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나민석 자꾸 헛소리하지 마. 걔가 그런 병이 왜 걸려?’
‘병이 사람 가리면서 오는 줄 알아?’
‘그래도 주서훈은 매년 집안에서 검진도 꼬박꼬박 받고 있…….’
‘네 눈으로 본 적 있어?’
‘…뭘…….’
‘주서훈이 매년 그 검진을 제대로 하고 있었는지, 확인한 적 있냐고.’
무작정 귀를 막으려는 유진을 향해 민석은 제법 단호했다.
이제 서훈에게는 얼마 남지도 않았을 시간, 원하는 대로 해 주자는 설득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들쑥날쑥한 마음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어딘가에 없는 듯 존재하던 악질적인 속삭임이 이제야 제 세상이라는 듯 피어올랐다.
손을 뻗을 수밖에 없을 유혹처럼.
네가 나쁜 게 아니라고, 이제부터 곁에 있으면 되는 거라고, 그 사람한테 버려진 게 아니었다고.
애써 복잡해진 생각을 밀어냈지만, 소용없었다. 한 번 싹트기 시작한 그 어둠은 유진이 흔들릴 때마다 속삭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순간, 복도 한편에서 유진이 돌연, 걸음을 뚝 멈추고 말았다.
‘…그럼, 난?’
여기서까지 서훈을 놓치면 그때 서유진은? 버틸 수 있고?
불현듯 떠오르는 의문과 함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더는 버티지 못한 유진이 끝내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서, 설마… 안 되는데, 어쩌… 어, 어쩌지…….”
당장에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유진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병실을 체크하던 간호사도, 다른 환자들도, 손에 무언가를 들고 병문안을 온 손님들까지 모두가 이상한 시선으로 그런 유진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먼저 손 내미는 사람도,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암묵적인 규칙처럼 모두 알고 있었다.
하루가 멀게 사람의 생사가 오가는 암 병동이 아닌가. 늘 그렇듯 오늘도 몇 명의 사람이 죽고, 다시 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리라.
‘어쩌지, 나는 이제부터 어쩌지.’
차츰 무언가가 유진을 아주 조금씩 좀먹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불안과는 전혀 다른 공포였다.
잃어버릴 것에만 치중하던 생각이 점차 사방으로 뻗치며 이젠 모든 걸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 거라는 끔찍한 망상까지도 불러일으켰다.
‘설마 아니겠지, 너한테 돌아온 대가라는 게…….’
경악하듯 크게 부릅뜬 채로 유진이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망각한 채, 유진은 흥건하게 젖은 눈으로 빈 허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 * *
남자가 동그랗게 허공을 휘저었다.
일렁이던 연기가 그 느릿한 손짓 한 번에 주변을 맴돌다가 그에게로 스르륵 빨려들었다.
“하― 이제 곧 끝인가?”
남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번뜩이는 눈빛을 반쯤 가린 눈매가 한껏 잠에 취한 맹수의 그것처럼도 보였다.
“그래, 그래야지. 아직은 나도 원하는 걸 얻지 못했거든.”
그 질척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점차 더 서유진이란 인간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과 쉽게 변하는 인간의 보잘것없는 마음이 그에게는 한없이 즐거운 유흥거리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거둬 갈 것이라면 조금 더. 이 정도의 짙은 파동으로도 남자의 만족감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제 곧 닥칠 절망을 기다리며 느긋하게 기댄 남자의 시선이 물 흐르듯 어딘가로 넘어갔다.
공간의 틈새가 출렁였다.
익숙하고도 지독한 향을 풍기면서. 점차 더 강해지는 진동에 한쪽 입매를 빼뚜름하게 올린 남자가 어딘가를 게슴츠레한 눈길로 지그시 응시했다.
“흐음―”
누군가 제 공간으로 침입한다는 증거가 아닌가.
느릿하게 고개를 치켜든 시선이 먹이를 발견한 듯 날카롭게 빛났다. 허공을 주시한 눈길이 금세 나른하게 축 늘어졌다.
“드디어 왔군.”
고개를 반쯤 꺾은 얼굴 위로 눈동자가 위험스럽게 빛났다. 이제 곧 나타날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은 곧, 그만큼이나 제 행동이 거슬리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닌가.
나쁘지 않다, 그 정도의 출혈쯤이야 이미 감당하지 않았나.
나직이 목을 울리는 얼굴 위로 가득 휘감은 욕망이 어지럽게 휘몰아쳤다.
타―닥.
일부러 발소리까지 흘리며 기척을 낸 상대는 몇 백 년이 지났어도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이야, 나의 미카엘.”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드리웠다.
“썩 반가운 만남은 아니라서.”
“글쎄, 지독한 악몽도 그리울 때가 있지 않던가?”
“악몽 따위 반가울 리가.”
제단 위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는 미카엘의 시선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기다렸다는 태도가 못마땅한 건가, 뭐 별로 상관없지만.
“올 줄 알고 있었다는 얼굴인데.”
“네가 흘리는 파동쯤이야,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으니까.”
“벨리알, 언제까지 나도 당하지만은 않아.”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아닌가.”
“…무슨!”
“좋군, 그대가 나만 온전히 본다는 말은.”
시작부터 노리고 벌인 판이었지만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겠지. 입꼬리를 비틀게 꺾어 올린 벨리알이 느릿하게 제 입술을 핥았다.
자신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걸 본 미카엘이 제단 아래에서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썼다.
“여전히 남의 말은 듣지도 않는다는 건가.”
“또 모르지. 그대의 말이라면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전부 새겨 넣을지.”
그렇게 말하며 벨리알이 기댄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 막 일어나려는 찰나, 반응하듯 미카엘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내려올 필요 없어.”
“흐음?”
“여기 온 이유, 한마디면 충분하니까.”
“들어 보지, 뜻대로 이곳에서.”
“그만 휘저어. 거긴 당신 같은 악마가 활개 칠 곳이 아냐.”
누가 들으면 그 인간들의 대변인쯤 되는 줄 알겠다. 그래 봤자 고작 인간 나부랭이한테.
“뭔가 착각하는군, 미카엘.”
“…과연 착각일까?”
“날 부른 건 언제나 욕심 많은 인간이지, 내가 아니라.”
차오르는 짜증을 드러내듯 돌연, 벨리알의 좌우로 불그스름한 기운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잠깐 사이, 벨리알의 기운이 제단 위를 가득 메웠다. 그 매캐한 기운을 보며 미카엘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치켜떴다.
뜻대로 안 되니, 알력 행사라는 건가. 미리 방어막 하나 두르지 않고 쳐들어왔을 리가 없는데.
한층 예리하게 날 선 눈을 번뜩이며 미카엘이 손바닥으로 작은 수정구를 만들었다.
여차하면 그대로 날려 버릴 생각이었지만, 그는 가볍게 손을 휘저으며 제 기운을 흐트러트렸다.
“경계할 것 없어. 힘을 쓸 생각은 아니니까.”
“악마의 말을 믿을 천사도 있던가?”
“믿는 것 또한 온전히 그대만의 몫이겠지만.”
그 말을 지키려는 듯 제단을 감싼 기운은 미카엘을 구속하려는 낌새도, 그 어떤 위협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상당히 비슷한 대치군. 안 그런가, 미카엘?”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비슷하잖나, 루시펠이 널 버리던 그날과.”
나직하게 목을 울리며 벨리엘은 언젠가의 기억을 소환했다.
* * *
자꾸만 목이 따끔하게 아팠다.
본능처럼 옆으로 손을 뻗으며 물병을 잡던 서훈이 돌연, 중심을 잃은 듯 모서리에 부딪히며 이불로 푹 쓰러졌다.
타-악!
상황을 알리기라도 하듯 손끝에 닿은 물병이 바닥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곤두박질쳤다.
뒤늦게 놀란 민석이 그에게로 휙 고개를 돌리다가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이미 물병은 바닥을 놔 뒹굴고 있었다.
“…크으, 윽,”
말 그대로 한순간이었다. 소파에 있던 민석도, 침대에 앉은 서훈마저도 찰나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몸이 굳어 버린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걸까. 잠시 얼이 나간 듯 빤히 보기만 하던 민석이 뒤늦게 서훈에게로 급히 뛰어왔지만.
“너 괜찮아?”
“하아, 모르겠… 아윽.”
서훈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그가 심하게 부들부들 떨었다.
“주서훈? 야, 서훈아?”
“아, 윽.”
“야, 새끼야, 대답 좀 해 봐.”
민석이 기겁하며 그를 불렀지만, 갑자기 닥친 통증 때문인지 서훈은 배를 움켜쥐고 끙끙 앓기만 했다.
그제야 그는 서훈의 상태를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스치듯 건넨 간호사의 무심한 말이, 그냥 웃으며 무시하고 넘어갈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멀쩡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아프다는 걸 잠시 잊었다. 그 와중에도 심해지는 통증에 점차 그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아파? 너 괜찮은 거야? 어?”
차마 서훈을 건드리지도 못한 채, 민석이 침대 주변을 서성거리며 발을 굴렀다.
바로 호출 버튼으로 간호사를 부르면 될 텐데.
민석은 그 간단한 생각마저도 사라지게 할 만큼 하얗게 비워졌다. 갈수록 서훈의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구겨진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맺히다 못해 축축하게 젖었고, 입술은 파리하게 질렸다.
시트를 움켜쥔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만 봐도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를 알 수 있었다.
“미치겠네, 진짜!”
지금껏 주서훈이 얼마나 지독한 고통을 혼자 견디고 있었는지를 민석은 굳이 듣지 않아도 다 알 것 같아서,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걸 어쩌지. 올라오는 욕설을 힘겹게 삼키며 민석이 연신 사방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 미친 자식, 말을 했어야지. 서유진한테는 숨겨도 나한테라도 말을 했어야지!’
큰일이다. 밖에서 유진이 몰래 보고 있을 게 분명한데. 오늘은 그냥 얼굴만 보고 돌아가라고 할걸.
그제야 민석은 한 박자 늦게 후회가 차올랐다. 당황하는 민석에게 겨우 팔을 뻗은 서훈이 힘겹게 무언가를 달싹이며 말했다.
“…하아, 빨리, 하아, 하으윽!”
“어? 어? 방금 뭐라고? 다시 말해봐, 어?”
“간호… 하아, 으윽… 호… 출……”
“가, 간호사? 마, 맞다! 간호사! 잠깐, 잠깐만!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다급히 침대 머리맡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
바로 그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울먹이는 유진의 목소리가 사방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훈아―!”
지금까지 밖에서 몰래 두 사람을 엿보고만 있던 유진이 그 광경에 참지 못한 채, 병실로 쳐들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