼져 나갔다. 한동안 괜찮았던 위염 증상이었다.

“뭐야, 너 어디 안 좋아?”

서준이 그걸 놓칠 리 없었다.

“그냥 가벼운 위염.”

“위염? 그런 놈이 검진까지 빠져?”

“신경성이야.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더라고.”

나직이 숨을 뱉어 내며 서훈이 빠져나온 호텔을 흘깃 턱으로 가리켰다.

“다 큰 놈이 그깟 일로 스트레스는.”

“병원 다니는 중이니까, 모른 척 해.”

서준이 혀를 차며 앞으로는 검진 빼 먹지 말라, 기어코 한마디를 더 얹었다.

어차피 그 검진이야, 매년 치르는 연중행사가 아닌가.

“한 번 빼먹었다고 안 죽어.”

금세 잦아드는 통증을 느낀 서훈이 구부러진 허리를 곧게 세우며 픽 웃었다.

* * *

호텔을 나선 뒤, 곧장 집으로 차를 몰았다. 한 사람 빠진다고 티가 날 리도 없고, 갑자기 도진 통증도 이유 중 하나이긴 했다.

그래서인지 도착이 그의 예상보다 더 빨랐다. 유진에게 미리 말해 놓은 것보다 두 시간쯤 일렀으니, 어지간히 빨리 나온 것이리라.

“진아, 다녀왔어.”

막 들어선 거실이 유난히 고요했다. 벌써 잠들었나. 의아한 듯 침실의 문을 열자 텅 빈 침대가 서훈의 눈에 띄었다.

다시 거실로 나온 서훈이 자연스럽게 작업실로 발길을 돌렸다. 역시나 꽉 닫힌 문틈 사이로 유진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아, 저랑 장난하세요?”

그것도 꽤나 열 받은 뉘앙스였다.

또 외주 업체랑 한 판 하는 중인가.

적당히 타협하면 좋을 텐데. 그쪽에서 매번 자기들 좋은 식으로 밀어붙이니, 성격 좋은 서유진이라도 열이 받을 수밖에.

끼―익.

소리가 나지 않게 서훈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살짝 열린 틈새로 짜증 섞인 유진의 옆모습이 보였다.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제 말은…….”

핸즈프리를 낀 채로 누군가에게 연신 제 의견을 늘어놓으며 유진이 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반 이상 흐트러졌는데도 쓸어 넘기는 손길이 거칠었다. 이미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것이리라.

“아무리 급해도 아닌 건 아니죠.”

그사이,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져만 갔다.

“계약서에도 분명히 적어 뒀고요. 네네, 그것부터 확인해 보시든가요.”

급기야 손에 쥔 펜을 그녀가 짜증스럽게 탁 놔 버렸다. 그림이고 뭐고 할 기분이 아닌 모양이다.

하긴 누구라도 일하다가 무작정 닦달 당하면 기분 나쁘겠지만. 어쨌거나 저 상태의 유진은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도대체가 거긴, 쯧!’

조용히 작업실의 문을 닫으며 그가 들리지 않게 그 누군가를 향해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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