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37화 (37/67)

❦제37화

카페를 나서고도 유진은 불만을 투덜거리며 서훈을 따라 몇 시간이나 더 밖을 돌아다녔다.

그가 짠 플랜이 싫다는 건 아니었다. 연인과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가 싫을 리 없었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데다가 매서운 날씨, 그 가게에서 타로를 보는 여자의 묘한 말들이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을 뿐이었다.

“여긴 또 어떻게 알아냈어?”

“먹을 만했지? 생각보다 고기 질이 좋던데.”

“응, 웬만한 레스토랑보다 나았어.”

상당히 맛이 좋기는 했다. 스테이크 가게가 숨겨져 있는 골목을 벗어나며 유진이 솔직하게 감상을 털어놓았다.

“다행이다, 가게가 허름해서 걱정했거든.”

“별걱정을 다 해, 걱정이 과하다니까.”

우스갯소리라도 들었다는 유진이 정색하자 그가 기분 좋게 웃었다.

“맛집은 원래 호불호가 갈리잖아, 어디든지.”

“하긴 저 스타일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더라.”

“네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할까.”

그 의견은 유진도 동의했다. 솔직히 지금 나선 가게도 작정하고 찾지 않으면 평생 몰랐을 법한 위치였다.

워낙 구석진 곳에 있었다.

눈에 띄지도 않는 가게인데 손님은 또 제법 많았다. 아는 사람만 알고 찾아오는 그런 맛집인 모양이다.

얼마나 데이트가 하고 싶었던 거야, 이 남자는. 게다가 그 플랜은 또 뭐고.

“도대체 그 플랜은 기준점이 뭐야?”

문득 궁금해진 유진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불쑥 물었다.

“추억하기 좋은 곳, 그건 갑자기 왜?”

“궁금해져서, 가는 곳마다 찾기 힘든 곳이던데.”

굳이 머리를 어렵사리 굴릴 필요도 없었다. 이 넓은 번화가에서 구석진 골목으로만 돌아다녔으니 말이다.

오히려 쉽게 찾는 사람이 더 이상한 거 아닐까. 유진으로선 이 추위에 돌아다니는 것부터도 곤욕이긴 했지만.

“아까 전의 거기는?”

“인터넷으로 추천 검색하니까 나왔어.”

역시나 노력보다는 활발한 포털 사이트가 최고였나 보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니만. 누군가의 추천을 보고 주르륵 데이트 플랜이라고 따라 만들어 버린 모양이다.

뭐, 어쩌겠는가. 저 남자가 좋아하는데 따라 웃을 수밖에.

간단하게 제 마음을 배운 채, 별생각 없이 걷던 유진은 뒤늦게 이상함을 느낀 듯 서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윽, 갑자기 왜 또.”

“지금 주차장으로 가는 거 아니지?”

이럴 줄 알았다.

“어? 진아, 그게 있잖아.”

말끝을 길게 끌며 눈치를 살살 보는 모양새만 봐도 확실히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주서훈, 꼬집기 전에 빨리 실토해.”

“그래도 나이가 몇 개인데 그런 협박까지…….”

“연인끼리 나이를 왜 따져?”

원래 연애는 다 유치한 거야. 설마 몰랐어? 대놓고 덧붙이며 팔짱을 낀 그녀가 서훈의 팔을 싹 잘랐다.

“그래, 다 내 죄다.”

“엎드려 절 받기도 별로니까, 어디 가는지나 말해.”

유진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이따금 지나가며 힐끔거리는 시선이 없진 않았지만, 그것 또한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연애 싸움이야, 커플의 일상인 것을.

그런 연인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금세 난처한 듯 웃으며 그가 멀리 떨어진 간판 하나를 슬쩍 가리켰다.

“너 데리고 저기 가려고 했지.”

“마로카이롱? 무슨 이름이 저래?”

유달리 눈에 띄는 간판을 보며 유진이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딱 봐도 공주님이 연상된다고 할까. 핑크빛 간판 위로 크게 적힌 영어 이름이 쓸데없이 너무 러블리했다.

저런 스타일은 싫던데. 들리지 않게 불만을 삼킨 유진이 곁눈질로 제 연인을 살폈다.

“…가고 싶구나?”

“그런 거 아냐, 디저트가 워낙 유명하길래.”

서훈이 손을 내저으며 반박했지만, 가늘어진 눈이 영 믿는 눈초리가 아니었다.

딱 봐도 가고 싶은 얼굴인데. 나직이 혀를 찬 유진은 그때, 별안간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렸다.

주서훈은 단 음식을 싫어한다.

늘 당이 떨어지면 안 된다며 달달한 초콜릿이나 디저트를 달고 사는 쪽은 오히려 유진, 바로 자신이 아닌가.

‘내가 그걸 왜 까먹고 있었지?’

아무래도 자신의 들뜬 연인은 정말 순수하게 자신을 저 가게에 데리고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춥고 귀찮다고 짜증만 부렸는데, 이걸 어쩌지. 저 홀로 쌓인 오해를 푼 유진은 괜히 미안해져서 그냥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네 말 들었더니 단 게 당기네?”

“가기 싫은 게 아니라?”

“유명하다며. 갑자기 좀 궁금해지기도 하고.”

정말로 맛이 궁금한 듯 간판으로 시선을 던지며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서훈의 팔짱을 꼈다.

“안 내키면 다른 가게로 가자.”

갑자기 말을 바꾸니 그는 영 못 믿는 눈치였다. 유명한 가게라고 하니 먹어보고 싶은 심리가 작용한 것도 없진 않았다.

“됐어, 그냥 저기로 갈래.”

“너 조금 전에는 별로 안 내켜 했잖아.”

“사람 마음이 다 그렇지, 뭐.”

이미 귀찮아하는 것도 서훈에게 들킨 듯했지만, 유진은 그냥 마음이 바뀐 거라며 나직이 웃을 뿐이었다.

* * *

여차여차해서 꼬박 몇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오랜만의 긴 데이트가 끝났다.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그는 기분이 꽤 좋아져 있었다. 말로는 연애운이 좋아서라고 하지만, 그냥 데이트가 좋았던 것 같았다.

“먼저 씻어, 난 조금만 쉴래.”

“늘어지면 더 귀찮아, 내가 목욕물이라도 받아 줘?”

귀찮다는 듯 소파에 반쯤 늘어져서 유진이 손을 휙 내저었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너나 씻어.”

유난히 추운 날씨 탓일까. 훈훈한 집안으로 들어오자 긴장으로 굳은 몸이 나른하게 풀어져만 갔다.

유진이 반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드레스룸으로 가는 서훈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기분 좋아 보이네, 주서훈.’

느슨하게 풀린 입매가 제법 볼만했다. 그는 자신에게 드러난 표정을 수습할 생각 따위도 전혀 없는 모양이다.

금세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서훈을 보며 유진이 바람 빠지듯 그를 따라 덩달아 웃고 말았다.

“너 혼자 기분이 너무 좋은 거 아냐?”

조금만 더 올라가면 입꼬리가 귀에 걸리겠는데.

“콩깍지 덕이야, 데이트하고 났더니 기분이 좋네.”

“그 두 개는 연관성이 없을걸?”

“뭐 겸사겸사, 아까 연애운도 잘 나왔으니까.”

다시 또 타로를 언급하며 그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전부 다 좋은 것도 아니었잖아.”

“괜찮아, 그 정도면.”

너무 좋아도 사기 같지 않냐며 픽 웃는 연인을 보며 유진은 그냥 소리없이 따라 웃고 말았다.

하긴 반박할 말도 없다. 기대치가 없던 유진이 보기에도 그 타로 마스터는 생각보다 상당히 잘 맞추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적당히 웃어넘기면 될걸. 가만히 보면 이 남자, 쓸데없이 아까 본 연애운에 너무 진심이 아닌가.

“앞으로도 함께한다잖아.”

그것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딨냐며 서훈이 대뜸 그녀의 옆에 앉아, 장난치듯 확 끌어안았다.

“그렇게 직접적으로는 말 안 했거든?”

“뭐든 해몽이 좋으면 장땡이야.”

“방금 그 말은 너무 단순한 논리인 거 아니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유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주서훈답지 않은 마인드인데. 무슨 소리를 늘어놓으려는 건가 싶었더니만, 결론 한 번 참 간단하기도 하다.

“그럴 거면 카드 점은 뭐하러 봤어?”

“추억이지, 한 번쯤은 그런 거.”

무슨 소리를 늘어놓으려는 건가 싶었더니만, 결론 한 번 참 간단하다.

“그 말도 일리는 있네, 한 번쯤은 추억이라…….”

말끝을 따라 유진이 흐릿한 기억 너머로 홀로 남았던 텅 빈 집을 느릿하게 그렸다.

익숙해진 그 공허함을 알고 있었다.

늘 함께인 공간이 침묵으로 가득 차고, 추억이라 넘긴 벽지 하나까지도 그저 아프게만 닿는 순간이 분명하게 존재했었다.

지금의 그는 모르는, 유진 혼자서 감내한 현재이자 과거가 된, 혹은 또 다가올지도 모를 미래이기도 한 기억이.

“그런데 훈아.”

“……?”

“네가 말한 그 추억이라는 건, 항상 좋기만 할까?”

욕실로 들어가던 서훈이 그 한 마디에 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갑자기 그런 생각은 왜 하는데.”

유진에게로 향한 시선이 의문으로 옅게 파였다.

“그냥 생각났어, 호기심도 좀 들었고.”

“늘 좋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나쁠 것도 없지. 우리가 헤어질 리 없잖아?”

“미래는 모르는 거야. 우리가 어떤 식으로 변할지는.”

뱉어놓고도 아차 싶었다. 스스로가 놀라 뒤늦게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유진은 그에게 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서훈도 썩 반가운 주제는 아니었던 건지, 수긍하듯 가볍게 끄덕이며 더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진 않았다.

“말이 옆으로 샜네, 얼른 샤워나 해.”

“대화하다가 이젠 막 욕실로 쫓아내는 거야?”

“누가 쫓아내? 아까 샤워한다면서.”

이래서 어느 세월에 씻어. 못 박히듯 서 있는 서훈을 지적하며 유진은 얼른 씻으라는 듯 재차 욕실을 가리켰다.

화낼 줄 알았는데 그는 예상보다 조용했다.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욕실 너머로 사라지는 서훈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어쩐지 조금 생각이 많아졌다.

마냥 모든 걸 좋게 받아들이는 서훈과 달리 그 타로 마스터의 말이 뇌리에 깊이 박힌 탓이리라.

‘보통 나이 차가 많을 때 나오는 카드거든요, 연상연하 커플이라던지.’

‘연상연하 커플이요?’

‘네, 그래서 전 여자분이 나이에 비해 동안이신 줄…….’

마치 시간을 건너뛰어 왔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그녀는 설명과 함께 유진을 묘한 눈길로 바라보기도 했다.

종합해 보면 나이도 뛰어넘을 만큼 사랑한다는 식이었다. 사람마다 받아들이기 나름이라 서훈은 꽤 만족하는 눈치였지만.

‘저, 그게 좋은 거겠죠?’

‘그럼요, 드문 확률인 만큼 남들보다 확실히 좋은 운이에요.’

확답을 받고서도 유진은 그 뜻이 마냥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드문 확률이라는 뜻이 정말로 좋기만 할까.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을 텐데.

과한 억측이라며 가볍게 흘려 넘겨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완전히 무뎌지지 못한 불안감이 자꾸 그녀를 엄습해오고 있었다.

그 시기만 넘기면 된다, 어떻게든 3년 전의 그날만.

여전히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감정을 삼키고, 또 삼킨 유진의 시선이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달력으로 불안한 듯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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