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42화 (42/67)

❦제42화

후후, 뜨거운 김을 바람으로 식히며 유진이 곁에 서훈에게로 반쯤 고개를 비틀었다.

“어쨌든 좋다, 오늘따라 타이밍도 잘 맞고.”

아직도 손에 꼭 쥔 아메리카노에선 연신 뜨거운 김이 올라왔지만, 지금의 상황 자체가 그녀는 썩 만족스러운 듯했다.

“우리 밖에서 따로 만난 건 오랜만인가?”

“음, 아마 그럴걸.”

마냥 좋아하는 유진을 바라보며 서훈이 그랬냐며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살기 시작한 지도 벌써 3년째로 접어들었다. 나가기 싫어하는 유진의 성격도 있었으나, 확실히 너무 집에서만 뒹군 모양이다.

“혹시 그거 때문인가?”

“뜬금없이 뭐가?”

“뭐라고 하지, 나 지금 막 되게 새로워.”

한동안 너무 외출을 안 했나 봐. 혼잣말처럼 옆에서 작게 조잘거리는 유진이 그는 귀엽기도 하고, 마음 쓰이기도 했다.

유진은 가끔 저렇게 아이처럼 굴 때가 있었다. 조만간 짧게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좋아하는 걸 보니 이번에는 가자고 하면 따라나설지도 모르겠다.

“서유진 매번 데이트 가자고 할 때마다 거절하면서.”

“마감에 지쳐 있었잖아, 안 그래?”

평소와 달리 애교스럽게 눈을 착 접으며 유진이 그의 옆구리를 장난치듯 쿡 찔렀다. 어지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긴 사무실에서 막 전화를 받았을 때도 비슷했다. 유독 높아진 하이톤이 약간의 조증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디 그것뿐이랴.

평소에는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유진이 막 퇴근한다는 서훈에게 아파트 근처 카페로 나오라며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이다.

그래서 알려 주는 카페로 들어갔더니만.

‘서훈아, 여기! 여기!’

미처 주변을 둘러볼 틈도 없이 창가에서 유진이 그를 불렀다. 자리로 들어가 유진의 곁에 앉은 뒤에야 그는 여유롭게 카페를 둘러볼 수 있었다.

‘난 미리 시켰는데 괜찮지?’

‘별 상관없어. 어이구, 커피가 그렇게 땡겼어?’

‘조금은? 푸흐….’

아파트 앞 상가에 새로 들어선 카페는 꽤 실내가 소담했다. 테이블도 몇 개 없는 작은 공간인데도 구석구석 놓인 화분이 제법 구석을 갖추고 있었다.

연인보단 거의 부부처럼 익숙한 모습인데도 서훈은 기분 좋은 듯 웃는 유진을 따라 부드럽게 입매를 휘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유진이 좋다고 하면 싫었던 것도 덩달아 좋아졌고, 좋아하던 것도 유진이 싫다고 하면 이유도 없이 싫어지는 일이 많았다.

물론, 몇 년 동안 그런 서훈을 일정하게 지켜보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걸 빌미로 종종 민석은 시비조로 장난을 치긴 했지만.

“너도 아메리카노?”

“음, 난 됐어.”

“별로야? 여기 커피 맛 괜찮은데.”

메뉴판을 가리키는 유진에게 그가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따라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는지 속이 좀 아파서.”

아프다는 말과 함께 회사에서 많이 마셨다고 하자 유진도 더 이상 서훈에게 커피를 권하진 않았다.

“커피 좋아하면서 속 아파서 안타깝다.”

“내가 커피를 얼마나 좋아한다고.”

재차 커피를 홀짝거리며 유진이 장난치듯 언젠가의 기억을 입에 올렸다.

“너 학교 다닐 때도 그랬거든.”

“내가 그랬던가?”

“자판기 보면 꼭 한 잔은 마셨던 거 기억 안 나?”

마치 까마득한 시절을 떠올리듯 유진이 아련한 표정을 드러냈다.

“으음…….”

가만히 보던 서훈이 그 정도였나 턱을 문지르며 그녀를 따라 기억을 더듬었다.

하긴, 참새와 방앗간 정도의 공식이라면 꽤 좋아하나? 커피를 좋아해도 서유진보단 덜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기억 안 난다고 잡아떼려고?”

“그럴 리가, 하여간 우리 마누라 기억력도 좋다.”

픽 웃으며 그가 유진의 머리카락을 부스스 흐트러트렸다.

기억 하나도 선명하게 되짚을 수 있는 연인이 그저 예뻐 보였지만, 역시 당분간은 마시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굳이 커피까지 들이부으며 통증을 유발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검사가 끝날 때까지는 자제하라는 도민의 언질을 받기도 했고.

카페인은 일반 사람한테도 적당히 마시라는 당부를 곧잘 하는 의사들이지만, 가뜩이나 좋지 않은 몸에 좋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한몫했다.

몇 년을 함께 살아온 커플답게 두 사람은 뜸해진 대화 속에서도 수시로 연결고리를 만들어 대화와 침묵을 반복해서 이어갔다.

그 와중에도 서훈은 가방에 넣어 놓은 책을 꺼내 읽다가 부름을 들은 듯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참, 서훈아.”

“음? 왜?”

“선배 만나러 간다더니 일은 잘 해결됐어?”

페이지를 찾아 책갈피를 넣던 손이 그 말과 함께 그대로 행동을 뚝 멈춰버렸다.

“어, 잘 해결됐어.”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시 책갈피를 끼워 넣으며 서훈이 대답했다.

* * *

며칠 동안의 공백은 한 회사의 대표라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김 비서와 일정을 조율하는 일도 서훈에게는 제법 까다로웠다. 적당히 둘러대기가 쉽지 않은 상대라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예? 2박 3일이나 말입니까?”

처음 들었을 때는 김 비서도 제법 놀라는 눈치였다.

“개인적으로 갈 데가 좀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어딘지 제가 여쭤보는 건…….”

“노코멘트. 그 부분은 대충 넘어가시죠.”

평소와 달리 단호하게 말한 서훈을 보는 김 비서의 눈가엔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며칠이나 자리를 비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미룰 수는 있겠습니까?”

“일정이야 제 선에서 미루는 것도 가능합니다만.”

“다행이네, 그나마 가능한 선이라면.”

“하지만 으음, 저도 백 프로 확신은 무리라서.”

서훈의 일정을 적어 놓은 수첩을 펼쳐보며 김 비서가 골이 아픈 듯 나직이 침음을 삼켰다.

중요한 일정이라도 잡힌 듯했지만, 서훈은 고맙다면서 시치미를 뚝 뗐다. 그러고는 재차 비밀로 해 달라는 말을 강조했다.

“비밀이어야만 하는 겁니까?”

“부모님한테도 안 돼요. 이번엔 김 비서도 공범으로 치죠.”

아무 관련도 없는 김 비서를 끌어들인 건 미안하지만, 그는 자신의 비서였다. 게다가 가장 최측근이니, 어쩔 수 없었다.

어느 정도는 감출 수 있을지 몰라도 일정 하나 비우는 것도 관리하는 비서와 합의가 이루어져야 수월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김 비서는 어렵지 않게 며칠 동안의 일정을 다른 날로 연기시켰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으나,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었다.

바로 유진이었다.

함께 산 뒤로 그는 유진을 두고 외박한 적도 거의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서훈은 한참 만에야 해외 출장이라는 핑계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하루 만에는 절대 끝낼 수 없는, 며칠간의 일정으로.

혹시나 의심하면 어쩌지. 걱정과 달리 유진은 그를 믿는 듯 흔쾌히 알겠다며 수긍했지만, 여전히 얼굴에는 어딘지 모를 불안이 담겨 있었다.

이래서 걱정스러웠던 거다. 이유도 모를 저 녀석의 흔들리는 불안감에 보는 자신까지도 괜히 더 불안해서.

“일정이 앞당겨지면 하루 만에도 끝난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가 무슨 애야? 걱정하지 말고 출장이나 잘 끝내.”

유진은 호기롭게 눈을 부라리며 어깨를 쫙 폈다. 그래, 애가 아닌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다.

“그 걱정이라는 놈이 내 말을 안 듣더라고.”

“누가 들으면 진짜 몰래 키우는 애라도 놓고 가는 줄 알겠다?”

“서유진 어린이는 애가 맞지.”

괜히 더 씁쓸해지는 기분을 느낀 듯 그가 유진의 머리카락을 잘게 흐트러트리며 일부러 장난을 쳤다.

“누가 누구한테 꼬마 취급이야, 지금?”

“또 발끈하는 거 봐라.”

아직도 머리 위에 걸쳐진 손을 휙 잡아서 내린 유진이 투덜거리자 서훈이 목을 울리며 작게 웃었다.

이제는 아예 얼굴까지 벌게지며 발끈하는 그녀에게 서훈이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뺨을 간지럽게 쿡 찌르며 나직이 속삭였다.

“이러니까, 서유진이 맨날 나한테 꼬마 취급 받지.”

“너랑 나랑 동갑이거든요?”

“그래, 그래.”

“웃기지 마. 내가 꼬마면 너도 꼬마야.”

밝게 웃는 모습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나 가슴에 박혀 드는지도 서훈은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알면서도 외면하는 걸지도.

검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없던 두려움이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는 비슷했고, 서훈은 아무 일도 없이 유진이 모를 수 있기를 바랐다.

* * *

서훈은 이른 아침부터 도민이 근무하는 병원으로 갔다. 유진에게는 해외 출장이라고 해놨으니, 일찌감치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주서훈 씨 맞으시죠?”

병동으로 가자 연락을 받은 간호사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녀는 친절하게 웃으며 몇 가지를 체크한 뒤, 그를 병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얼마 뒤, 따로 연락을 받은 도민이 병실로 찾아왔다.

“누가 도망갑니까? 천천히 와도 되는데 뭘 굳이.”

“이건 찾아와도 고마운 줄을 몰라.”

피곤에 찌든 얼굴로 소파에 털썩 걸터앉은 도민이 못마땅한 듯 인상을 썼다.

“미안해서 그러죠. 딱 봐도 바빠 보이는데.”

“됐어, 후배인데 내가 챙겨야지.”

“그런 것치고는 자세가 너무 편한 거 아닙니까?”

침대에서 내려가려다 말고 서훈이 어이없다는 듯 그의 자세를 지적했다. 당장에라도 잠들 것처럼 늘어져 있지 않은가.

“이해 좀 해라. 나 어제도 몇 시간 못 잤거든.”

“…여기 환자 병실일 텐데.”

“그리고 내 후배 병실이기도 하지, 안 그래?”

뻔뻔하게 받아치며 도민은 정말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몇 초 만에 뻗은 것이다.

“이것 참.”

기가 막힌 듯 잠든 도민을 보면서도 그는 억지로 깨우는 대신, 가벼운 한숨을 뱉어낼 뿐이었다.

그의 말대로 개인적으로는 선후배 사이가 아닌가. 도민이 말은 저렇게 쌀쌀맞게 해도 심란할 걸 알고 찾아왔을 거다.

‘뻔히 알면서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난감한 듯 미간을 찡그리던 서훈이 포기한 듯 그냥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잠깐 대화할 때는 좀 났더니, 금세 머리가 다시 복잡해졌다.

“하아, 내일 9시부터 검사라고 했던가?”

후각을 자극하는 병원 특유의 냄새가 가뜩이나 심란한 그의 신경을 한층 더 바짝 곤두서게 했다.

이른 시간부터 검사하려면 자야 할 텐데. 어쩐지 오늘따라 더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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