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어지간해서 전화 붙들고 성질내는 애가 아닌데.
피곤한 듯 침실로 간 서훈이 걸치고 있는 재킷을 벗었다. 그러나 다시 또 위가 아픈지 그가 쓰린 속을 부여잡았다.
“으, 이놈의 속은…….”
명치를 관통하는 싸한 통증이 깨작깨작 서훈의 신경을 자극했다.
확실히 스트레스 탓이 컸다. 창립 기념회보다 꼴도 보기 싫은 친척들이 더 문제였던 것 같지만.
‘약을 꽤 길게 복용하고 있는데 통증이 영 잡히질 않네요.’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원인인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라…….’
‘궤양까지 진행돼서 더 그럴 겁니다.’
의사와의 지난 대화를 곱씹으며 서훈이 급히 협탁 안쪽을 뒤적였다. 다행히 처방받은 약이 며칠치가 더 남아 있었다.
금세 침실을 나온 서훈이 손에 쥔 약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이내 빈 컵을 내리며 숨을 돌리려는 찰나, 뒤에서 작게 문소리가 들렸다.
“어? 훈아.”
급히 약 봉투를 들키지 않게 구기며 서훈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하던 일 다 끝냈어?”
“뭐, 대충은.”
이제 막 통화가 끝났는지 거실로 나온 유진이 놀란 듯 서훈에게로 다가왔다.
“소리도 못 들었는데 언제 왔어?”
“조금 전에.”
“기척이라도 좀 내던가.”
서훈이 자연스럽게 잔을 내리며 싱크대에 몰래 약 봉투를 버렸다.
“괜히 방해하기 싫어서, 목도 좀 마르고.”
“작업할 땐 근처에도 안 오면서.”
투덜거리는 유진을 따라 웃으며 그것도 나름대로 내조라, 서훈이 태연하게 말장난을 쳤다.
다행히 아무것도 보지 못한 눈치였다. 제법 타이밍이 좋았다. 쓸데없이 약 먹는 걸 들키면 저 걱정 많은 여자가 안절부절못할 테니 말이다.
“통화는 잘 끝냈고?”
“아, 설마 여기까지 다 들렸어?”
“그냥 네 목소리만 작게.”
“다행이네, 좋은 대화는 아니었거든.”
유진이 오만상을 쓰며 말했다.
“안 들어가길 잘한 건가?”
“어차피 네 목소리도 귀에 안 들어왔을걸. 열 받아서.”
“자꾸 열 받게 하면 욕이라도 날리지.”
기분을 풀어 줄 작정으로 장난스럽게 툭 뱉었다. 그러자 유진의 잔뜩 구겨진 미간이 그나마 한층 누그러졌다.
“그럴걸, 아주 내가 인내심 테스트하는 줄 알았잖아.”
“왜, 무리한 요구라도 해?”
넌지시 묻자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자꾸 계약사항엔 없는 부분을 무리하게 요구하는 모양이다.
“더럽고 치사해서 못 해 먹겠다니까.”
“흐음, 애들이 상도가 없네.”
“내 말이, 지금껏 여러 애들 겪어 봤는데 진상도 그런 진상이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유진이 엉망인 머리카락을 금세 또 마구 흐트러트렸다. 보다 못한 서훈이 낮게 혀를 차며 유진에게 팔을 뻗었다.
“성질 그만 내고 이리 와 봐.”
“응? 갑자기 왜?”
“머리 다 풀렸잖아.”
반 이상 풀린 머리카락을 그녀의 뒤에 선 그가 대신 틀어 올려 묶었다. 그러고는 두 팔로 예고도 없이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고생했다는 말을 속삭이면서.
* * *
쓸데없이 걱정을 끼칠까, 약 봉투를 숨긴 서훈의 마음은 이미 유진에게 간파당한 지 오래였다.
서로의 곁을 그만큼이나 당연하다는 듯 오래 지켜 온 친구이자 연인이었다.
“주서훈, 누굴 바보로 알아.”
하여간 이럴 때는 머리가 안 돌아간다니까, 저 바보. 협탁에서 꺼낸 약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혼잣말을 작게 읊조렸다.
서훈이 약을 복용 중이라는 사실은 그녀도 진즉에 눈치챘다. 먼저 얘기해주겠지, 모르는 척 기다리다가 스스로 포기했을 뿐이다.
유진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자잘한 감기 하나에도 제 걱정 끼치기 싫다며 매번 숨기다가 들키고는 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무슨 약이지? 진통제 같지도 않고 감기약도 아닌 것 같은데.’
투명한 약 봉투에 비친 몇 개의 약이 시야를 복잡하게 사로잡았다. 작정하고 협탁 안쪽까지 밀어 넣은 걸 보며 유진이 모호하게 미간을 좁혔다.
“이 남자가 매번 이런 쪽으로만 머리가 잘 굴러가지.”
곤란하다는 듯 유진이 약 봉투를 꽉 움켜쥐었다.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어째서 이런 걸 숨겼을까, 그 남자는.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헤어질 그 시기에도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한동안 사라진 줄 알았던 불안감이 다시 유진을 사로잡았다. 이미 지나 버린 3년 후의 잔상이 문제였다.
하지만 복잡하게 엉킨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심코 본 시계와 함께 유진이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아는 동생과 잠시 만나기로 한 약속이 떠오른 것이다.
“아, 언니 여기요.”
“시간보다 꽤 빨리 왔네?”
카페의 문을 연 유진은 아는 척 손을 흔드는 지인에게로 곧장 다가갔다.
“근처에서 잠깐 미팅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나랑 약속까지 잡았어?”
“그 정도는 여유 있어요, 언니는 뭐 안 바쁜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되묻자 그녀가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이 바닥이 원래 개인차가 심하잖아.”
“에이, 괜찮아요. 그림은 다 거기서 거기인데 뭘.”
여유로운 말과 달리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다. 유진이 커피를 가져오는 사이에도 그녀는 연신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연차가 높아질수록 시작점이 같은 지인들과 차츰 벌어지는 격차를 느낄 수밖에 없고, 그건 꽤 씁쓸한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괜히 미안해진 유진은 급한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쩍 말문을 열었다.
“바쁘네, 요즘 일 많아?”
“그냥저냥 굶지 않을 정도로는 벌고 있어요.”
겸손하게 손을 내저으며 그녀가 작게 웃었다.
“굶기는, 한창 잘 나가던데.”
유진이 태연하게 씩 웃었다.
“그림판이 빛 좋은 개살구인 거 아시면서.”
“빛도 빛 나름인 것도 잘 알지.”
“반박은 못 하겠네요, 그것도 사실이라서.”
그녀는 이 업계에 막 들어왔을 때부터 함께 버텨 온 친한 동생이었다.
자신처럼 자잘한 삽화만 하다가 최근 들어서 웹소설의 표지를 시작했다. 만나지 못한 사이, 얼굴이 좋아진 걸 보면 일이 잘 풀리는 있는 모양이다.
일러스트 표지는 모르는 만큼 궁금한 게 많았다. 유진이 슬쩍 호기심을 드러내자 그녀는 친절하게 아는 만큼의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의외로 자리 잡으니까 쓸 만해요.”
“그건 다행이다, 자리 못 잡아서 고생하는 경우도 허다하잖아.”
“사실 그렇긴 한데 전 운이 좋았죠.”
외주를 막 시작했을 때 그린 표지의 글이 유통사에서 크게 흥행했다고, 그 덕을 톡톡히 봤다면서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 바닥에서는 운도 실력이었다. 그 타이밍과 맞물리는 배경, 혹은 유행 흐름에 맞는 그림체와 스토리 같은 것들이 한 박자가 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언니도 표지 생각 있으신 거죠?”
“그렇긴 한데 그쪽은 또 처음이니까, 좀 어렵네.”
손에 쥔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유진이 쓰게 웃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요, 뭐든 처음은 어려우니까.”
“이제 와서 새로운 걸 시도해도 될까, 솔직히 겁도 나고.”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먹고 살려면.”
친절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제법 아팠다. 언제까지 그것만 벌고 살 거냐는 뉘앙스를 느낀 유진은 할 말이 없어졌다.
매번 외주를 구하는 것도 일이었고, 일자리보다 그 일을 하려는 사람이 넘쳐 나는 곳이 아닌가.
사실 유진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림체 하나까지도 새롭게 적응해야 할 테고, 다시 또 그곳에서 자리를 잡아가야만 했다.
유진은 고민해 보겠다는 말과 함께 조용히 제 몫의 커피 잔을 들었다. 기분 좋게 나왔는데 끝이 영 별로다.
갑자기 튀어나온 주제 때문일까. 한 모금 넘긴 커피가 오늘따라 더 쓰게 혀끝을 휘감았다.
* * *
카페를 나선 유진은 아파트 근처의 약국을 잠깐 들렀다. 팔목 통증 때문에 살 것도 있었고, 그 약 봉투에 관해서도 물어볼 생각이었다.
별일 아니겠지만, 알아두면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진통제 좀 주세요. 아, 팔목에 붙이기 좋은 파스도.”
“팔목 때문에 진통제도 필요하신 거죠?”
“네, 팔목을 자주 써서 그런지 요 며칠 자꾸 욱신거려서요.”
유진은 피곤한 듯 웃으며 팔목 보호대를 감은 오른팔을 슬쩍 들어 올렸다. 이것 때문이라는 것처럼.
그제야 알겠다며 약사가 두 종류의 진통제와 한쪽에 진열된 작은 사이즈의 쿨파스를 내밀었다.
“통증이 심하시면 각각 한 알씩 같이 드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약값을 계산하고 나서야 유진이 가방에서 챙겨 온 약 봉투를 꺼냈다.
서훈의 협탁 안쪽에서 확인 차 티 나지 않게 딱 한 봉투만 몰래 빼내 온 것이다.
“아, 저기 여쭤볼 것도 좀 있는데.”
천연덕스럽게 약사에게 꺼낸 약을 보여 주며 그녀가 난처한 듯 웃으며 사정을 설명했다.
“예전에 복용하던 약이거든요.”
“그런데 이걸 왜?”
“무슨 약인지 모르겠어서, 확인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약 설명이 적힌 봉투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약사는 가끔 그럴 때가 있다며 약을 봉투 채, 위로 들었다.
“으음, 복용하던 시기는 혹시 기억하세요?”
“대강은 기억하는데. 그 당시에 병원을 두 군데 다녀서요.”
유진은 종류만 알려 주시면 된다며 부탁했다. 섣불리 입을 열지 않던 약사는 그 말을 들은 뒤에야 위가 안 좋을 때 먹는 종류라, 뭉뚱그려서 대답했다.
“아, 그쪽 약이었구나.”
일부러 알아차렸다는 듯 약사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굴며 유진이 곧장 약국을 나섰다.
정확하게는 몰라도 그 정도면 충분했다. 확인하기 전까진 서훈이 자신 모르게 어디가 많이 아픈 건 아닐까, 걱정이 꽤 많았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유진이 손에 쥔 약을 가방에 넣으려던 찰나, 누군가와 실수로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툭. 투둑.
그 반동으로 약이 바닥에 떨어지자 급히 사과하며 유진이 휙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죄송합니다, 앞을 제대로 보질 못해서… 아, 당신은…….”
놀란 듯 유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