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38화 (38/67)

❦제38화

겨우 한 장 남은 달력도 슬슬 마지막 날의 반절이 넘게 흘러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한 해의 끝자락인 셈이다.

―유하 씨는 한 해의 마무리 잘하고 계신가요?

―올해는 개인적으로 너무 바빴거든요. 뭔가를 마무리할 정신도 없었다고 할까?

―누구보다 올해 사랑을 많이 받으셨으니, 이해합니다.

화면에서 나오는 연말 시상식을 보는 유진의 눈길은 그런 연말의 기대감은커녕, 오히려 평소보다 유난히 더 멍하게 풀려 있었다.

연말 분위기라도 즐기자며 시상식을 틀어놓고도 생각이 많아서인지, 자꾸 의식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이 시기에 뭘 하고 있었더라.

이곳으로 돌아오고도 몇 년이 흔적도 없이 지나갔다. 그사이 기억도 제법 흐릿해졌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도 저 남자와 한 공간에서 이러고 있었을 거다. 번잡하게 인파가 몰릴 시기엔 외출을 싫어하는 그녀를 위한 서훈의 타협점이었으니 말이다.

언제나 비슷했다.

크리스마스나 명절, 연말에는 외출을 자제하는 대신, 그들은 화면으로나마 그 특유의 분위기를 즐기는 편이었다.

같이 보신각의 종소리를 듣고, 서로에게 기분 좋게 새해 인사를 건넨 뒤 잠들었던 것도 같다. 또렷하게 남을 만한 색다른 기억도 거의 없었다.

‘뭐, 오늘도 비슷하겠지. 그런데 얘는 왜 또 안 나와.’

가볍게 온갖 잡생각을 흘려 넘기며 유진이 들릴 듯 말 듯 투덜거리는 사이, 드디어 그가 거실로 다시 돌아왔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자기가 호랑이인 줄 아나 보네. 홀로 웃음을 삼키며 유진이 곁으로 오는 서훈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래 걸렸네, 통화는 잘 끝났어?”

“얘기가 좀 길어져서.”

“원래 일 얘기는 하다 보면 끝없이 길어지긴 하더라.”

“그러게, 금방 끊을 생각이었는데.”

피곤한 듯 말하며 그가 손에 쥔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소파로 툭 던졌다. 어지간히 연말 저녁을 방해받아서 짜증이 난 모양이다.

그만큼 오래 걸리기는 했다. 갑자기 걸려온 김 비서의 전화에 잠깐 통화하고 온다며 들어간 서재에서 꼬박 30분을 채우고 나왔으니 말이다.

“급한 일이었나 보네, 이 시간에 연락을 다 하시고.”

떠보듯이 묻자 오만상을 구기며 그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김 비서가 워커 홀릭이라 피곤하다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약간 깐깐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의외인 듯한 시선으로 유진이 그를 빤히 주시했다.

“아버지 쪽 사람은 하나 같이 저 지경이야, 워커홀릭뿐이지.”

“음, 아버님이 사람 보는 눈이 좋아서 아냐?”

“절대 아닐걸, 오히려 부려 먹기 좋은 사람만 모은 거겠지.”

김 비서도 생전 애인 만드는 꼴을 못 봤다며 그가 혀를 찼다. 지금껏 쌓인 악감정이 제법 많아 보였다.

적당히 좀 투덜거리지, 그래도 일 처리는 꼼꼼한 사람 같았는데.

쓰게 웃어넘기려는 찰나, 이제야 화면을 본 서훈이 의외인 듯 중얼거리며 곁에 앉았다.

“벌써 시상식 시작했어?”

“조금 전에. 그런데 통 누가 누군지 모르겠더라.”

“다 그래. 관심 없으면 봐도 몰라.”

쓰게 웃으며 털어놓자 자기도 비슷하다며 그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어차피 모르는 얼굴뿐인데 연예 대상으로 돌릴까?”

“그냥 둬. 연말에라도 들어보는 거지.”

리모컨을 들고 서훈과 몇 마디를 나누는 사이, 화면에서는 요즘 핫하다는 모 아이돌 그룹의 특별 무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노래 좋다, 리메이크곡이랬나?”

“익숙하긴 하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느낌인데.”

어느샌가 서훈을 따라 그녀의 시선이 화면으로 옮겨졌다. 금세 노래가 끝나자 카메라의 앵글이 MC석으로 차츰 넘어갔다.

그때부터 유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훈과 시상식을 시청했다. 1부가 끝날 즈음에서야 허기짐을 느낀 그녀가 서훈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녁은 어떻게 할까?”

“연말이니까, 적당히 배달시켜서 먹자.”

시켜 봤자 야식처럼 족발이나 삼겹살, 오돌뼈 정도겠지만, 연말이라는 기분 탓인지 서훈은 마냥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연말이라 꽤 밀릴 텐데.”

“지금은 괜찮을걸. 더 늦기 전에 시키는 게 낫지.”

“으음, 그게 나을까?”

종소리 듣기 전에 너도나도 배달시켜서 술 마시고 그러잖아, 우리처럼. 천연덕스럽게 덧붙이며 서훈이 씩 웃었다.

“그거 술 마시자는 뜻이지?”

“우리 마누라, 가뜩이나 예쁜데 요즘엔 머리까지 잘 굴러간다니까.”

대놓고 남들 술 마시는 얘기하면서 우리 어쩌구 한 사람이 누군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며 유진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반응을 보면서도 서훈은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뭐가 저렇게 좋은 걸까, 그녀가 심드렁하게 서훈을 보며 팔짱을 꼈다.

“다음에는 가벼운 와인이라도 한 병 준비하던가.”

“사 오면 같이 마셔 주려고?”

“와인 정도면 마실 만하니까, 생각해 볼게.”

허용선은 딱 거기라는 듯 유진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술을 즐기지 않는 그녀로 인해 덩달아 서훈까지 차를 마시고는 했다. 그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언젠가 유진은 로제 와인을 한 병 선물로 받은 적이 있었다. 기회 삼아 마셔 봤더니, 칵테일처럼 부드럽게 넘어갔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소주나 맥주보다는 훨씬 나았다. 유진이 그 기억을 곱씹으며 말하니, 그걸 또 서훈이 물고 늘어지려고 했다.

“이왕이면 오늘도 어울려 줘.”

“뭘 어울려, 술 안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유진이 단칼에 거절하며 그에게 눈을 흘겼다.

“고민하는 척도 안 하지, 냉정하다, 서유진.”

“내가 좀 냉정하지. 왜, 다시 반했어?”

“콩깍지가 워낙 튼튼해서 별 상관은 없어.”

약간 서운하긴 하지만. 들릴 듯 말 듯 덧붙이며 그가 오버스럽게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술 한잔에 연기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텐데.

“됐거든요, 술 마시느니 일출을 보러 가고 말지.”

당연히 가벼운 말장난이었다.

인파가 몰릴 새해의 일출을 보러 일부러 찾아갈 이유는 없으니까, 하며 유진은 말 그대로 가볍게 웃었지만.

“어? 그럼 일출이라도 보러 갈까?”

“장난이야, 뭘 모르는 것처럼 진지해지고 있어.”

“나쁘지 않은 생각이잖아,”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다고, 유진은 뒤늦게 후회했다.

이미 서훈은 그녀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둘이서 새해 일출을 보러 간 적은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 남자, 또 쓸데없는 부분에서 진심으로 덤벼들기 시작한 것이다.

“말 나온 김에 가자, 지금 당장.”

아마도 그건, 새해를 한 시간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다.

* * *

그렇게 무계획으로 집을 나서고 몇 시간 뒤, 유진은 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며 차마 울지 못해서 그냥 웃고 말았다.

새해 시작부터 겨울 바다라니. 보신각의 종이 울리는 걸 보지 못했을 때보다 더 서글펐다.

먼저 말 꺼낸 사람도 자신이었다.

새해부터 웬 바다냐며 서훈을 붙들고 짜증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냥 제 발등을 찍은 것이다.

“해가 바뀌어도 바다는 달라지는 것도 전혀 없네.”

“바다야, 매번 그대로 있으니까.”

무심히 대답하며 유진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어쨌든 좋다, 둘이서 바다 오는 것도 오랜만이고.”

“굳이 한겨울일 필요는 없었잖아.”

“이맘때니까 온 거지. 아직도 많이 추워?”

걱정스럽게 묻는 서훈에게 유진이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입만 열어도 시린 바람이 매섭게 파고드는 탓이었다.

도대체 이놈의 해는 언제쯤 뜨는 거야.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유진은 해가 뜨는 방향을 연신 힐끔거렸다. 얼른 일출만 보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역시나 춥다.

유진은 롱패딩이며 주머니 가득 채운 핫팩을 만지작거리며 두 손으로 제 뺨을 감싼 서훈을 왜 그러냐는 듯 말없이 주시했다.

언제나 그의 다정함이 좋았다. 지금처럼 한 번씩 핀트가 엇나가는 경우가 있긴 해도 그쯤은 참아 줄 수 있을 정도로.

‘추우니 손 떼라고 하면 걱정해 준 사람만 민망해지겠지?’

그냥 추워도 좀 참기로 한 유진은 언제쯤이면 서훈이 손을 뗄까,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그때였다, 서훈에게서 반가운 말이 들인 것은.

“사람들 슬슬 몰린다, 곧 뜨려나 본데?”

“어, 진짜?”

덩달아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는 찰나, 뒤에서 그가 품으로 그녀를 확 끌어당겨 안았다.

“뭐야, 갑자기 놀랐잖아.”

“모르는 사람하고 부딪칠까 봐, 걱정돼서.”

“다 좋은데 앞으로는 예고라도 좀 해.”

유진이 허리를 감싼 서훈의 손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탁, 쳤다. 그러자 아프다는 엄살과 함께 장난치듯 서훈이 뒷덜미로 더 바짝 파고들었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데, 너무 태연했다. 오히려 그 뻔뻔한 태도에 기어이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진아, 그만 웃고 저기 봐.”

금세 집중하라는 듯 서훈이 그녀를 부르며 붉게 타오르는 허공 어딘가를 콕 짚었다.

“진짜로 뜨고 있네? 조금 전까진 낌새도 안 보이더니.”

슬슬 새해의 첫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손끝을 따라 허공을 본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들 시간대를 체크하고 왔나?”

“그런 것 같지? 잠깐 사이에 우르르 몰려들었어.”

“우리가 너무 계획 없이 온 걸지도 모르고.”

투덜거리면서도 유진의 시선은 붉게 솟구치는 바다 너머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서서히 위로 드러나는 광경은 제법 장관이었다.

살을 에는 추위도 그 순간만큼은 무디게 느껴졌다. 금세 유진은 허리를 감싼 서훈의 팔 위로 소리 없이 제 팔을 겹쳐 잡았다.

“예쁘다, 고생해서 온 보람도 있고.”

“뭐, 그래. 예쁘기는 하다.”

바다 특유의 비린 물 내음을 한껏 들이켜며 그녀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래도 새해 첫 일출인데 감상은 그게 끝?”

“새해 기분도 나고, 다 잘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뭐가 더 필요해?”

“그건 아닌데 별 감흥이 없어 보이길래.”

실망한 듯 서훈이 쓰게 웃었다.

그는 유진이 신나게 일출을 본 감상이라도 잔뜩 늘어놓을 줄 알았나 보다. 뭐, 원한다면 못 해 줄 것도 없겠지만.

“약간 좀 현실감이 없어.”

그저 담아두고만 있던 솔직한 속내를 툭 뱉으면서 유진은 알 길 없는 모호한 미소를 드러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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