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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베룸의 공녀, 아이네이스 (3/29)

2. 베룸의 공녀, 아이네이스

다음 날, 아이네는 어제 격렬했던 춤 수업의 여파로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났다.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며 조금은 감상적인 기분에 빠져들었다.

창문과 모슬린 커튼 사이로 은은하게 스며들어오는 아침 햇살과 새들의 지저귐.

더는 원작 알아내기를 하지 않아도 되니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는 아침이었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사라, 어떤 곳이든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인 것 같아.”

“……아가씨. 그래도 오징어는 안 빼 드려요.”

쳇, 사라는 다 좋은데 눈치가 너무 빠르다.

사라의 재촉에 아이네는 준비를 서둘렀다. 아침과 저녁만은 함께 먹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나딘 때문에.

그래봤자 자유로운 가풍 특성상 간단하게 씻고 잠옷이 아닌 평상복으로 입는 게 전부긴 했다.

그녀도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 들어왔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땐 코르셋과 불편한 드레스를 입어야 하나 겁을 먹었더랬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비교적 예법에 엄격한 편인 황도에서도 요즘은 실용적인 의상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역시 원작 여주가 남장여자라서 드레스 같은 복식 설정이 느슨했던 거였어.’

하긴 드레스 입기가 너무 복잡하면 남장에 익숙한 여주가 곤란할 일이 있을 테니까.

의외로 디테일이 살아있는 세계관이었잖아?

생각지 못한 데서 여주 덕을 톡톡히 보는구나.

집에서 간단히 입는 단출한 상아색 원피스를 입고 아이네는 사라의 손에 머리를 맡겼다.

탐스러운 올리브색 머리카락을 빗겨주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두피를 긁어내리는 간질간질한 빗질에 다시 잠이 오려는 찰나.

“아 참, 그 황실 기사님 있잖아요.”

“테고 경?”

“네! 그 잘생긴 기사님이요. 오늘부터 아가씨를 호위한다고 하시던데요.”

아이네는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아니, 난 성안에만 있는데 왜 호위를 해?”

“황도에선 다들 그렇게 하나 봐요!”

으응? 사라, 그건 아닐걸.

한숨을 내쉬며 아이네는 이마를 짚었다.

“여하튼, 오늘은 제발 오징어 좀 안 나왔으면 좋겠다.”

“어머, 아까 주방에서 들었는데 오징어 잼을 바른 크루아상이라고 하던데요?”

“뭐?”

아니, 이게 무슨 끔찍한 혼종이야. 누가 오징어로 잼을 만들 생각을 했어?

정말 이놈의 베룸 영지는 모든 음식을 오징어화하는 데에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정작 버터구이 오징어는 없으면서!

‘이럴 바엔 차라리 내가 작정하고 버터구이 오징어 붐을 일으키는 게 낫지.’

버터구이 오징어 정도로는 원작의 흐름이 바뀔 것 같지도 않은데, 한번 해볼까…….

아이네는 정말로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골똘히 생각에 잠긴 아이네가 복도로 나왔을 때였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커다란 인영이 몸을 일으켜 그녀의 눈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앗! 기사님.”

“어, 좋은 아침이에요. 테고 경?”

깜짝이야.

하지만 그런 그의 불의의 습격에도 불구하고 아이네는 먼저 친절하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이제 그녀는 확실하게 노선을 정했으니까.

“……가시죠. 오늘부터 공녀의 호위는 제가 맡습니다.”

그랬건만 테고는 잠시 머뭇거렸을 뿐 제대로 된 인사조차 돌려주지 않았다.

그래, 나는 주요인물이 아니다 이거지? 엔딩만 지나 봐. 그 뒤로는 원작이랑 상관없이 다 똑같은 사람이야.

‘내가, 어? 그때까지만 딱 참는다.’

소설 뒤에 사람 있어요!

아이네는 그의 뒤에서 티 나지 않게 입을 비죽거렸다.

“공녀.”

“가요, 간다고요.”

* * *

“어제 돌리에 부인이 춤 수업은 더 안 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그럼, 오늘 오후 일정은 비었고……. 오전에 귀족 연감 수업만 하면 되겠다.”

오늘 일정을 종알거리며 아이네가 복도를 따라 쪼르르 앞서나갔다. 그런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상아색 치마가 팔랑거렸다.

테고는 제 시야를 파고드는 치맛자락이 어쩐지 거슬린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거슬린다는 말이 맞는 건가.

종아리 중간쯤까지 오는 치맛자락엔 자잘하게 수가 놓여 있었다. 자잘한 수를 놓은 포인트의 옷은 자그마한 그녀에게는 퍽 잘 어울렸다.

테고는 아이네의 뒤를 따르는 사라보다도 한 발자국 더 떨어져 걸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가만히 턱을 쓸었다.

‘특별히 사회성이 떨어져 보이진 않는데…….’

공녀는 도무지 성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죽하면 테고가 성안에서마저 호위를 자처했겠는가.

베룸 공작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황제가 따로 맡긴 임무가 하나 더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발현자인지도 확인해 봐야 하고.’

이 영지와 공녀에게 무슨 특별한 점이 있는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생각을 마친 테고는 요 며칠간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공녀는 티타임이나 모임 약속이 없습니까?”

“어, 음…….”

순간 계단을 내려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멎었다. 그리고 아이네의 얼굴엔 곤란한 기색이 떠올랐다.

역시 은둔형 왕따 공녀인 게 티가 났나 보다.

“세, 세상에,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정작 머쓱한 얼굴의 아이네보다도 크게 충격받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사라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어떻, 어떻게 그걸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수가 있어요? 황도 사람들은 정말…….”

“아니, 사라! 나는 괜찮아. 저기, 사라?”

사라는 끝내 울먹이며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러고는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호다닥 달아나버렸다.

‘사라……. 그렇게 울면서 가버리면 내가 뭐가 되겠어.’

이거 완전히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 공녀 이미지 확정이잖아.

아이네는 테고의 질문보다 사라의 반응에 더 상처 입었다.

어디 가서 자세한 사정을 말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정말 친구를 ‘못’ 만든 게 아니라 ‘안’ 만든 건데…….

허허, 아무도 안 믿어주겠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아이네의 곁으로 그가 몇 칸쯤 걸어 내려왔다.

그녀보다 두어 칸 아래쪽 계단에 선 테고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습니까?”

그러자 아이네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랬나 보네요.”

이럴 때는 정말이지 직설적이고 할 말 다 하는 여주의 성격이 원망스러웠다.

아니, 뭐.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오빠를 잃고 남장까지 하며 살아오느라 곁을 내줄 수 없는 환경이긴 했겠지만.

이 정도로 무심한 건 타고난 게 틀림없었다.

‘이것도 설정을 아는 나니까 이해하는 거지. 보통은 다 도망간다고요.’

막 동이 텄을 무렵의 하늘같이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테고를 원망스럽게 응시했다.

“다 사정이 있는 법이에요. 일단 나는 몸도 아픈 거로 되어있고…….”

“‘일단’?”

테고가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가 아이네보다 내려가 서 있는 덕분에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여태 아이네가 한참은 목을 꺾어야 겨우 볼 수 있던 그의 잘생긴 얼굴이 지척에 있었다.

“…….”

그 바람에 잠시지만 아이네는 방금까지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사실을 전부 잊었다.

그러고는 무의식중에도 테고의 얼굴을 샅샅이 훑는 자신을 깨닫고야 말았다. 절로 한탄이 새어 나왔다.

아, 사람이란 이 얼마나 시각에 약한 짐승인가.

여자라는 점이 정말, 정말 안타까웠다.

아이네가 빤히 바라보기 시작하자 그는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그런 테고에게 가까이 붙어 그녀가 소곤거렸다.

“그런데 호위인 척만 해도 되는 거 아녜요? 진짜로 하려고요?”

“……일단은 황명입니다만.”

아이네에게서 슬쩍 몸을 물리는 테고의 목소리가 더욱 퉁명스러워졌다.

“치이.”

누가 융통성 없는 사람 아니랄까 봐 적당히 넘기면 될 일에도 열심이다. 하지만 그래서 다소 능글맞은 성격의 원작 남주인 대공과 잘 맞는 거겠지.

“저 근데 진짜로 성 밖에는 잘…….”

안 나가요, 라고 말하려던 아이네가 입을 합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친하게 지내려고 마음먹은 참이었잖아. 오히려 더 잘된 일 아냐?

‘지금 이렇게 친분을 좀 쌓아두면 황도에 가서 악역 영애를 만날 때도 도움이 될지 몰라.’

게다가 원작 소설에선 반란과 전쟁까지 나온다. 베룸 가문의 비중이 크지 않다 해도 여파가 미칠 수 있다.

책빙의란 게 말이야, 원작에선 서술되지 않은 문제가 생길 수도 있거든. 그것도 지금처럼 원작 시작 전에 빙의하는 경우엔 더더욱!

‘이건 보험이야, 보험!’

어느새 결연해진 얼굴의 아이네가 테고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렇게 아이네는 이른 아침 만개하는 꽃 같은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굳이 거울을 보고 연습하지 않아도 부탁을 할 때면 늘 써먹었던 터라 내심 자신이 있었다.

미인계를 남자한테만 쓰라는 법이 어딨어. 테고도 사람인데! 아이네는 공작가의 모두가 해주는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테고 경 말이 맞아요! 몸이 아파서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친구를 못 사귀었지 뭐예요. 그래서 티파티나 모임에도 가본 적이 없거든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심지어 나딘까지도 아이네가 이렇게 활짝 웃으면서 매달리면 한 수 접어주곤 했다.

“그러니까 테고 경이 나랑 친구 해주면 되겠다!”

“무슨……?”

급하게 손을 빼려는 그를 아이네가 단단히 옭아맸다.

좋아, 이건 하늘이 준 기회야.

왕따 이미지를 내주고, 여주 친구 자리를 취한다!

“공녀!”

손을 강하게 잡힌 테고는 당황한 듯 아이네를 불렀다.

테고가 손쉽게 넘어올 것 같지 않자 그녀는 결국, 아끼고 아껴두었던 비장의 표정을 내보였다.

아치형의 고운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커다란 눈망울을 최대한 울멍울멍하게 떴다.

그러자 그가 움찔했다. 동시에 빼내려던 손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지금이야!

“혹시, 사람인 여자 친구 있어요?”

“뭐?”

……너무 급해서 말이 헛나갔다. 이게 아니지.

“아, 아니. 여자 사람 친구 있어요?”

“……없습니다.”

거봐, 테고 당신도 친구 없지? 아이네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당신 미래를 대강 아는데 말이야.’

엔딩에 이르기까지 테고에게 여자인 친구는 없었다. 그럼 친구 없는 사람끼리 모여서 친구 하면 되는 거 아닐까.

그리고 정확하게 어디쯤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테고가 외로움을 토로하는 장면도 원작에서 있었다.

솔직히 이 세계에서 내가 아니면 누가 이걸 알아주겠어, 안 그래? 요즘 로판소설 트렌드는 안전한 동성 친구 하나쯤 가지는 거라고!

거기다 일방적으로 여주의 덕을 보겠다는 것도 아니다. 다들 잊었을지 모르겠으나 아이네는 무려 제국의 공녀였다.

그래서 그녀는 저 자신보다도 자신이 가진 지위를 믿었다. 이래 봬도 제국에 공작가는 셋뿐이다.

엔딩만 본다고 끝이 아니라고! 인생은 실전이야.

아이네는 이런 친분이 테고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중에 여자로 밝혀질 즈음엔 나딘 따위보다는 같은 여자인 자신이 더 든든한 친구가 될 테니까.

“나랑, 친구 해요. 네?”

“…….”

그러나 여전히 테고는 묵묵부답이었다. 아이네는 회심의 ‘얼굴만 믿고 조르기 작전’이 최초로 실패했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칫, 결계인가.’

아이네는 원작의 벽이 높다며 투덜댔다.

하지만 테고의 망설임은 베룸 영지에 오기 전, 황제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 * *

“굳이 황실기사로 위장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럼, 이 민감한 시기에 리테루온 공작 신분으로 베룸 영지에 방문하겠다고?”

“…….”

안 될 이유는 없지 않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테고는 현명하게도 참아냈다.

황제가 이어 말했다.

“반란군과 남부 놈들이 연관됐다는 증거만 찾았어도 싹 다 잡아넣을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너까지 베룸 영지로 보낼 이유도 없었을 거고.”

팔걸이를 톡톡 건드리는 황제의 손가락 움직임이 조금 빨라졌다.

“애초에 내 정통성을 문제 삼는 놈들이니, 역으로 정통성을 내세우면 아무 말도 못하겠지. 지금은 베룸의 지지가 필요해.”

영지에만 콕 틀어박혀 가끔 서신으로 동의를 표하는 정도로는 모자랐다.

“게다가 3년 동안 자기들 영지에서 몸 사리고 있었으니 귀족파 놈들도 곧 하나씩 기어 올라올 거야.”

황제의 얼굴에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게 네놈은 토벌 작전 전에 약혼이라도 해두라고 했건만. 말도 지독히 안 듣는구나.”

“왜 갑자기 제 이야기를…….”

방금까지만 해도 할 말이 많아 보이던 테고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너는 이제 어쩔 테냐? 3년 전에는 성년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제는 무슨 핑계를 대려고?”

“대귀족에게 혼인은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니…….”

그저 일반론에 불과한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는 테고의 말을 황제가 잘라냈다.

“네가 황도로 귀환한 걸 알면 저 치들은 제 여식부터 들이밀 거다. 하나하나 다 만나보고 거절할 셈이냐?”

“그건, 아닙니다.”

천천히 고개를 저은 테고가 눈을 들어 황제를 응시했다. 먼저 꺼내지는 않았으나 새파란 눈동자로 하고픈 말이 무엇일지 짐작이 갔다.

“이젠 막아주는 것도 한계야. 네가 내 대자라고는 해도 그건 미성년일 때까지나 유효한 것이지. 하다못해 형제라도 있으면 모를까, 혈혈단신이지 않느냐. 쯧쯧.”

반박할 수 없는 핀잔에 테고가 다시 고개를 떨궜다. 이어 황제의 시선이 다시 숙여진 동그란 정수리로 향했다.

내리 3년을 최전방에서 굴렀다. 그런데도 황도에서만 자란 귀한 영식들처럼 상한 곳 하나 없어 보이는 외양.

정말이지, 저토록 잘난 외모를 도통 써먹을 줄 모르는 모습에 황제가 가슴을 쳤다.

자신이 많은 걸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적당한 집안의 황제파 여식과 약혼이라도 해두길 바랐을 뿐인데…….

진짜 혼인을 하라는 게 아니라 귀족파들을 정리할 때까지만이라며 얼러도 보았다. 그러나 테고는 묵묵부답이었다.

안주인도, 윗사람도 없는 리테루온 가문을 탐내는 승냥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어리고 과묵한 테고를 조종하기 쉬운 먹잇감으로 본 모양이리라.

거기다 황후가 황도를 비운 지금, 테고의 약혼녀가 될 영애가 사교계의 주인으로 올라설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아르비드 녀석이고, 이 녀석이고……. 그 나이 먹도록 여자 한번 만나질 않으니.’

지금의 테고가 혼인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황성 밖까지 줄을 설 영애들이 한가득일 텐데.

“방법이 하나 있지.”

“무엇입니까?”

테고의 얼굴이 번쩍 들렸다. 맞선은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다.

“티아와 약혼이라도 해둘 테냐?”

“올해 도로테아 황녀님의 나이가…….”

황녀의 나이를 가늠해보려던 테고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출정할 때쯤 겨우 걸음마나 떼었던 것 같은데.

“올해 여덟이 되지. 11년 정도만 더 기다리면 성인이 될 거고.”

“…….”

스스로 말을 뱉어놓고도 말이 안 된다는 건 황제가 가장 잘 알았다. 결국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그는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당분간 귀족파를 견제해줄 베룸의 힘이 필요해. 나타니엘이 내게 약속했던 바도 있으니, 이번엔 거절하지 못할 거다. 네가 가서 공녀부터 데려와.”

“그뿐이라면, 굳이 제가 가지 않아도…….”

끝까지 미약한 반항을 시도하는 테고를 황제가 흘낏 노려보았다.

“네게 시간을 벌어주려는 걸 몰라 이러느냐? 그럼, 황도에 남아서 귀족파 영애들과 맞선이라도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거라. 말리지 않을 테니.”

본래도 과묵하고 고지식한 면이 있는 테고였다. 그런 그가 여자에겐 더 견고한 철벽을 친다는 걸 황제가 모를 리가.

여기서 그 공녀를 테고의 가장 이상적인 짝으로 생각한다고 하면 끝까지 안 가겠다며 버티겠지?

“……베룸을 확실히 중앙으로 끌어들일 방법은 역시 혼인일 거다. 공녀의 지위를 생각해볼 때, 황태자비는 되어야 할 게 아니겠느냐.”

“그러면 폐하의 뜻은…….”

화사한 금발의 온화하게 생긴 황태자를 떠올린 테고가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가서 네가 직접 보고 아르비드에게 어울릴 만한 아이인지 판단해 오거라. 그걸로 네가 귀환명령을 어긴 건 봐주마.”

“예.”

그럴듯한 명분 하나를 쥐여 주자 그제야 테고가 순순히 긍정의 대답을 내어놓았다.

‘저 답답하고 꽉 막힌 놈을 어찌할꼬.’

황제의 입에서 드물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역시 예비 황태자비까지만 언급하는 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공작부인의 자리에도 합당할지 생각해보라는 말은 그대로 조용히 묻혔다.

* * *

아이네가 친구 신청을 한 뒤로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아직이었다.

테고는 베룸 영지에 와서 입맛을 붙인 오징어 수프를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대신 그의 시선은 맞은편에 앉은 아이네에게 가서 닿았다.

‘영애한테 친구가 되자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군.’

제 한 손으로 둘 다 잡히고도 남을 법한 작달막한 손이었다. 그런 손으로 붙잡으니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까이서 들여다본 공녀는 마치…….

“또 요정 컨셉 같은 데에 맛 들인 건 아니지? 아침부터 무슨 꽃핀이야.”

“…….”

테고는 침묵을 지켰다.

“내가 요정처럼 보이면 요정이라고 해. 오빠는 칭찬을 할 거면 솔직하게 하든가.”

“어휴, 머리에 꽃이나 꽂고…….”

아이네에 대해서 테고와 나딘은 같은 감상인 듯했지만 두 사람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요정 컨셉이라기엔 꽤…….’

그리고 테고의 상념은 나딘이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에 그대로 묻혀버렸다.

오늘도 베룸 공작가 남매는 사소하지만 일상적인 다툼을 이어갔다.

“자꾸 이런 식이면 오빠랑 같이 안 먹을 거야!”

“아버지가 시킨 거거든?”

나딘과 티격태격하면서도 그녀는 착실하게 수프에서 오징어를 덜어냈다.

‘이놈의 오징어 수프, 하루라도 안 먹었으면 좋겠는데.’

한참을 통과의례처럼 투덕거리다 나딘이 먼저 테고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보고서 양식에 대해서 묻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게 제출할 건지에 따라 다른데……. 말씀해주시면 참고해서 추려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테고의 눈이 다시 아이네를 힐끔 훑었다. 그녀는 여전히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수프에서 오징어를 골라내고 있었다.

목적이라…….

“지극히 사적인 용무에 대한 보고입니다.”

“아하, 공문서만 아니면 그냥 깔끔한 기본 양식으로 제출해도 될 것 같은데요.”

황제 폐하에게 직접 보고하는 예비 황태자비 동향 관찰 보고서는 공문서일까, 아닐까.

테고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의문에 대한 답이 조금 궁금해졌다.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입을 꾹 다문 테고에게 나딘의 시선이 닿았다.

‘아하.’

아이네와 옥신각신할 때만 아니면 나딘은 공작가의 건실한 행정 업무 베테랑으로 변모했다. 그런 그가 씩 웃었다.

공작인 그가 보고할만한 사람이라면 역시 폐하일 거고. 그렇다면 굳이 물어보는 보고서 양식은 역시, 그거겠지?

“다행히 경위서 예제는 공작성에 넘치게 있거든요. 조찬 마치고 함께 올라가서 보시면 되겠군요.”

경위서 예제가 많다는 건 경위서를 써낸 인원이 많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어쩐지 ‘경위서’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나딘의 눈이 유난히 둥글게 휘어 보였다.

“그건, 아니…….”

“경위서가 아닌가요? 선뜻 말하기 어려워하시길래.”

“……비슷, 합니다.”

귀환명령 불응에 대한 처분으로 공녀의 호위 업무와 함께 맡은 ‘벌’이었다. 그러니 따지자면 크게 다르진 않지만.

“외부에서 일을 하다 보면 경위서를 올려야 할 일이 생길 수 있죠. 곤란해하실 것 없습니다.”

“…….”

나딘이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테고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말을 아꼈다.

테고는 3년간 국경에서 구르며 적들의 동향 보고를 받는 건 익숙했다.

하지만 황태자비 후보라는 공녀를 관찰하는 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 진짜 싫다.”

마침 아이네는 찡그린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반으로 갈라진 크루아상이 있었다. 안에 오징어잼이 듬뿍 발려있다는 게 퍽 불만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테고가 이미 부스러기만 남기고 제 손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크루아상의 맛을 떠올려보았다.

굉장히 독특하긴 해도 맛있었는데…….

특이한 식성도 보고해야 하나.

* * *

오후 수업까지 마친 아이네는 간단한 점심을 먹은 참이었다.

그러고 나서 정원을 산책하다 온실까지 들어온 건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그저 안쪽 정원 길을 걸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테고에게 미처 소개해주지 못한 온실이 눈에 띄었고.

테르미누스 산맥 아래이긴 해도 대륙 전체로 보면 베룸 영지는 북서쪽에 위치했다.

그런 까닭에 겨울도 길었다. 여러모로 다양한 식생이 자라기엔 부족한 땅이었다.

그래서 정원 깊숙한 곳에 커다란 온실을 지었다. 특히 아이네의 어머니인 공작부인이 좋아하는 공간이어서 무척 공들인 곳이었다.

참고로 아버지인 공작과 오빠인 나딘 공자는 식물이란 먹을 수 있냐, 없냐로 나누는 게 전부인 무감한 자들이었다.

‘식물이 주는 힐링을 모르는 당신들이 불쌍해!’

파릇파릇한 식물들에게 애정을 갖는 건 풀떼기 머리 색을 지닌 사람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의무 같은 게 아닐까.

비록 주인공의 머리 색은 아니라지만 스스로를 사랑할 필요가 있었다.

엑스트라도 사람이야, 사람!

아이네는 온실 안쪽의 기다란 벤치에 눕거나 흔들의자에 앉아 쉬는 걸 가장 좋아했다.

특별히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하녀나 하인들도 들어오지 않는 내밀한 공간이었기에, 방해받지 않고 쉴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아이네는 일찍 끝난 오후수업을 떠올렸다. 오늘도 그녀의 탁월한 암기력에 미멘 준남작은 기립 박수를 보냈더랬다.

귀족가의 문장과 가주들, 그 역사를 훌륭하게 복습해낸 것이다.

‘도대체 다른 귀족 자제들은 얼마나 공부를 안 하는 거람.’

대한민국에서 12년간 한국사를 공부해온 아이네에게는 특별히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 사람들도 붕당 정치의 전개 과정을 좀 달달 외워봐야 해.

어디를 가든 실속 없는 논쟁으로 싸우고 편 가르는 지배층들은 만국 공통이거든.

“아, 기분 좋아.”

대륙 중앙이나 남부로 가야 볼 수 있는 관엽식물 덕분에 온실은 청량한 공기가 맴돌았다.

북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한 색의 나뭇잎이 아니라 조금 옅은 연둣빛의 잎사귀가 싱그러웠다.

아이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값비싸게 공수해 온 통유리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벤치까지는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길이었다.

그렇게 고개를 위로 들어 식물처럼 햇볕을 받으며 걷던 아이네가 이내 멈춰 섰다.

늘 그녀의 자리이던 곳에 이미 선객이 있었던 탓이다.

“…….”

확실히 원작 여주가 맞긴 맞는가 보다. 원작에서도 생긴 것과 다르게 식물을 좋아하더니, 제대로 안내해주지도 않은 온실에 용케 잘 찾아왔네?

지금에야 생각난 건데, 원작 여주는 중증의 방향치였다. 무심하고 서늘한 성격 탓에 이런저런 클리셰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성격상 의도하지 않은 이벤트는 이런 식으로 진행된 걸로 기억한다.

비록 자신이 남주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친구 하라는 원작의 계시가 아닐까.

여긴 친한 친구가 생기면 1순위로 소개해주고 싶을 만큼 아이네가 좋아하는 장소니까!

‘그래서 아무한테도 소개해 준 적이 없지.’

갑자기 역류하려는 눈물샘을 아이네는 필사적으로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벤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머리 부근에 적당히 그늘이 져서 낮잠 자기 딱 좋은 명당인데. 어떻게 알았을까.

한쪽 팔을 베고 잠든 테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시 봐도 참 잘생겼다. 여자란 걸 알아도 자꾸 시선이 가는 걸 보면 정말 딱 제 취향이었다.

본래 모습이 여자라 그런지 아티팩트로 남장을 해도 소년처럼 여리여리한 얼굴선.

햇빛이 그대로 투과될 것만 같은 투명하고 흰 피부.

그 위로 보송보송한 솜털마저 솟아있었다.

그런 그의 이마 위로 초콜릿색 머리카락이 달콤하게 흐트러져 있기까지.

아이네는 손을 들어 쓰다듬어 주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아냈다.

머리보다 색이 짙은 눈썹을 지나 빽빽하게 들어찬 속눈썹.

눈을 감고 있으니 그런 속눈썹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나도 속눈썹 엄청 긴 편인데 비슷한 길이네.’

사라가 알면 부러워하겠어.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잘생쁨인가.

사실 아무리 그래도 겉모습이 남자인데 남주인 대공이 끌리는 건 무리수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정체성에 혼란을 주는 미모란 건 정말로 실재하는구나.’

기왕 남장을 할 거면 아티팩트로 진짜 남자처럼 변장할 것이지. 이렇게 미묘하게 여성스러운 부분을 남겨두니 문제가 되는 거다.

감은 눈두덩이 위로 투명하게 비치는 핏줄을 보던 아이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고 보니 눈을 마주친다고 매번 ‘기억’이 떠오르진 않았다.

‘아까도 가까이서 뚫어지게 봤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걸.’

괜히 테고만 더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공들여 조각이라도 한 것처럼 높은 콧대를 지나 약간 핏기 없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꿀꺽.

침 삼키는 듯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아이네가 테고의 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기다란 목에서는 보통의 남장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목울대가 울렁거리고 있었다.

‘오오, 폴리모프급의 아티팩트라더니.’

이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바꿔주는구나.

하긴 가문을 처음 세운 고대인들이 남긴 아티팩트였다. 원작 여주의 신체적인 한계까지도 일시적이나마 보조할 수 있는 사기템!

그런 아티팩트를 제대로 구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이능력자가 바로 원작 여주인 테고였다.

겉보기에는 좀 곱상한 미청년인데 부딪히게 될수록 왠지 모를 설렘이 느껴지는 거지.

이러니 남주든 섭남이든 끌림을 느끼다가도 고뇌에 빠질 만했다.

‘앗, 그럼 혹시 수염도 나려나?’

본래대로라면 남장 여주들은 수염이 안 나겠지만 이 소설은 아티팩트를 썼으니까 좀 다를지도 몰라.

갑작스레 든 엉뚱한 호기심이 아이네를 자극했다. 그래서 한껏 고개를 옆으로 꺾어 그의 미끈한 턱 아래를 유심히 살피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시선이 떠난 테고의 감긴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는 걸 보지 못한 채로.

* * *

“흐음.”

아이네의 커다란 눈이 옆으로 길게 가늘어졌다.

수염을 깨끗하게 잘 밀었는지, 거기까지는 아티팩트로 변장할 생각을 못 한 건지.

테고의 턱은 하얗고 매끈하기만 했다.

‘하긴 로판에서 면도하는 여주는 좀…… 그래.’

그래도 기사니까 뙤약볕 아래서 훈련했을 테고. 지난 3년간은 반란군 진압 작전도 다녀왔다던데.

어쩜 이렇게 성안에서 갇혀 자란 자신만큼 고운 피부일까. 역시 이런 게 여자 주인공 버프구나.

괜히 조금 울적해진 아이네는 그의 얼굴에 대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번 테고의 볼에 작은 경련이 일었으나 이번에도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아이네의 검지가 혼내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코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흥!”

아까는 오늘부터 호위를 맡네, 어쩌네 하더니!

여기서 길이나 헤매다가 속 편하게 낮잠이나 자고 말이야. 역시 호위라곤 안 해본 티를 이렇게 낸다니까.

호위대상을 두고 잠들어 있다니, 다른 영애였으면 가만히 안 있었어.

심통이 난 탓에 테고를 깨워볼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뭐, 앞으로 원작이 시작되면 숨 가쁘게 엔딩까지 살아가야 할 사람이다.

이럴 때 잠깐의 여유쯤은 즐기게 두는 것도 나쁘진 않지.

게다가 아이네의 수업이 예상보다 일찍 끝난 탓에 엄밀히 따져서 아직은 근무 외 시간이다.

동성에게서 이 정도의 합리화를 끌어내다니, 과연 마성의 미인이 따로 없구나.

사실 그보다는 평화롭게 잠든 미인을 괜스레 괴롭히기엔 그녀가 예쁜 사람에게 너무 약했다.

‘누워있는 얼굴까지 이렇게 완벽할 일이야?’

아무리 조금 둔한 성정이 여주의 덕목이라지만. 주위에 사람이 다가와 있는 줄도 모르고 평화롭게 잠든 모습이라니.

심지어 그의 수려한 낯이 온실과 더없이 잘 어울렸다. 진짜 요정 같은 사람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아이네는 조금 슬퍼졌다.

‘에휴, 나도 오랜만에 밖에나 나갔다 올까.’

지금이 바로 자존감 테라피를 받아야 할 때였다.

* * *

“……하.”

온실 문이 부드럽게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테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입에서는 한껏 참고 있던 숨이 토해졌다.

베룸 영지는 북부인지라 이제야 기껏 봄 날씨 같았다. 그렇다고 온실 안이 유난히 더운 것도 아닌데 테고의 이마에는 땀이 솟아나 있었다.

그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벤치에 앉은 자세 그대로 잠시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뿐이랴. 흘러내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입을 앙다문 테고의 턱에는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윽.”

공녀가 제 앞에 쭈그려 앉았을 때 모른 척 눈을 떴어야 했다.

아니, 누군가 온실에 들어온 기척을 느꼈을 때 서둘러 일어나 있어야 했다.

기실 그는 온실 밖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릴 때부터 이미 잠에서 깨어나 있었으니까.

한번 타이밍을 놓친 죄로 테고가 겪어야 했던 벌은 꽤 가혹했다.

공녀가 떠날 때까지 그는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해야만 했으니까.

뭐가 문제였을까.

그저 지난번에 공녀가 안내해줄 때 하인들도 잘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는 말이 생각났을 뿐이었는데.

“그래도 그렇지…….”

아니, 아무리 잠든 줄 알았다고 해도!

유리로 안이 훤히 비쳐 보이는 곳이라고 해도!

공녀의 신분으로 이렇게 조심성 없이 굴 수가 있나?

자신이 이 영지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도대체 제가 어떤 사람일 줄 알고?

처음에는 나딘 공자가 그래도 성인인 여동생에게 너무 유난이다 싶었다. 그런데 겪으면 겪을수록 공자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럼, 공녀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것들이 여동생을 대하는 감정인가?’

모르겠다. 제대로 된 오누이 관계를 겪어본 적이 없으니. 이전에 그가 본 남매라곤 황태자와 황녀 정도가 다였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게 있었다.

자신이 공녀의 오빠라고 해도 늘 입에 잔소리가 붙었을 거란 사실이다.

가느다랗고 약해 보이는 체구를 가진 주제에 나쁜 마음을 먹은 남자라도 마주치면 어쩌려고.

‘하, 제길.’

그녀의 숨이 자신의 볼과 입술을 간지럽히던 것만 떠올리면 계속해서 마른침이 넘어갔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가 느껴지지 않아서 이번에는 그대로 넘어갔을 뿐.

처음에는 입이라도 맞추려는 줄 알고 온몸의 털이 다 곤두섰다.

물론 정말로 입을 맞추려 했다면 그 순간 단호하게 밀어낼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부 위로 예민하게 와 닿던 숨결과 그에 따라 실려 왔던 좋은 향기가 잊히질 않았다. 결국, 테고는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안 되겠다, 앞으로 이곳엔 절대 오지 말아야겠어.’

굳게 결심한 그는 단호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온실을 빠져나갔다.

* * *

그는 저도 모르게 흘렸던 식은땀을 식히려 정원을 한참이나 배회했다.

그러다 이제 진정이 되어 자신이 머무는 별관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아, 테고 경. 일어났네요?”

아이네가 그가 쉬고 있던 온실에 들렀던 게 ‘우연’이었듯이, 테고가 본관 앞에서 그녀를 발견한 것도 ‘우연’이었다.

심지어 공녀는 온실에서 자고 있던 그를 발견했던 사실을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게다가 아이네의 옆에는 기사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어디를 가십니까.”

또다시 미묘하게 가슴속에서 거스러미가 일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테고는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기울여 상념을 털어냈다.

편안한 복장을 하고서 막 마차에 오르려던 아이네가 그를 보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바깥 구경이요!”

그녀는 이제 테고만 보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원작 소설을 알려준 일등공신이 아닌가.

도대체 무슨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질까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다니!

그동안 수고했다, 아이네!

이전까지는 정말이지 갇혀 사는 답답함을 누르다 못해 발작하듯이 뛰쳐나갔는데…….

어떤 내용의 소설인지, 어떤 등장인물이 나오는지 대강 알게 되자 이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었다. 이게 다 테고 덕분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들떠 보이는 공녀님을 보고 전담 호위인 로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테고는 어이없게도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제가 오늘부터 공녀의 호위를 맡겠다고 했을 텐데요.”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불쾌한 느낌이 드는 건 자신의 의견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다.

“어……. 진짜로 하시려고요?”

아이네의 커다란 눈이 옆으로 데구르르 굴렀다. 테고의 미모에 깎인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마실인데, 동행하면 의미가 없어지지 않나.

“말했듯이 황명입니다.”

으음, 잘 모르는 자신이 봐도 그건 그동안 사교계에 코빼기도 안 보이던 저를 데뷔시키려는 황제의 핑계 같은데 말이지.

굳이 공작이자 황제의 대자인 테고를 보낸 이유라기엔 너무 하찮았다. 그게 아니라면 역시,

지금 황도에서 테고가 없어야만 진행 가능한 사건이라도 있나?

이래서 원작 시작 전 빙의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은 게 문제다.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지.

테고가 고집을 부리는 황명이란 걸 무시할 수도 없으니까.

‘아무리 테고라고 해도 원작 시작 전부터 사건을 몰고 다니진 않을 거야. 바로 성 앞의 시장이기도 하고. 이 정도는 같이 다녀도 괜찮……겠지?’

아이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바람에 호위기사 로윈의 손을 잡고 막 마차에 오르려던 자세 그대로 멈춘 채였다.

그러나 아이네의 생각까지 읽을 길이 없는 테고는 조금 더, 기분이 가라앉았다. 어딘지 마뜩잖아 보이는 모습도 그렇고, 왜 저렇게 손을 오래 잡고…….

본래 감정 기복이 그렇게 큰 편이 아닌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기분이 널을 뛰었다.

“저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공녀를, 수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마디 한마디씩 끊어 이를 갈듯이 내뱉었다.

자신이 부여받은 ‘명’에는 곁에서 관찰하여 보고서를 올리는 것까지 포함이었다. 그녀에게 미리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건 정당한 공무집행이다.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그럼, 같이 가실래요?”

“실례하겠습니다.”

아이네의 떨떠름한 권유가 떨어지기 무섭게 테고는 마차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고는 로윈을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눈짓을 했다.

손을 놓고 비켜서라는 뜻이다.

그에 로윈이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더 장신인 데다 황실 기사답게 훌륭한 체격을 가진 청년이었다.

게다가 영지 내에서 가장 미남인 나딘 공자보다도 훨씬 눈을 사로잡는 미청년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진하고 맑은 파란 눈동자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이유 없는 적의에 온몸에 소름까지 돋았다.

‘황도 사람들은 권위적이고 오만하다더니…….’

황실 기사라면 작위도 있겠지. 당연히 직급은 저보다 높을 게 분명했다.

그런 데다 방금 황제 폐하의 명을 운운하고 아가씨도 허락하셨으니 마땅히 자신이 물러서는 게 맞았다.

하지만 무언가 찜찜한 예감이 들었다. 특히 방금 보인 그 눈빛이라던가.

평소 로윈은 제 부인에게서 생긴 것과 다르게 감이 좋다는 말을 듣곤 했다. 그러나 그 감을 제대로 표현할 언어구사력은 조금 떨어졌다.

‘우리 아이네 아가씨는 베룸 공작가 모두의 작은 별과 같은 분인데!’

그런 공녀님을 빼앗길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로윈 경. 그럼 오늘은 테고 경과 다녀올게요. 어차피 중앙 시장에 갔다가 금방 오려고 했어요. 오빠한테는 경이 좀 전해줘요.”

“……예. 아가씨.”

아이네까지 로윈에게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서 있던 테고에게로 손을 뻗었다.

단이 그렇게 높지도 않은 마차를 오르다 넘어질까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레이디를 향한 관례와 같은 일이었을 뿐.

그렇게 테고의 손을 잡은 그녀가 착석하자 그가 서둘러 뒤따라 올라탔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마차 문을 쾅 닫았다.

로윈은 아까부터 느껴졌던 찝찝한 기분에 더욱더 젖어들었다.

그래서인지 급하게 출발하는 마차의 뒤꽁무니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아, 참. 공자님께 말씀드려야지.”

* * *

마차가 출발하여 공작성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빠진 아이네에게 테고가 먼저 말을 걸었다.

“평소에도 호위와 그리 친밀하게 지내십니까?”

“네? 누구요? 로윈 경이요?”

정원에서 길을 잃고 온실에서 팔자 좋게 낮잠이나 자고 있을 때는 언제고.

이상하게 갑자기 싸늘해진 테고의 태도에 아이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 안 좋은 꿈이라도 꿨나?’

방금까지 그녀는 기억을 곰곰이 더듬어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친구가 되어달라는 말에 확실하게 거절을 당한 건 아닌 거 같아서.

맛있는 거라도 사주면서 다시 꼬셔볼까 하던 참인데. 아무래도 때를 잘못 택한 모양이다.

아니면 로윈 경과 친구처럼 보여서 약간 심술이라도 났나.

하지만 자신은 분명히 여자인 친구가 없다고 했지, 남자인 친구까지 없다고는 안 했는데?

물론 아이네는 남자인 친구도 없긴 했다.

게다가 로윈 경은 친구가 아니라 엄연히 공작가에 소속된 기사였다. 그리고…….

“저번 달에 태어난 둘째 이름도 제가 지어줬으니까요. 꽤, 친하긴 하죠.”

“둘째……라니. 유부남이었습니까?”

테고는 내내 굳은 얼굴이다가 갑자기 무언가 삐끗 어긋난 표정을 지었다.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인상을 쓰는 그를 아이네가 조심스레 살폈다.

그러고 보니 로윈 경이 결혼하기 전에는 꽤 인기가 많긴 했지.

남자 주인공인 대공과 만나기도 전에 이런 전개가 되면 안 되는데! 큰일이다.

원작 전 빙의란 정말 신경 쓸 게 많구나.

이런 건 제 선에서 단호하게 끊어줘야 했다.

“설마, 로윈 경한테 관심 있어요?”

“됐습니다.”

갑자기 김이 빠진 기색으로 그가 창문을 향해 턱을 괴며 고개를 돌렸다. 거기다 한 손으로 입과 얼굴을 가렸지만 미미하게 볼이 붉어진 듯도 했다.

뭐야. 여자 주인공, 당신.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는 데도 반응이 왜 그래!

아무리 지금이 원작 시작 전이라지만 이 정도면 캐릭터 붕괴라고!

“저기, 노파심에 미리 말해두는데 부인인 케이트 경은 우리 가문 여기사 중에 제일 예뻐요. 그리고 아이들도 정말 귀엽고.”

“그렇, 습니까.”

여전히 테고가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탓에 목소리는 다소 웅얼거리듯 들렸다. 심지어 이젠 아이네와 반대 방향으로 머리를 완전히 틀어버렸다.

아니, 사람이 말하면 듣는 척이라도 좀 해!

“그리고, 그리고…… 로윈 경은 붉은 머리가 취향이랬어요.”

“…….”

테고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 * *

아이네의 장점은 사소한 일까지 마음에 오래 담아두는 타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이미 무심하고 까칠함 속에 숨겨진 원작 여주의 마이웨이는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지금 당장 꼭 필요한 논의를 하기로 했다.

“아 참, 마차에서 내리면 이제 절 ‘라비’라고 부르셔야 해요.”

“라비?”

“그럼 영지민들 앞에서 공녀라고 부를 생각이었어요?”

“…….”

테고의 눈이 가볍게 아이네를 죽 훑었다.

흔한 색도 아닌 눈에 띄는 예쁜 올리브색 머리카락에 청명한 터키색의 눈동자.

거기다 한번 보고 나면 쉽게 잊기 힘든 대단한 미색까지.

과연 ‘라비’인 척하는 아이네가 누구인지 모를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잔뜩 들뜬 기색인 그녀가 상기된 채 종알거리는 모습은 썩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테고는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 몸을 바로 돌려 팔짱을 끼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기나 하겠다는 태도였다.

“들어봐요. ‘라비’는 ‘라비니’의 애칭인데, 사실은 디도 상단주의 딸인 거죠. 어릴 때 몸이 약해서 베룸 영지로 요양을 왔다가 시장에 종종 출몰한다는 설정이에요.”

“…….”

테고의 미간이 살풋 좁아졌다.

굳이 저런 설정을 짤 필요 없이 로브를 쓰든지 변장을 하든지 하면 되는 게 아닐까.

저런 말도 안 되는 설정을 짜면서까지 시장에 나오는 것부터…….

아이네는 근본적으로 그를 이해시키는 데에 실패했다.

“내가 알기로 디도 상단주는 아직 미혼이라고.”

“수, 숨겨진 딸일 수도 있죠.”

디도 상단주인 칼티고는 베룸 영지 출신이었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초기에 베룸 공작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렇게 성장한 디도 상단은 제국 전체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직접 마주한 적 없는 테고 역시 디도 상단을 웬만큼 알고 있었다.

덕분에 베룸 공작가 사람들은 디도 상단의 간부들이 가진 까만 인장을 받았다. 이것이 있으면 아이네도 상단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녀만이 홀로 고수하는 설정은 모두 거기서 파생된 것이었다.

몸이 약해 성안에서 나오지 않는 공녀 이미지를 고수하면서 이따금 외출을 즐겨온 비법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그에 맞춰 테고의 설정을 정할 차례였다. 비록 본인은 전혀 관심이 없다는 커다란 문제가 있었지만.

“자, 내가 방금 생각해봤는데요. 테고 경은 ‘라비’랑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던 ‘소꿉친구’지만 기사수련을 마치고 최근에 돌아온 거예요. 그래서 내가 테고 경의 ‘친구’로서 시장 구경을 하게 해주는 거죠! 어때요?”

“……그냥 호위기사로 하겠습니다.”

급조하긴 했으나 ‘친구’라는 키워드를 넣어 짠 설정이 단박에 기각당했다. 이상하게 테고는 ‘친구’라는 단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표정까지 금세 심드렁해져 흥미를 잃었다는 건 누가 보아도 티가 났다.

“그럼 나한테 ‘라비 아가씨’라고 부를 거예요?”

“굳이 지칭하지 않아도 호위하는 데에는 문제없습니다.”

“익……!”

이, 이 벽창호같이 꽉 막힌 기사 같으니.

아이네는 거센 콧김을 내뿜으면서도 차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 이제 황도로 가서 원작이 시작되면 다시는 안 올 영지다, 이거지?

아이네는 분명 오빠인 나딘이 저렇게 말했다면 벌써 으르렁거리며 덤벼들고도 남았을 테다.

하지만 그녀는 원작 여자 주인공과 척을 져서는 안 된다는 제1원칙을 상기했다.

게다가 여주와 친해질 수 있다는 헛된 희망 역시 놓지 못한 상태였다.

그랬기에 씩씩거리면서도 속으로 분을 삭였다.

“큼.”

한편, 무표정을 가장하고 아닌 척 시야 한구석에 아이네를 담고 있던 테고는 눈을 꼭 감았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있던 안쪽 팔을 몰래 꼬집어 가까스로 웃음을 참아냈다. 그 바람에 그의 목울대가 여러 번 울렁였다.

하지만 잔뜩 심통이 난 아이네는 늘 그렇듯 알아채지 못했다.

* * *

솔직히 말해서, 테고는 놀랐다.

변방에 위치한 데다 폐쇄적인 영지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소탈한 공작가의 분위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평민들의 생활공간은 낙후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가장 번화한 황도도 그렇고, 부유한 영지일수록 으레 신분 관계는 더 엄격했으니까.

공작성 아래 위치한 중앙 시장 입구에서 마차가 멈추었다.

먼저 내린 그는 아이네의 하차를 도와주는 것도 잊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

“…….”

입구에서부터 뻗어 나간 곧은 길이 깨끗하고 넓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흙바닥이 아니라 제대로 조성한 돌바닥이었다.

게다가 시장 입구에는 규모가 꽤 큰 마차 보관소까지 있었다. 누가 보아도 오래전부터 자생해온 시장이 아니라 새롭게 설계한 모양새였다.

특히 물품을 실어 나르는 통로와 보행로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건 황도의 시장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초기 단계부터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났다.

“공작가에서 조성한 겁니까, 아니면 디도 상단의 힘입니까.”

“시작은 저희 할아버지 대에서 했고, 마무리는 디도 상단이 했죠.”

감탄하는 테고의 모습을 보며 아이네가 뿌듯하게 가슴을 폈다.

지금도 그렇지만 베룸 영지는 도로망을 구축하는 데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도로를 타고 유통되는 특산물이 다이아몬드도, 마정석도 아닌 오징어여서 그렇지.

베룸 영지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어딜 가나 길이 잘 닦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건 다른 영지와는 달리 파격적인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받은 덕이 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공작성 안에서도 느꼈던 위화감이 테고를 덮쳤다. 단순히 제국의 타 영지들과 다른 정도가 아니라,

‘마치 시간이 더 흐른 후 발전된 제국의 모습을 뚝 떼어다 놓은 것처럼…….’

무언가 이질감을 느낄라치면 어김없이 아이네가 개입해 다시금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여기 대부분은 디도 상단과 연계해서 등록된 상점이에요. 내가 왜 디도 상단주의 딸인 설정을 짰는지 알겠죠?”

“…….”

혼란스러운 와중이지만, 그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설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일만 하느라 여태 미혼인 상단주의 숨겨진 딸이라니.

하지만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한 발전된 영지의 모습과 공녀의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에 테고의 의심은 조금 더 짙어졌다.

‘뭔지 몰라도 일반적인 영애는 아니야. 여기 영지도 그렇고.’

폐하의 명이 아니더라도 베룸 영지와 공녀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놀랍군.’

이렇게 스스로 뭔가에 의욕을 불태워 본 게 얼마 만인지.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들었던 검이다. 맨 처음 목적은 이제 요원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검은 이제 그의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검을 들어 부모님과 여동생의 원수를 갚았다. 그러면 속이 좀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꼬박 8년간 쫓아왔던 목표가 사라지자 그 자리를 채운 건 지독한 무기력함이었다.

“그래서 라비의 소꿉친구 할 거예요, 말 거예요? 어차피 그것도 기사 역할인데.”

“…….”

설마하니 폐하께서 그 무기력함을 눈치채셨을까. 저를 여기까지 보낸 이유 중 하나라고 여긴다면 과도한 해석이려나.

뭐가 되었든 정신없긴 해도 나쁘진 않았다.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해도 심심하지 않은 베룸 공작가 남매 덕에 요 며칠간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정말로 이 철없는 공녀를 황태자비로 삼으실 생각인가.’

꼬인 곳 없이 밝고 명랑한 성격은 꽤 사랑스럽긴 했다. 하지만 이 순진한 공녀가 과연 황도의 사교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황태자비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왠지 가슴께가 따끔따끔해졌지만, 테고는 애써 무시해버렸다.

* * *

“라비! 안 그래도 잘 왔어요. 저번에 말한 신제품을 방금 구워봤는데, 한번 먹어볼래요?”

“팥앙금 만들기 성공한 거예요? 와, 대단한데요.”

이제 테고는 이 영지를 자신의 상식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일회성의 조잡한 설정인 줄 알았더니…….’

이미 그들 속에서 아이네는 ‘라비’가 되어있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공작성에 갇혀 자란 귀한 영애답지 않은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누가 보면 어디서 평민 생활을 겪어보고 온 적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저기, 라비! 나는 딸기 바나나 주스를 새로 출시했어요. 지금 반응이 엄청 좋아요.”

“오! 꼭 먹으러 갈게요.”

한편 이곳에서도 딸기 바나나 주스를 맛볼 생각에 아이네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제대로 된 레시피를 넘긴 것도 아니고 대강의 재료와 맛만 묘사했을 뿐인데…….

원래 세계와 늘 똑같이 재현하는 장인 정신이 놀라울 정도다.

“거기다 오징어 졸인 시럽을 넣었더니 반응이 더 폭발적이더라고요! 라비 몫으로 한 잔 남겨둘 테니 꼭 와야 해요.”

아냐, 그거 아니야.

제발 알려준 재료대로만 해.

다 된 딸기 바나나에 오징어 묻히지 마.

해사한 웃음을 짓고 있던 아이네의 얼굴이 애매하게 굳었다. 베룸 영지의 모두가 기승전 오징어 사랑을 부르짖는다는 걸 간과한 대가였다.

헤이 브로, 두유 노우 오징어?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그녀는 깊이 반성했다.

“아,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야 할 거 같기도 하고.”

난처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아이네가 테고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도와주세요. 용사님, 아니, 여주님.

하지만 그 역시 태생적으로 이 소설에서 만들어진 등장인물일 뿐이었다.

딸기 바나나 주스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테고였다. 그러나 오징어 시럽이 그만 그의 흥미를 자극하고 말았다.

오징어 수프와 오징어 돼지 볶음, 오징어 잼까지.

테고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오징어 시럽은 대체 그에게 어떤 세계를 보여줄 것인가.

테고는 저도 모르게 기대가 되어 심장이 작게 뛰었다. 그러나 짐짓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침 오늘 오후 일정은 없다고 했으니 넉넉하게 들를 수 있겠군요.”

“…….”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당신, 정말 이러기야?

“꼭 와요! 원래 금방 매진되는데 동행분 것까지 두 잔은 남겨둘게요!”

어제부터 느꼈지만, 그는 오징어를 꽤 좋아하는 듯했다.

장담컨대 이건 합리적 의심이다.

‘생긴 거랑 다르게 단 걸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오징어까지?’

오징어에 열광하는 사람과 겸상하는 건 나딘으로 족한데.

이젠 황도에 함께 가야 할 테고한테까지 오징어가 묻어버렸다.

그냥 지금이라도 데뷔탕트고 뭐고 황도 안 가겠다고 드러누워 볼까.

아이네는 오징어에 질린 나머지 차근차근 세운 계획마저 다 뒤집을 판이었다.

따지고 보면 원작을 알기 전부터 황도는 늘 궁금했다. 어느 로판이 되었든, 이야기의 주 무대는 황도였으니까.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곳엔 온갖 플래그가 득실댄다는 뜻이다.

여전히 제가 빙의한 이유를 모르는 데다 저번에 보였던 비 오는 날 마차 장면까지, 불안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차라리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까.

오징어에서 시작해 점점 심각한 생각으로 빠져들던 아이네는 이내 걱정을 밀어내고 다시 테고를 보았다.

이럴 때, 번듯하게 여주의 친구라는 타이틀 하나 확보해두면 얼마나 좋게요?

황도가 아니라 황도 할아버지가 와도 든든할 테다.

아이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테고는 딸기 오징어 바나나 주스를 만들었다는 상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네가 들르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가게에 찾아가 볼 기세였다.

왜 저렇게까지 집착한담?

“황도에는 오징어 요리가 없나요?”

“아무래도 황도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운반비용도 많이 들고 신선도를 유지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녀는 황도로 가야만 하는 결정적인 이유를 획득했다.

좀 전에 안 가고 드러눕겠다는 경솔한 발언, 그거 누가 한 거죠? 일단 저는 아닌 것 같네요, 하핫.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오늘부터 황도는 아이네에게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 * *

테고는 ‘라비’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시장 입구에서 상인들과 대화한 이후 그녀는 제게 무언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오후에 별다른 일정이 없는 건 사실 아닌가?’

무엇보다 굳이 주겠다는 오징어 주스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그러나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뿐 아이네의 재잘거림은 쉬질 않았다.

“올해 남쪽에선 올리브가 풍년이라던데, 다 팔린 거예요? 왜 이렇게 조금밖에 안 남았어요?”

몇십 년 만의 풍년이라 훨씬 값이 내릴 줄 알았는데, 외려 올리브 가격이 올라있었다.

거기다 그나마 남아있는 올리브의 양도 지나치게 적었다.

“아이고, 말도 마십쇼. 거기서 풍년이면 뭘 해. 아무리 싸도 세금은 작년하고 똑같이 내라 하니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고 들어오는 양은 더 줄었수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상인의 말에 아이네의 미간이 살짝 좁혀들었다.

“올리브 물품세는 지난달부터 줄어들지 않았어요?”

“아유, 우린 그런 건 몰라. 이거 떼어오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아는 거지요.”

지나다니며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생글생글 웃음을 지어주던 아이네의 표정이 금세 싸늘해졌다.

곁에서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던 테고가 움찔할 만큼 확연한 변화였다.

“그렇군요. 잘 알겠어요.”

그러나 아이네는 금세 예의 그 웃는 낯으로 다시 돌아왔다.

잘 익은 사과 하나를 계산하고 뒤돌아선 아이네를 흘끗 바라보고는 테고가 가게 주인에게 조용히 물었다.

“상단 관계자한테 세금 이야기는 왜 하는 겁니까? 어차피 해결해주지도 못할 텐데.”

낮은 목소리로 질문하는 그에게 한쪽 눈을 찡긋한 가게 주인이 사과 한 알을 건넸다.

그러자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테고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이 부근에서 공작님 내외와 나딘 공자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수.”

“그럼…….”

“관청에 신고하려면 뭘 복잡하게 막 쓰라고 하는데, 우리가 그런 걸 어떻게 해. 하지만 ‘라비’ 아가씨에게 말하면 찰떡같이 알고 해결해주시거든.”

아이네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그러자 상인이 그에게 어서 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에 잠시 머뭇거리던 테고가 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며 가게 주인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공녀님께서 라비로 불러주길 원하시니 당연히 따라야 하지 않겠수. 나딘 공자님께서도 모른 척해주길 당부하셨고.’

테고는 아이네가 그 허술한 신분을 어떻게 지금까지 유지해왔는지 이해했다.

그사이에 그녀는 길거리 가판대 상인에게 잡힌 모양이었다.

한참 뒤에서도 가판대 주인과 깔깔거리는 아이네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번화한 거리와 인심 넘치는 영지민들.

그리고 그런 영지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영주 가문과 그 아가씨.

어쩐지 테고는 그림으로 그린 듯 이상적인 영지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 * *

“우와, 이걸 사람 손으로 깎았단 말이에요? 귀여워라.”

“라비가 원하면 이것도 줄까요?”

“으으음, 어떡하지. 아까 그것도 엄청 귀여웠는데…….”

이미 작은 장식품 대여섯 개를 손에 쥔 아이네는 정교한 목각 장식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안 되겠어. 이것도 일단 사고 봐야겠다.

다음에 나왔을 때 이게 남아있으리란 보장이 어딨어.

이건 오늘 귀족 연감 수업을 완벽하게 마친 자신에 대한 보상이다!

“그럼, 이것도 주…….”

“그쯤 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아이네의 어깨 너머로 커다란 손이 쑤욱 뻗어져 나왔다. 그러더니 그녀가 집었던 목각 인형을 제자리에 놓았다.

“아니, 왜요!”

“또 그런 걸 마구 사려는 겁니까.”

“하지만…… 귀엽잖아요.”

반박하는 아이네의 목소리가 시무룩하게 작아졌다.

밖에 나가면 자그마한 소품들을 사 오는 게 그녀의 소소한 낙이었다.

이전 생에서는 생활비도 아껴 써야 했던 대학생인 데다 원룸이라 공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운 좋게 돈 걱정 안 해도 되고 커다란 집에 사는 공작 영애가 되지 않았나.

‘보석이나 드레스처럼 비싼 사치품도 아니잖아!’

기껏 시장까지 나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속이 헛헛한데!

여기는 택배도 없고, 인터넷 쇼핑몰도 없다고!

아이네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뒤돌아 테고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턱 바로 밑에서 그런 그녀를 목도한 테고가 움찔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작다고 그런 걸 막 사면, 어디에 둘 겁니까.”

“내 방 응접실에 두면 되죠.”

“……이미 꽉 차 보이던데.”

아니,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반문하려던 아이네가 입을 합, 하고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테고를 보고 기절했던 당시, 깨어날 때까지 제 응접실에서 대기했다고 들었다.

그냥 응접실에 주르륵 늘어놓은 것들을 다 봤다니…….

그동안 친구도 없고, 찾아오는 손님도 없어서 방심했다.

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아이네가 모른 척 넘어간 것도 사실 수십 번이었다. 그들은 가족이니 문제가 없었지만…….

“흐, 흐응.”

가족 아닌 타인에게 의도치 않게 피규어 취미를 들킨 느낌이 들었다.

결국 아이네의 볼이 조금 붉어졌다. 그래서 괜히 툴툴거리며 여태 골라두었던 장식품만 계산하고 손가방에 급히 챙겨 넣었다.

“다음에 또 올게요! 많이 파세요.”

“그래요, 라비. 더 예쁜 거 구해둘게요.”

“…….”

아이네만큼 능청스러운 인사말은 없었지만 그도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했다.

비록 몇 시간뿐이어도 그녀를 따라다니며 테고 역시 목례 정도는 익숙해졌다.

그들이 떠난 좌판을 정리하며 상인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와 혼담이라도 오가는 영식이신가.”

한눈에 보아도 귀하게 잘생긴 청년이었다.

절도 있고 세련된 자세뿐만 아니라 묘하게 평민을 대하기 껄끄러워하는 태도.

거기에 서로 존대를 하고 있어도 아가씨 쪽에서 미묘하게 말을 높이고 있었다.

필시 공작가의 기사는 아닌 듯했다.

‘아가씨도 벌써 열아홉, 성년이시니 혼담이 오갈 때도 됐지.’

귀족들의 혼사는 저희와는 다르다고 들었다. 평민들이야 그저 서로의 마음만 있으면 혼인 서약 하고 함께 살면 되었다.

하지만 귀족 나리들은 이런저런 조건과 이해관계를 따질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하니…….

이미 속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꿋꿋하게 몇 년째 디도 상단의 ‘라비’로 행세하는 공녀님이었다.

처음엔 시장의 모두가 긴장했었다. 혹시나 귀한 분의 심기라도 거스르면 큰일이니까.

하지만 아가씨는 첫날부터 스스럼없이 길거리 음식을 사서 입에 물었다.

게다가 그 흔적을 입가에 묻힌 채로 한참을 돌아다녔다.

결국, 보다 못한 누군가가 조심스레 입가에 묻은 소스를 지적할 때까지.

“아? 너무 맛있어서……. 고마워요, 헤헤.”

그러자 작은 요정 같은 소녀가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으며 입가를 슥 훔쳤다.

그 순간, 자리에 있던 모두는 마법처럼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 * *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다.

이쪽 세계에는 없는 말이지만 적어도 아이네가 살았던 세계에서는 자주 쓰이던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쇠뿔을 빼야 할 때였다.

아이네는 애써 무시하려고 했던 딸기 오징어 바나나 찬스를 써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활용도는 0이지만 오로지 사는 데에 의미가 있던 귀여운 소품 모으기 취미를 들킨 걸 무마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었다.

아이네는 자신의 취미활동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진심으로.

“목마르지 않아요?”

“아닙니다.”

어쩐지 아까 소품 가판대를 지난 이후로 테고의 목소리는 조금 딱딱해진 듯했다.

그가 호위를 자처했다 해도 너무 일방적으로 끌고 다녔나 싶어 참고 마시려 했는데.

하지만 테고가 마시기 싫다면 굳이 강요할 순 없지. 여주와 척을 지면 안 되니까요.

“어, 그럼 아까 그 딸기 바나나…….”

“조금 쉬었다 가는 것도 좋겠지요.”

쳇, 눈치는 빨라서.

평민들이 이용하는 시장이라 고급 상점거리처럼 디저트만을 따로 파는 가게는 없었다.

다만 식사류를 파는 가게에서 종종 간단한 주스나 간식을 함께 팔기도 했다.

“트로이의 망아지…….”

간판을 본 테고가 중얼거렸다.

“가게 주인의 할아버지가 식당을 열 때 망아지 한 마리 판 돈으로 시작했대요.”

아이네와 그가 들어서자 아까 만난 청년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마침 딱 두 잔 분량만 남았어요! 잘 왔어요.”

한 잔만 남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못 이기는 척 테고에게 양보의 미덕을 베푸는 착한 공녀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그제야 아이네는 처음 맛보는 오징어 시럽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다. 그래서 오징어 시럽의 맛을 희석해줄 식사와 간식거리도 마구잡이로 함께 주문했다.

당연하게도 테고에게 생색내듯 인자한 미소를 짓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제가 살게요. 마음껏 드세요.”

“지금 나는 호위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공녀가 사야 하지 않겠습니까.

뒤에 숨겨진 말이 너무나 명확해서 아이네가 눈을 흘겼다.

그래, 봐준다. 리테루온 영지가 부유하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아니까.

분명 점심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일 터였다. 그때까지 배고픈 기색 하나 없던 테고는 음식이 차려지기 시작하자 빠른 속도로 그릇을 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식기 사용법과 앉은 자세가 너무나 정확하고 우아했다.

‘역시 주인공은 주인공이네.’

순식간에 옆에 쌓여 가는 빈 그릇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고고하게 빛이 났다.

저렇게 많이 먹어도 살도 안 찌겠지. 주인공이니까!

테고에게는 한순간에 평범한 식당을 고급 레스토랑으로 만들어버리는 품위가 있었다.

온 식당 안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는 광경이 당연하게까지 느껴졌다.

물론 그를 흘끔거리게 된 건 아이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문제의 ‘그’ 음료가 나왔을 때 잠시간이지만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라비! 그리고 기사님! 특별히 오징어 시럽을 듬뿍 넣었어요.”

아니, 딱 두 잔 분량만 남았다면서! 어떻게 듬뿍 넣을 수가 있는 건데.

이럴 때는 절약의 미덕을 좀 보여주지 않겠어요, 영지민 여러분?

그녀는 차마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입가를 늘어뜨렸다.

“고마, 워요.”

정말이지, 이런 특별대우라면 평생 사절하고 싶다.

아, 가고 싶다. 황도…….

황도로 출발하려면 아직 일주일도 넘게 남았는데! 벌써부터 그날이 간절하게 기다려진다.

“큼!”

울상이 된 아이네의 얼굴을 마주한 테고가 다시 한번 헛기침을 내뱉었다.

누구보다 훌륭한 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가 싶다가도 가끔씩 비치는 이런 면이 정말…….

“…….”

괜히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어 그는 주먹으로 제 명치를 작게 두들겼다.

그러자 아이네가 기다렸다는 듯 제 몫으로 나온 주스 잔까지 그에게 밀어주었다.

“어머! 급하게 드셔서 그런가 봐요. 어서 이 주스를 한 번에 쭉 들이켜야겠네요. 저는 괜찮으니 제 것까지 드세요.”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해보려는 노력이 눈물겨웠다.

신속하게 내밀어진 그녀의 잔 대신 제 것을 먼저 들어 마셔본 테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어떤가요?”

“굉장히…… 맛있군요.”

정말이었다.

여유분만 있다면 세 잔이든 네 잔이든 마실 수 있을 만큼.

그에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던 아이네가 한 모금 마셔보았다.

‘윽!’

그러고는 한껏 꾸며낸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제 잔을 테고에게로 떠밀었다.

“많이, 드세요.”

어느새 꽤 많았던 음식이 거의 다 비어있었다.

여성보다 먼저 식사를 마쳐서는 안 된다는 예법에 따라 테고는 한입거리만 남긴 상태였다.

반면 아이네는 작은 얼굴과 몸만큼 입도 작은지 오물오물하면서 열심히도 먹고 있었다.

그와 속도를 맞추느라 아이네의 볼이 작은 다람쥐처럼 볼록해져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테고는 기꺼이 제게 양보해준 주스 잔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러지 않으면 귀여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날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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