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35화 (35/67)

❦제35화

멍한 얼굴로 유진이 한 걸음 사이로 떨어져 서 있는 남자를 주시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이상하리만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냉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건 공포심과도 닮은 감각.

맹수를 본 초식 동물의 본능처럼 유진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분명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확실했다. 그래, 꼭 어디선가…….

“어디선가 만난 얼굴이라고?”

“……!”

“제법 감이 좋구나, 내 손으로 직접 기억을 지웠을 텐데.”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그가 유진에게만 들리게끔 나직이 속삭였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기억을 지워? 누구의, 설마?’

머릿속의 생각을 꿰뚫어 보듯 남자의 목소리가 고요한 어둠 사이를 가로질러, 유진에게로 내리꽂혔다.

“그래, 네 기억을.”

짧은 대답과 함께 모든 것들이 뚝 멈추고야 말았다.

어떻게 과거로 왔나, 지금까지 기억이 영 흐릿했을 테지. 다 안다는 듯한 속삭임이 그녀의 심장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진짜 그 남자다, 그 목소리였다.

“…기억나, 그때 그 목소리… 아니, 이건 꿈에서도…….”

“흐음. 겁부터 먹는 반응이라.”

떠올린 직후, 본능처럼 유진이 남자에게서 다급히 멀어지며 긴장한 듯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타―닥.

“저, 저리 가. 아니, 오지 마. 가까이 오, 오지 마.”

“어쨌든 제법이야.”

탁.

“누구야, 당신 도대체 누구냐고.”

타―닥.

탁.

“꿈에선 따로 손을 쓰지 않아서겠지만.”

뒤로 물러서는 유진을 따라 앞으로 발을 뻗으며 남자가 즐겁다는 듯 사납게 웃었다.

“서서히 떠오를 거다, 네가 여기로 오던 날부터.”

“오, 오던… 순간……?”

“그렇게 비틀어 놨지, 이 목소리를 들을 때만 떠오르도록.”

그 말은 곧 언령으로 변해, 지금껏 머릿속에서 뿌옇게 흐리기만 하던 기억이 하나둘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기억을 받아들일 여유도 없이 유진이 이마를 푹 덮고 신음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던 남자가 다시 또 한 걸음 다가왔다.

“아직 적응하면 곤란해, 인간.”

“무, 으윽, 도대체… 무슨 소리를…….”

갈수록 심해지는 두통에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유진이 어렵사리 고개를 들었지만, 여전히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할 뿐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전부 되돌려주마.”

“…….”

“사라진 그 기억들을.”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남자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거슬린단 말이다, 벌써 잊었다는 식의 그 파동도.”

턱을 문지르며 혼잣말처럼 읊조린 남자가 느슨하게 풀린 눈길을 날카롭게 치켜올렸다.

“너도 잊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도대체, 뭘…….”

“미래이자 현재, 지금 이것도 네가 지나온 과거라는 걸.”

지금껏 묵인하던 사실을 일깨워주며 그가 잔인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다는 듯이.

이미 한 번 지나 버린 과거와 지금 현재는 달랐다. 계기는 사소했지만, 많은 것들이 변하고, 또 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모든 걸 부정하고 있었다.

착각하지 말라고, 현재의 평온함에 속지 말라고, 혹은 여전히 네가 이곳에 속한 줄 알았냐는 듯 유진을 비웃는 듯 조소했다.

“이게… 내, 과거라고?”

“그래, 어차피 큰 틀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큰 틀이라면, 그와 헤어질 미래를 말하는 건가. 어쩌면 다시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주서훈의 행동일지도 몰랐다.

‘바뀌는 건 없어.’

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도착점으로 향한 이성이 그 한 가지를 깨달으며 유진이 다시 주워든 약 봉투와 함께 시선을 바닥으로 툭 떨어트렸다.

아냐, 저 말이 틀릴 수도 있어. 뒤늦게 이를 악물며 유진이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이미 시야는 텅 비어있었다.

“하…….”

놀란 듯 주변을 살핀 유진이 허탈하게 숨을 내뱉었다.

“아무도 없어?”

마치 신기루라도 본 듯 그 어디에서도 남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커다란 화분 하나만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제야 안심한 듯 유진의 얼굴에서 창백함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래, 방금 그건 내 상상이 환영처럼 나타난 거야. 차오르는 불안을 가라앉히듯 뻔히 보고도 제 착각이라, 유진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 * *

다시 또 꼬박 몇 달이 지났다.

슬슬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그와 헤어지던 동거 삼 년 차를 코앞에 두고서야 유진은 위궤양에 관한 사실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마감 하나를 겨우 끝마치고 돌아온 일요일이었을 거다.

서훈도 바쁜 일정을 하나 마무리 짓고, 둘이 휴가 기분으로 느긋하게 뒹굴다가 예상치 않게 튀어나온 주제이기도 했다.

“주서훈, 그 약은 또 뭐야?”

“어? 어, 그게…….”

반쯤은 작정하고 그녀가 만든 함정이었다. 약 먹는 걸 들킨 서훈에게 그녀가 엎드려 절 받기 식으로 얻어 낸 결과였기 때문이다.

“사실 최근에 위궤양이 좀 생겼어.”

“뭐? 위염이 아니라?”

“처음엔 그냥 위염이었어. 관리가 허술했는지 좀 심해졌지만.”

뒤늦게 약 복용 사실을 털어놓는 서훈에게 그녀는 알고 있었다는 말 대신,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

“그게 뭐야, 더 빨리 말했어야지.”

“걱정 끼치는 것도 싫고, 이래저래 정신이 좀 없었어.”

느슨하게 풀어진 입매를 다잡으며 유진이 고개를 치켜들자 서훈도 손에 든 책을 옆으로 쓱 밀었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하다며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유진의 속도 편치는 않았다.

단순히 위염인 줄 알았더니, 무려 위궤양이란다. 그걸 지금껏 숨기고만 있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언제부터 생긴 건데?”

“최근이라고 했잖아, 얼마 안 됐어.”

“하아, 그 얼마가 얼마냐니까.”

“그냥 몇 달 전쯤.”

유진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별거 아니라는 듯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진짜 몇 달이 맞기는 하고?”

“매번 속고만 살았지?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믿어.”

어, 너한테 속고만 산 느낌인데.

차마 꺼내지 못할 말을 삼키듯 대답하며 유진이 애써 구겨지려는 표정을 다잡았다.

어디부터 진짜인지도 유진은 알 수 없었다. 약을 발견한 것도 꽤 지났는데 그는 무작정 말을 얼버무리듯 넘기려고만 했다.

“모르겠다, 네가 나한테 비밀 만드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유진이 포기한 듯 중얼거리자 그가 분위기를 전환하듯 눈꼬리를 짓궂게 착 접었다.

“뭐야, 빨리 말 안 해서 삐졌어?”

“됐거든요, 삐지기는 누가.”

뾰로통하게 콧방귀를 뀐 유진이 그만하자는 듯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도 좀 빨리 말해 주지. 괜히 그에게 모난 서운함이 드러날까, 자리를 피하려던 것뿐이었지만, 서훈은 그녀가 삐졌다고 여긴 모양이다.

“진짜 화났어?”

“아니라니까, 내가 몇 번을 말해.”

“그럼 갑자기 어딜 가는데.”

걱정스럽게 따라 일어난 그에게 주방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유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너도 커피 줘?”

“아냐, 네가 일어나길래 조금 놀라서.”

괜히 민망해진 그가 머쓱하게 제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뻔히 보이는데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유진은 애써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억눌렀다.

은근히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반쯤은 빨리 말해 주지 않은 사소한 복수였고, 또 나머지 반은 연인의 반응이 귀여워서 눈감아 주는 것뿐이었다.

결국, 커피가 든 머그잔을 들고 거실로 나온 그녀에게 서훈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이브에 데이트를?”

“그래, 작년에도 우리 집에만 박혀 있었잖아.”

“번잡한 시기인데 굳이 뭐하러.”

“연말이니까, 가끔은 기분전환 삼아.”

기분 전환 두 번만 했다가는 사람에 깔려 죽겠다. 상상만 해도 오싹한 듯 유진의 반듯하게 펴진 미간이 보일 듯 말 듯 잘게 구겨졌다.

그 시기엔 어디를 가도 사람이 넘쳐 흘렀다. 데이트하는 커플이며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까지, 그냥 인파의 무덤이었다.

‘사람 많은 곳은 딱 질색인데.’

귀찮은 티를 내면서도 유진은 차마 데이트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이미 주서훈의 기분이 너무 좋아 보였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한 번쯤 인파에 파묻히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대강 생각을 정리하며 유진이 가볍게 웃어넘겼다.

슬슬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온 시기라 들뜨기도 했고, 여느 커플처럼 데이트를 즐기고 싶은 서훈의 뜻도 알 것 같았다.

“어디 갈 생각인데?”

“글쎄, 기억에 남는 데이트면 좋겠는데.”

고민하듯 턱을 문지르며 그가 눈꼬리를 착 접었다.

“데이트가 다 거기서 거기 아냐?”

“요즘엔 갈 곳도 많을걸, 이왕이면 기억에 남을 만한 장소로 잡자.”

“네네, 주서훈 씨가 원하는 플랜으로 짜 보세요.”

나직하게 웃으며 그녀가 장난처럼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걸 곧이곧대로 이해한 건지 서훈의 표정이 제법 진지해졌다.

“흐음, 데이트 플랜이라…….”

“데이트하자며, 너무 진지한 거 아냐?”

이래서 무슨 말이던 함부로 하면 안 되나 보다.

“상상만 해도 좋으신가 봐요?”

“싫을 리가. 너랑 그 시즌에 나간 기억이 까마득하다고.”

“나가면 고생하니까 그랬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 몰라?”

어이없게 웃으며 유진이 기분 좋은 듯 풀어진 그의 표정을 빤히 응시했다.

“거기서 말한 고생이 그 고생은 아닐 텐데?”

“뭐든 붙이기 나름이지.”

어차피 한집에서 살고 있었다. 굳이 외부에서 데이트할 필요가 없을 텐데.

“이브 날이면 사람 엄청나겠다.”

벌써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잘게 구기자 서훈이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이번엔 고생 안 하는 데이트로 잡아볼게, 그럼 됐지?”

“무려 크리스마스이브거든요.”

아무래도 그에게 따로 계획이 있는 눈치였다. 약간 못 미덥기는 했지만, 우선 알았다며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연인의 기대감을 와장창 부숴 버리기엔 아직 그녀에게도 서훈의 콩깍지는 꽤 깊이 씌워져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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