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눈 깜짝할 사이,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여러모로 유진으로선 생각이 많아지는 겨울이었다. 그와 헤어진 시기가 훌쩍 코앞으로 다가온 탓이었다.
폭염이 심한 여름이 지나서일까.
다른 해보다 더 일찍 찾아든 겨울은 앞으로의 추위를 알려 주듯 매섭게 영하권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으, 추워.”
서훈을 따라 차에서 내린 유진이 추운 듯 목도리를 더 위로 추어올렸다.
“후우, 예년보다 추운 느낌인데?”
“어쩔 수 없지, 나오자고 한 건 너잖아.”
재킷을 꽉 여미는 서훈을 보며 유진이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집에서 편히 뒹굴면서 영화나 보면 좀 좋아. 그놈의 데이트 두 번 하다가는 얼어 죽을 지경이 아닌가.
“진아, 어차피 나온 건데 표정은 좀 풀자.”
“표정이 왜, 째려본 적도 없거든?”
“그래도 뺨이 아프던데, 꼭 누가 찌르는 것처럼.”
다정한 말과 함께 서훈이 그녀의 어깨 위로 제 팔을 걸쳤다. 그 천연덕스러운 모습을 보며 유진이 내리라는 듯 손등을 툭 쳤다.
“은근슬쩍 뭐하는 짓이야?”
“뭐하긴, 남들 보는데 끌어안을 수는 없잖아.”
그렇게 말한 연인을 바라보며 그녀가 눈을 세모꼴로 치켜떴다.
“누가 들으면 평소에도 늘 이러고 다니는 줄 알겠다.”
“대신 손잡고 다니잖아, 매번.”
“같이 외출하는 횟수 자체가 적잖아, 우리는.”
하필이면 올해 들어서 가장 추운 날이었다. 그래도 기분 내겠다는 서훈을 생각해서 참고 있었지만, 칼바람이 매섭기는 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데?”
“있어, 그런 곳이. 추워서 그래?”
“당연한 걸 물어.”
급기야 짜증이 난 듯 유진이 입을 툭 내밀었다.
“끄응, 짜증부터 내지 말고.”
“짜증 아냐. 추워서 신경이 곤두선 거야.”
누가 봐도 짜증을 내고 있으면서 유진은 천연덕스럽게 그런 적 없다고 우겼다.
유진은 어릴 때부터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었다. 서훈도 잘 아는 사실이라, 최대한 예민해진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많이 추우면 재킷 벗어 줄까?”
“사양할게.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머니한테 죄송하잖아.”
“네가 왜 우리 식구들 눈치를 봐?”
“예비라도 며느리잖아, 시어머니가 편할 리 없지.”
쓸데없이 샛길로 빠지는 대화가 불편한 듯 유진이 그냥 넘기라며 대화를 딱 끊었다.
솔직한 심정이야, 감기가 문제는 아니었다. 굳이 추운 날 밖으로 나온 것부터가 불만의 시작이었으니까.
“그냥 집에서 영화나 보면 딱인데.”
서훈에게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며 유진이 상체를 바짝 움츠렸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영 가실 줄을 몰랐다.
다행히도 그녀의 짜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세 무언가를 찾던 서훈이 검지로 어느 한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다, 저 노란 건물 보이지?”
“어? 저기 저 노란 거?”
손끝을 따라 움직인 눈이 건물을 보며 신기한 듯 휘둥그레졌다.
“맞아, 다 좋은데 따로 주차장이 없더라고.”
“눈에 확 들어오네.”
“아마 저 건물 삼 층일 거야.”
꽤나 독특한 건물이었다. 온통 노란색인 외관도 그랬지만, 층마다 각기 다른 카페가 채워져 있는 것도 그랬다.
“난 또 뭔가 했더니, 카페야?”
“이색 카페야, 타로랑 사주 봐주던데.”
“타로랑 사주?”
“주변에서 저기가 평이 제일 좋더라고.”
가만히 듣던 유진이 생각지도 못한 듯 눈썹을 잘게 찡그렸다. 이색 카페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게 타로나 사주일 줄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색다른 곳으로 가자더니, 새해 앞두고 연애운이라도 보고 싶어진 건가.
‘추억이 되긴 하겠네.’
쓰게 웃으며 유진이 제 손을 끌어당기는 서훈을 따라 들어갔지만, 입구에 적힌 글귀를 보며 걸음을 멈춰 세웠다.
여기 예약제라고 적혀 있지 않냐. 서훈에게 넌지시 묻자 오히려 예약까지 해놨다면서 유진을 향해 그가 씩 웃었다.
“그래 놓고 나한테는 입도 뻥긋 안 하셨고요?”
“이런 건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
요컨대 서프라이즈란다. 아무래도 한 번 날 잡아서 이벤트의 개념을 다시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유진이 턱을 치켜들었다.
자꾸 유진이 계단 아래에서 버티자 어지간히 답답한 모양이다. 여기까지 온 이유가 따로 있다며 서훈이 재차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힘없이 반쯤은 딸려 올라가며 그녀는 이 카페여야만 하는 이유를 서훈에게 들을 수 있었다.
연애를 상당히 잘 보는 유명한 타로 마스터가 이 가게에 있다던가. 뭐, 어쨌거나 그렇단다.
“흐음.”
가게로 들어서자 독특한 내부가 시야를 사로잡았다. 인테리어를 보던 유진이 확인하듯 서훈의 팔을 꾹 잡아당겼다.
“여기 타로 봐주는 카페라고 했지?”
“맞아, 그런데 인테리어가 상당히 독특하네.”
“솔직히 무슨 마녀의 집 같아.”
“진아, 그래도 마녀는 좀.”
“개인적인 감상인데 뭘, 신경도 안 쓸걸?”
그렇게 가게 입구에서 내부 인테리어를 구경하며 서훈과 한창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눌 즈음이었다.
히피처럼 옷을 걸친 여자가 반쯤 가려진 커튼 사이로 나와, 좌우로 두리번거렸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상당히 이국적이고, 눈에 띄는 외모였다. 머리카락이나 눈동자만 봐서도 한국인은 아니었다.
“혹시 예약하신 분이세요?”
뒤늦게 두 사람을 본 그녀가 곧장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네 주서훈으로 예약해 놨습니다.”
“시간 딱 맞춰서 오셨네요.”
친절하게 웃으며 여자는 두 사람을 조금 전의 커튼 안쪽으로 안내했다. 아마도 조금 전, 서훈이 말한 유명한 타로 마스터가 바로 이 여자였던 모양이다.
* * *
테이블로 간 여자는 한쪽에 놓인 카드를 꺼내 섞으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집중시켰다.
“알고 오셨겠지만, 전 연애운만 봐요. 두 분 다 괜찮으시죠?”
친절하게 묻는 말투가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처럼 들렸다. 유진은 알고 있다고 대답하는 서훈을 흘깃 바라보다가 다시 여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테이블에는 몇 가지의 카드 뭉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한 가지의 카드를 놓고 봐주는 게 아닌 모양이다.
“차는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그 질문을 받으며 어쨌거나 여기가 카페라는 사실을 유진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고 난 뒤에야 그녀는 싱긋 웃으며 본격적으로 카드 점에 관한 운을 뗐다.
“사람한테는 각자의 연이 있어요. 그걸 일컬어 붉은 실이라고도 하고.”
“동양에선 그거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던데.”
“비슷해요, 나라마다 조금씩 비슷하고도 약간 다르니까요.”
운명의 붉은 실이라. 창작에 관한 직업인지라, 스치듯 유진의 눈동자로 호기심이 차올랐다.
“보통 연인은 그게 다 이어져 있을까요?”
“글쎄요, 확률은 반반이라고 할까.”
“네? 반반이라면, 아닌 경우도 있다는 뜻?”
“살면서 없던 인연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기도 해요.”
그녀는 친절하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 나갔다. 손님을 많이 상대해 본 노련함이 묻어난 화법이기도 했다.
재차 질문을 꺼내려던 유진은 도로 제 입을 닫아야만 했다. 카드를 쥐며 바라보는 시선이 슬슬 시작해도 되겠냐 묻고 있었다.
“가장 중점적으로 보고 싶으신 부분 있으세요?”
“다들 뭘 가장 중점적으로 보죠?”
“글쎄요, 오는 분마다 조금 다르기는 한데.”
커플로 오면 앞으로의 관계, 혹은 결혼에 관해서 많이 묻는다며 그녀는 간단히 설명했고, 대강 서훈도 알아들은 눈치였다.
물론, 유진의 생각은 좀 달랐다. 서훈을 따라왔지만, 사실 타로 카드를 그녀는 크게 신용하지도 않았다.
‘과연 저걸로 미래가 보이기는 할까?’
자연스럽게 떠오른 의문은 단순했다. 아예 미래에서 넘어온 유진에게 저 타로점이 맞을지도 미지수일 수밖에 없었다.
과정이 달라졌는데 그 결과가 그대로인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타로라는 말을 듣고도 흔쾌히 그를 따라 들어온 것이다.
유진이 잠깐 딴생각에 빠진 사이, 테이블에는 여러 종류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카드가 정해진 대로 나열되고 있었다.
“이거, 잘 맞아요?”
“…네?”
느릿하게 물음을 던진 유진을 본 그녀의 얼굴은 기묘했다. 마치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쓸데없이 너무 속내를 드러낸 모양이다. 쓰게 웃으며 유진이 자신을 빤히 보는 여자와 나란히 시선을 마주했다.
“타로는 생전 처음이거든요.”
“네, 그건 입구에서 두 분 봤을 때부터 느꼈어요.”
“그래서예요, 처음이라 그냥 좀 궁금해서.”
“대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잘 맞는 기준도 손님의 몫이 아닐까요?”
뒤늦게 질문을 이해한 듯 유진을 향해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배열이 끝난 첫 번째 카드를 곧장 뒤집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연상시키는 그림이었다. 한눈에 봐도 연인 카드였다.
“어머, 처음부터 연인이 나오는 건 드문 일인데.”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좋은 겁니까, 그 카드?”
“그럼요, 연애운에서는 최고의 카드 중 하나에요. 다만…….”
“……?”
“양날의 검과 비슷한 카드기도 하죠.”
그 말과 함께 손끝으로 그녀가 남자와 여자의 머리 위로 보이는 뱀을 콕 짚었다.
‘그건 이중성을 뜻하는 건가?’
유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충족된 애정도 좋지만, 늘 선을 조심하는 것도 좋겠어요.”
“그 선은 뭘 뜻해요?”
“과한 애정이나 집착, 뭐든지 적당히가 좋죠.”
가만히 듣던 유진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네요.”
“세상엔 한 가지만을 담는 경우는 드무니까요.”
솔직히 어디서나 해 줄 수 있는 조언이었다. 서훈도 그걸 느꼈는지 더는 질문이 없었고, 그녀는 다시 두 번째의 카드를 새로 뒤집었다.
카드를 빤히 주시하며 유진이 알 길 없는 모호한 표정을 드러냈다. 언뜻 보기에도 이번 카드는 그 뜻을 알 것 같았다.
연인 다음에는 시간이라니.
우습기도 하다. 저건 꼭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로 온 자신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유진에게는 그랬지만.
“혹시 남자분이 연하신가요?”
“동갑입니다만,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건지.”
“네? 동갑이요? 으음, 이상하네.”
타로를 보는 사람에게는 그게 다른 의미로도 해석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