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본인이 아니더라도 연락할 곳은 의외로 꽤 많았다. 민석은 가장 먼저 서훈의 가족, 그중에서도 형인 서준을 떠올렸다.

평상시에도 그 집하고 왕래하지 않았던가. 유진이 반쯤 넋이 나가서 그쪽으로는 연락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저런 상태인 사람한테 붙들고 물어볼 수도 없지 않은가. 차라리 직접 연락하는 게 낫겠다. 짐작하며 그가 핸드폰의 주소록을 훑어내렸다.

“분명 어딘가에 있을 텐데.”

일부러 연우에게 유진을 맡긴 뒤, 서준에게 연락한 것도 그런 이유였지만.

―갑자기 연락이 안 된다고?

“예, 급하게 연락할 일이 좀 생겨서요.”

―유진 씨는? 그쪽이 더 빠를 텐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고작 몇 마디만으로도 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본능과도 유사한 감각이었다.

방금 서준은 당연하다는 듯 유진을 언급했다. 바꿔 말하면 그건 곧 두 사람의 현재 상황을 전혀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걔도 자는 것 같더라구요.”

―흐음, 뭐 그렇다면야.

일부러 더 난감한 듯 민석이 회사 일이라며 재차 부탁했다. 그러자 한 박자 늦게 서준에게서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선 기다려 봐. 해 보고 다시 연락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형님.”

―됐다, 전화 한 번 대신 거는데 무슨.

“그래도 형님 전화는 받겠죠.”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며 통화를 끝낸 민석이 피곤한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준의 전화라면 받을 거다.

움켜쥔 핸드폰을 흘깃 내려다보며 그가 문가로 휙 고개를 돌렸다. 넋 나간 유진을 떠올리니, 다시 또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쯧! 헤어지려면 적당히 이해라도 시켰어야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엄한 곳에서 폭탄이 떨어진 꼴이었다.

“어? 형 나오셨어요?”

민석이 다시 거실로 나오자마자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연우가 그에게로 쪼르르 다가왔다.

“설명도 없이 미안하다. 그 녀석은?”

“아, 누나는 남는 방에…….”

“설마, 걔 아까 들어온 그 상태 그대로 있어?”

“예, 그대로 앉아 계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연우가 반쯤 열린 손님용 방을 가리켰다.

“진짜 환장하겠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유진 누나 저러는 거 처음 보는데.”

“하아, 그게 좀 복잡해서 말이다.”

그제야 아직 연우에게 상황을 알려주지 않았음을 떠올리며 민석이 곤혹스럽게 제 턱을 문질렀다.

“…형?”

“설명하려니 난감하네, 쯧.”

그대로 입을 닫아버리니, 어지간히도 답답했나 보다. 평소와 달리 재촉하듯 묻는 연우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 민석은 두 사람의 헤어진 사실을 털어놓았다.

“네? 헤어졌대요?”

“그래, 자세한 사정까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말도 안 돼, 그 두 사람이…….”

민석만큼이나 연우도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평생 옆에서 안 떨어질 것처럼 굴던 커플이었으니, 오죽할까.

이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는 모양이다. 쓰게 웃으며 민석이 고생했다며 연우의 어깨를 툭 쳤다.

“어쨌든 너도 좀 쉬어라. 쟨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연우를 방으로 돌려보낸 뒤, 그가 손님용 방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열린 문틈으로 침대에 앉은 유진의 옆모습을 소리 없이 주시했다.

연애 두 번만 하다가는 아주 사람을 잡겠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핼쑥한 모습에 가뜩이나 구겨진 그의 얼굴이 한층 더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새끼, 애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놔?’

어딘가에 있을 주서훈에게 온갖 욕을 퍼부으면서.

* * *

“간단하게 신상과 사진은 팩스로 넣었으니 확인하시면 될 겁니다.”

혹시라도 찾으면 바로 이 번호로 연락주시고. 누군가에게 거듭 당부한 뒤에야 민석이 길지 않았던 통화를 끝냈다.

탁―

천천히 핸드폰을 내린 민석이 피곤한 듯 연거푸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이내 손바닥으로 미간을 탁 짚었다.

벌써 주서훈을 찾기 시작하고도 며칠이 지났더라. 자꾸만 목 끝까지 절로 한숨이 차오르는 상황이 아닌가. 그저 눈앞이 막막했다.

‘이번에도 허탕이면 안 되는데.’

슬슬 의지가 꺾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반쯤은 폐인 몰골인 유진의 상태가 동시에 그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기대한 서준에게도 좋은 소식은 듣지 못했다. 아예 두 사람이 헤어진 사실조차도 모르는 눈치라, 더는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

‘너 만약, 우리가 헤어지게 되면 어떨 것 같아?’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냐, 그건?’

‘갑자기 궁금해서. 원래 넌 유진이 친구였으니까.’

그때 뜬금없이 왜 그런 걸 묻나 싶었더니만, 이거였나. 이미 서훈은 지금의 사태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부러 회사까지 찾아갔지만, 거기서도 서훈은 볼 수 없었다. 대신 민석의 얼굴을 아는 김 비서가 인사하며 맞을 뿐이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나 전무님께서.”

“오랜만입니다, 김 비서.”

“미리 연락을 주시지요. 대표님은 한동안 못 나오실 텐데.”

난처한 듯 상황을 설명하는 김 비서를 향해 민석이 불쑥 되물었다.

“여기도 출근 안 합니까?”

“대표님은 개인 사정으로 쉬고 계십니다만.”

무슨 일이냐는 질문에 그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애써 구겨지려는 제 표정을 다잡았다.

‘주서훈 이 빌어먹을 새끼가 아주 작정하고 잠수를 타?’

어딘가에 있을 서훈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민석은 태연하게 곤란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하아, 난감하네.”

“대표님께 급한 볼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딱히 그렇게까지 급한 건 아닌데.”

뒤늦게 실수했다는 듯 민석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김 비서를 잠시 간과한 탓이었다.

“그래도 오신 김에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그건 주 대표가 출근한 뒤로 미루죠.”

괜한 부분에서 말꼬리를 잡힐까. 곧 약속이 잡혀 있다며 사무실을 나선 민석은 곧장 몇 년 전까지 서훈이 살던 오피스텔로 향했다.

하지만 역시 없었다.

이미 그곳에는 어느 한 대학생이 꼬박 1년째 살고 있었다. 가 볼 만한 동선을 모두 훑었는데도 주서훈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민석은 제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하아…….”

힘없이 꺾인 고개를 치켜들며 민석이 핸드폰의 화면을 이유도 없이 툭툭 신경질적으로 건드렸다.

생각만 해도 골이 다 아팠다. 이제 또 어디를 가봐야 하나. 다시 또 생각에 잠기려는 그때, 민석의 핸드폰이 들릴 듯 말 듯 진동했다.

익숙한 번호의 발신자는 연우였다.

전화를 잘 걸지 않는 녀석이 어쩐 일이지? 화면을 빤히 보던 민석은 뒤늦게 유진을 부탁했음을 떠올리며 급히 전화를 받았다.

역시나 유진의 문제였다.

“아무것도? 전혀 안 먹어?”

―전혀요, 쳐다보지도 않으시는데 어쩌죠?

음식을 넘기려고도 하지 않으니, 옆에서 챙겨 주는 연우가 속을 끓이고 있는 모양이다.

스피커 너머로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생각만 해도 골이 아픈 듯 민석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아, 그 녀석 쓸데없이 고집은.”

―어떻게 해요? 제 말은 안 들리시는 눈치인데.

“옆에 서유진 있지? 좀 바꿔 봐.”

민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차며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스피커에서 연우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오다 금세 잠잠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전화를 바꾼 모양이다.

“서유진, 너 진짜 이럴 거냐?”

―…….

“누가 해코지하냐? 밥 먹으라는데 왜 애를 힘들게 해?”

주서훈 찾기도 전에 굶어서 죽고 싶냐며 민석이 격양된 목소리로 유진을 마구 나무랐다.

“그대로 죽게? 그렇게 죽고 싶어?”

매서운 타박 때문일까. 금세 수화기 너머에서 들릴 듯 말 듯 미안하다는 유진의 사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민석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아이처럼 달래며 무언가를 먹일 생각 따위 그에겐 처음부터 없었다.

“이딴 식으로 찾아 달라면 내가 퍽이나 잘 찾아 주겠다 안 그래?”

―난 진짜 입맛이 별로 없어서…….

“없어도 먹고, 싫어도 먹어. 그래야 주서훈 찾을 힘이 생길 거 아니냐!”

애써 어그러지는 말투를 다잡으며 민석은 재차 먹으라는 말을 강조했다.

“찾아 준다고, 내가 그 새끼.”

―…민석아.

“그러니까 무조건 안 쓰러지게 몸 챙기고 있어.”

지금 답답하기는 민석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이유도 정확히 듣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땐 믿었다.

적어도 주서훈을 찾고 나면 어떻게든 일이 해결될 거라, 은연중에도 민석은 믿고 있었다.

* * *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민석이 잠시 주변을 훑어보다 인상을 썼다. 유난히도 싸늘한 복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디가 아프길래 암 병동까지 와?’

스치듯 의문이 들었지만, 민석의 발은 어느 사이엔가 병동 입구에 있는 데스크로 향했다.

암 병동은 민석도 생전 처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굳은 입매를 가볍게 풀어내며 그가 데스크를 똑똑 두드렸다.

“예, 무슨 일로 그러세요?”

“친구를 찾는 중인데 병실을 좀 알 수 있을까요?”

미리 몇 호인지 들었는데 통 기억이 나질 않아서. 난감한 듯 민석이 눈살을 찡그리며 부탁조로 말했다.

거짓은 단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은 것처럼 태연한 모습에도 간호사는 눈을 굴리며 은근슬쩍 대답을 피했다.

“음, 죄송하지만 그건…….”

민석이 몰래 혀를 찼다. 아무래도 예민한 부분이라, 함부로 낯선 사람한테 발설하면 안 되는 규정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얼추 눈으로 상황을 살펴보던 민석이 그 순간, 먼저 선수를 치며 넌지시 되물었다.

“아무나 알려 주면 안 된다거나?”

“잘 아시네요. 죄송하지만 규정이 그래서요.”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끄응.”

간호사의 말이 끝나자 조용히 듣기만 하던 민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쏟아 냈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섰지만, 돌아갈 리가 없었다.

“이 새끼는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도대체?”

그는 일부러 들리게끔 연신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마치 환자와 약속이 잡혀 있었던 것처럼.

“바로 갔다고 성질낼 텐데.

의아한 기색으로 지켜보는 시선도 잠시, 어느샌가 간호사의 얼굴로 금세 어쩌나 싶은 난감함이 차올랐다.

“아, 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