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46화 (46/67)

❦제46화

―뭐? 지금 갑자기?

의외인 듯 놀라서 묻는 유진에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언제나처럼 장난을 치며 데이트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뱉었다.

점심도 넘긴 어정쩡한 시간.

예리한 서유진이라면 이상함을 알아차릴 법도 한데,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데이트 신청이 익숙해서인지, 별다른 의심도 하지 않았다.

“오늘 마감인 건 아니지?”

―윽,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도 마. 그냥 좀 뜬금없어서 그러지.

“다행이네, 산책 삼아서 나와.”

지금쯤이면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인데.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그는 이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펐다.

선하게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자신을 만난 뒤, 마감도 놓친 채 멍해져 있을 서유진의 모습이.

―번잡한 거리에서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야.

“아냐, 이맘때는 사람도 별로 없어.”

거절할 건 아니지? 넌지시 덧붙인 그가 다정하게 유진을 설득하며 시선을 위로 들었다.

―뭐야, 주서훈. 이 시간에 가봤어?

“지나가다가 몇 번 봤어. 가끔 외근 나가잖아.”

―진짜 외근뿐이었어? 이거 영 수상한데.

“수상할 것도 많다.”

한없이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백미러에 비친 서훈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대조적일 정도로 목소리와 표정이 정반대였다. 스스로도 이런 상황이 힘겨운 듯 서훈이 소리도 없이 이를 악물었다.

그가 예상한 대로 유진은 고민하듯 글쎄, 라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이내 알겠다며 서훈에게 만날 장소를 물었다.

미리 정해둔 번화가의 거리를 알려주며 그는 스피커 너머로 귀를 기울였다. 유진은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서훈을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다.

“그래, 거기서 기다릴게.”

끊어진 핸드폰을 툭 떨어트리며 서훈이 한껏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힘없이 떨어트린 화면이 몇 번 깜박이다 툭 꺼졌다. 앞으로의 상황을 예상이라도 하듯 서훈이 손바닥으로 제 눈을 푹 덮었다.

“하…….”

결국, 이렇게 될 거였나.

미련 맞은 심장이 퍼렇게 멍이 들고 남았을 그의 울음을 다독여 주듯 빠르게 박동했다.

애써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어 내듯 그가 핸들로 팔을 올렸다. 아니, 놓칠까 부러질 듯이 힘껏 움켜쥐다시피 했다.

‘가자, 주서훈 정신 차리고.’

자기보다 늦게 왔다며 그 여자가 화라도 낼까. 괜한 조바심마저 느낀 서훈은 점점 마음이 다급해져만 갔다.

마지막으로 웃는 모습이라도 한 번 보면 좋을 텐데. 쓰게 웃으며 시동을 거는 찰나, 민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 새끼는 타이밍도 참.”

흘깃 시선을 던진 서훈은 화면에 뜬 번호를 보며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알고서 전화했을 리도 없는데 기분이 묘했다. 사고 치기 직전, 누군가에게 들킨 것처럼 그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이렇게 늦게 받아?

한참 만에야 전화를 받자 민석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먼저 툭 튀어나왔다.

“지금 일하는 시간인 거 몰라?”

―웃기지 마, 시간 남아도는 새끼가 뭔 헛소리야.

“그거야 피차 사정이 다른 거고.”

급한 볼일은 아니었던 건지, 민석은 평소처럼 몇 마디를 투덜거리며 몇 달 뒤, 유진의 생일을 언급했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민석에게 불쑥 질문을 던진 이유는.

“너 만약, 우리가 헤어지게 되면 어떨 것 같아?”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냐, 그건?

“갑자기 궁금해서. 원래 넌 유진이 친구였으니까.”

언젠가의 기억을 더듬으며 서훈이 대답하자 금세 스피커 너머에서 민석이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웃기는 놈. 네 입으로 말해 놓고 뭘 일일이 물어.

“나보단 역시 유진이, 맞지?”

―당연히 서유진이지. 걘 똥 기저귀 찰 때부터 친구였는데.

“그래, 너라면 그럴 것 같더라.”

굳이 확인차 민석에게 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한 듯 서훈이 소리 없이 씁쓸함을 삼켰다.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적어도 혼자 남겨질 유진의 곁을 민석은 어떤 식으로든 지키고, 챙겨 줄 테니까.

그래, 그거면 됐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나민석의 존재가 그 어떤 때보다도 서훈은 고맙게 느껴졌다.

* * *

“이제 그만하자, 우리….”

헤어지자고 했다.

데이트하자며 일부러 사람 많은 거리로 불러내서, 자존심 강한 유진이 매달릴 수도 없게끔.

지금 여기가 북적거리는 시내의 한복판인 것도, 환하게 웃던 유진이 놀란 얼굴도, 그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 그게…….”

이건 꿈이다. 아니, 꿈에서도 겪기 싫었던 눈앞의 현실이었지만.

“주서훈?”

“…….”

“…서훈아.”

시리도록 아픈 눈을 감추며 서훈이 싸늘한 시선으로 유진을 마주했다.

“주서훈, 내 말에 대답해.”

“…그래.”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보지 않고도 알아차릴 수 있는 목소리가 아프게 그를 불렀다.

“장난이 심해, 도대체 무슨 소리를.”

“이게 장난으로 보여?”

“…너…….”

“헤어지자고, 우리 두 사람.”

서훈이 막히는 목을 힘겹게 쥐어짜듯 소리를 내뱉었다.

마지막일지 모를 얼굴인데 잊어버리면 어쩌나. 조금이라도 눈에 얼굴을 새겨 넣고 싶은 간절함으로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정신 차리고 내 말 들어.”

“말? 무슨 말?”

“하아, 소리 좀 낮춰. 여기 길 한복판이야.”

유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웃기지 마. 지금 넌 남들이 중요해?”

이러려고 데이트 운운하며 불러냈냐, 날을 세우며 몰아붙이는 유진이 그의 감춘 심정을 알 리가 없었다.

“연애가 원래 다 그렇지.”

“장난이면 이쯤 해 둬, 진짜로 나 화나려고 하니까.”

“내가 할 말이야. 우리가 무슨 결혼이라도 했어? 고작해야 동거야.”

“너 그걸 말이라고!”

“그러게, 적당히 눈치 좀 채라.”

그 말과 함께 서훈이 습관처럼 제 팔을 움켜쥔 손을 냉정하게 탁, 쳐냈다.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유진이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조금 전까지 화를 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충격이 커 보였다.

“도대체 무슨, 아니…. 아니, 그러니까, 왜….”

“서유진 이미 다 알아들었잖아.”

경악으로 무너진 얼굴 위로 커다랗게 떠진 눈이 황망하게 그를 주시했다.

“아니, 그러니까, 난… 나는…….”

곁을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가시 박힌 시선이 아프게 박혀 왔지만, 이별을 앞둔 그들에게 이보다 아픈 상황은 없었다.

그때부터 서훈은 머릿속으로 하나씩 숫자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하나에 입을 열고, 둘에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숫자가 열을 채우기 전에 끝내기 위한 시선이 둘 사이의 타이밍을 살폈다.

금세 보이지 않게 서훈이 팔을 뒤로 뺀 채, 손톱이 파고들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자꾸만 엇나가는 몸이 그대로 저 여자를 끌어안을 것만 같았다.

겨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는 심장이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유독 더 아팠다.

“이건 아닌데, 벌써 그 시기가 왔을 리가 없는데.”

“…….”

“분명히 뭔가 잘못된 거야. 그래, 아니 그게 아니라. 훈아, 우선 내 얘기부터…….”

완성되지 못한 문장을 횡설수설 중얼거리며 유진이 연신 그럴 리가 없다는 듯 허둥거렸다.

그건 꼭 또 다른 제 모습과도 같았다.

“마지막까지 이러지 말자.”

“왜 마지막이야? 너 당장 집에도 안 들어올 거야?”

“…어, 따로 지낼 장소도 구해 놨어.”

당연히 그런 것 따위 구할 여유도 없었지만.

“하… 이렇게 또 네가 날…….”

“고의는 아니었지만, 딱히 방법이 없더라.”

“…….”

“그렇다고 헤어지고도 같이 지낼 순 없잖아?”

상처가 깊어질수록 소리도 없이 파고든 그 고통이 점점 유진을 좀먹어가겠지만.

“끝, 이제 우리 끝내자고.”

애처롭게 매달리는 눈동자를 기어이 잔인하게 뿌리쳤다. 일부러 짜증 난다는 표정도 아직은 가능해서 다행이라 안도하면서.

서훈에게는 이게 최선이었다.

차마 꺼내지도 못한 고백을 차곡차곡 쌓아 바람결에 흘려보내며 서훈은 생전 믿지도 않던 신까지 찾았지만.

“네가, 주서훈… 네가 기어이….”

역시나 많이 아팠다.

눈물이라도 쏟을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린 유진의 모습이 아프게 눈동자로 스며들었다.

그래도 서훈은 다 괜찮았다. 충격으로 일그러진 미간에, 물기 스미는 눈가에 저절로 올라가는 손을 다잡으며,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괜찮다고, 다 괜찮을 거라고.

입술을 짓씹으며 서훈이 다시 유진과 시선을 맞닥뜨렸다. 지끈, 울리는 심장에서 기어코 버티지 못한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미안…….”

끝내 마지막을 고하기 위해 서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떻게 날…….”

“미안하다, 유진아.”

떨어지지 않는 입술이 자꾸만 발버둥 쳤다. 하지 말라고, 그러지 말라고, 저 사람 아프게 하면 안 된다고, 미친 듯이 발악했다.

하지만 이게 맞는 거다.

이렇게 두 사람의 연애는 끝나고, 각자의 길로 가는 마무리가 가장 예쁠 테니까. 적어도 상처받은 유진이 자신을 잊는 결말로.

서훈은 정말 그것만으로도 괜찮을 수 있었다.

‘그렇게 미워하면서 다 지우고, 그냥 넌 아무것도 모르면 돼.’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불행을 마주하고서도 미련 맞게도 그는 망연자실한 유진을 걱정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앞으로는 보지 말자.”

기어코 울먹이기 시작한 유진을 본 그가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자, 잠깐! 주서훈, 훈아!”

“…….”

“잠깐 기다려 봐!”

“부모님껜 내가 말할 테니까, 당분간은 비밀로 부탁한다.”

숨이 막혔다. 누군가 목을 콱 틀어막은 것만 같아서, 한마디도 쉽게 뱉을 수가 없었다.

“짐, 짐은… 나중에 주소 보낼게.”

뒤에서 매달리듯 잡아챈 손을 다시 또 뿌리친 채, 그때부터 서훈은 무작정 걷기만 했다. 이대로 계속 걸어서 멀어지기만 하면 끝이었다.

이걸로 된 거다.

이미 차오르다가 넘치기 시작한 눈물이 그제야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래로 뚝뚝 소리도 없이 서럽게 흘러내렸다.

“훈아! 주서훈―!”

뒤늦게 목이 터져라, 부르는 유진의 고함이 아프도록 등을 찔렀다. 그 소리에 잡히기라도 할까, 오히려 그는 더 빨리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주서훈은 두 번째로 다시 서유진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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