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
“됐어, 거기까지.”
“갑자기 왜, 방금까지 그런 분위기였잖아.”
확 달라지는 분위기를 느낀 서훈이 오만상을 썼다.
“글쎄, 착각은 자유?”
“이래 놓고 지금 착각이라는 거지?”
“어쭈, 자꾸만 어딜 들이밀어.”
“하, 서유진 어디서 이딴 밀당을 배워서는.”
누가 가르쳤어, 앞으로는 그런 쓸데없는 거 배우지 마. 지금도 충분해.
둘 사이를 가로막은 팔을 잽싸게 잡아채며 짓궂게 투덜거린 그가 유진을 확 끌어안았다.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다는 헛소리를 투덜거리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그래서 얌전히 안겨 주다가 품에서 슬쩍 빠져나왔다.
“내가 좀 모범생이거든.”
“내가 서유진을 어떻게 이기냐.”
그제야 진짜 한 방 먹었다는 듯 제 손을 거둬들인 서훈이 투덜거리며 작게 웃고 말았다.
조금 미안했지만,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다. 외국을 종종 나가는 서훈과는 조금 달랐다.
늘 집에서만 모든 걸 해결하는 유진이 아닌가. 그만큼 적은 움직임으로도 피로가 몇 배로 더 몰아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이른 시간부터 메이크업이며 헤어, 정신 차릴 틈 없이 끝난 결혼식과 열두 시간을 넘는 비행까지 했으니, 멀쩡할 리가.
“미안하지만, 난 장거리 비행 초보거든요.”
“그거야 나도 알지. 그게 왜?”
“너처럼 장시간을 비행하고도 멀쩡할 수 없다는 거잖아.”
나직이 터트리는 한숨을 따라 유진이 투덜거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결론은 별거 없었다.
피곤하니까, 더는 덤비지 말라는 뜻이었으니까.
가만히 듣던 서훈이 알겠다며 유진에게 바짝 붙인 상체를 떼어 냈다. 그러고는 치덕거리는 대신, 자기가 먼저 씻겠다며 곧장 가까운 욕실로 들어갔다.
“그래도 아직 양심은 남아 있네.”
소리 죽여 웃은 유진이 닫힌 문 너머를 흘깃 바라본 뒤, 그대로 곧게 세우고 있는 상체를 뒤로 느슨하게 젖혀 버렸다.
시트가 푹신하게 등을 감싸자 절로 긴장으로 굳은 몸이 이완되며 녹아내렸다. 그대로 천장을 응시하며 유진이 이불로 제 얼굴을 푹 파묻었다.
“하아, 그래도 좋다.”
이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어울리지 않게 몰아치듯 결혼을 끝내 버린 기분이라고 할까. 정신을 차렸더니, 이미 모든 게 다 끝나 있었다.
확실히 유진에게는 너무 과도하게 몰린 스케줄이었다. 그나마 일주일의 신혼여행이 일도 놔 버리고 여유 있게 쉬는 타이밍인 셈이다.
서훈이 들어가면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쉬라고 그랬는데.
이불에 푹 몸을 감싼 채로 유진은 캐리어에 들어 있을 제 옷을 떠올리며 차츰 무거워지는 눈을 감았다.
한 번 느슨해지기 시작한 정신은 어느 순간, 완전히 탁 풀어지며 더는 유진도 몰려오는 수마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 * *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이었다. 앞으로 두어 걸음 움직이며 유진은 저 앞의 허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멀거니 주시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를 보는 것처럼. 암담하다는 단어가 이런 느낌인 걸까.
칠흑처럼 새까만 어둠도 아니고, 반대로 환한 빛도 없는 공간에 홀로 떨어진 듯한 느낌은 지극히 공허하고도 이질적이었다.
탁. 타-닥.
“도대체 여긴…….”
목을 뚫고서 흘러나온 말이 고스란히 허공에서 잠겼다. 이 넓은 공간에서 울림이 크게 퍼지질 않고 사그라진 것이다.
그렇게 어딘지도 모를 공간을 몇 번이고 맴돌았을까.
하얗지도, 그렇다고 까맣지도 않은 잿빛 가득한 모노톤의 시야 너머로 불현듯 하늘에서 무언가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리도 없이 어디에선가 나온 새카만 점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다. 멍하니 그 광경을 올려다보던 유진이 놀란 듯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어, 어어……?”
마치 물속에 잠긴 기분이었다.
그래, 눈앞의 이 묘한 광경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저것보다 정확한 말은 없을 정도로.
점점이 허공에서 터지듯 풀어진 그 어둠이 잿빛 가득한 공간을 야금야금 좀먹어 들어갔다. 잉크라도 풀리듯, 미세한 균열 사이사이로 색이 물들었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어둠이 닿기라도 할까, 놀란 유진이 뒤로 물러서다가 기어이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사방은 짙은 어둠에 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유진은 이제 어디로도 달아날 수가 없었다.
더는 방법이 없다.
깨달으며 두 눈을 질끈 감으려는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빛이 확 터졌다. 그와 동시에 유진이 번쩍 눈을 떴다.
“……!”
흐릿해진 시야로 밝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옆으로 몸을 돌린 유진이 몽롱하게 풀린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천장을 주시했다.
오묘한 꿈이었다.
악몽이라 볼 수도 없는 꿈인데 유독 그 새까만 어둠이 당장에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처럼 섬뜩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꿈이야.’
재차 기억을 곱씹어가던 유진이 파르르 몸을 떨다가 돌연, 손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무언가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느릿하게 움켜쥔 손을 풀어보니, 식장에서 받은 드림캐처가 보였다.
“…어, 내가 이걸 왜?”
이상하다, 이걸 꺼낸 기억이 전혀 없는데. 의아한 듯 갸웃거리며 유진이 늘어지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당신한테 주는 내 선물이에요.’
‘네? 굳이 약혼 선물까지 안 주셔도 되는데.’
‘받아 둬요, 앞으로는 좋은 꿈만 꾸게 해 줄 테니까.’
설마 그 남자가 한 말이 진짜였던 건가. 하긴 드림캐처가 그런 거라고 듣긴 했지만 미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효과가 있을 줄이야.”
움켜쥔 드림캐처를 얼굴 가까이 들어 올리며 유진이 빤히 응시했다.
천장의 불빛이 다른 곳보다 강해서일까, 살짝 흔들자 빛을 받아서 반짝이는 색이 오묘하다.
“신기하네, 진짜.”
유진이 손에 쥔 드림캐처를 연신 흔들어 보며 홀로 중얼거리는데 멀리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서훈이 다 씻고 나온 모양이다.
“뭐야, 서유진 또 그거 보고 있었어?”
괜히 또 투덜거릴까 잽싸게 손을 내렸지만, 잠깐 사이에 그걸 본 눈치다.
“하여간 눈도 좋아.”
“아예 들어 올려서 보고 있는데 모를 리가.”
서훈이 못마땅하게 투덜거리며 곁으로 왔다.
“제대로 본 적이 없거든. 드림캐처라는 것만 들어봤고.”
“그래봤자 전부 상술이야, 뻔한 걸.”
“주서훈, 자꾸 애처럼 말꼬리 잡고 투덜거릴래?”
그냥 구경하는 거로 꼬투리까지 잡고. 인상을 쓰며 유진이 매섭게 눈을 흘기자 오히려 젖은 머리를 털어 내며 서훈이 픽 웃었다.
“질투라고 해 주면 더 좋겠는데.”
“그래서 드림캐처에 질투하는 소감은 어떠세요?”
“좋진 않네, 물건 따위한테 질투까지 하니.”
“알기는 하는구나, 이게 물건인걸.”
일부러 약 올리듯 유진이 손에 쥔 드림캐처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느슨하게 풀린 눈을 치켜 올리며 서훈이 곁으로 바짝 붙었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다.
손을 내리며 유진이 서훈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옆에 앉혔다. 여기서 더 자극해 봤자 그다지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오해한 듯 서훈이 그녀에게 깍지를 끼며 손등을 입가로 자연스럽게 가져갔다.
“이제 피로가 좀 가셨어?”
“가시기는, 아직 피곤해서 딱 죽겠어.”
보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피로 얼마나 기다리면 풀리는 건데.”
“나도 모르지, 들어오고 한 시간도 안 지났거든?”
“뭐, 그렇긴 한데.”
“식 올리느라 긴장한 거 이제 풀리나 봐.”
그만큼이나 유진은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 서훈의 집안과는 차이가 심했으니, 부담감이 더 얹어졌던 것도 같았다.
주서훈만 그걸 모르는 눈치였다. 하다못해 민석이며 연우까지도 알아차린 긴장의 이유를 말이다.
그래도 뭐 어쩌리. 스스로가 선택한 연인인데. 가끔 맹하게 굴 때도 있지만 고의도 아닐 텐데.
유진이 별다른 말이 없자 이번에도 서훈은 또다시 자기 멋대로 상황을 유추하는 듯했다.
“진아, 차라리 우리 말이다.”
말끝을 따라 손등에서 멈춘 열기가 팔을 타고 느릿하게 올라와, 얼굴 앞에서 멈춰 섰다.
“갑자기 우리 뭐?”
“허니문 베이비 먼저 만들까?”
예상이 확신으로 바뀌기까지는 금방이었다.
“아직 환한 대낮이야, 지금이 몇 시인 줄 알고.”
“상관없잖아, 뜨거울 신혼인데.”
“시끄러워, 능글능글한 아저씨처럼 자꾸 이럴래?”
“아까도 딱 거절하고, 나만 안달복달하고.”
얼굴로 흐트러지는 서훈의 숨결이 묘하게도 들떠 있었다.
“그, 그거야, 막 들어왔으니까.”
“이제는 들어온 지도 시간 좀 지났고.”
어느샌가 유진의 어깨로 닿은 입술이 간지럽게 속삭이며 그녀를 아이처럼 재촉해 댔다.
그래서일까. 이미 조금 전까지의 섬뜩한 꿈은 유진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직 열두 시도 안 지났잖아, 너 진짜.”
“쉿, 괜찮아.”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간지러운 속삭임과 함께 서훈이 유진에게 키스했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즐기기만 해.”
가볍게 한 번 훑어간 열기가 잠깐 사이, 짙게 변하며 유진을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하아, 하… 주서훈, 너.”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서훈을 마주 끌어안으며 유진이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진짜 환장하게 좋아?”
“…웃기지 마, 내가 널… 읍.”
쏟아지려는 불만이 어딘가로 사그라들었다.
다시 키스를 시작한 서훈에게선 낯선 향이 감돌아, 유진을 한층 더 자극했다.
호텔 어메니티 향이 유난히 짙게 후각을 자극하는 건가. 익숙한 체온이 마주 닿으며 어딘가에 잠든 열기를 툭툭 건드려 자극하고 있었다.
몇 년을 함께 살면서 익숙해진 연인의 온기인데도 유진은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면 이게 가장 큰 문제일지도.
서훈이 덤벼들면 날을 세우다가도 휩쓸리는 부분이.
몇 년째 이어지는 버릇 아닌 버릇은 장본인보다 그가 더 잘 아는 약점이었다. 서유진을 자극하는 하나의 매개체로서.
그리고 또 퇴원한 뒤로 달라진 서훈의 새로운 모습이기도 했다. 늘 짓궂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저돌적으로 구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바짝 붙어서도 제가 귀찮아하면 한걸음 물러설 줄도 아는 남자였는데 어느 날부턴가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