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여주라고 했잖아요! 1
Prologue
‘아니야, 아닐 거야.’
테고의 귀에 간신히 얹은 내 손이 바들바들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아니, 이건 몸이 떨리는 건가.
침착하자, 아이네.
자꾸만 가빠오는 숨을 억누르며 그의 귓불에서 아티팩트를 천천히 분리해냈다.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원작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기란 너무도 어려웠다.
그렇게 눈을 한 번 깜박일 정도의 짧고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이런…….”
치열하게 부딪쳐 싸우던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가 완전히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실망했습니까?”
아뇨, 이건 실망이 아니라…….
정확히는 당황과 공포에 더 가까운 감정이었다.
‘말도 안 돼, 이게 뭐야.’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힘이 빠진 내 손을 받쳐 든 테고에게로 귀걸이가 스르륵 옮겨갔다.
다시 달달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매끄러운 뺨에 살짝 가져다 대었다. 여태껏 발 디디고 있던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두 손으로 이렇게 더듬어 만져보는데도.
“어, 언제부터 남자였어요? 아니, 왜…… 왜 남자인 거예요?”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잖아.
양손에 닿은 뺨이 조금은 뜨겁다고 느낄 즈음, 테고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공녀도 내가 아니라 라니엘이 살아남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아냐, 그런 뜻이 아니야!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이건, 이건…….”
어쩐지 테고의 눈빛이 조금 사나워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려 했다. 그러자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등 위로 올라왔다.
“내게서 뭘 기대했는지는 상관없습니다.”
엄지손가락 아래로 이어진 손바닥의 우묵한 곳 살갗에 보드랍고 촉촉한 무언가가 닿았다. 그때의 나는 테고가 내 손바닥에 얼굴을 부비고 있다는 걸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당황하고 있었다.
“공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 맞는 말이다. 테고는 나에게 한 번도 자신이 여자라고 말한 적 없으니까.
하지만 여긴 소설 속이잖아! 원작의 전개가 틀어질 수는 있어도, 설정이 이렇게까지 바뀌면 안 되는 거 아냐?
성별이 바뀐 건 너무 큰 설정 오류인데……!
“뭐가 되었든, 너무 늦었습니다. 공녀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책임? 무슨 책임을요? 제가 무언가를 했나요?
하지만 여전히 충격에 사로잡힌 내 입술은 그저 뻐끔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변명도, 억울함도 토해내질 못했다.
“…….”
누가, 누가 저 대신 말 좀 해주시겠어요? 이 소설 주인공……. 남장여주라고 했잖아요!
* * *
눈을 떠보니 낯선 몸에, 낯선 세계더라고요. 낯설지만 익숙한 이 느낌.
이거 그거 맞죠? 책빙의!
그런데……. 8년 넘게 원작이 뭔지도 모르는 책빙의도 있어요?
아, 이젠 모르겠다. 여태 읽은 로판이 몇 권인데, 힌트 하나 없이 원작을 찾으란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원작 찾기는 오늘부로 포기합니다. 다들 안녕히 계세요! 이제 전 자유를 찾아 떠납니다!
“…….”
그렇게 무려 8년이나 해온 일을 때려치웠건만.
나는 고작 일주일 만에 포기 선언을 철회하기로 했다.
그야말로 온 세상이 멈춘 듯하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귀가 먹먹해지다 못해 이명까지 들렸으니까. 거기다 조금,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찬란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잘 다듬어진 본관 앞 화단에서 풍기는 옅은 꽃향기가 싱그러운 날이었다.
지난 8년과 마찬가지로 어제도 별일 없었고, 오늘도, 내일도 그럴 예정이었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커다란 말 위에서 뛰어내린 남자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스치듯 마주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품 안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더니 줄줄 읽기 시작했다.
“저는 에스피오 제국의 지지 않는 태양 라비우스 1세 폐하의 명을 받아…….”
갑작스레 들이닥친 낯선 남자를 왜 경계하지 않느냐고?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남자는 누가 보아도 반박할 여지가 없을 만큼 잘생겼기 때문이다.
‘와, 잘생겼어.’
선생님, 아니, 기사님. 초면이지만 제가 드릴 말씀이 이것뿐이네요.
정말로 잘생긴 미남에게는 굳이 미사여구를 붙일 필요가 없다는 옛말이 있다. 그 말은 철저하게 검증된 조상들의 지혜가 틀림없었다.
‘아니……, 어쩜 목소리까지.’
게다가 이분은 성대까지 잘생긴 모양이다. 남자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아주 귀에 쏙쏙 꽂혀 들었다.
종이에 쓰인 말을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그저 조곤조곤 읊는 것뿐이었는데도.
달콤한 초콜릿색 머리카락 위에서 햇빛이 뭉개지듯 부드럽게 이지러졌다. 그 아래로 남자치고는 하얀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을 들여 하나씩 언급하자면 끝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꺼이 그 시간을 들이고 싶은 외모를 갖고 계시네요.
그 와중에 지금 내 시선을 끌어당기는 건 따로 있었다.
“와.”
물결도 일지 않는 깊은 바다 같은 청아한 눈동자.
길게 내리깔린 속눈썹 사이에서도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남자가 무어라 말하는지, 뒷부분의 내용은 모조리 놓치고 말았다.
그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끌림이었다. 이번엔 단순하게 잘생긴 외양 때문이 아니었다. 조금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차고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래, 두 번째 이유!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지금 이 장면을 누군가 예비해 놓은 것처럼.
“내 말, 아니, 제 말 듣고 있습니까?”
멍하게 서 있는 나를 눈치챘는지 남자의 목소리에 약간 못마땅한 기색이 담겼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도 남자의 눈높이는 나와 별로 차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남자가 고개를 든 순간,
“네에? 엥?”
나는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그를 통해 내게로 흘러들어온 건…….
‘기억’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파편화된 조각처럼 정지된 장면들이 눈앞에 좌라락 흩어졌다.
‘고작 이런 아티팩트로…… 나를 속여왔…….’
‘……오빠 대신 살아남은 게…….’
‘당신이 여자라는 걸 먼저 안 건 바로……!’
‘상관없어, 이젠. 네가 여자든, 남자든…….’
그리고 마지막엔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가든 결혼식까지.
‘와, 이게 뭐야?’
그러니까 기억은 기억인데, 문제는 내 기억이 아니란 거다. 그렇다고 이제는 8년이나 되어서 익숙해진 이 몸의 것도 아니고.
“……공녀, 음?”
“…….”
그리고 왜인지 남자의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말을 잃은 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이게, 헉, 무슨! 누구, 헉, 마음대로!”
헐레벌떡 뛰어온 오빠의 외침이 남자와 내 사이로 끼어들기 전까지.
“아.”
그제야 내게서 눈길을 거둔 남자가 두리번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아니, 거둘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지만 남자는 눈가를 가늘게 좁히며 한 발 물러섰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턱밑에 바짝 붙은 내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러고는 괜스레 왼쪽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내 머리 너머로 시선을 던진 채 그가 오빠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당신이 나딘 베룸 공자입니까?”
“아니, 헉, 그쪽은 누군데, 이렇게 다짜고짜.”
“폐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만.”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가 흠, 헛기침을 하며 한 발짝 더 뒤로 몸을 물렸다.
어떻게든 다시 눈을 마주쳐보려는 내 노력을 명백히 무시하려는 태도였다.
이보세요, 기사님! 처음엔 잘생겨서 본 거 맞는데, 지금은 그거 때문이 아니란 말이에요!
‘뭐지, 뭔가……. 떠오를 거 같은데. 잠깐, 안 돼!’
숫제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손을 올린 나를 피해 남자가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그의 귀에 걸린 녹색 귀걸이가 햇빛을 받아 반짝, 빛을 냈다.
“어, 어?”
그때까지만 해도 희미한 잔상처럼 흩어져있던 ‘기억’들이었다. 갑자기 그것들이 하나로 뭉쳐 눈앞에 선연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곧이어 마치 영상을 빠르게 돌린 듯 휙휙 지나가기까지.
어느덧 하나의 장면에서 ‘기억’이 정지하자 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건, 말도 안 돼.”
원작 소설이 있으면 있다고 좀 더 빨리 알려줄 수는 없었나요? 심지어 이 원작엔 아주 커다란 문제가 있는데 말이죠.
그게 뭐냐고? 방금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저 청년 기사!
저 잘생긴 남자가 무려 여자 주인공인 남장 여주 소설이었으니까!
빙의한 지 8년이나 지난 걸 감안하더라도 읽은 지 오래된 소설인 게 분명했다.
자세한 내용이 기억 안 나는 건 둘째 치고, 요즘은 이런 소설 안 나온다고! 이게 도대체 몇 년 전 트렌드야.
하고 많은 최신 소설들 두고 왜 저는 하필이면 고전 로판에 들어왔나요.
‘누가 거짓말이라고 좀 해주세요.’
여태 되게 식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이 닥치면 정말로 ‘말도 안 된다’고 내뱉게 되는구나. 아니면 거짓말이냐고 자문하든지.
그동안 욕해서 미안했어요, 책빙의 여주님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겁니까, 공녀?”
작게 내뱉은 목소리를 용케도 알아들었네. 하여간 귀는 밝아서.
남자가 커다란 몸을 돌려 다시 나에게로 눈을 맞췄다. 그러자 설마는 이제 확신이 되었다.
아니, 그보다 이 사람을 ‘그’라고 불러야 해? ‘그녀’라고 불러야 해?
갑작스럽게 밀려들어온 정보와 그로 인한 충격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가 그렇게 원작을 찾아보려고 노력할 때는 힌트 하나 안 주다가! 어? 인제 와서, 이렇게 갑자기?
“아이네!”
“공녀!”
혼신의 힘을 다한 내적 주먹질을 마지막으로, 저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흐흑, 드디어 내 취향으로 생긴 남자 하나 찾았나 싶었는데 여자라니요.
나는 어쩜 이렇게 복도 없을까.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눈물이 난다, 정말.
날 부르는 주변 사람들의 외침을 뒤로한 채 나는 시야가 일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