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39화 (39/67)

❦제39화

그건 꼭 웃음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울음을 참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 기이한 비틀림을 그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곤혹스럽게 미간을 찡그리며 왜 그러냐 묻는 서훈을 향해 유진은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더라는 모호한 대답을 돌릴 뿐이었다.

“어렵다, 그 속을 들여다볼 수도 없고.”

“뭘 진지하게 고민해. 그냥 감상이야.”

“감상치고도 너무 철학적으로 들려서 말이지.”

픽 웃으며 그가 스리슬쩍 유진의 손을 잡았다. 피차 춥기는 마찬가지인지라, 꽁꽁 언 손이 마주 닿는다고 감각이 느껴지는 것도 없었지만.

새해 첫 일출 보기란 참 허무했다.

이 추위 속에서 한참 기다렸다가 몇 분이 지나면 각자 돌아가기에 바빴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체온이 더는 버텨 내질 못하는 것이리라.

“우리도 그만 돌아가자.”

주변이 한적해지자 유진도 남들처럼 급히 주차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쉬워하는 서훈을 모르는 척 그녀는 날름 보조석으로 올라탔다.

“영하권이라 그랬나? 오늘따라 더 추워.”

“확실히 춥다. 히터 좀 더 올릴까?”

칭칭 동여맨 목도리를 풀어 낼 엄두도 나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유진이 히터 앞으로 바짝 두 손을 내밀었다.

그놈의 일출이 뭔지, 두 번만 보다가는 얼어 죽겠다.

들리지 않게 연신 속으로 투덜거리는 찰나, 뒤쪽에 있던 담요가 그녀의 어깨 위로 폭 내려앉았다.

“뭐야, 이러려고 챙겨 왔구나?”

“너 추울까 봐서. 이럴 땐 담요도 제법 쓸 만하지?”

“역시 옛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불현듯 생각난 듯 유진이 작게 중얼거리자 서훈이 모르겠다는 뉘앙스로 되물었다.

“뜬금없이 무슨 말?”

“약 주고 병 준다는 거. 지금 딱 네가 그렇잖아?”

“에이, 그래도 난 약속 지켰잖아.”

“무슨 약속을, 설마 술 안 마신다고 했던 그거?”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은 얼굴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와락 구겨졌다.

따지고 보면 술을 안 마신 게 아니라 운전한다고 못 마신 거면서.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이 더 기가 막혔다.

“새해부터 술 마시겠다는 네 마인드가 제일 나빠.”

“그냥 반주로 마시겠다는 거였지.”

반주는 무슨, 삐뚜름하게 치켜 올라간 시선으로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반주는 술 아니고? 핑계도 좋지.”

“뭐, 그게 정 싫으면 난 다른 술도 상관없는데.”

“자꾸 술한테 미련 떨래?”

적당히 좀 해. 느릿하게 팔짱을 끼며 운전석으로 그녀가 시선을 던졌다. 때마침 타이밍 좋게도 그가 막 유진에게 곁눈질을 했다.

“종류를 바꾼다니까?”

“어차피 술이잖아. 그게 그거지.”

그래봤자 서로가 장난인 줄 알고 있었다. 유진은 웃기지 말라는 듯 일부러 더 냉랭하게 받아쳤지만.

“원래 입술만큼 중독성 강한 술도 없더라고.”

그걸 증명하듯 술을 빌미로 서훈이 대뜸 말장난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 * *

돌아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예상보다 한산한 고속도로는 제법 여유 있었고, 서훈도 드라이브하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운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차가 막 서울로 접어들 무렵, 뜬금없이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야, 새해 아침부터.”

서훈을 따라 보조석에서 유진도 설핏 미간을 찌푸렸으나 스피커를 타고 들려온 목소리가 상당히 귀에 익었다.

서훈의 어머님이었다.

금세 유진이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서훈이 그녀의 팔을 꾹 누르며 어머니에게 먼저 운을 띄웠다.

“이 시간부터 어쩐 일이세요?”

―해가 바뀌었잖니, 목소리나 들을 겸, 연락해 봤다.

“기다리시면 제가 알아서 연락드렸을 텐데.”

―네가 퍽이나, 말만 번지르르해선.

“…오늘은 할 생각이었어요, 점심쯤으로.”

곤혹스러운 듯 서훈이 한숨 섞인 변명을 늘어놓았다.

―됐다, 너희가 말만 앞서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었어야지.

“거기에 왜 절 낑겨 넣으세요, 어머니는.”

―말이 그렇다는 소리야, 말이.

“그래도 제 입장에서는 억울하단 말이죠.”

최근에 서준은 이혼까지 하지 않았던가. 싸잡아서 묶인 취급이 그는 꽤 억울한 기색이었지만, 어머니의 입장은 조금 다른 듯했다.

―매번 투정도 많다, 서훈이 너는.

“어머니, 도대체 제 말 어디쯤이 투정이라고…….”

―전부 투정이잖아, 뭘 몰랐다는 듯이.

가만히 듣던 유진이 스리슬쩍 제 입을 가렸다. 어머니한테 밀리는 모습을 보니, 목 끝까지 간질간질한 웃음기가 맴돌았다.

물론, 그 웃음도 오래가진 못했다.

일찌감치 연락하셨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일출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라는 말을 듣고, 어머니가 돌연 본가에 들르라는 말을 꺼낸 것이다.

“아침부터 저희는 또 왜요.”

당연히 툭 튀어나간 목소리가 썩 좋게 들리진 않았다.

―어차피 너희 지금 밖이라며.

“예, 그렇긴 한데…….”

―와서 떡국이라도 먹고 가, 그래도 새해인데.

괜찮다며 바로 거절하려다 말고, 서훈이 조용히 제 입을 닫았다. 어머니가 불쑥 유진을 언급하시니,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대놓고 보고 싶다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유진이 괜찮다는 의사를 전했고, 눈치껏 서훈은 가겠다는 말과 함께 어머니와의 통화를 끝냈다.

“불편하면 지금이라도 못 간다고 다시 연락할까?”

“그러지 마, 어머니한테 예의가 아냐.”

“형 이혼한 지도 얼마 안 지났어, 가면 들볶일 텐데.”

한숨 섞인 불만을 내뱉으며 그가 답답한 듯 창문을 살짝 밑으로 내렸다.

“실망감이 크긴 하셨겠다, 어머니가.”

“나야 계획을 알고 있었으니 상관없는데 어머니는 몰랐으니까.”

서훈이 씁쓸하게 웃었다.

“전혀 눈치 못 채셨던 거야?”

“그 인간은 나랑 다르게 어머니한테 끔찍하거든.”

“형한테 그 인간이 뭐야, 으이그.”

사실 유진도 본가에서 직접 본 게 있으니 그의 걱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주하린을 살뜰히 챙기며 예뻐하시지 않았던가. 며느리라고 정을 준 만큼 반대로 실망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새해가 되면 인사차 한 번쯤 서훈과 함께 본가에 들를 생각이었으니, 이대로 핑계 삼아 가는 것도 괜찮을 거다.

“대충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서훈이 막 톨게이트를 지나자 고속도로 너머를 바라보며 유진이 불쑥 물었다.

“글쎄, 이대로 가면 1시간도 안 걸리겠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아침 먹자고 부르시는데 너무 늦으면 좀 그렇더라.”

“미리 얘기해 놨으니까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서훈의 말은 반 이상은 정확히 일치했다. 본가까지 40분쯤 걸렸고, 우려와 달리 어른들의 식사는 이미 다 끝난 상황이었다.

물론, 서준의 이혼으로 상심한 어머니가 유독 그녀를 반겼다는 것만 빼면.

* * *

“하아…….”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그가 천천히 숙인 고개를 치켜들었다. 커다란 욕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주시하는 눈길엔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저 볼품없는 남자는 누구지?’

병자처럼 질린 제 얼굴을 바라보며 급기야 서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미련 맞은 새끼, 미친놈.

이 지경으로 몸이 망가질 때까지도 무디게 흘려 넘긴 자신이 한심하고, 서훈은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몇 달 사이, 증상이 눈에 띄게 확 심해진 느낌이었다. 메스꺼움이며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한 시점도 그는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함께 일출을 보러 갈 때까지도 이 지경은 아니었는데,

단순히 스트레스성 위궤양으로 보기엔 증상이 너무 이상했다. 통증으로 하얗게 질린 낯빛은 줄어드는 체중 때문인지 유독 광대뼈까지 도드라졌다.

“하, 제기랄. 이 꼴이 뭐냐고.”

겨우 치받치는 욕설을 삼킨 서훈이 흉하게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너무 건강을 자신했던 건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을 때, 조금이라도 빨리 정밀 검사를 받아 볼 걸 그랬나 보다.

어디가 잘못된 지도 알 길이 없었다. 거울 속 제 모습을 뚫어지게 보던 서훈이 손바닥으로 느릿하게 이마를 문질렀다.

“후―”

자꾸만 몸이 늘어지고 이상하리만치 만사가 다 피곤했다.

살면서 크게 아파 본 것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적었던 서훈이다. 은연중에도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걱정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고작 그게 끝이라고만 여겼다.

유진이 괜한 걱정으로 울상 짓는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도 않았고, 일이 바빠서 정밀 검사가 자꾸 미뤄지는 탓도 없진 않았다.

“더 늦기 전에 해야겠지, 검사를.”

겨우 쥐어짠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가 무언가를 계산해 보듯 천천히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다섯 번이다.

이번 주에만 그가 복통을 일으킨 횟수였다. 서훈이 접힌 손가락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금세 힘을 빼고 천천히 폈다.

지금에 와서 횟수를 세어 본다고 해결될 리도 없지 않은가.

생각에 잠긴 서훈이 연신 세면대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한 박자 늦게 눈을 깜박이며 그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흐르는 물이 닿자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가 뼛속까지 오르며 그나마 약간 통증이 잦아들었다.

“제발 주서훈, 정신 좀 차리자. 제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서훈이 연거푸 찬물을 끼얹었다. 얼얼한 자극으로 통증이 잦아들며 그나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훈이 세면대로 내린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정신이 맑아지자 잠시 내려놓은 걱정이 다시 머릿속을 가득 채워나갔다.

‘그 녀석 놀랐을 텐데.’

시선이 절로 꽉 닫힌 욕실 입구로 넘어갔다. 거실에서 함께 TV를 보다 말고 욕실로 들어왔으니, 여기서 오래 진을 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지금쯤 문밖에서 유진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게 눈에 선했다. 최대한 빨리 통증을 잠재우고 언제나처럼 웃으며 나가야 할 텐데.

똑똑.

한 치도 빗나가지 않은 예상처럼 돌연, 문 너머에서 유진이 그를 부르듯 문을 두드렸다.

아직 수건으로 닦지 못한 얼굴에서 연신 물기가 흘러 티셔츠를 적셨지만, 서훈은 그걸 닦아 낼 여유조차 없었다.

“…서훈아?”

불안하게 흔들린 목소리로 유진이 연신 애타게 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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