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이미 시야에선 그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뻔히 보고도 섣불리 바닥에서 발을 떼어 내지도 못한 채, 흐리멍덩한 눈으로 한참이나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5분.
다시 또 10분.
가까스로 유진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시간이 꽤 많이 흐른 뒤였다.
하늘이 온통 붉게 변했음을 알아차린 뒤에야 유진이 바닥으로 천천히 시선을 떨어트렸다.
‘어떻게 잡은 기회였는데…….’
이번에도 막지 못했다, 떠나는 주서훈을.
두 번째의 이별 통보와 미묘하게 뒤바뀐 미래. 여전히 혼자 남겨진 자신만이 이 넓은 거리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분명 그때는 이 시기가 아니었는데. 어렵사리 몇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던 유진이 포기한 듯 마구 제 얼굴을 쓸었다.
너무 빨랐다.
몇 개월이나 앞당겨진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저 유진은 다시 또 겪는 이별이 아프기보단 허무했다.
어쩌지,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지? 연신 저 홀로 중얼거리는 유진의 시선으로 가방에 넣은 핸드폰이 보였다.
“맞다, 핸드폰이 있었지. 그래도 전화는 받을 테니까.”
애써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유진이 핸드폰을 꺼냈지만, 깜박했다.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주서훈의 사진을.
“이럴 거면 웃지나 말지, 또 이렇게 버릴 거였으면.”
화면 가득 채워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유진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불과 몇 달 전, 장난처럼 찍은 사진이었다. 뚫어지게 화면을 보는 유진의 눈동자엔 차마 삼키지 못한 원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상태로 한참 만에야 유진은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바로 단축키를 누르려고 했지만, 자꾸 떨리는 손이 숫자를 비켜나갔다.
“괜찮아, 서유진 괜찮으니까 침착해.”
최면을 걸듯 유진이 놀란 마음을 다스리며 기어이 단축키를 꾹 눌렀다.
“주서훈 받아, 제발 좀 받으란 말이야.”
하지만 그 애절한 바람에도 서훈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유진은 목소리를 듣지도, 그와 대화할 방법조차 몰랐다.
헤어지는 방법도 많을 텐데. 주서훈은 왜 이런 최악의 방법밖에 없었을까. 어째서 또 같은 패턴이었을까.
복잡하게 엉킨 생각을 떨쳐내며 유진이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그런 뒤에야 땅에 붙어버린 발을 기계처럼 앞으로 내뻗었다.
“결국, 또 이렇게 될 거였는데 무슨 미련이 남았다고 다시 3년을…….”
횡설수설하며 걷는 모습이 반쯤은 미친 사람처럼도 보였다. 이따금 힐끔거리는 낯선 시선도 유진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걷기만 했다.
“…저 여자 조금 이상한 거 아니야?”
“야, 야. 그냥 모른 척해.”
“그래도 좀, 경찰에 신고하는 게 낫지 않아?”
고막까지 닿지 못한 말들은 금세 허공에서 흐트러질 뿐이었다.
차라리 그게 더 마음이 편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온통 흐려진 정신으로 유진은 다시 찾아와 버린 이별에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서훈과 함께하며 달라진 현실을 마주하면서도 변하지 않을 미래도 존재한다는 것을.
항상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그래서 늘 불안감을 느꼈고, 언제 변할지 모를 서훈의 태도가 무섭기도 했지만.
“이렇게 준비도 없이 또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외면이 가장 큰 문제였을지도.
여전히 핸드폰을 꽉 움켜쥔 채, 지난 3년을 곱씹어 가던 정신은 돌연, 울리기 시작한 진동과 함께 덜컥 현실로 돌아왔다.
“여보세요? 훈아, 너 주서훈 맞지?”
화면을 확인해볼 겨를도 없이 전화를 받은 유진의 목소리는 어느샌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핸드폰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움켜쥔 그녀는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 민석의 목소리를 확인한 뒤,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뭐야, 너 반응이 왜 이래?
익숙한 목소리가 그나마 어지러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지만, 오히려 전화를 건 민석이 더 놀란 기색이었다.
―너 뭐야, 목소리 왜 그따위냐니까?
“그게, 민석아, 그러니까…….”
―갑자기 왜 버벅거려, 서유진 말 똑바로 안 할래?
거칠게 높아지는 다그침을 듣고도 유진의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는 제대로 된 말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저 입력된 말을 반복하는 앵무새라도 된 듯 중얼거리는 혼잣말은 오히려 민석을 더 답답하게 만들 뿐이었다.
* * *
탁. 탁. 탁. 탁.
한적한 공원에 낯선 발소리가 사방을 요란하게 울렸다. 금세 멀리 벤치에 앉은 유진을 발견한 듯 민석이 중앙을 가로지르며 그녀를 큰 소리로 불렀다.
“서유진―!”
반쯤은 넋을 놓은 것처럼 풀린 눈동자가 가까워지는 그에게로 향했다. 그나마 목소리를 알아듣기는 하는 모양이다.
“후우, 너 상태 왜 이따위야? 어?”
민석이 연신 턱 끝까지 몰아치는 숨을 고르며 벤치 앞에서 딱 멈춰 섰다.
“주서훈 어디 갔는데? 출장이라도 가서 이 지경이야?”
“…….”
“말을 좀 해 보라니까?”
답답해진 그가 유진의 어깨를 쥐고 마구 흔들었다. 저러고만 있으니 무슨 일인지도 알 길이 없는 탓이었다.
“말을 해야 내가 알아들을 거 아니냐고.”
무슨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난 게 틀림없다고, 유진의 상태를 본 민석은 의심할 것도 없이 그렇게 단정 지었다.
“서유진.”
“…….”
“서유진-!”
“…….”
몇 번을 다시 불러도 유진은 입을 본드로 딱 붙인 것처럼 말이 없었다. 그저 민석을 빤히 올려다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서훈과 사귄 뒤로 유진의 이런 모습을 그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덩달아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그가 유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장 닫아 버린 입을 열게 만드는 방법 따위 있을 리 없다. 스스로 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하아,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
“까짓 기다리면 될 거 아니냐, 네가 입 열 때까지.”
주서훈이 의미 모를 질문을 던질 때부터 감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 몰라 유진에게 전화를 건 그는 심상치 않은 목소리를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유진은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서훈을 찾아 달라며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고, 놀란 민석이 겨우 위치를 물어 달려온 게 바로 이 상황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라는 말인가.
서훈이 당장 죽기라도 한 것처럼 넋을 놔 버린 서유진의 모습이라니. 바로 옆에서 얼굴을 살피던 그가 속으로 혀를 찼다.
몇 년을 사귀면서 싸움 한 번 하지 않던 커플이다. 오죽 사이가 좋으면 일부러 질투가 나서 민석은 시비를 걸기도 참 많아 걸었다.
그런데 한 명은 넋이 나갔고, 다른 한 명은 연락조차 받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석에게는 모든 상황이 답답할 뿐이었다.
그렇게 또 꼬박 얼마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운동복 차림으로 뛰어가는 사람이나 자전거로 공원을 돌아다니는 사람, 아이와 함께 산책을 나온 가족까지.
멀뚱히 벤치 앞을 지나는 낯선 사람들을 구경하던 민석의 귓가로 그제야 유진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민석아.”
통화할 때는 횡설수설하며 울먹이더니, 이제는 목소리가 제법 차분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가타부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대신 이어져 나올 유진에게 가만히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서훈이, 우리 서훈이 좀…….”
“…….”
“연락이 안 돼, 어디로 사라진 건지 위치라도…….”
차분하지만,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가만히 듣던 민석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설핏 찡그렸다.
서유진이 어쩌다 이 지경으로 망가진 모습인지, 옆에서 보는 내내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좋지 않았다.
“민석아, 네가… 주서훈 어디로 사라진 건지, 찾아다 줘.”
“하아, 알았다. 그거면 되는 거냐?”
힘없이 흘러나온 말은 재촉보다는 알 길 없는 회환이 담겨 있었다. 그 묘한 뉘앙스를 느낀 민석이 그녀를 바라보며 이내 그대로 입을 닫았다.
서글픈 체념이 섞인 얼굴 위로 희미하지만 아주 약하게 웃는 입매가 보였기 때문이다.
* * *
살짝만 건드려도 쓰러질 듯 유진은 위태로워 보였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민석은 괜찮다는 유진을 반강제로 집까지 데리고 왔다.
“일찍 오셨… 어라, 누나까지 어쩐 일로…….”
“하아, 사정이 좀 있어. 그보다 넌 왜 집이야? 강의 없어?”
“막판에 휴강이 두 개나 생겨서요.”
그랬느냐며 쓰게 웃으며 그가 현관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유진, 안 들어올 거야?”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본 민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유진을 거실로 끌어당겼다.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그녀는 민석의 손길에 따라 힘없이 거실로 들어오고, 소파에 털썩 앉기까지 했다.
“서유진.”
“…….”
“어이, 너 내 말이 들리기는 하냐?”
서훈을 찾아달라는 몇 마디를 꺼냈을 뿐, 유진은 그 뒤로도 계속 저 상태였다.
“이걸 어쩌면 좋냐고, 진짜.”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을 보며 민석이 짜증스럽게 뒷머리를 헝클었다.
반쯤 풀어진 눈의 초점이 반쯤 어딘가로 날아가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민석으로선 속이 터질 수밖에.
헤어졌다고 했던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유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연우에게도 유진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넋이 나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가 왜 저러는 거냐 넌지시 물었지만.
“그거라도 알면 내가 이렇게까지 짜증은 안 날 텐데 말이다.”
“형도 누나가 왜 저러는지 몰라요?”
“전화했는데 이상해서 장소만 캐물어서 갔더니, 이미 저 상태더라.”
지금 민석은 일일이 자초지종을 설명할 정신도 없었다. 우선 급한 대로 간단히 대답한 뒤, 그가 연우에게 잠시 유진을 부탁했다.
“우선 너라도 얘 좀 챙기고 있어 봐.나 잠깐 연락할 곳이 있어서.”
“네? 아, 그건 걱정 마세요.”
“부탁 좀 하자. 오래는 안 걸릴 거다.”
그대로 몸을 돌린 민석이 곧장 서훈에게 연락을 했다. 예상대로 받지 않는다.
오는 내내 몇 번이나 연락했지만, 유진의 말처럼 주서훈은 일부러 전화를 피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누가 있을까.
다시 또 부재중으로 넘어가는 화면을 주시하는 민석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