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앓다-56화 (56/67)

❦제56화

유진은 그런 남자에게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글쎄, 왜 안타까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불편하다,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낯선 사람을 애써 외면하려 시선을 다시 돌릴 즈음, 옆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들었다.

“또, 또…….”

“……?”

“보고 싶은 사람도, 한 번은 더 눈에 그려볼 수 있을 테니까요.”

스치듯 바람결에 실은 속삭임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시선은 멀리 어딘가를 응시한 채로.

유진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상상을 하라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표정이, 저 권유가 제 취미까지 꿰뚫는 듯한 말투가 아닌가.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미묘한 감정이 출렁거리며 어지럽게 제 안에서 흔들렸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

낯선 남자와 눈에 선한 기억.

어디선가 겪어본 것만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별안간 머리 한쪽이 옥죄며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으―윽.”

급기야 제 머리를 움켜쥐며 유진이 신음을 뱉자 그 소리에 놀란 남자가 곁으로 와, 덩달아 인상을 썼다.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요?”

“두통이 약간…….”

통증을 참아 내며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다는 말을 꺼내려던 찰나, 유진이 내민 손을 아래로 내렸다.

문득, 낯설지 않은 기억 하나가 사그라질 듯 희미하게 떠올랐다.

“후… 저기…….”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유진이 입을 달싹이다가 도로 닫았다. 깨질 듯한 두통 때문인지,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대놓고 만난 적 있느냐고 물을 수도 없고, 정체가 뭐냐고 물어야 하나?

비슷한 기억이 머릿속으로 스치듯 사라졌다. 예전에도 어떤 남자와 벤치에 앉은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때 무슨 말을 했었지?’

유진이 흐릿하게 잔상을 곱씹었다.

‘서유진은 이게 왜 재밌을까. 난 지루해 죽겠는데.’

‘상상이지, 상상.’

‘무슨 상상인데?’

‘그건 말이야, 여길 지나가는 모든 걸 다 보는 거야.’

‘모든 걸?’

당연한 듯 대답하는 자신에게 남자는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이곳에서 도대체 무슨 상상이 가능하냐는 듯이.

‘그런 거 있잖아, 왜.’

‘그런 거 뭐?’

‘저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호기심에 망상도 한 번 해보고, 또 자연스럽게 배우기도 하고.’

‘흐음, 망상이라…….’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 한 번 보라니까? 각자 표정이 다 다르다?’

자신이 무얼 보는지 알려 주는 것처럼. 남자는 낯선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가리켰다.

왜 여기서 사람과 사물, 심지어 하늘까지 구경하는지를 이해시키려는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저 기억을 더듬었다.

아주 느릿하게 조곤조곤 속삭이듯이. 말하는 틈새로 유진의 눈은 공원의 모든 곳을 훑으며 천천히 담아 냈다.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에게서 웃음이 터진 건 그즈음이었다. 벤치에 등을 기대며 그가 고개를 뒤로 휙 젖혔다.

멀거니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그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배운다라…….’

‘이 직업은 어쩔 수 없어. 일상에서만 배울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니까.’

‘뭐 그래, 틀린 말은 아니네.’

때아닌 웃음에도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지, 따라 웃으며 자신도 뒤로 고개를 젖혔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유진은 다시 멀어지는 기억에 두어 번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후우―”

어느덧 극심하던 통증은 잠잠해져 있었다. 유진이 크게 숨을 들이쉬며 허리를 쭉 편 뒤, 기억처럼 벤치에 등을 기대고 뒤로 고개를 젖혔다.

하늘을 바라보자 여전히 눈에 비치는 광경은 기억에 남은 하늘과 다를 것도 없이 똑같았다.

“하아, 하늘은 언제나 똑같네.”

허공에 대고 유진이 홀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내내 잠잠하던 옆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조금 괜찮아요?”

“아…….”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은 저 남자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라고, 유진은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며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 *

침묵이 내려앉은 거실.

못 박힌 듯 허공을 뚫어지게 보던 서훈이 한참 만에야 바닥으로 힘없이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어쩐지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시간은 흐르는 물보다 빠르다더니, 마냥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긴 시간일 텐데.

정신을 차렸더니, 잠을 잘 틈도 없어 벌써 일주일이 훌쩍 다 지나가고 말았다.

“시간이 참 빠르다, 진아.”

그래, 어쩌면 제 간절함이 부족했던 걸지도. 새삼 짧게만 느껴지는 시간을 곱씹으며 서훈이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이제 서훈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더 과거를 반복하고, 추억이 깃든 장소로 데리고 갔을 뿐이다.

“그래도 마지막일지 모르는데 얼굴이나 더 볼걸.”

오히려 그게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쓰게 웃으며 그가 세면대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금세 옆으로 돌린 수도꼭지에서 차디찬 물이 콸콸 쏟아졌다.

이제 화살의 촉은 제 손을 떠났다.

이제라도 유진이 한 조각이라도 기억을 찾아낸다면 모를까, 희박한 가능성을 마주한 눈가에는 얼핏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하지만… 믿어 봐야겠지, 마지막까지.”

성공한다면 이 계약이 서훈에게도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감은 나지 않았다. 지금의 서훈에게는 죽음과 함께 끝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목전으로 다가온 죽음이라는 칼이 뾰족하게 날을 세워, 점점 더 그의 숨통을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반나절도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뻔히 알면서도 서훈은 반쯤 포기한 듯 힘이 풀린 손으로 세면대를 꽉 부여잡았다.

후들거리는 팔 때문인지, 자꾸 세면대에서 손이 미끄러졌다. 어렵사리 힘을 주며 서훈이 차가운 물을 제 얼굴을 마구 끼얹었다.

“후우, 조금만 더 버티자. 주서훈, 조금만 더.”

그래, 몇 시간만 더.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세뇌라도 된 걸까. 거짓말처럼 흐릿하게 풀린 머릿속이 차츰 또렷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혹시 또 모를 일이다. 유진에게도 기억을 끄집어낼 계기가 필요한 걸지도.

“그래, 뭐라도 남겨 놓으면 볼 텐데.”

다짐하듯 홀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치켜든 그가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뚝뚝.

닦지 않은 물기가 연신 얼굴을 타고 셔츠를 축축하게 적셨다. 그런 제 모습을 빤히 들여다보던 서훈이 기어코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콱 물었다.

과연 이 시험은 누굴 위해서일까.

자신이 죽고 나면 힘들어할 서유진을 위해서? 아니, 그런 순수한 마음일 리가 없다.

어떻게든 곁에 남고 싶은 욕심으로, 죽고 싶지 않은 자신의 공포와 이기심일 뿐이었다.

“차라리 편히 죽지, 기어이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 여자를 놓을 수가 없었다. 애써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욕실을 나선 뒤, 서훈은 어딘가에서 꺼낸 종이에 짧은 편지를 써 내려갔다.

하얀 종이에 적힌 내용은 온통 알아볼 수 없는 기호와 글자 같은 것들로 몇 줄이 빼곡하게 채워졌다.

하지만 서유진이라면 알아볼 거다. 그건 두 사람이 학생 때부터 사귀는 내내 장난삼아 사용한 암호와도 같았다.

서훈은 다 적은 편지를 손에 꽉 쥔 채로 급히 현관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만난 공원은 거리가 꽤 멀었지만, 그에게는 금방이었다.

금세 나무로 된 벤치에 주저앉으며 서훈이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하아, 하…….”

서훈이 오는 내내 움켜쥔 손을 펼쳐, 그 안의 구겨진 편지를 씁쓸하게 내려다봤다.

과연 유진이 이걸 발견할 수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는 상황을 덧그리며 구겨진 편지를 그가 손끝으로 죽죽 폈다.

미리 약속하지도 않았다. 이 꿈인지, 환상인지도 모를 현실에서 유진과 함께 공원을 온 것도 고작해야 딱 한 번.

어쩌다 운이 좋아서 다시 온다고 해도 편지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이 벤치를 오는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이것 또한 희박한 가능성.

사람들은 이따금 중요한 걸 모른 채로 살아가고는 한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가능성, 그중에서도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더 희박한 확률.

지금까지 잘 모르고 살았다.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눈앞에 닥친 행복은 놓친 뒤에야 깨닫는 법이었다.

지금의 서훈처럼.

“확률…. 그래, 희박해도 아예 제로는 아니니까.”

생각만큼 나쁜 확률은 아닐지도 모른다. 스스로 위로하며 서훈이 머리 위의 하늘을 멀거니 올려다봤다.

눈앞이 자꾸 뿌옇게 흐려지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래, 기회를 잡고도 놓쳐 버릴까, 더 힘든 건지도.

“그래도 진아…….”

조금만 더 나를 기억해 내. 차마 뱉어 내지 못한 말을 고스란히 삼키며 그가 미련 없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 * *

‘이거 들을 때마다 노래가 제법 좋기는 한데 말이지.’

‘그런데? 다른 문제라도 있어?’

‘으음, 가사가 너무 슬프지 않아? 꼭 새드엔딩처럼.’

‘에이, 그냥 노래인데 뭘.’

‘누가 몰라? 느낌이 좀 그렇다는 거지.’

‘뭐, 사실 쓸데없이 슬프기는 해.’

가볍게 대답한 그가 장난스럽게 입매를 휘어 올렸다. 옆에서 감상에 젖은 유진이 그를 따라 나지막이 웃었다.

괜히 가사를 떠올리며 서글퍼졌는데 저 얼굴을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하긴 명곡이긴 하지.’

‘그래서 더 슬프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고.’

‘네가 불러서 그런 걸지도?’

그렇게 말한 유진이 장난스럽게 씩 웃으며 돌연, 앞으로 손을 뻗었다.

반쯤은 장난이었다. 닿을 듯 가까이 앉은 남자의 뺨을 그녀가 웃으며 두 손으로 감쌌지만.

‘…어?’

‘진아, 왜 그래?’

‘서유진?’

‘어, 그래. 서…….’

서, 뭐였지? 분명히 알고 있는데 왜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거지? 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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