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도 착각은 순조롭게
“어, 어억!”
“아이네 아가씨!”
“오징어 수프는 이제 싫어…….”
“베룸 영지 아가씨가 오징어를 싫어하시면 어떡해요. 아니, 이게 아니지! 주인님! 주인마님! 아가씨께서 깨어나셨어요!”
아이네는 오징어 수프가 정말 싫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 빙의인지, 환생 나부랭이를 한 것보다 매일 아침 나오는 오징어 수프가 더 싫었다.
왜 하필 자신이 사는 영지의 특산물이 오징어인 건지 저주스럽기까지 했으니까.
판타지 세계라면 자고로 마정석이나 다이아 광산! 이런 게 특산품이 되어야 하는 거 아냐?
왜 저는 오징어 영지의 영애가 되었나요, 선생님.
오늘도 끔찍한 오징어 수프를 먹을 생각에 아이네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그녀의 방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낯익은 얼굴들이 앞 다투어 들이닥쳤다.
“아이네!”
“아이고, 우리 아가!”
“어, 오셨네요? 언제 오셨지.”
감찰 기간이라 공작령 일대와 가신 영지를 시찰하러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아버지와 어머니가 벌써 돌아와 계셨다.
한번 떠나시면 적어도 한 달은 넘게 자리를 비우시는 분들이…… 무슨 일이지?
“몸은 좀 어떠니? 어지럽진 않고?”
몸은 괜찮은데, 어쩐지 아주 나쁜 꿈을 꾼 것 같아요.
그녀의 어머니는 아직도 잠이 덜 깬 아이네의 볼을 연신 더듬거렸다. 그러는 동안 진찰을 대강 마친 공작가 주치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이상은 없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아주 건강하십니다. 그저 조금 피로하셔서 오래 주무신 것 같군요.”
“다행이다, 다행이야. 아이네.”
“그러게 밤에는 책 좀 그만 읽고 일찍일찍 자라고 하지 않았느냐.”
“…….”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정기적으로 상태를 봐주는 공작가 주치의에, 갑자기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신 부모님의 과한 반응까지.
영문을 모르는 아이네는 더욱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나만 이해 못 하는 거 아니지?’
여전히 그냥 평소처럼 자고 일어났다고 믿는 그녀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이틀이나 일어나질 못하니까 아버지, 어머니께서 다시 오셨잖아. 이번에도 꾀병이었으면 넌 내 동생 자리에서 퇴출이야!”
그런 아이네의 눈앞으로 적당히 겹치는 생활반경 내에서 공생하는 나이 많은 혈육이 다가왔다.
‘아니, 나라고 좋아서 네놈 동생이 된 줄 알아?’
평소처럼 으르렁거리는 남매 전쟁의 발발을 막은 건 그녀의 어머니였다.
“나딘! 아파서 누워있었던 동생한테 그게 무슨 못된 말이야. 세상에, 우리 아기 얼굴이 반쪽이 됐네.”
공작부인이 그녀의 오빠를 다그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계속 만지고 있던 말랑말랑한 아이네의 볼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로.
그러나 어머니의 손안에서 제 볼 살이 마구 일그러지고 있는 것도, 이틀이나 쓰려져 있었다는 사실도 아이네의 머릿속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 들어왔을지 모를, 바로 눈앞의 남자 때문에!
‘어, 어어. 꿈……이 아니었네?’
한 남자가 문간에 삐딱하게 서서 그들 가족의 촌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맞았다.
달콤한 초콜릿 같은 머리카락.
흔하지 않은 코발트블루 빛깔의 눈동자.
그리고 이어진 탐색하는 듯한 시선.
8년 만에 떠오른 ‘기억’들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 진짜로 오래된 남장여주 소설에 빙의했나 봐.’
아이네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했다.
그나저나…….
문제는 이 소설을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는 사실이다.
거기다 빙의한 지 이미 8년이나 되어서일까. 책 제목만은 영 떠오르질 않았다.
이거 이래도 괜찮은 걸까.
여전히 아이네는 자신이 기절했었다는 자각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래서 공작부인의 손에 제 얼굴을 맡긴 채 원작의 주인공만 힐끔거렸다.
그래, 책 제목은 중요하지 않다. 내용이랑 역할이 중요한 거지.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여자 주인공이 죽은 쌍둥이 오빠 대신 남장을 한다는 이야기였지? 와,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너무 완벽한 남장에 아이네는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네의 모습을 보며, 그녀의 오빠 나딘은 곁에 서서 입을 비죽거렸다.
‘그래도 갑자기 기절했다가 한참 만에 깨어난 것치고는 멀쩡하네.’
안도하는 속마음과는 달리 이번에도 핀잔이 이어졌다.
“하여간 사람 걱정하게 하는 데에는 뭐 있…….”
그러나 나딘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곳에 그들 가족만 있지 않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탓이었다.
이틀 만에 눈을 뜬 아이네의 상태를 먼저 살피느라 그녀의 가족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뿐인 금지옥엽의 침실에 외간남자를 들였다는 사실을.
“자, 잠깐만요. 그쪽이 여기 들어와 계시면 어떡합니까! 여긴 아이네 침실이라고요.”
순간, 방 안 모두의 눈길이 일제히 남자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남자는 그저 한쪽 눈썹만 치켜세울 뿐이었다.
“그, 그렇지. 리테루온 공은 나 좀 보세.”
평소 당황하는 법이 없던 베룸 공작이 남자의 시야를 가리며 벌떡 일어섰다.
처음 문이 열린 순간부터 아이네의 얼굴과 눈만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그였다.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남자의 등을 나딘과 베룸 공작이 꾹꾹 밀어 돌렸다.
못 이기는 척 뒤돌아선 그에게서 높낮이 없이 딱딱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를 보고 쓰러졌으니 응접실에서 함께 기다리는 게 도리라고 말하신 건 베룸 공작님이 아니십니까.”
“거, 젊은 친구가 말이 많군. 일단 여기서 나가세.”
그렇게 문을 나서는 순간이 되어서야 남자의 눈길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네에게서 겨우 떨어져 나왔다.
* * *
“자네가 반란군 토벌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소식은 들었네.”
“예.”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베룸 공작의 서재에 낮게 울려 퍼졌다.
“제르, 아니, 폐하는 잘 지내시고?”
“……예.”
남자가 가져온 황제의 서신을 펼친 공작이 끙, 하고 머리를 짚었다.
“이제 성년을 넘겼으니 공작위는 완전히 이어받았겠군. 그런 자네를 보냈다는 건…….”
“일단은 황실 기사의 자격으로 왔습니다.”
베룸 공작은 다시금 서신을 꼼꼼하게 읽었다. 그저 서신만 온 게 아니었다.
동봉된 건 무려 3년 만에 황궁에서 열리는 데뷔탕트 연회 초대장이었다.
그리고 그 초대장에는 아이네이스 베룸이라는 이름이 멋들어진 필기체로 쓰여 있었다.
서신을 아무리 뜯어봐도 아이네를 데뷔탕트 연회에 초대한다는 내용뿐이었다. 다만 손수 고른 황실 기사가 황도행을 호위할 것이라는 말이 함께였다.
“후, 제르……. 이놈이 정말.”
아무리 친우라고 하나 스스럼없는 호칭에 테고의 몸이 조금 움찔거렸다.
“그래서 자네에게 우리 아이네의 황도행 호위를 명하셨다, 이 말인가?”
“예, 그 기간은 공녀가 황도로 올라와 데뷔탕트를 치르는 시기까지라고 하셨습니다.”
책상을 내리치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억누른 공작이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아직,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몇 달에서 일 년은 더 지나야 했다.
‘일어나야 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만다는 건가.’
제가 본 미래는 시점이 뒤죽박죽 섞인 채였다. 하지만 하늘로 높이 치솟은 까만 연기와 부서진 황궁의 성문. 불길하기 짝이 없는 피로 물든 옥좌까지.
누가 보아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반란의 순간이었다.
그건 언젠가 황도가 위험해 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래서 아이네가 영지 밖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애썼던 건데.’
아이네를 황도로 보낸다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은 이미 보아버린 자가 아니던가. 정해진 때가 될 때까지 관여하기는커녕 베룸 영지를 떠날 수도 없었다.
그건 베룸의 직계라면 누구나 지켜야할 ‘법칙’이었다. 다행히 아직까진 제 아들은 완전한 제약에선 자유로운 듯했다.
‘아이네를 통해서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선 안 돼.’
베룸 공작이 눈을 떴다. 그의 하늘빛 눈동자가 천천히 제 앞의 청년을 응시했다.
그 ‘기억’ 속에서 살아남아 반란을 진압한 인물들 중 하나.
특히 무채색에 가까운 흐릿한 기억 틈에서도 저 녹색 귀걸이만큼은 또렷하게 뇌리에 남았다.
‘믿어보자. 적어도 그 아수라장 안에 내 아이들은 없었으니까.’
금실을 아낌없이 사용한 초대장 위를 공작의 손가락이 조심스레 훑었다.
“우리 아이네의 데뷔탕트라……. 그 외에 폐하께서 또 명하신 건 없던가?”
다소 무감한 편인 테고도 공작이 썩 내켜 하지 않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가 일러준 그대로 읊었다.
“혹시 공작께서 망설이시거든 이렇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뭔가.”
“이 결정에 반발할 시 황실의 이름으로 베룸 공작가에 청혼서를 넣겠다. 나는 약속을 지켰어, 니엘.”
“뭐? 제르, 이 자식이!”
쾅-
베룸 공작은 이번엔 책상을 내려치는 자신을 자제하지 못했다.
* * *
영지를 시찰하다가 급하게 달려온 터라 공작 부부는 금세 다시 마차에 올라야 했다.
“하필이면 올해는 상투아리움에서 제례가 있으니 우리가 돌아오면 너희는 황도로 떠나고 없겠구나.”
“데뷔탕트만 마치고 금방 다시 오면 되는걸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쓰러졌다가 깨어난 이후 아이네는 신이 난 기색이 역력했다.
‘왜냐고? 드디어 어느 책에 빙의했는지 알았거든!’
이제 마음 졸이면서 자발적 외톨이로 살던 삶은 끝이야, 끝!
한편, 그런 그녀의 변화에 베룸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래 영애들과는 달리 바깥출입도 별로 하지 않고, 친구를 사귀는 일도 묘하게 꺼리던 딸이었다.
여태까지는 제 의도와 맞아떨어지기에 내심 안도하며 아이네가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 그런데 테고의 등장만으로 이렇게 태도가 바뀔 수가 있나.
이게 과연 우연일까.
테고 리테루온 공작은 아직 수염도 제대로 나지 않은 턱이 말끔한 청년이었다. 얼굴만 보자면 여전히 앳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역시…… 너무 지나치게 잘생겼다. 딸을 아끼는 아버지의 눈에는 그마저도 마뜩잖은 법.
“안 되겠다. 나딘, 너도 아이네와 함께 황도에 다녀오거라.”
곁에 가만히 서 있던 나딘이 펄쩍 뛰었다.
“아니, 아버지. 그럼 공작성은 누가 지키고요?”
“일주일 정도 공백은 괜찮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내가 돌아와 있을 테니.”
여기서 황도까지 마차를 타고 가면 꼬박 열흘은 걸릴 텐데…….
설마 열흘 내내 한 마차 안에서 같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서로를 바라보는 아이네와 나딘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저 재수탱이 오빠 놈이랑?’
‘저 망아지 같은 동생 놈이랑?’
그들 남매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썩어들어 가는 모습을 테고는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왼쪽 귓불에 달린 작은 귀걸이를 만지면서.
한편 부인과 마차에 오르려다 다시 제 아이들을 응시하던 베룸 공작의 눈동자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정말 제가 8년 전, 잠시 숨이 멎었다가 깨어난 아이네에게서 본 대로라면…….
‘괜찮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 * *
주치의의 말대로 아이네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뿐 아니라 테고에게 공작성을 소개해주겠다며 자원까지 했다.
“저기요, 테고 리테루온 경? 아니, 공작님?”
“일단 지금은 폐하의 명으로 공녀의 호위를 맡고 있으니 경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하여간 융통성 없긴.
아이네가 앙증맞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한편, 테고는 아까부터 싱글거리며 제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공녀가 부담스러웠다.
흔히 받아왔듯 흑심 가득한 눈빛이면 모진 말로 쫓아내기라도 할 텐데.
마치 신기한 생물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하, 테고 경.”
“…….”
그렇다고 이름으로 부르라고 허락한 적은 없는데…….
그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테고가 경계하는 기색을 내보이든 말든 아이네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단지 그녀에게는 떠오른 ‘기억’과 테고의 외양이 정확하게 일치하는지만이 관심사였으니까.
‘와, 나한테도 이런 날이 다 오다니.’
감탄사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두 손으로 억누르며 아이네가 두 눈을 빛냈다.
그래, 맞아. 이거야. 이거!
결 좋게 포슬거리는 진한 갈색 반곱슬 머리칼에, 선명한 바다색 눈동자.
여자로도, 남자로도 보이는 중성적인 얼굴.
무엇보다 그녀의 기억에 확신을 더해준 건, 바로 저 작은 녹색 귀걸이였다.
짜식, 아니, 언니. 여기선 나보다 나이 많으니까 언니라고 불러도 되겠지?
저는 알고 있어요. 그게 바로 언니를 오빠로 보이게 만들어준 아티팩트라는 걸!
그나저나 여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냥 만났다면 당연히 남자로 알았을 만한 겉모습이었다.
평균보다 조금, 아주 조금 작은 제 키보다 머리 하나 반은 더 컸다. 거기에 떡 벌어진 어깨가 눈에 띄었다.
‘이 정도면 진짜 누가 봐도 남잔데?’
그때까지 싱글벙글 웃던 아이네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흠, 그런데 소설에서는 일반 여성의 키보다 훌쩍 큰 키에 탄탄한 몸매라고 한 것 같은데.
‘이렇게 보통 남자들보다도 크다는 말이 있었나?’
쓸모없이 꺽다리처럼 키만 큰 오빠 놈만큼 더 커 보였다.
원작 남주가 워낙 커서 그런가. 남주보다 작기만 하면 되는 거였나. 기억이 잘 안 나네.
센티미터 단위를 쓰지 않는 이곳에선 그저 눈대중만으로 짐작해야 했다. 문제는 키가 작은 아이네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키는 전부 다 ‘엄청 크다’로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하.”
테고는 그녀의 시선이 제게로 다시 돌아오자 눈을 내리깔았다. 저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이상하게 한숨부터 나왔다.
거기다 무슨 생각을 심각하게 하는지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특이한 공녀였다.
“……호위 임무를 하는 동안은 그저 황실 기사이니 그때까지만 이름을 허락하지요.”
와, 목소리까지 완전히 남자야.
원래의 조금 낮은 듯한 미성이 아티팩트 덕분에 적당히 그윽한 중저음으로 바뀌었나 보다.
‘그래, 그래. 이렇게 아티팩트 착용 전후가 확 달라야 원작 남주가 혼란스러워하지.’
우연히 변장을 푼 여주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한 남주가 다시 남장한 여주에게 흔들리면서 혼란스러워 하는 거, 그게 바로 남장여자물의 클리셰 아니겠어?
저 혼자 의문을 가졌다가 납득하고선 실실 웃는 낯으로 아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런 그녀의 시야로 허리를 한껏 숙인 테고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으앗?”
“혹시, 아직 아프다면 무리하지 말고 들어가도록 하지요. 공녀가 또 쓰러지면 내가 곤란해집니다.”
“어어? 아니요, 아니요. 아프지 않아요. 뭐라고 했죠?”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그의 눈가가 다시 좁혀졌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눈동자는 그저 커다랗기만 한 게 아니었다. 청명한 아침 하늘이 그 큰 눈망울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베룸 공녀는 열아홉 성년이라고 들었는데. 보면 볼수록 자그마한 소동물이 따로 없지 않은가.
괜한 상념을 떨치려 테고의 목소리가 다소 퉁명스러워졌다.
“황명으로 공녀를 호위하는 동안에는 이름을 허락한다고 하였습니다.”
일견 새침해 보이기도 하는 그의 태도에 아이네가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어이쿠, 소설에서는 매번 ‘테고’라고 서술되어서 그런가, 너무 자연스럽게 이름으로 불렀나 보다.
그런데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 봐 가까이서 봐도 피부가 너무 곱네.
“아, 이름? 저도 모르게……. 헤헤. 그럼, 테고 경도 절 ‘아이네’라고 부르세요.”
선심 쓰듯 애칭을 허락한 아이네의 태도에 테고의 눈초리가 재차 가늘어졌다.
미혼 남녀가 서로의 이름이나 애칭을 부르다니, 의미를 알고 하는 말인가.
정말 자신에게 쓸데없는 감정을 품은 건 아닌지 살피느라 그의 침묵이 조금 길어졌다.
“……됐습니다. 저는 그냥 공녀라고 부르는 게 편합니다.”
“앗, 이왕 호위기사 노릇 하는 거 제대로 해볼래요? 보통 ‘아가씨’라고 부르던데…….”
배시시 웃는 모습에 테고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이건, 새로운 방식으로 제 관심을 끌어보고자 함일까.
여자를 꾀어내는 데에 사용하지 않을 뿐, 테고는 제 외모가 꽤 쓸 만하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았다. 웬만한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마저 얼굴을 붉히는 일이 종종 있었다.
“…….”
그가 부러 아이네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악의가 조금도 없어 보이는 맑은 얼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마주해왔다.
“으응?”
틀렸다. 오히려 제 얼굴이 화끈해질 만큼 아무 반응도 없었다.
결국, 먼저 테고가 그대로 말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래, 사람마다 취향은 다 다르다고 하니까. 공녀의 취향이 내가 아닐 수도 있지.’
아니, 잠시만.
이건 취향이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또래의 이성이 가까이서 바라보는데 이렇게까지 담담할 수 있나?
되레 제가 얼굴을 붉힐 뻔했다.
‘……제길.’
이런 일은 처음이라 테고는 필사적으로 다른 핑곗거리를 찾았다.
사람을 신기한 동물 보듯 하며 계속 웃기만 하는 걸 보면, 역시 어디가 좀 모자란 공녀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공작이 여태 사교계에 데뷔도 안 시킨 채 꽁꽁 싸매고 돌았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테고는 수런대던 마음이 조금 잠잠해지는 걸 느꼈다.
“에이. 농담이에요. 그러고 보니, 밥 먹었어요, 테고……?”
“…….”
“……경?”
은근슬쩍 ‘경’조차 떼고 반말로 부르려던 아이네의 시도에 그가 걸음을 멈췄다.
테고는 어깨만 측면으로 틀고는 아이네를 슬쩍 노려보기까지 했다.
그는 언뜻 어딘가 분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기분 탓이겠지?
‘하긴 8년 만에 원작이 뭔지 알았다고 들뜬 건 나 혼자일 텐데. 이상해 보였으려나.’
반가운 마음에 너무 나갔나 싶어 아이네는 겸연쩍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이제 여기부터는 하녀도, 하인도 안 들어오는 안쪽 정원이에요. 그리고, 음.”
괜히 딴청을 부리며 공작성 내부를 마저 안내해주는 아이네의 말에 테고가 또다시 멈춰 섰다.
“지금, 아무도 안 오는 내밀한 정원에 단 둘뿐인 겁니까?”
다시 경계하며 멀어지는 테고에게 아이네가 발끈했다.
“저기요, 뭘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저는 그쪽 취향 아니거든요!”
잘생긴 데다 미혼의 공작이니 그동안 시달린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장을 하고 있어도 알맹이는 여성일 테니 반했다면서 달려드는 여자들이 지긋지긋했겠지.
‘응, 근데 나는 안 그래. 난 남자 좋아하거든. 그것도 잘생긴 남자!’
그러고 보니 이제 무슨 소설에 빙의했는지도 알았겠다, 나도 잘 생긴 남자랑 연애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소설 주인공이랑 주요 조연만 피해 가면 되잖아. 지금껏 혹시 피폐물이나 악녀물에 빙의했을까 봐 연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야.
완벽하게 모든 내용이 떠오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강을 파악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일단 제일 중요한 여주랑 남주, 서브남주는 알았으니까.’
애석하게도 아이네는 조각난 채 떠오른 ‘기억’ 속에서 아이네 공녀라는 자신의 역할만큼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거의 엑스트라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아이네의 상념은 끝없이 이어졌다. 취향에서 시작된 의식의 흐름은 이젠 원작 소설에 대한 불만으로 향했다.
그래! 아파서 그런 거겠지. 자신이 빙의하기 전만 해도 오늘내일 하고 있었다고 하니까.
이제와서 세부 내용까지 기억하기에 8년의 세월은 너무 길었다.
‘왜 하필이면 성별이 제일 중요한 비밀인 소설이람.’
테고에게 ‘사실 제가 책에 빙의한 사람이어서요. 안심하세요’하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애초에 믿어주기나 할까. 심지어 지금은 원작이 시작되기도 전인 거 같은데.
폭, 하고 한숨을 내쉰 아이네가 테고를 향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일단은 저 불신의 눈초리부터 어떻게든 누그러뜨려야 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저어기 보이죠? 저기 온실이 있으니 다음에 구경해보시고. 오늘은 이만 나가요.”
“그러지.”
아이네에 대한 경계를 미처 지우지 못한 테고는 갑작스럽게 반말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여태 걸어왔던 길의 반대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나가자는 아이네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듯한 태도였다.
거참, 성질도 급하다. 누가 뭐 어쩌기라도 할까 봐? 그나저나 테고답지 않네. 반말을 다 하고.
‘지금 이 세계에서 당신한테 가장 안전한 여자는 바로 나거든요?’
괜히 영애들과 가까워졌다가 남장 중인 걸 들키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란 걸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오해받는 건 사절이야.
“흥!”
테고의 보폭을 따라잡으려면 아이네는 거의 뛰다시피 종종거려야 했다. 약한 체력 탓에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어느새 그걸 눈치챈 테고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테고는 속도를 늦추는 저를 따라붙는 아이네의 연둣빛 정수리를 이끌리듯 응시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정원 입구였다.
문득 그는 이렇게 도망치듯 빠져나올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둘이 있다고 해서 이 조그마한 공녀가 제게 위해를 가할 수 있을 리도 없는데.
겨우 이만큼 걸었다고 숨을 몰아쉴 정도로 연약한데.
‘도대체 내가 왜 도망쳤지?’
걸음을 서서히 늦춰 아이네와 보폭을 맞추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아이네!”
어디선가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한참 찾았잖아!”
마침 정원 입구를 초조하게 빙빙 돌고 있던 나딘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가쁜 호흡을 고르던 아이네가 인상을 썼다.
“뭐야, 괜히 놀라게.”
그리고 테고는 나딘 공자의 등장으로 비로소 침착함을 되찾았다. 참으로 이상하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테고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까 그 느낌이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기억을 더듬어보아야 했다.
“설마, 설마 했더니 너어!”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나딘의 우렁찬 목소리에 바로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어깨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려던 아이네는 귀를 틀어막았다.
“오빠는 툭하면 소리부터 지르더라? 좀 고쳐. 그런 거 영애들한테 인기 없어.”
핀잔을 주며 시선을 돌린 그녀의 눈에 테고와 나딘이 나란히 들어왔다. 덕분에 아이네는 자연스럽게 둘을 비교했다.
어떤 사람은 여자인데도 영애들의 눈길을 저절로 사로잡는데, 어떤 사람은…… 쯧쯧.
‘그래도 혈육의 정이 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이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딘의 잔소리를 흘려들었다. 아무리 호위 중이라 해도 테고는 손님인데 무슨 추태람.
어? 그런데 둘이 키 차이가……. 테고 경이 조금 더 큰 것 같은데?
“공녀에게는 순수하게 정원 안내를 받던 중이었습니다.”
그래, 우리는 순수하게 정원을, 응? 뭐지, 이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은.
그리고 왜 굳이 ‘순수하게’라는 말을 덧붙이시는 거죠? 그거 하나도 안 순수했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잖아요.
그렇다고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나딘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아이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만 재빨리 흔들었다.
“뭐가 됐든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뭘 어떻게 생각하는데?”
“…….”
아무래도 나딘은 중대한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다.
황도에서 기사랍시고 온 공작은 공작성을 뒤집어 놓을 만한 미남이지, 친구도 안 만들던 여동생인 자신은 그를 보고 갑자기 태도를 싹 바꿨으니까.
그래, 그럴 수 있다.
누가 봐도 집순이, 아니, 성순이던 제가 황도에서 온 공작에게 홀딱 반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
‘어휴, 빙의한 원작을 알게 돼 흥분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아이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엄한 척하려는 나딘의 얼굴을 살폈다.
8년이나 남매로 살아왔다고 해도, 비록 이 몸이 빙의 전에는 침대에 누워 골골거리기만 했었다고 해도.
‘생판 남인 내가 이 공녀 몸을 차지한 건 사실인데…….’
이제 와서 전부 밝히기엔 모두에게 정이 많이 들어버렸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티격태격하기 일쑤인 나딘까지 가족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되었으니까.
이미 가족이 되어버린 나딘이 아이네를 걱정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나딘이 테고가 여자라는 걸 모르는 채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지만.
착각계가 독자로 볼 땐 재밌었는데 실제로 겪으니 속이 터져나가는구나.
‘그러게 왜 쓸데없이 오해받을 만한 말을 해선.’
아이네는 어느덧 무심하고 태연한 얼굴로 돌아온 테고를 흘겨보았다. 그 와중에도 단정하고 곧은 자세가 고고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은 여자란 걸 들키면 안 되니까 내가 그냥 넘어간다, 정말.’
원작이 진행되기도 전에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테고의 작위는 공작가 방계에게로 넘어가고 말 테다.
이곳 에스피오 제국은 작위나 공직이 여성에게까지 개방된 곳이 아니었다. 다행히 그 두 가지만 제외하면 여성 인권이 그렇게 바닥은 아니었다.
조금 기묘한 설정이라 전에는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남장여주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여주가 남장을 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저 설정을 고수해야 했던 거다.
‘뭐, 그래도 결말에선 테고가 여자 몸으로도 공작이 되니까.’
그러고 보니 중간에 반란군이 어쩌고, 전쟁이 어쩌고 하는 장면도 있었던 것 같은데.
테고를 보고서 떠올랐던 ‘기억’들이 너무 흐릿해 자세한 내용은 생각나질 않았다.
그때, 한참 아이네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던 나딘이 이번엔 테고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그렇지, 잘한다!
“그리고 리테, 아니, 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순수한 정원 안내겠지요! 우리 아이네는 남자에 별로 관심이 없는 애예요.”
이젠 얼굴까지 붉으락푸르락해진 채로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오빠처럼 감싸고도는 모양새에 아이네가 입을 삐죽였다.
‘얼씨구, 누가 보면 평소에 날 끔찍하게 아끼는 줄 알겠네.’
아무리 앙숙 같은 오빠라지만 엄연한 윗사람인 리테루온 공작에게 더 이상 무례를 저지르게 둘 순 없었다. 거기다가 정정해줄 말도 있고.
그래서 아이네는 두 사람 사이에 쏘옥 끼어들었다.
“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왜 남자에 관심이 없어.”
“너 전에는 약혼이고, 결혼이고 다 안 하고 그냥 여기서 오래오래 산다고 했잖아!”
아이네의 눈이 단박에 샐쭉해졌다.
그거야 그땐 무슨 책에 빙의했는지 모르니까 괜히 이상한 플래그 꽂기 싫어서 그런 거고. 이제는 다 알았으니 상황이 변했는걸.
“그건 그때지! 지금은…… 기회가 되면 할 수도 있고.”
예를 들어 원작이 전개대로 잘 마무리된다든가 하면 말이다. 어쨌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소설이니까.
그리고 그 해피엔딩은 여기 목석처럼 서 있는 테고에게 달려있단다, 이 바보 나딘아.
아이네는 말꼬리까지 늘어뜨리며 테고를 힐끔거렸다. 그런 동생의 태도에 나딘은 더더욱 열이 올랐다.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물론, 지금 이 경우엔 공작이라는 지위도 가진 잘생긴 남자라는 함정이 있었다. 하지만 나딘은 애써 외면했다.
나이가 찬 여동생을 둔 오빠라는 건 이리도 모순된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자리인 것이다.
머리로는 아이네의 짝으로 테고만 한 남자가 없다 싶었다. 그러다가도 제 동생이 그의 옆얼굴을 훔쳐보며 실실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심사가 뒤틀렸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 아이를 첫 만남에 기절까지 하게 만든 테고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역시 리테루온 공작의 저 무심한 태도였다.
아이네가 좀 얄미운 구석은 있어도 입만 다물면 그럭저럭 미인 축에는 드는데 말이다.
‘설마 아이네 이 녀석, 한눈에 반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비록 부족한 점 많은 아이지만 제 동생이 짝사랑하는 꼴은 못 본다.
나딘은 자신 역시 황도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과연 이번에도 아버지의 판단이 옳았던 셈이다.
“춤 선생이 곧 올 테니 넌 이만 들어가 봐. 성 안내는 내가 마저 할게.”
“설마 돌리에 부인은 아니지? 윽, 싫어. 내일 몸살이라도 나면 어떡해.”
쓰러져서 일어난 게 바로 어제인데. 스파르타식 수업으로 유명한 돌리에 부인이라니.
데뷔탕트를 위해 단기간 복습을 하려면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건 잘 안다.
그래도 자신이 돌리에 부인의 수업을 얼마나 버거워했는지 잘 알면서. 이 오빠 놈이 또!
“하여간 내가 편한 꼴을 못 보지? 이걸 오빠라고, 정말.”
“뭐? ‘이걸’? 너 지금 오빠한테 ‘이거’라고 했어?”
이쪽 세상으로 오기 전만 해도 아이네는 외동이었다.
하지만 아이네이스 공녀로 살아온 지 어느덧 8년 차.
생전 겪어본 적 없던 오빠라는 존재에도 익숙해지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늘 그렇듯 나딘과 익숙하게 투닥거리다 아이네는 퍼뜩 삿대질을 멈췄다. 그리고 뒤를 돌아 이번에도 그들 남매를 구경하는 테고와 눈이 마주쳤다.
새파란 바다빛 눈동자가 더 짙어져 있었다.
“아……. 그러니까, 이건. 음.”
돌리에 부인이 온다는 소리에 너무 흥분했나 보다. 평소처럼 나딘과 아웅다웅하느라 테고가 있다는 사실을 깜박하고 말았다.
불의의 사고로 죽은 쌍둥이 오빠 대신 여장까지 하고 있는 그녀인데, 제가 너무 무심했다.
이런 다툼까지 테고에겐 그리운 일일 수도 있다. 지금도 이렇게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걸 보면 거의 확실했다.
“마, 맞아. 우리는 쇼윈도 남매예요.”
결국, 어쭙잖게 테고를 위로한답시고 아이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고작 이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변명처럼 뱉어낸 후에야 제 말이 얼마나 이상하게 들릴지 깨달았기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단어에 나딘과 테고의 눈썹이 동시에 꿈틀거렸다.
“쇼윈도? 누가 우릴 전시라도 한다는 거야?”
“모르면 좀 가만히 있어!”
아이네가 가만히 있어도 커다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짐짓 꾸짖기라도 하는 듯 허리에 손을 얹었다.
겨우 이 세계의 여자 주인공을 알아냈는데 친구는 못 되어도 호감은 얻어야 할 것 아닌가.
‘안 그래도 우리는 이 소설에서 존재감이 공기인 거 같단 말이야!’
제 역할은커녕 베룸 공작가도 딱히 생각이 안 나는 걸 보면 말이지.
게다가 테고가 남장했다는 사실까지는 모른다 해도 그가 부모와 쌍둥이 동생을 한꺼번에 잃은 건 다들 아는 일인데.
하여간 오빠 놈은 눈치가 너무 없어.
아이네는 필사적으로 분위기를 환기하려 애를 썼다.
좋아, 작전 A. 없느니만 못한 남매 사이 어필하기!
“둘만 있을 땐 사실 별로 말을 섞지도 않아요, 하하.”
“뭐? 오늘 아침만 해도 같이…….”
……실패했다.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아이네는 도망이라는 다음 계책을 택했다.
“앗! 저기 돌리에 부인의 마차인 거 같은데? 그럼, 저는 이만.”
“…….”
돌리에 부인의 마차는 무슨.
여기서 손님의 마차가 보일 리 만무했다. 하지만 어딘가 촉촉하게 젖은 것 같은 테고의 눈가를 목격한 아이네는 빠르게 도망쳤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작전상 후퇴인 거야.’
원작의 설정부터가 일반적이지 않다 보니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여주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방향은 피해야 한다.
작가님, 듣고 계세요? 왜 이제야 원작을 알려주신 건가요. 미리 알고 있어야 제가 대비를 하든가 할 것 아녜요.
어쩐지 이미 첫 단추를 애매하게 끼운 것 같지만, 소설 주인공, 특히 여주와는 무조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괜히 잘해줬다가 집착 당하기 쉬운 남주나 서브남주와 친하게 지내는 것과는 다르다!
여태 자신이 읽어왔던 모든 책빙의 소설을 걸고서 아이네는 장담할 수 있었다.
* * *
“…….”
그다지 빠르지 않은 걸음걸이로 부리나케 도망치는 아이네의 뒷모습을 따라 테고의 시선이 움직였다.
만난 지 며칠 안 된 사이지만 나딘은 그 시선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마치 산책하다가 난생 처음보는 미지의 생물이라도 만난 듯한 그런 눈빛.
자신이 염려했던 이성에 대한 호감이 아닌 것에 안도하며 나딘은 저도 모르게 동생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네가 모자란 애는 아닌데. 그, 아시다시피 어릴 때부터 좀 아팠거든요.”
서로 얼굴만 봤다 하면 으르렁대기 바쁜 남매였지만 나딘은 꽤 필사적으로 변명해주었다.
여러 번 강조한다. 자고로 현실 남매란 이토록 모순된 관계이니.
‘아니, 다른 영식들한테도 이런 식이면 굳이 황도까지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거 아냐?’
얼굴이 귀여우면 뭘 해. 꽁무니를 발에 채인 망아지마냥 도망가는 꼴이 귀족 영애와는 거리가 멀어졌는데.
아버지, 아이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인기가 없을 수도 있겠어요.
불과 몇 분 만에 나딘은 조금 전의 결심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렇, 군요.”
반면 간신히 웃음을 참아낸 테고는 눈을 꾹 감았다.
참으로 이상한 공녀가 아닌가.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리 바쁘게 하는지 표정이 이리저리 바뀌었다.
귀족 자제가 얼굴에 생각하는 바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모습은 자못 신기했다.
베룸 영지가 특별한 걸까, 아니면 공녀가 특별한 사람인 걸까.
자신은 그런 순수함 따위 이미 한참 전에 잊어버렸는데.
씁쓸한 기분과 더불어 이곳으로 오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황태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잘 만들어진 인형처럼 늘 똑같은 미소를 짓는 그와 공녀의 조합이라…….
공녀 역시 오밀조밀하게 빚은 요정 같은 외모이니 어찌 보면 황태자와 잘 어울리긴 할 터였다.
그래, 요정.
머리 색이며 저절로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감까지. 그녀의 모습은 이제 동화와 전설로나 들을 수 있는 요정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고서에 묘사된 요정과는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
가령, 좀 전의 그 요상한 표정이라든가.
“흣, 크흠!”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모르던 아이네의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결국, 삐져나온 웃음에 테고는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나딘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저건…… 비웃는 건가, 아니면 특이 취향인 건가?’
뭐가 됐든, 둘 다 나딘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 * *
“자아, 박자에 따라 하나, 둘, 셋, 넷. 좋아요, 턴! 어깨에 힘을 더 빼세요.”
“…….”
오랜만에 듣는 돌리에 부인의 하이톤에 맞추어 아이네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몸을 움직였다. 몸에 각인된 움직임이란 정말이지 놀라웠다.
익숙한 음악과 부인의 목소리만으로도 아이네는 바로 어제 배우기라도 한 듯 금방 감을 되찾았다.
이게 다 어린 시절 혹독하게 배워둔 덕분이다.
춤만 그랬을까. 아이네는 책도 열심히 읽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어느 책의, 어느 상황에 빙의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놔야 했다.
‘혹시 하루아침에 공작가가 망하면 배운 거로 입에 풀칠은 해야 하잖아.’
그래서 아이네는 어떤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으면서 예법이나 춤은 열심히 배웠더랬다. 아, 물론 초대받지 못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괜히 연회에 참석했다가 원작에 휘말려드는 걸 방지하기 위한 현명한 조치였다.
보통은 공녀 신분으로 연회마다 불참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편리하게 써먹을 수 있는 만능 핑계가 있었으니까.
‘본디 몸이 약하여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점 이해 바랍니다. 좋아, 이렇게 서신을 보내면 되겠지? 완벽해!’
덕분에 몸이 약한 척 구는 건 만렙이 되었다. 대신,
‘친구 하나 없는 자발적 왕따 공녀가 되었지.’
괜히 연회에 참석했다가 남자 주인공을 만나서 첫눈에 반하면 어떡해. 이건 악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그게 아니면 의도치 않게 여자 주인공과 최악의 만남이라도 갖는다면?
조연인 악녀 무리와 친해진다거나 있을지 없을지 모를 흑막과 얽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사교계에 나가는 순간, 언제 어디서 플래그가 꽂힐지 모른다 싶었으니까.
‘그래, 처음에는 내가 여자 주인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지.’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아이네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그도 그럴 게 그녀가 빙의한 몸은 굉장한 미인이었다. 제 입으로 말하는 게 전혀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
처음 거울을 봤을 때의 충격과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고작 열한 살짜리 꼬마의 몸으로 병석에서 겨우 일어난 그녀가 본 건 이미 완성된 미모였다.
그러나…….
‘머리 색이 에러였어.’
장담하건대 아이네는 이런 머리 색을 가진 여주가 나오는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역시 메이저라면 금발, 흑발, 은발! 조금 특수한 경우라고 해도 적발이나 갈색 머리는 되던데.
안타깝게도 제 머리색은 풀떼기 같은 색이었다.
주위에선 오묘한 올리브색 머리칼이 탐스럽다며 감탄하곤 했지만.
‘주인공의 색은 절대 아니야.’
그래도 눈동자는 터키석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의 가장 맑은 부분을 떼어놓은 듯한 예쁜 눈.
‘그런데 그러면 뭐 해.’
아련했던 표정이 금세 울적해졌다.
“좋아요! 왼발은 그대로 두고, 오른발은 크게 반원을 그리면서!”
돌리네 부인의 박수 소리에 맞추어 그녀의 몸이 빙그르르 우아하게 돌았다.
감성이 듬뿍 들어간 아이네의 얼굴과 유려한 몸 선에 돌리네 부인은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다른 생각에 빠져 기다란 속눈썹을 팔랑거렸다.
‘내가 또 무슨 설정까지 떠올려봤더라.’
아이네는 포기하지 않고 특이한 설정들도 떠올려봤더랬다.
왜, 그런 것도 있지 않나. 등장인물의 입양된 동생이라거나 집안이 흑막이라거나.
등장인물의 입양된 동생이라는 가정은 부모님과 나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즉시 폐기했다.
도저히 핏줄이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닮은 외모였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특히 나딘과 그녀는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굳이 차이를 따지자면 머리와 눈동자 색의 옅고 짙음만 좀 다를 뿐이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얼굴만은 반반한 나딘 역시 주요인물에서 탈락이었다.
‘세상에, 남자 주요인물 중에 머리가 풀떼기 색인 소설이 어딨어.’
있으면 누가 좀 가져와 봐.
게다가 흑막이라기엔 베룸 영지는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신분제는 어쩔 수 없더라도 세금이며, 영지민들에 대한 처우는 아이네가 알던 보통 영지들과 달랐다.
변방 국경 지역이긴 해도 산맥에 둘러싸여 있으니 전쟁이 벌어질 위험도 적고.
그러고 보니 이 소설……. 후반부에 전쟁 장면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나중에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전쟁이 설마 우리 영지까지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 하긴 그랬으면 아이네 공녀가 이런 존재감일 리가.’
으응, 존재감이 이런 쪽으로도 없는 걸 기뻐해야 하는 걸까.
다른 생각을 하며 춤을 마친 아이네를 향해 돌리에 부인이 박수를 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머나, 3년 만인데도 몸이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으셔요. 저는 공녀님의 춤 선생으로서 데뷔탕트가 늦어지는 게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몰라요. 다들 이 고상한 백조 같은 모습을 봐야 하는데…….”
백조라니요. 백조가 물밑에선 얼마나 필사적으로 헤엄치고 있는지 알고 하는 말인가요, 부인?
“이제 몸도 꽤 건강해진 데다 데뷔탕트를 더 미룰 수는 없다고 하시니.”
외부인들에겐 철저하게 고수하고 있던 가녀리고 병약한 컨셉대로 아이네는 힘없이 웃었다.
물론 속으로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진작 원작을 알아냈으면 나도 이렇게 안 살았어!’
지난 8년간의 잠 못 들던 밤이 떠올랐다. 그러자 아이네의 얼굴이 조금 험악해졌다.
그녀의 표정에 깐깐하기로 유명한 돌리에 부인까지 흠칫 놀라 목을 가다듬었다.
오랜만의 첫 수업인데 너무 빡빡하게 진행했나?
“호, 호호호. 공녀님께선 운동신경이 좋기는 하지만 체력은 약하시니까요. 잠시…… 쉴까요?”
“그러죠.”
아이네가 냉큼 대답했다. 사실 그 정도로 지치진 않지만, 체력이 약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이 몸으로 깨어난 뒤, 꼬박 반년은 밥보다 약을 더 많이 먹어야 했을 정도로 병약했던 몸이었다.
한창 자라야 할 시기에 골골대느라 성장하지 못한 탓에, 지금도 아이네는 또래보다 훨씬 자그마한 키와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후우.”
그녀는 잠시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다. 마침 그런 아이네의 눈에 창밖을 함께 지나가는 나딘과 테고가 들어왔다.
‘뭐야, 갑자기 친해졌어?’
비록 나딘이 주로 이야기하고 테고는 간혹 고개만 끄덕이지만 말이다.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지 둘 사이가 사뭇 진지해 보였다. 그들의 모습에 시선을 집중하려는 찰나, 돌리에 부인의 하이톤 목소리가 아이네의 집중을 깨웠다.
“3년 사이 어엿한 숙녀가 다 되셨네요. 공녀님. 황도에서 있을 데뷔탕트에서 황태자 저하께서 공녀님께 반하면 어떡하죠? 꺄, 그럼 공녀님은 황태자비 마마가 되시는 걸까요.”
“돌리에 부인…….”
셋뿐인 공작 가문에서 황태자 또래의 미혼 영애는 아이네 혼자이긴 했다. 그러니 전혀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아니지만.
‘응, 불가능해요. 그 황태자가 이 소설의 서브남주랍니다.’
원작 남주는 대공. 서브남주는 황태자.
두 사람은 여주 테고를 두고 삼각 관계가 될 예정이니까.
아이네는 테고의 초콜릿색 머리카락이 목 뒤에서 흔들리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설 주인공이라서 그럴까. 멀리서 봐도 온몸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앞구르기하고 윈드밀 추면서 봐도 주인공이네.’
그때, 불어온 바람이 테고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놓았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뒤를 슬쩍 돌아보던 테고가 아이네와 눈이 마주쳤다.
“앗!”
“공녀님?”
아이네가 재빨리 창틀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자신을 부르는 돌리에 부인을 향해 검지를 입술 위로 세워 보였다.
못 볼 것이라도 봤는지 아이네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봐, 봤나? 아니, 근데 나는 왜 숨은 거야.’
아이네가 급히 숨었음에도 테고는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공녀?’
어쩐지 뒤통수가 조금 따갑더라니, 테고는 창틀 아래 아이네가 숨어 있는 모습을 마치 들여다보는 것처럼 지그시 응시했다.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호기심이 일었지만 테고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나딘의 목소리에 다시금 귀를 기울였다.
영지와 황도 이야기로 시작했던 나딘과의 대화는 아이네에 관한 화제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아까의 모습 때문에 자신이 공녀가 모자라다고 오해할까봐 마음에 두고 있었나보다. 솔직히 말해서 테고에게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랴.
아이네 본인은 기억조차 하고 있을지 의심스러운 갓난아기적 모습부터 제 동생이 얼마나 영특했는지 필사적으로 설명하는 나딘의 얼굴은 유난히 밝았다.
“그리고 저렇게 뛴다는 건 교양과 예법을 떠나 건강하다는 뜻이니까요. 저래 봬도 성격은 정말 밝아요.”
종종 이렇게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이 섞여 있긴 했지만.
‘도대체 이 남매는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여전히 숨죽인 채 창틀 아래 숨어있던 아이네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뭐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방금 테고와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 이상한 기시감 같은 게 들었다. 지금은 분명히 원작이 시작하기 전인데…….
게다가 아주 잠깐이지만 폭우가 내리치는 깜깜한 숲을 지나가는 마차가 보였던 듯도 했다.
아이네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혹시, 혹시 주요 등장인물들 근처에 있으면 계속 ‘기억’이 떠오르게 되는 걸까?
‘그래, 테고를 처음 마주쳤을 때도 막 영상 같은 게 보였잖아.’
그런데, 이거 왜 자꾸 떠오르는 거지? 보통은 원작을 한 번에 기억해내고 나면 끝인데.
꼭 단서를 던져주듯이 조금씩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라니…….
만약 자신을 이곳으로 빙의하게 만든 존재가 있다면, 무언가 목적이 있을지 모른다.
제일 흔한 건 역시, 악녀나 악당이 자신의 운명을 비틀기 위해서일 테다.
‘그렇다면 나는 그 틈을 만들기 위한 변수로 끌려왔을 가능성이 높아.’
벽에 등을 대고 쪼그려 앉은 아이네의 얼굴이 삽시간에 진지해졌다. 이제부터는 여태 읽어둔 모든 로판 지식을 총동원해야 할 때다. 아이네는 창틀 아래에서 다짐했다.
어떤 경우에도 여자 주인공 테고와는 척을 지지 말 것!
특히 여주의 처지가 곤란한 걸 이용해서 깎아내리거나 하는 실수는 절대, 절대 금지다. 심지어 여기 여주는 검술 천재거든. 여차하는 순간에는 목이 댕겅, 썰려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 시점에서 여주의 약점이라곤 남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이것만 안 건드리면 돼.
하지만 약점이라기엔 너무 압도적인 미모가 아닌가요.
그도 그럴 게 조금 전만 해도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리는 옆모습이…….
조금 전 마주쳤던 테고의 얼굴이 떠오르자, 이상하게 가슴이 조금 부푸는 기분이 들었다.
“흐, 흥!”
하여간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 봐. 정말 얼굴 하나는 잘났다. 여자인 게 안타까울 정도로 제 취향…….
쿠당탕 소리를 내며 아이네가 엉덩방아를 찧듯 미끄러졌다. 이에 돌리에 부인이 놀라 그녀에게로 급히 달려왔다.
“공녀님! 괜찮으신가요?”
다치지 않았냐며 호들갑을 떠는 부인의 목소리는 돌고래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아이네는 갑작스러운 깨달음 덕분에 얼얼한 엉덩이도, 초음파처럼 고막을 괴롭히는 하이톤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설마 나 방금 여자한테 설렌 거야?’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내내 아팠던 바람에 인간관계가 좁디 좁은 공녀. 그리고 그런 공녀의 일상에 갑작스레 스며든 겉모습만큼은 완벽한 남자!
아니, 남자로 보이는 여주!
같은 여자인데다 안쓰러운 마음에 공녀를 챙겨주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짝사랑 상대가 되고.
그렇게 깊어진 흠모의 감정은 여주가 남자라는 걸 안 순간 분노와 증오로 바뀌게 되는데……!
아이네는 어쩐지 모골이 송연해졌다.
‘와, 방금 악녀물 한 편 뚝딱 읽은 기분인데.’
원작 시작 전에 정말로 이렇게 일이 진행되었다고 해도 아이네는 악녀를 할 수 없는 몸이었다.
듣자하니 빙의 전 원래 아이네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고 했다. 제 아무리 황명이래도 어쩔 수 없으니 테고는 금방 영지를 떠났겠지.
게다가 이상하게 베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좀처럼 영지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질 않았으니까.
‘악녀도 체력이랑 건강이 있어야 하는 거야.’
어쩐지 생각하면 할수록 아이네는 원작 소설의 공기같은 존재감이 이해가 되었다. 심지어 테고한테 반하는 악역 영애는 따로 있다.
그것도 이미 황도의 사교계를 점령한 멋지고 건강한 모습으로!
그래, 그래. 악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공감이 되어서 더 안타까웠지.
“어?”
잠깐만…….
아이네는 책빙의 소설의 전개를 꽤 잘 알았다. 모름지기 이유 없는 빙의는 드문 법이다.
그리고 그녀의 빅데이터 분석상 빙의 시기는 그 목적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테고가 여자인 줄 모른 채 그에게 빠져버린 악역 영애가, 자신의 운명을 비틀기 위해 나를 여기로 불러온 거라면!
굳이 원작 전에 빙의된 것도 설명이 되었다.
‘와, 이거 맞는 거 같아.’
그렇게 아이네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굳은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황도에 꼭 가야겠어.’
황도로 가서 반드시 그 악역 영애를 확인해봐야 했다.
악역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내용의 소설도 한둘이 아니었거든.
그러니 그때까지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할 사항은 단 하나다,
절대, 절대 테고에게 반하지 말 것!
‘잊지 말자, 아이네! 테고는 여자야. 남장여주라고!’
휴, 방금 하마터면 팔자에도 없는 악역 영애가 될 뻔했지 뭐야.
* * *
거울 앞의 아이네는 몇 시간 전과는 달리 어딘가 초조한 표정이었다. 얼마나 잘근잘근 짓씹었는지 평소의 연분홍색 입술이 새빨개져 있었다.
아이네의 얼굴은 울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책빙의의 메리트는 미래를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첫째도, 둘째도 조심해야 할 것은 주요 전개를 비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제가 황도에 감으로써 원작의 주요 전개가 비틀려버린다면?
방금 한 추측은 상당히 설득력 있었다.
남작 영애나 자작 영애로 빙의했다면 모를까. 잠시 잊고 살았지만 아이네는 무려 공녀였다. 너무 많이 아파서 존재를 드러낼 여력이 없었을 뿐.
빙의했을 당시, 그녀는 병상에 누운 채 일어날 가망이 없었다고들 했다.
혼미한 의식 너머로 기적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다행히 어딘가의 왕국에서 입수해 온 약이 효과가 있어 반년 뒤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건강을 회복한 아이네에게 다들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처럼 성격이 변했다고.
당연하지. 다른 사람인데.
‘애초에 내가 빙의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네 공녀는 침대에서 영영 일어나지 못할 운명이었을지도…….’
그랬다면 원작에서 아이네 공녀의 존재감이 제로에 가까웠던 것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황도에 가도 되는 걸까.’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애꿎은 입술만 짓씹던 아이네는 마침내 결심했다.
‘악역 영애를 만나고, 데뷔탕트만 끝내고 곧장 돌아오자. 아직 원작 전이거나 초반이니까 큰 사건은 없……겠지?’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이쯤 되면 책빙의자를 위한 가이드북 같은 거 나올 때 안 됐어요?
“진정해 아이네, 내가 악역 영애 역할만 안 맡으면 돼.”
그렇게 아이네는 거울 앞에 서서 제 눈가에 손을 대었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눈꼬리가 삐죽 끌려 올라갔다.
흔한 클리셰의 소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남장여주물에서의 악녀가 남장한 여자주인공에게 반하게 되는 것까지는.
다만, 이 소설의 악역 영애는 잘못된 선택의 스케일이 좀 컸다.
그저 사교계에서 뒷공작을 하는 따위의 악행이 아니었다. 그녀는 중후반부에 나오는 반란에도 깊게 연관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원작에선 붉은 머리라고 했다.
거기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화려하고 새침한 미녀로 묘사되었으니, 아마 황도에 가면 금방 알아볼 수 있겠지.
‘역시 난 악녀 역할을 하기에 너무 맹하게 생겼는데.’
보고 계세요, 저를 불렀을 지도 모를 악녀님? 사람 잘 못 고르셨어요.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아이네 공녀는 악역을 맡기 어려운 외모였다.
워낙 크고 동그란 눈이라 짐짓 화난 척을 해보아도 하찮아 보이기만 했다.
“아가씨, 이제 저녁 드실……. 뭐 하시는 거예요!”
눈꼬리를 잡아 올린 채 거울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사라에게 들켰다. 아이네는 슬그머니 손을 내리려다 사라에게 물었다.
“사라, 나 이러면 좀 악녀처럼 보여?”
외모나 인상은 주관적인 거니까. 사라가 보기엔 좀 다를 수도 있…….
“네에?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또 이상한 책 보셨어요?”
……지 않구나.
8년간 아이네가 얼마나 다양한 루트를 상상하고 실험해보았겠는가. 그녀의 시중을 들어왔던 사라는 이제 그녀의 어떤 괴상한 행동에도 익숙해져 맞장구까지 쳐줄 정도였다.
“에이, 역시 아닌 것 같지?”
그런 사라가 장단 맞추기 식으로라도 거들어주지 않는 걸 보면 영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아이네는 최종 결론을 정리했다
하나, 일단 황도로 가서 악역 영애를 만나 본다.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게 그녀일 수도 있으니까.
둘, 상황을 잘 살펴보다가 이도저도 아니다 싶으면 최대한 빠르게 영지로 돌아온다. 그리고 원작이 끝나길 기다린다.
‘비겁하지만 반란이나 전쟁에 휘말리는 것보단 낫지.’
원작을 비틀려고 하면 꼭 사달이 나는 법이다. 모름지기 안전제일!
결론을 내리고 나자 조금 맥이 풀릴 만큼 허무해졌다. 혹시라도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역할일까 봐 지난 세월 마음 졸인 게 무색해서.
하지만 아이네는 자신의 원작 속 무존재감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 피곤하다. 사라, 나 오늘 저녁은 방에서 먹어도 되지?”
“저녁 식사는 나딘 도련님과 새로 오신 황실 기사님이랑 다이닝룸에서 함께 하셔야 한다던 걸요.”
……하여간 나딘은 인생에 도움이 안 돼요.
사라에게 익숙해진 광경은 그녀의 괴상한 행동뿐만 아니라 혼자 중얼거리며 거울을 보고 있는 것도 포함이었다. 방긋 웃는 사라와 거울 너머로 눈을 마주치던 아이네가 일순간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물었다.
“사라, 만약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고 거기에서 내 역할이 따로 있다면 사라는 어떻게 할 거야?”
자신이야 책빙의라는 개념을 알고 있지만 그걸 모르는 인물들의 생각도 궁금했다.
“좋은 역할인가요?”
“으음, 아니. 아무 역할도 없는 역할인 거지. 그렇지만 좋은 역할인 사람이랑 나쁜 역할인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
마치 선문답 같은 물음이었으나 사라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저라면……. 음, 좋은 역할인 사람이랑 친하게 지낼 거 같아요.”
“아무 역할이 없는데도 굳이?”
사라는 약간 구겨진 아가씨의 치마 밑단을 정성스레 매만졌다. 그런 그녀의 손끝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좋은 사람이라면 친하게 지내둬서 손해 볼 건 없지 않을까요? 이제 슬슬 내려가요, 아가씨.”
그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아이네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이거야, 이거.
왜 단순히 여주와 척지지 않으려고만 생각했을까. 더 적극적으로 친구가 되는 방법도 있는데!
위험에 빠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상 못 한 위기에서 빠져나올 길도 마련해두어야 하는 법.
여주와 인연을 맺을 수만 있다면 혹시 전개가 좀 비틀어져도 선택지가 늘어날 테다. 대부분의 로판 마지막은 주인공들의 승리로 끝나니까.
아이네는 세 번째 항목으로 여주인공과 친분 쌓기를 추가했다. 그리고 뒤에 괄호로 ‘가능하다면’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고마워! 사라는 천재야.”
활짝 웃으며 사라를 꼭 껴안아 준 아이네가 씩씩하게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휴, 우리 아가씨는 정말.”
사랑스러운 외모도 그렇지만 공작성의 모두를 웃게 하는 건 그녀의 밝은 성격이었다.
8년 전, 아이네가 건강을 되찾기 전만 해도 매일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때 공작성은 마치…… 거대한 무덤 같았다.
‘만약 그때 아가씨께서 영영 일어나지 못하셨더라면.’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이었다. 목덜미에 소름이 쭈뼛 돋은 사라가 고개를 저었다.
* * *
테고는 22년이라는 삶을 살아오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단기간에 감상이 바뀌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베룸 영지에 도착해서 베룸 공작가 일원들과 처음 대면했을 때도 그랬고.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그랬다.
‘여긴 도대체 뭐 하는 곳이지?’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마치 이곳만 어딘가에서 뚝 떼어다 제국에 붙여둔 것 같은 기시감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제국 역사 시간에 배운 대로라면 베룸 영지는 분명 특이한 곳이긴 했다.
제국을 세운 네 고대 일족의 가문 중 하나이면서도 긴 시간을 독립된 왕국으로 지내온 독특한 이력.
그러다가 다시 제국 안으로 편입된 게 불과 백여 년 전.
편입된 과정의 전말이야 상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 과정에서 강제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베룸 가문은 황실에 적대적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심지어 베룸 공작은 현 황제인 라비우스 1세의 반정에 지대한 공을 세운 자였다. 그의 몇 없는 친우이기도 했고.
공국에 준하는 자치권을 가진 곳이라 베룸 공작은 중앙정치에 나서지 않았고, 황제가 그 점을 늘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귀족사회에 공공연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테고 경. 오늘 석찬은 우리 베룸 영지의 특산물인 오징어로 준비했습니다. 구운 돼지고기를 오징어에 싸서 드셔보세요.”
그가 보기에 이곳은 별세계와 같았다. 애초에 영지의 주인인 공작 가문부터 남달랐다.
“…….”
테고는 제게 음식을 권하는 나딘 공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스물하나라고 했나.
베룸 공작가의 적통은 공자와 공녀 단 둘뿐. 제국법상 공녀는 작위를 이을 수가 없으니 성년이 지난 공자는 소공작으로 불려야 마땅했다.
그런데 이곳은 능력에 따라 후계자가 결정되는 데다 계승권자가 한 명이어도 나이가 스물다섯이 되어야 한단다.
“으음, 황도 사람들의 입맛은 다를지도 모르겠네요.”
테고의 침묵에 머쓱해진 나딘이 콧잔등을 긁었다. 그의 모습을 잠시간 응시하던 테고가 말없이 식기를 들었다.
“……색다른 맛이군요.”
그리고 드물게 감탄했다. 좁히거나 찌푸리는 게 다였던 눈이 놀라움으로 조금 커졌다.
“그렇지요? 역시 산지에서 직접 먹는 오징어는 다른 법이니까요.”
나딘이 어깨를 으쓱했다. 며칠간 테고를 겪어 본 바, 이게 그로서는 얼마나 격렬한 반응인지 알았다.
베룸 영지의 특산물은 오징어다. 특산물이 아니라 사실상 독점 생산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게 전 대륙 오징어 어획량을 독차지했다.
그런 곳의 특산물로 차려진 정찬은 테고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다.
본디 그가 크게 가리는 음식이 없다는 걸 감안해도 도무지 식기를 내려놓을 수 없는 중독적인 맛이었다.
“도련님. 아이네 아가씨가 곧 내려오신다고 합니다.”
집사장의 말에 테고는 나름 바쁘게 움직이던 식기를 잠시 내려놓았다. 베룸에 와서 특이하게 여겼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상하 관계나 격식을 그다지 따지지 않았다. 신분제가 와해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미묘한 차이가 종종 눈에 띄었다.
아무리 집사장이라도 모시는 아가씨의 애칭을 함부로 부르다니…….
테고가 다시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나딘 공자도, 집사도 이런 대화가 자연스러운 걸로 보아 이상함을 느끼는 건 저뿐인 듯했다.
“아이네 수프에는 특별히 오징어를 더 많이 넣어줘.”
“예, 안 그래도 듬뿍 넣었답니다. 아가씨께서 도통 드시려 하질 않아서 걱정입니다.”
“아이네가 아직 제대로 먹을 줄 몰라서 그래.”
단순한 분위기 문제가 아니었다. 공작 남매부터 사용인들과 스스럼없이 친밀해 보였다. 마치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 제국의 어느 귀족 가문도 가족이라 해서 이렇게 화기애애하진 않을 거다.
‘그런데도 사용인들의 기강이 해이해지지 않았다니.’
거기다 이토록 이질적인 베룸 영지에서 가장 예상 밖인 건 바로 ‘아이네’라는 공녀였다.
황도에서 듣기로는 몸이 아파서 매 계절 죽을 고비를 넘긴다고 하던데. 소문과는 달리 실제로 본 공녀는 꽤 건강해 보였다.
그래도 어린 시절 크게 앓았다는 건 사실인지 좀 작고 가냘프긴 했다. 훤칠한 키에 우아한 귀부인의 전형인 공작부인과는 다르게.
매끄러운 흰 피부에 혈색 좋은 뺨.
어디로 보아도 병약하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체구만큼이나 조그마한 얼굴 안에 오목조목 자리 잡은 이목구비가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여자들의 외모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자신도 눈이 갈 정도였으니까.
공작가의 모든 이들이 왜 그렇게 감싸고도는지 단박에 이해가 갈 만큼 귀여운 외양이었다. 이는 별이라도 쏟아질 듯 크고 맑은 눈망울 덕분일 테다.
별……이라.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 눈이 별처럼 빛났던 듯도 했다. 단지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공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목도한 건 여러 색이 찬란하게 섞여 반짝이는 눈동자였다.
정말 잠시간이었지만 그런 눈동자는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저도 모르게 넋이 나가 말을 잃어버렸다.
이후 본래의 청명한 모닝 블루의 눈동자로 돌아오긴 했다. 그러나 그 놀라웠던 장면은 테고의 머릿속에서 내내 지워지질 않았다.
‘뭐, 정원에 햇빛이 꽤 강하게 내리비치고 있었으니.’
자신이 잘못 봤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가. 공녀가 발현자일 리도 없…….
“…….”
……지 않다.
왜 여태 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테고의 흰 피부가 더 새하얗게 질렸다. 식기를 들고 있던 손등 위로는 어느새 힘줄이 돋았다.
제국을 세운 고대 일족의 후예인 네 가문 중 세 가문에는 아티팩트가 전승되어 내려왔다.
가문의 직계 중에서도 발현자만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마도구였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언제부턴가 발현자의 명맥이 끊어졌다. 그 뒤로 아티팩트는 그저 직계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상징으로 전락했고.
테고는 제 왼쪽 귓불에 걸린 아티팩트의 존재를 새삼스레 상기했다.
‘그래, 다른 세 가문에는 다 아티팩트가 있었지.’
오직 베룸 가문에만 아티팩트가 남아있지 않았다.
고대 서적에 ‘진실의 눈’이라는 것이 있다고 두루뭉술하게 서술된 글귀가 유일한 증거였다.
모두들 아주 당연하게 ‘진실의 눈’ 역시 마도구 형태로 어딘가에 존재할 거라 생각했다.
주입되듯 알려진 정보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마치 단체로 세뇌라도 된 것처럼.
그건 테고도 예외가 아니었다.
‘왜, 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지?’
이상하고도 기묘한 느낌이었다.
깨달은 순간, 뇌리를 덮고 있던 아주 얇은 막이 한 겹 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문제의 공녀가 등장했다.
* * *
“늦었어, 아이네.”
“저녁 일정을 오빠 마음대로 잡으면 어떡해. 오늘은 피곤해서 그냥 방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아버지, 어머니도 안 계시니까 우리끼리라도 저녁은 같이 먹어야지. 이 오빠는 너 그렇게 안 키웠다.”
나딘이 제법 엄숙한 목소리를 냈다. 그걸 들은 아이네는 단박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오빠가 뭘 키워! 나랑 두 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윽. 저거, 저거 또 시작이네. 손님이 와있으니 오빠 흉내 내보고 싶은 건 이해하겠는데.
‘지금은 그럴 때 아니야. 눈치 챙겨, 오라버니.’
무어라 반박하려는 나딘에게서 아이네가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여전히 그들 남매를 말없이 응시하는 테고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테고 경도 계셨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녀가 약식으로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테고 역시 잠시 일어서서 짧게 고개를 숙였다.
본디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는 편이 아니라 겉으로는 멀쩡한 낯이었다.
그러나 테고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은 아직도 그를 섬찟하게 만들었다.
“…….”
공작 영애가 인사를 건넸으니 답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베룸 공작가의 느슨한 분위기가 고마웠다. 누구 하나 그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제가 리테루온 공작이라는 사실은 공작부부와 나딘, 아이네만 알고 있으니 사용인들 앞에서는 기사로서 처신해야 했다.
테고는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닙니다. 기다렸어야 했는데 부득이 먼저 식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앗, 아니에요. 그래도 손님이신데 제가 기다리게 했네요.”
아이네가 배시시 웃자 나딘이 기다렸다는 듯 타박을 했다.
“알면 일찍일찍 좀 다녀.”
“윽, 식사시간이 다 돼서 부른 게 누군데! 내가 오빠처럼 한가한 줄 알아?”
“…….”
덕분에 테고는 쉽사리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도무지 긴장감에 휩싸여 있을 틈을 주지 않는 남매다.
남매의 격의 없는 투덕거림에도 다이닝룸 안의 누구 하나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조금 전 자신의 무례를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러한 베룸 영지의 분위기는 겪어도, 겪어도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불편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명치끝이 저릿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게 어떤 감정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이네가 자리에 앉자 테고도 다시 착석했다. 그러고는 식사를 마저 이어갔다.
아니, 마저 이어가는 듯했다.
“악! 내가 내 거에는 오징어 많이 넣지 말랬잖아.”
“남들은 없어서 못 먹는 오징어를 왜 안 먹는 건데.”
또다시 베룸 공작가 남매는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다.
“자꾸 수프에 오징어를 넣으니까 그렇지!”
“이건 베룸의 전통음식이라고. 테고 경을 봐. 외지인인데도 얼마나 잘 드시는지.”
조용히 오징어 수프를 두 그릇째 비우고 있던 테고가 어깨를 움찔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터키석 같은 두 쌍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
성별은 달라도 머리며 눈동자 색까지 비슷한 남매는 눈을 부라리는 모습도 닮아 있었다.
“이게…… 맛있어요?”
“너 오기 전에 벌써 오징어 돼지 볶음 한 접시를 다 드셨어.”
“뭐?”
아이네는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듯 반문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무리 가리는 거 없이 잘 먹는 식성을 가진 설정의 여주라고 해도 이런 괴식까지 품는다고?
‘여주, 당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쩐지 아이네는 유일한 제 편에게 부정당한 기분까지 들었다.
“큼.”
그런 공녀의 표정을 보자 테고는 다시금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또 저렇게 요정 같은 얼굴로 삽시간에 심각해진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가의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그 덕에 테고는 급한 대로 냅킨을 들어 입을 닦는 척 가려야 했다.
“그럭저럭, 흠, 먹을 만했습니다.”
“거봐. 맛있다고는 안 하시잖아.”
“맛없으면 저렇게 많이 드셨겠어? 네가 이상한 거라니까.”
옥신각신하는 남매를 보며 테고는 잠시 눈을 흐릿하게 떴다.
이젠 일반적인 귀족 가문 형제자매들이 어떤 모습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보통 남매들은 다 이런 건가.’
라니엘이 살아있었다면 자신과 그 아이도 이렇듯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을까.
글쎄.
어디까지나 ‘보통’의 남매일 테니. 저와 라니엘은 달랐다. 쌍둥이라고 한들 함께 부대끼고 자라야 남매간의 정이라는 것도 싹이 틀 텐데.
‘라니엘이 일족의 땅으로 보내진 게 세 살인가, 네 살인가.’
잘 모르겠다. 하나뿐인 여동생이라고 해봤자 초상화로 몇 번 본 게 전부라.
그녀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명맥을 기적처럼 잇고 태어난 리테루온 일가의 ‘발현자’였다. 그래서 아주 어린 나이부터 마력 폭주 현상을 겪어야 했다.
부모님은 현존하는 온갖 고서를 뒤져서 겨우 그 마력 폭주 현상을 약화하는 방법을 알아내셨다고 했다.
그 방법은 태초에 가문이 세워졌던 일족의 땅으로 라니엘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후로 부모님은 종종 시찰을 이유로 일족의 땅에 있는 성소 상투아리움에 들러 라니엘을 만났다. 그러나 테고는 그때마다 늘 공작성에 홀로 남아야 했다.
‘라니엘이 발현자라는 비밀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으니까.’
작위를 잇지 못하는 여자아이가 발현자라는 건 잡음을 일으키기 쉽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늘 그 점을 안타까워하셨다.
마력 폭주로 라니엘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릴 때면 어김없이 부모님은 성을 비웠다.
국경에 위치한 탓에 군사력은 출중하지만 척박하고 가난한 땅.
부모님도, 비밀을 아는 소수의 최측근 가신들도 모두 라니엘이 희망이라고 믿었다.
그럼, 자신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름만 공자일 뿐 나는 부속물에 가까웠지.’
제게는 핏줄을 타고 종종 발현된다는 이능이 옅었다. 한날한시에 같은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인데도.
마치 누군가가 제 존재를 설계해두기라도 한 것 같았다.
라니엘이 일족의 땅에서 마력을 안정시키는 동안 세간의 이목을 받지 않도록. 그렇게 공작성을 대신 지킬 허수아비로.
그때, 그가 제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건 검이었다. 정해진 수련시간 이상으로 휘두르느라 여린 손바닥이 터져나갔다.
물집이 잡혔다가 터지기를 반복하고,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연무장의 흙바닥에 구르며 어린 테고는 그렇게 스스로의 존재감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인정받고 싶었다. 발현자로 태어나진 못했어도 그만큼 두 배, 세 배로 노력한다는 걸 누군가 알아주길 바랐다.
‘이제 와선 다 부질없는 일이 되었지만.’
테고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매달렸다.
8년 전, 열넷의 어느 비 오는 여름밤.
반란군의 잔당에게 부모님과 라니엘을 한꺼번에 잃은 뒤 테고의 시간은 거기에 멈춰있었다.
그리고 3년의 시간을 들여 그들을 모두 소탕한 스물둘의 테고도 여전히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럴 바엔, 차라리 그날 자신이 라니엘 대신 죽었다면 어땠을까.
‘이 아티팩트도 훨씬 기뻐하지 않았을까.’
테고는 제 귀에 걸린 작은 귀걸이형 아티팩트를 습관처럼 매만졌다.
하지만 역시 일족의 발현자가 아니면 발동하지 않는다. 그 탓인지 녹색 보석이 박힌 아티팩트는 그저 샹들리에의 빛만 반사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