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싹트는 마음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영지 내 무기점이었다.
무기점 안은 바깥 날씨와 다르게 후끈 달아올랐다.
키가 훤칠하게 큰 청년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벽에 걸린 검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의 가게 주인인 듯한 남자는 잔뜩 상기된 기색이었다.
“그럼 힐트(hilt, 칼자루)와 블레이드까지 전부 베룸 영지산이라는 겁니까.”
“어유, 그럼요. 한번 쥐어보시겠습니까? 그립감이 남다릅니다요.”
주인의 권유를 받아 검을 쥐어본 청년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밝아졌다. 게다가 작지만 진심 섞인 탄성이 새어나왔다.
“과연……. 이 가격에 강철 상태도 꽤 상급인 것 같은데.”
“아이고, 아이고. 뭘 볼 줄 아시네요!”
“…….”
아이네는 요 며칠 동안 테고가 저렇게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평소 과묵하기로 유명한 무기점 주인 역시 박수까지 치는 게, 아주 쿵짝이 잘 맞았다.
시작은 그저 근처에 무기점이 있다고 지나가는 말을 흘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테고의 눈은 생기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녀는 원작 여자 주인공의 무기 사랑이 대단했다는 걸 기억해냈다.
‘어느 세계에나 저런 사람들은 있구나.’
다섯 가지 덕을 가진 두 사람이야 더없이 행복한 대화일 테다.
하지만 아이네는 그런 쪽엔 영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지루함에 하품만 쩍쩍 해댔다.
“기다려보십시오! 기사님께는 특별히 저희 고조할아버지의 역작을 보여드릴 테니.”
“부탁하죠.”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그리고 그 시선은 금세 서로에 대한 신뢰로 충만해졌다.
결국, 의자에 앉아 발만 까닥거리고 있던 그녀가 먼저 폴짝 뛰어내렸다.
“여기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황도의 웬만한 무기점보다 훌륭합니다. 베룸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얼씨구? 제법 감동에 겨운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당신.
잠시 벅찬 얼굴로 감상에 빠져있던 그가 그제야 아이네를 살폈다.
무심한 성격이지만 그래도 그녀가 흥미 없어 한다는 건 눈치챈 모양이었다.
“큼! 공녀는 마음에 드는 게 있습니까?”
……있을 리가.
그래도 아이네는 직감적으로 지금이 테고의 호감을 얻을 기회란 걸 알았다.
자고로 오덕, 아니, 마니아에겐 잘 모르는 척 추천받는 게 가장 쉽게 친밀도를 올리는 방법이었다.
“테고 경이 추천해주면 안 돼요?”
“흐음, 공녀가 쓸 만한 무기라.”
그가 심각한 얼굴로 무기점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 테고의 옷자락을 슬쩍 붙잡은 그녀가 검 하나를 가리켰다.
“제가 맞혀볼까요? 이거! 레이피어 추천하려고 했죠?”
“레이피어를…… 말입니까.”
마치 ‘네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너무나 노골적인 기색에 아이네는 바짝 약이 올랐다.
“네! 레이피어요!”
물론 키가 닿지 않는 관계로 손수 내려준 건 테고였다.
“근력이 약한 여기사라면 보통 레이피어를 쓰지 않아요?”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여전히 못 미덥다는 그의 눈빛에 아이네가 레이피어를 건네받았다.
아니, 저를 얼마나 약해빠진 영애로 보기에 그런 표정이람?
“어?”
생각보다 가벼운데?
검 끝이 위로 가도록 들어올린 아이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막상 들어보니 보기보다 길긴 했다. 하지만 무게감이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코앞에서 반짝이는 레이피어의 검신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홀리는 기분이 들었다.
‘와, 나한테도 혹시 기사의 자질이 있는 거 아냐?’
가뿐하게 레이피어를 들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네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앗?”
“여기 위로 검지를 이렇게 올려서 잡는 겁니다.”
테고가 그녀의 손가락 위치를 올바르게 고쳐 잡아 주었다.
“가벼워서 여기사들이 주로 쓰나 봐요.”
“으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애매한 표정을 지은 그가 아이네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등 뒤로 묵직하고 따뜻한 무게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고 테고가 아이네의 등 한가운데를 가볍게 짚었다.
“어깨에서 힘을 빼고 등을 곧게 펴십시오.”
“으응, 이렇게요?”
낮고 그윽한 그의 목소리가 아티팩트 때문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네는 어쩐지 숨을 제대로 쉬기가 어려웠다.
아직 얼굴 한 번 못 본 악역 영애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이미 여자란 걸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 설레려고 하는데 남자인 줄 알고 있다면 홀랑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지.
저도 모르게 밭은 숨을 내뱉는 그녀의 어깨 위로 한참 긴 팔이 뻗어졌다.
“손을 받쳐도 되겠습니까.”
“아, 네에.”
그가 곧장 커다란 손을 내밀어 아이네의 손을 받쳐 잡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힘을 주어 살짝 기울어진 레이피어의 검신을 수직으로 세웠다.
“양발을 살짝 벌려보십시오. 아니, 그거보단 조금 좁게.”
“…….”
생각보다 넓게 벌려진 그녀의 다리를 테고가 제 다리로 감싸서 모았다.
그 바람에 아이네는 꼼짝없이 그의 품 안에 안긴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흐, 네에.”
으아……. 귓가에 대고 그렇게 속삭이듯 말하지 마!
이제 그녀는 테고가 무어라 말하는지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바로 뒤에서 바짝 붙어 말하는 것 같은 목소리 때문에 어쩐지 오른쪽 귀가 간질간질했다.
“검 끝이 아니라 목표한 지점에 시선을 고정하고 이렇게……!”
테고가 뒤에서 살짝 민 오른 다리가 앞으로 나가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팔이 쭉 뻗어 나갔다.
그가 잡아줬다고 해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깔끔한 자세였다.
초심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제법 운동신경이 좋군.’
의외라는 표정으로 테고가 그녀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보니 정수리 부근의 머리카락은 연한 새싹 같은 색이었다. 공녀와 꼭 어울리는 색이라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와! 뭔가 어깻죽지가 시원한 느낌이 들었어요.”
아이네가 갑작스레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테고는 그녀를 감싸고 있던 오른손에서 힘을 빼고 급히 뒤로 물러섰다.
너무…… 가까웠다.
챙강, 레이피어의 검 끝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건 그의 심장 언저리가 급격하게 내려앉는 순간과도 정확히 일치했다.
다행히 날카로운 소리에 아이네가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아……. 이렇게 쭉 뻗기에는 무겁, 어?”
이번에는 테고의 도움 없이 호기롭게 검신을 다시 수평으로 들어 올리려 시도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아이네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까는 분명히 가볍게 됐었는데!’
아이네가 다시 뒤로 돌기 전에 그가 서둘러 그녀의 손을 받쳐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검날을 수직으로 세우도록 도왔다.
분명히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인데 테고는 갑자기 귀가 먹먹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주 잡은 손을 타고 심장이 뛰는 것만 같았다.
이건 필시 공녀가 너무 급작스레 고개를 든 탓이다.
“…….”
처음 의도는 검을 들어본 적 없는 그녀에게 레이피어가 무리라는 걸 체험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서 한시라도 빠르게 이 상황을 정리해야만 했다.
본디 과묵한 편인 테고답지 않게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레이피어를 사용하는 여기사들이 많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공녀 같은 민간인은…….”
그러다 무심코 생각 없이 검을 잡고 있는 아이네의 오른쪽 팔뚝을 잡았다.
수련하지 않은 일반인의 약한 근력으로는 어림없다고 말을 이으면 분명 끝나는 일이었는데.
“앗.”
테고의 커다란 손에 잡힌 그녀의 팔이, 너무 가늘고 말랑말랑했다.
그 촉감이 그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전달되는 순간, 마치 전기가 오르는 듯 기묘한 감각이 테고의 전신을 관통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생소한 감각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도망치는 걸 택했다.
이번엔 아티팩트가 달린 왼쪽 귓불뿐 아니라 양쪽 귓불 모두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 * *
얼마 뒤, 테고가 다시 돌아왔을 땐 이미 그녀가 단검 하나를 구매한 뒤였다.
기실 단검이라기보다는 겨우 한 뼘 크기의 나이프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면 공녀 신분으로 휴대하기 어려운 레이피어보다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단검류로 골라주었다면 아까 같은 일도 없었을 텐데.
‘정신 차려, 테고 리테루온. 공녀는 황태자비 후보다.’
그렇게 애써 다짐하는 그의 입 안이 어쩐지 꺼끌꺼끌하게 말라왔다.
분명 제 또래 영애와 이렇게까지 가깝게 지내본 적이 없어서일 테다.
가끔 마주했던 여기사들은 이성이라기보단 사실상 전우일 뿐이었으니까.
테고를 본 무기점 주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반갑게 맞았다.
“저희 가게 안에도 화장실은 있는데, 미리 말씀하시지.”
“…….”
그 말에 테고가 아이네를 지그시 응시했다.
제가 자리를 비운 이유를 무어라 둘러댔는지 알 만했다.
그녀는 애써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유를 들어 설명할 순 없었다.
그럴 말재간도 없고.
테고 역시 제가 왜 도망쳤는지 해명할 수 없었기에 이번만 그대로 넘어가기로 했다.
“자, 이건 절대 팔지 않는 저희 집안의 가보와도 같은 검입니다. 원래는 언급도 안 하는데, 라비 아가씨의 일행분이기에 특별히 보여드리는 겁니다요.”
처음의 기대감이 푸시식 식어버려 무감해진 얼굴로 테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아이네는 검을 보관한 상자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판타지 세계니까 마법검이나 에고소드 같은 거 아냐? 이런 걸 기연이라고 하지 않나?’
여자를 감쪽같이 남자로 변장시켜주는 아티팩트도 있는 세계였다. 숨겨진 설정으로 전설의 검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상자가 열렸을 때 둘의 반응은 판이하게 엇갈렸다.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멀찍이서 팔짱만 끼고 있던 테고가 상자 앞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이네는 생각했던 마법검이 아니라 실망한 기색이었다.
“이건…….”
“역시 기사님은 아시지요? 저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직접 제련 과정에 참여하고 남은 걸 하사받으셨다고 하더군요.”
검신 표면이 물결치는 듯한 소용돌이.
틀림없는 그 검이었다.
* * *
“아까 그 검이 그렇게 좋았어요?”
“공식적으로는 제국에 열 자루 남짓밖에 없는 검이 아닙니까.”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와중에도 테고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아이네가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아까 그자의 검은 시제품 단계라 진검으로 인정받긴 어렵겠지만 애초에 그런 것조차 별로 남아있질 않으니까요.”
정말, 우리 여주님은 검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구나. 어느새 그런 거까지 파악했대?
아이네의 눈동자와 목소리에서 조금씩 영혼이 사라져갔다.
“흐음, 하긴 원재료도, 제조법도 소실되었다고 알려져 있긴 하지요.”
“공녀도 다마스커스 검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순식간에 마주 앉은 그녀에게로 바짝 다가온 테고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반짝였다.
알다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잔뜩 쌓여 있을 텐데……. 아이네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처음 봤을 땐 신기해서 좀 알아봤으니까요. 그런데 어차피……. 어?”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아이네의 동그란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자고로 레어템에 흔들리는 것은 오덕, 아니, 마니아의 숙명!
그리고 테고와 가까워질 수 있는 찬스!
“최상급 다마스커스 검 보여줄까요?”
“그게 공작성에 있습니까?”
툭 말을 내뱉고 아이네는 뒤늦게 멈칫했다.
‘가만, 거기에 테고를 데려가도 되나?’
하지만 이제 와서 말을 무르기엔 저 기대에 찬 눈이 부담스러웠다.
최상급 다마스커스 검, 그런 게 있다면 저도 꼭 보고 싶네요, 하핫!……이라고 말하면 안 되겠지?
그래서 아이네의 뇌는 맹렬하게 자기합리화를 시전했다.
어차피 거긴 원작에 등장하는 곳이 아니었다.
수상한 게 나오는 곳도 아니고.
내가 데려가지 않으면 테고 혼자 가볼 만한 데가 아니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망설임을 담은 아이네의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으음, 대충 비슷한데……. 그럼 비밀로 해줄 거예요?”
그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다마스커스 검이 어떤 검인가.
검깨나 다룬다는 자들뿐 아니라 수집가들도 탐을 내는 진귀한 명검이었다.
그 강도와 탄성은 신물이나 오리할콘, 아다만티에 버금갈 정도였다.
오죽하면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검이라 일컬어졌다. 애초에 상급은커녕 단순히 진검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검조차 드물었다.
테고는 아까부터 의식적으로 그녀에게 닿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순간 깡그리 잊을 정도로 최상급 다마스커스 검의 유혹은 강력했다.
한편, 수습할 말을 끈질기게 찾고 있던 아이네의 뇌리를 무언가가 뒤늦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잠깐. 안 가겠다는 얘길 먼저 꺼내게 만들면 되는 거 아냐?’
그래, 뭔가 저도 손해는 보지 않을 만한 조건이라도 달아서 말이다.
아이네는 작전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미적지근하게 굴던 방금과는 다르게 그녀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귀엽고 무해하게 생긴 외양과 다르게 아이네는 제게 유리한 기회를 놓치지 않는 여자였다.
거기에 달콤한 눈웃음과 은근한 목소리는 덤이었다.
자고로 모든 거래의 기본은 선제시다. 그리고 아이네는 기본에 충실한 타입이었다.
“하나 더, 나랑 친구 해준다고 약속하면 보여줄게요.”
“…….”
무심코 그녀와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려던 테고가 흠칫하며 좌석 등받이로 바짝 물러섰다.
도대체가 방심할 수 없는 공녀가 아닌가.
흔히 보기 힘든 명검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그녀의 생글거리는 얼굴 때문인지 몰라도 테고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 바람에 멈칫한 그에게 아이네가 채근했다.
“나랑 친구 하면 보여준다니까요? 뭐어, 싫으면 말고요.”
아이네는 새끼손가락만 치켜든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테고는 여전히 등받이에 몸을 묻은 채로 경계 어린 눈빛만 보냈다.
‘또, 또 그놈의 친구 소릴…….’
거기엔 미약하게나마 반항기도 깃들어 있었다.
그 모양새가 꼭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새끼 고양이 같아서 그녀는 어쩐지 오기가 생겼다.
자신도 긴가민가하며 내건 조건이지만, 친구가 뭐 어때서!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물론 아이네 역시 지지 않고 두 눈을 부릅떠 맞받아쳤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원작 시작 전까지 내가 어떻게든, 기필코! 친구 하자는 말 듣는다. 두고 봐.’
혹시 자신이 반할까 봐 거리 두는 걸지도 몰랐다. 하긴 들키지 말아야 할 비밀이 보통 비밀이어야지.
마음 같아서는 여자인 걸 안다고 밝히고 곁에서 응원해주고 싶지만.
그리 되면 제가 테고의 비밀을 어떻게 아는지도 털어놓아야 한다.
책빙의자라는 걸 밝히는 건 최후의 수단이어야 했다. 아이네는 책빙의의 철칙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비참한 결말을 맞는 게 아니라면 전개를 너무 비틀진 말 것!’
그도 그럴 게 소설의 가장 큰 위기가 반란과 전쟁이었다. 가만 놔두면 이길 상황에 변수를 너무 많이 만드는 건 좋지 않다.
‘그래도 여주의 친구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허용 범위지.’
그러니 이건 일종의 거래다. ‘그곳’은 아이네에게도 비밀장소와 같은 곳이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테고는 제법 괜찮은 거래 상대다.
‘테고 경이 얼마나 입이 무거운지는 내가 원작에서 이미 다 봤지.’
어차피 ‘그곳’은 욕심난다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장소도 아니니 좋아하는 검이나 실컷 보게 해주지, 뭐.
그러나 마차가 본관 앞마당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더 밀어붙일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그녀가 새침한 표정으로 뻗었던 손가락을 거두고 선심 쓴다는 듯 덧붙였다.
“치이. 앞으로 한 이틀 정도는 드레스 치수 점검해야 해서 바빠요. 그럼 특별히 시간을 더 드릴 테니 사흘 후까지 입장을 정해 오세요.”
아이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고가 캐물었다.
“공작성 안에 있는 곳입니까?”
거참, 끈질기네.
“뭐어, 가보면 알아요. 일단 오빠한테는 비밀이에요.”
먼저 마차 문을 열고 내리려던 아이네가 그를 돌아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아이네! 호위는 꼭 데리고 나가라고 했지!”
아이네가 마차의 발 디딤판에 발을 내딛자마자 나딘이 빽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다. 그 탓에 그녀는 테고가 자신의 별 의미없는 행동에 바짝 얼어버린 걸 알 수 없었다.
나딘은 마차가 성안으로 들어올 때 이미 보고를 받고 나와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아우, 진짜. 테고 경이랑 같이 간다는 보고 못 들었어?”
“아무리 그래도 둘만 외출하면 어떡해.”
아이네는 오빠인 나딘이 무얼 걱정하는지 대강 알았다.
아마 가족들도 그렇고 공작가 사용인들도 자신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공녀님인 줄로만 알고 있을 터.
정 없고 삭막하다는 황도에서 온 귀족 청년과 섣부른 연애라도 할까 봐 걱정인 거다.
‘하지만 전부 다 틀렸단 말씀.’
일단 자신은 세상 물정 모르는 공녀님이 아니었다. 이래 봬도 각종 미디어가 넘쳐나는 현대에서 온갖 간접경험은 다 해본 몸이란 말이지.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테고는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
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남자를 꼽으라면 바로 테고일 텐데.
그녀가 속으로 혀를 차며 나딘에게 다가갔다.
“너어……!”
허리에 손을 얹고 눈에 잔뜩 힘을 준 걸 보니 또 오빠 같은 소리라도 하려나 보다.
괜히 잔소리 시작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 했다.
“오빠, 올리브 물품세 인하 공문 언제 돌렸어?”
효과는 굉장했다.
나딘은 멈칫하다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뭐? 그거는, 지난달 중순 전에 이미 다 내려갔지.”
역시, 누군가 중간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위에서 엄격하게 감독해도 아래에서 착복하려는 시도는 늘 있었다.
이러니 시장 상인들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중간관리자들에게 보고서를 올리라고 하면 좋은 말만 써서 얼버무릴 게 뻔하니까.
“기존이랑 물품세를 똑같이 받는 곳이 있는 거 같아. 그래서 올리브 매입량이 확 줄어들었다고 하더라고.”
“이번엔 또 누구야? 하여간……! 로버트! 누가 로버트 좀 불러와 봐.”
로버트는 나딘의 보좌관이었다.
물론 보좌관이라고 쓰고 나딘 전용 동네북이라고 읽기도 했다.
나이가 젊은데도 참 똑똑하고 순한 청년인데 박복하기도 하지.
아이네는 오빠 밑에서 일만 하느라 연애 한 번 못 해본 불쌍한 로버트에게 마음속 깊이 애도를 표했다.
팔짱을 끼고 제 보좌관을 기다리던 나딘이 아이네의 손가방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래서 베룸의 큰손께서는 오늘은 뭘 잔뜩 사 오셨나?”
“……오늘은 누구 때문에 거의 사지도 않았어!”
생각해보니 자신은 테고가 잔소리하는 바람에 뭘 제대로 사지도 못했는데!
‘이래놓고 친구 안 한다고 버티기만 해 봐라.’
작은 아이네를 건드리면 큰일 나는 거야, 어?
“…….”
그녀가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있는 테고를 노려보며 씨근덕거렸다.
그 바람에 그는 정신을 차리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이네의 원망 어린 눈빛을 받아야만 했다.
테고는 주춤거리며 허공을 바라보는 척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거 봐. 여섯 개밖에 안 산 게 말이 돼?”
“…….”
생각해볼수록 열 받네. 잠시 잊고 있었던 분노가 점진적으로 그녀를 잠식해나갔다.
원래 별로 말이 없는 테고였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 조금 더 과묵한 남자가 되어있었다.
“몰라, 방에 갈래. 저녁 때까지 나 부르지 마!”
“저거 저거, 하여간 나이만 먹었지. 어휴.”
“…….”
그리고 나딘은 테고의 무표정해보이는 낯에서도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을 찾아냈다.
“경과 무척 친해졌나 보네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저럴 애가 아닌데, 흠.”
“그렇습니까.”
그렇게 아이네가 있는 대로 발을 구르며 사라진 직후, 나딘이 테고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한 겁니까?”
“뭘 말입니까.”
그러고는 제법 친근하게 악수를 청하며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경께서 아이네의 충동구매를 막은 비법 말입니다.”
“막은 것까진 아니고…….”
엉겁결에 뻗어진 손을 맞잡은 테고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우리 집 소비요정이 저거밖에 안 사고 돌아왔대요? 안 그래도 자잘하고 쓸데없는 것만 잔뜩 사 모으는 취미가 있거든요.”
잡은 손을 흔들며 정신없이 웃어젖히던 나딘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정말로 이 남매는 사이가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뭐가 됐든 아이네가 심통이 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딘은 기쁜 듯했다.
그렇게 동생의 불행을 제 행복으로 여기는 전형적인 오빠, 나딘은 로버트가 올 때까지 테고를 붙잡고 낄낄거렸다.
* * *
“아참, 저번에 작성하신다던 보고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직 기한이 좀 남아서 천천히 쓰고 있습니다.”
테고는 그동안 나딘과 제법 친해졌다. 경위서가 됐든, 보고서가 됐든 서류에 대한 나딘의 열정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렇게 시작된 조언은 이제 시간이 날 때면 나딘의 집무실에서 행정업무를 배우는 일로 이어졌다.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었다. 그래서 리테루온 공작령은 황실에서 보낸 대리인이 행정을 맡았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황제가 작고한 리테루온 선공작과 친우인 데다 테고의 대부라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숨겨진 속내는 따로 있었다. 당시 겨우 열넷이었던 어린 공자를 제 입맛대로 좌지우지하려는 방계 혈족들을 조기에 차단하기 위해서였으니.
반란군 토벌을 떠나기 전 아슬아슬하게 미성년이던 테고는 3년이 지나 성년이 되었다. 이제 곧 그가 직접 나서야 할 시기가 머지않았다.
영지경영도 그렇지만, 요즘 들어 테고는 보고서를 쓰며 부쩍 황제와의 대화를 되짚어보고 있었다.
약혼……. 약혼이라. 꼭 해야 한다면 공녀와 해도 나쁘지 않…….
아니, 황태자비 후보인 공녀를 두고 대체 무슨 생각을.
“…….”
테고는 굳은살이 잔뜩 박인 제 손바닥을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그는 늘 자신을 선택지가 모두 지워진 상태에서 단 하나만 남은 답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황제가 이끌어주는 삶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이렇게 자신을 잡아끄는 존재는 검 이후로 처음이었다.
하지만 사물과 사람은 다르다. 테고는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 * *
“으음, 이 시간쯤이면 아이네의 일정도 거의 끝났을 텐데.”
“근육통은 이제 완전히 나았다고 합니까?”
“팔도 움직이고 멀쩡히 걸어 다니는 걸 보면 괜찮을 겁니다. 걔는 운동을 좀 해야 해요.”
아이네는 테고와 외출한 다음 날, 하루 꼬박 근육통으로 앓아누웠다.
아가씨가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한다며 사라는 눈물 바람으로 집무실에 들이닥쳤었다.
그때, 굳은 얼굴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던 나딘을 테고는 기억했다.
그러나 금세 제 동생에게 다녀온 나딘은 또다시 책상을 두들기며 웃어댔다. 언제 심각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큭큭, 침대에서 바둥거리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더라고요. 어제 무얼 했길래 애가 저럽니까?”
“…….”
테고는 더도 덜도 말고 사실만을 말해주었다. 레이피어를 딱 한 번 휘둘렀노라고.
그 정도로 앓아눕는 약한 인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남들이 보기엔 표정 변화가 없는 그였지만 실은 적잖이 당황했다.
도대체 얼마나 근육이 없으면…….
나딘 공자가 늘 공녀를 유리구슬처럼 여기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운동 신경은 어느 정도 있는 듯했는데…….
“황도에도 소문이 났죠? 아이네가 몸이 약하다고.”
“시한부라고들 하더군요.”
테고가 무심하게 말했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황도는 물론이고 베룸 영지의 사교계에서도 공녀는 미지의 인물이었다.
성안에 틀어박혀서 도통 사교활동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뿐이랴, 황제가 베룸 공작에게 매년 공녀의 데뷔탕트를 제안하는데도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들었다.
“지금은 아닌데, 어렸을 때는 정말로 많이 아팠어요.”
나딘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정작 아이네와 마주치면 투덕대며 싸우기 바쁘다가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세상에 둘도 없는 팔불출이 되었다.
“원래 태어날 때부터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작았다고 하더라고요. 주치의가 고비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으니까요.”
처음엔 또 시작인가 싶어 묵묵히 듣기만 하던 테고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반응을 보이며 아이네 일대기를 경청했다.
“병이 있었습니까?”
“병이라기보다는 타고나길 허약한 체질이었던 거지요. 심지어 아이네가 열한 살 때는 한순간이지만 숨까지 멎은 적이 있으니까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서류를 처리하던 나딘의 눈이 잠시 젖어들었다.
곁에서 서류 양식들을 눈에 익히고 있던 테고도 눈치챌 정도였다.
고개를 저어 울적한 추억을 털어낸 나딘이 힘이 빠진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 8년 전 여름 이후 아이네의 삶은 덤이라고 생각해요. 나쁜 길로 가지만 않는다면 그 애가 건강하게 지내는 거 외엔 바라는 게 없어요.”
“…….”
테고는 그제야 왜 공작성의 모든 이들이 아이네에게 지나치리만큼 약하게 구는지 알았다.
귀여운 외양에 미워할 수 없는 성격 덕분인 줄 알았더니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8년 전 여름이라니. 운명은 참으로 얄궂기도 하지.
테고의 부모님이 그의 여동생을 만나러 마차를 타고 일족의 땅에 갔다가 사고를 당했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누군가는 그즈음 죽음에 가까이 갔다가 돌아오고, 누군가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구나.
순간, 테고가 문득 드는 생각에 나딘에게 물었다.
“혹시 고열이 빈번한데 병명은 알 수가 없고, 발작주기가 불규칙하지 않았습니까?”
“……경께선 어떻게 아십니까?”
날 때부터 연약했다는 사실은 좀 다르지만 혹시, 혹시.
그때였다.
“오빠! 나딘!”
집무실 문을 걷어차듯 등장한 아이네가 무거운 공기를 와장창 부숴버렸다.
드레스 치수를 다시 맞춘다더니 아마 도중에 뛰쳐온 모양이었다.
다짜고짜 발걸음을 옮겨 나딘의 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제 목을 가리켰다.
“오빠가 보기에도 이거 개목걸이 같아?”
“이게 뭔데?”
“초커잖아, 초커.”
갑작스러운 아이네의 등장에 저도 모르게 일어선 테고도 그녀의 목에 눈길을 주었다.
가느다랗게 재단해 목을 감싼 천에 화려한 보석 브로치 같은 게 달려있었다.
으음, 공녀가 말하지 않았다면 그저 목에 달린 장식이라고 여겼겠지만. 개목걸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어쩐지…….
하지만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과묵한 테고의 성격이 이번에도 그를 살렸다.
말 대신 침묵을 지킨 테고와는 달리 나딘은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큭큭. 아, 그러네. 개목걸이네, 완전히.”
“지금 나보고 개라고 한 거야?”
“왜 나한테 그래. 개목걸이 같냐고 먼저 물어본 게 누군데.”
또다시 나딘과 아이네가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병약했다던 과거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생기가 넘쳐 보였다.
‘하긴 일족의 땅에 가지 않고도 나았다면…….’
다시 조금은 씁쓸해진 기분에 사로잡힌 테고에게로 남매의 화살이 돌아왔다.
“테고 경, 말해 봐요. 경이 보기에도 이거 개목걸이 같아요?”
“그래, 제3자한테 한번 물어보자. 넌 왜 오빠 말을 곧이곧대로 안 듣는 건데?”
베룸 공작가 남매는 똑 닮은 얼굴과 표정으로 부담스럽게 테고를 응시했다.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천천히 말을 고르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글쎄요, 답답해 보이긴……. 아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테고는 과묵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남자였다. 결국, 이번에도 베룸 남매는 그의 대답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했다. 그러다 급기야 서로 삿대질을 시작했다.
“오빠는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길래 이게 개목걸이로 보이는 건데?”
“야, 말은 똑바로 해라. 개목걸이라는 말을 먼저 한 건 아이네, 너야.”
“…….”
늘 생각하지만 이 남매를 보면 수도 경비대에서 키운다던 군견이 생각났다. 서로 으르렁거리다가도 몇 분 뒤면 함께 바닥을 구르며 놀곤 하는.
지체 높은 공작가 자제들을 개로 비유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보통의 남매가 정말 다 이렇진 않을 거라 믿는다.
테고는 제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펴며 아이네의 목에 걸린 초커라는 것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개목걸이든 아니든 저 정도의 미모를 지닌 공녀가 착용하고 나타난다면 단박에 새로운 유행이 될 터였다.
가느다란 목에 빈틈없이 감겨든 천에 눈길이 갔다. 희고 연약해 보이는 목에 갖다 대기엔 거칠어보이기도 하고.
옷감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조금 더 부드럽고 매끈한 재질로 하는 게 좋지 않나.
자신도 모르게 귀 아래로 이어진 유려한 목선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그저께 뒤에서 안았을 때 유난히 달콤한 향기가 나던 곳이 목이였었나.
멍하니 바라보던 그의 눈은 조금 더 아래로 향했다. 그날 입었던 단출한 원피스와는 확실히 다른 드레스였다.
‘둘 다 잘 어울리는군.’
지금의 드레스도 아담한 체형의 그녀에게 굉장히 잘 어울렸다. 하긴 무슨 옷을 입은들 어울리지 않을까.
“오빠가 패션을 알아?”
“내가 알아야 되냐?”
씩씩거리던 아이네가 결국 나딘에게서 등을 돌리고 쿵쿵거리며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문을 열기 직전, 남매 전쟁을 관전하고만 있던 테고를 정확하게 지목했다.
“답답해 보인다고 했죠? 그럼 엄청 파인 드레스 입고 차면 되겠네.”
“아이네! 그런 드레스는 아직 안 된다고 했지!”
“오빠가 무슨 상관이야!”
결국, 문을 열고 나가버린 아이네의 뒤를 나딘이 급하게 따라나섰다.
복도의 울리는 남매의 목소리가 테고의 예민한 청각에 모조리 걸려들었다.
“너어, 황도로 가져가는 드레스 전부 검사할 거야.”
“오빠가 보면 알기나 해? 그 나이에 애인도 하나 없는 게!”
혼자 남은 테고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아까 공자가 말하기로는 나쁜 길만 아니면 공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둔다고 하지 않았나.
* * *
나딘은 그 뒤로 아이네가 정말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고르는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쯤 되니 별생각이 없었던 그녀도 삐딱한 마음이 생겼다.
‘어차피 이제 성인인데, 과감한 거 하나 골라 봐?’
베룸 영지는 비교적 북쪽에 있다 보니 여름이 짧아서 드레스의 노출 부분이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황도의 사교계는 뭐든 화려하고 튀어야 유리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종종 파격적인 디자인이 등장한다고 들었다.
‘기껏 이런 몸을 타고났는데 장점을 살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아이네는 열한 살의 소녀에게 막 빙의했을 때를 떠올렸다.
숨을 크게 몰아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만큼 살아있는 게 기적인 몸이었다.
몸에 좋다는 귀한 약초도 그녀에겐 버겁기만 했다. 약에 취해 까무룩 잠들었다가 깨어나길 여러 번.
겨우 팔을 들어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건 앙상하게 마른 팔과 작은 손뿐이었다.
‘그때는 하필 다 죽어가는 몸에 들어왔다고 절망했었는데…….’
몇 번이고 자신은 왜 여기에 있으며, 당신들은 누구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만 흥분해도 몸에 무리가 가는 바람에 그러질 못했다.
그렇게 처음 석 달 동안 그녀의 입에서는 그저 색색거리는 가쁜 숨만 터져 나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서 자연스럽게 베룸 공작가에 스며들 수 있었다.
소중한 공녀의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는 걸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는 가족은 없을 테니까.
“정말 이러다가 죽는 건가 싶었지.”
아련한 표정으로 드레스 시중을 받는 아이네에게 사라가 말을 걸었다.
“어제오늘 많이 힘드셨어요? 저는 우리 아가씨가 이렇게 건강해져서 하루에 스무 벌도 넘게 드레스를 갈아입는 걸 보니까 눈물이 다 나던걸요.”
“아니야, 사라. 으음……. 나 어릴 때 아팠던 거 기억나?”
어린 시절 아팠던 이야기를 꺼내자 사라의 눈동자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아이네는 질문을 한 것을 금세 후회했다.
“아니, 울리려고 한 말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
정작 당사자는 크게 감흥이 없는데 말이다.
이렇게 아이네의 주변은 그때를 떠올릴라치면 눈물바다가 되곤 했다. 감흥이 없다고 했지만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 역시 늘 가슴이 먹먹했다.
“사, 사라. 나 여기 허리 부분 어때? 너무 끼지 않아? 그새 살이 좀 쪘나 봐. 그렇지?”
아이네가 급히 말을 돌리려 애쓰는 것에 화답이라도 하듯 사라가 옷 소매로 눈가를 닦아내곤 훌쩍이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조금만 살이 더 붙으셨으면 좋겠어요. 아가씨가 오징어 편식만 안 하셔도 훨씬 건강하실 텐데. 어릴 때는 곧잘 드시더니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입맛이 바뀌어 버리셨지 뭐예요.”
“윽.”
이 좋은 분위기에 꼭 그렇게 오징어를 끼얹어야 해?
아이네의 눈가와 가슴이 바싹 마른 오징어처럼 모두 메마르게 변했다.
그래도 지금은 덜하지만, 종종 ‘다른 사람 같다’라는 말을 들으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마 그녀가 빙의한 몸이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소녀가 아니었다면 진작 들키고도 남았을 테지.
그것도 아이네의 가족들처럼 화목한 가정이라면 더더욱.
“아유,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뒤늦게 크는 사람도 있대요.”
“사라, 나 열아홉이야.”
이미 늦었어. 성장판은 다 닫혔다고.
한창 자랄 시기에 너무 독한 약초를 써서인지 아이네는 성인이 되어서도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차성징 전에 몸이 나아져서 다행이야.’
고개를 내려 아래를 바라본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팔다리가 마른 것에 비해 아주, 아주 훌륭했다.
이게 바로 유전자의 힘이다! 어머니, 공작부인!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면 키도 이 정도면 그렇게까지 작은 편은 아니었다.
이 세계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너무 큰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아이네!
나딘이 일깨운 청개구리 심보와 더불어 그녀는 갑작스레 자신감이 상승했다.
그래서 아이네는 사라를 붙잡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마음이 바뀌었어, 사라. 마담 클로제한테 아까 보여준 그 드레스도 같이 준비해달라고 해줘.”
* * *
그렇게 그녀가 근육통으로 앓아누웠다 회복하여 드레스까지 모두 맞춘 저녁 시간.
일정이 하루씩 밀렸는데도 테고는 이에 대해 말 한마디 없었다.
‘혹시 잊어버린 거 아냐?’
식사하는 내내 아이네는 테고를 힐끔거렸다. 그렇다고 나딘도 있는 자리에서 ‘그곳’ 이야기를 할 순 없으니까.
이제 테고와 나딘, 아이네까지 함께하는 저녁식사는 일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오늘도 시비를 걸어오는 나딘에게 건성으로 대응하며 아이네는 기회를 노렸다.
무슨 기회냐고? 내일 나딘 몰래 빠져나가 ‘그곳’에 갈 작전을 미리 논의할 기회 말이다.
거창한 건 아니었다. 대강의 만날 시간과 장소만 정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와, 설마 나랑 친구가 되느니 다마스커스 검 안 보고 말겠다, 이런 건 아니지?’
분명 처음엔 그러길 바라서 붙인 조건이긴 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나오니 조금 약이 올랐다.
이래 봬도 아무나 갈 수 없는 장소였다.
‘원작대로라면 테고는 그래도 통과 정돈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오늘따라 나딘은 끈덕지게 오징어 스테이크를 권유해왔다. 그런 그를 외면하며 아이네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베룸 가문이 원작에서 거의 언급이 안 되어서일까. 공작성 뒤편에는 원작에선 등장하지 않는 공간이 있었다.
정확히는 원작에 등장하긴 하는데, 이게 베룸에서는 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고 해야 하나.
‘경계 내부가 숲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아이네의 베룸 영지와 테고의 리테루온 영지는 각각 제국의 북서와 북동쪽의 국경에 위치해 있었다. 원작의 설정상 제국을 세운 네 일족이 제국의 경계를 지켰다고 나와서인 듯했다.
그러니 경계인 산맥에 걸쳐 있는 경계 너머의 공간은 일종의 작품 배경인 셈이었다.
잠깐 들르는 정도로는 중요한 전개에 영향을 주지 않을 터였다.
무, 물론 그런 것치고는 꽤 스케일이 크긴 하지만…… 아이네는 애써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작가가 설정 덕후인가 보지. 아니면 연작이라도 생각하고 있었든지.’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나딘이었다.
‘자기도 두 번이나 같이 가놓고서.’
그것도 깊은 곳까지 들어간 건 단 한 번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인 베룸 공작은 이유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이 경계에 접근한 것을 귀신처럼 알아채고 혼을 냈다. 그 뒤로 나딘은 다시 가보잔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하여간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기로는 테고랑 쌍벽일 거야.’
아이네의 시선이 나딘을 향해 돌아갔다.
“아이네, 이거 한 입만 먹어 봐. 제럴드가 이번엔 아주 칼을 갈았다니까? 오징어 육즙이…….”
“제럴드보고 레시피 개발 좀 제발 그만하라고 해. 우리 이젠 평범한 것 좀 먹으면 안 돼?”
나딘이 한 입 크기로 썰어준 스테이크 조각 그릇을 밀어내며 아이네가 질색했다. 어디서 자꾸 끔찍한 혼종 신메뉴가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
그 순간만큼은 옥신각신하는 두 남매를 테고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아, 배가 너무, 너무 부르다. 오늘은 드레스 때문에 피곤하니까 일찍 자야겠는걸?”
한없이 어색한 어조와 말투로 이야기하며 아이네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딘은 그녀가 오징어를 먹기 싫어서 자리를 피하는 줄로만 알고 그저 눈을 흘겼다.
“너 이제 나이가 열아홉이야. 언제까지 편식할 건데!”
“몰라. 나는 나보다 약한 녀석의 명령 따위는 듣지 않는다.”
그렇게 대충 대꾸한 아이네는 다이닝룸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본관 현관 근처에 몸을 숨겼다.
미리 준비해둔 실내화로 갈아 신은 그녀는 숨을 죽였다. 이 순간만큼은 때를 노리는 한 마리의 맹수와도 같았다.
물론 그건 아이네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로비를 지나다니는 집사와 사용인들은 어렵지 않게 그녀를 발견했다.
다만 굳이 의문을 표하고 일일이 반응하는 자들이 없었을 뿐. 이제 와서 그러기엔 그들은 아가씨의 깜찍한 기행에 너무나 익숙했다.
“아가씨께서 또 뭔가 계획하시는가 본데.”
“쉿! 그냥 넘어가. 우린 아무것도 못 본 거야.”
그래서 이번에도 서로 눈빛만 교환하며 모른 척했다.
‘좋아, 테고가 별관에 들어가면 바로 덮친다.’
아,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 정정해주자면 당연히 그런 의미의 ‘덮친다’는 아니었다.
이상하게 요즘 계속 제 취향을 강조하는 기분이 들지만, 아이네는 철저하게 이성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그것도 무조건 잘생긴 남자!
그래서 테고의 조각 같은 얼굴을 볼 때마다 벌어지려는 입을 가까스로 단속할 수 있었다.
왜냐면 테고는 여자니까! 이것만큼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었다.
‘왔다, 왔어.’
드디어 테고가 저녁을 다 먹고 별관으로 돌아가려는 모양이다. 그런 그의 뒤를 아이네가 조심스레 밟았다.
“…….”
혹시나 발소리가 날까 푹신한 실내화로 갈아 신은 용의주도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윽!’
하지만 그녀는 용의주도함을 얻고 스피드를 잃었다.
이 세계의 실내화는 오로지 푹신한 카펫 위에서만 신도록 만들어졌다는 걸 잠시 깜박한 탓이다.
그래도 아이네는 테고의 걸음걸이가 느린 편이라 다행이라고 여겼다. 게다가 그가 이따금 멈칫거려준 덕분에 아이네는 별관까지 가까스로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나, 두울, 세엣, 네엣, 다섯!’
테고가 별관 문을 열고 들어간 뒤 그녀는 속으로 다섯까지 셌다.
그렇게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간 아이네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어?”
손님이 왔을 때만 사용하는 별관이긴 해도 로비에는 항상 불을 켜두는데…….
여기 근처 어딘가에 로비를 밝히는 조명과 연결된 마정석이 있을 터였다.
평소에는 와볼 일이 없던 별관 벽을 더듬는 아이네의 손목이 탁, 하고 잡혔다.
“으앗!”
그녀의 몸이 그대로 뒤로 돌려졌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머리 위에서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녀가 도대체 여기까지 왜 온 겁니까.”
꼭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제야 아이네는 제가 그에게 커다란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남장 여주들이 정체를 가장 잘 들키는 순간이 바로 개인 공간에서 안심하고 있을 때였다.
자신이야, 테고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 어떤지 알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만약 그 전에 알게 된다고 해도 비밀을 기꺼이 지켜줄 생각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미래를 모르는 테고는 낯선 환경에서 정체를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제 생각이 짧았다.
‘화……났으려나.’
미안함을 가득 담아 아이네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그의 셔츠 가슴팍 언저리였다.
이렇게 가까이 마주 서 보니 새삼 테고와의 키 차이가 실감났다.
아이네는 조금 더 시선을 들어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울렁이는 그의 목울대와 날카롭고 갸름한 턱 끝까지가 다였다.
도대체 뭐 어디까지 고개를 들어야 하는 건데! 왜 이렇게 욕심을 내서 키를 크게 설정했담?
결국, 아이네는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한 번에 고개를 뒤로 확 젖혔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곧바로 테고의 눈을 마주하게 되어버렸다.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니,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이미 테고와 벽 사이에 갇혀 더 물러설 곳도 없었다.
‘……일 났다, 화났나 봐. 화났어.’
조명 없이 어두운 와중에도 올려다본 테고의 새파란 눈동자는 형형한 빛을 품고 있었다.
마치 눈동자 속에서 피어난 시퍼런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했다.
그 바람에 아이네는 그녀답지 않게 조금 겁을 먹었다.
솔직히 여태껏 그녀는 테고의 설정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도 흑심만 안 품으면 같은 여자한테는 비교적 너그럽다고 했는데.’
아이네에게도 무심한 듯 은근히 챙겨주려는 기색이기에 방심했다.
그리고 다른 남자면 모를까, 테고에겐 절대로 이성을 향한 호감이 생기지 않을 거고, 만에 하나 생긴다 해도 내비칠 리 없기 때문이었다.
“헤헤.”
“…….”
안 통하네.
아이네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종종 냉담한 시선이나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이긴 했어도 이렇듯 무섭게 쳐다본 적은 없었는데.
하기야 자신이라도 화가 났을 법했다. 여자임을 들키는 순간 테고의 공작위는 방계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단순히 정체를 들키는 정도로 끝나는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를 배려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는 일생이 달린 문제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엔 내가 잘못했네.’
그녀의 어깨가 불쌍하게 축 내려앉았다.
그래도 상황을 수습하긴 해야 했다. 아이네는 억지로 입가를 길게 늘이며 모른 척 입을 열었다.
“어, 어어. 테고 경, 방에 안 들어갔어요?”
“…….”
능청스러운 그녀의 태도에 테고는 그만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부터 무언가 이상하다 싶었다. 나딘 공자와 틱틱거리면서도 계속 제 눈치를 보던 공녀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나 싶어 내심 기대를 했다.
그런데 말을 걸긴커녕 식사도 먼저 끝내버리고 사라졌더랬다.
이후 그녀를 발견한 건 본관 로비에 놓인 동상 뒤였다. 물론 굉장히, 엄청나게 수상했다.
하지만 분주하게 로비를 오가는 다른 사용인들이 모른 척하기에 그도 그냥 두었을 뿐이었다. 테고는 그 나이 또래 영애들의 습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으니까.
본관 앞 정원을 가로질러 뒤를 쫓아올 때도 진작에 알아챘다.
제 딴에는 살금살금 기척을 숨긴다고 노력한 것 같지만.
그러기엔 바닥에 질질 끌리는 실내화 소리가 너무 컸다. 그때쯤 되자 테고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알아채주길 원하는 건가.’
선뜻 판단하기 어려워 그는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그래도 따라오기 벅차하는 것 같아 중간중간 멈춰 서 보기도 했다.
혹시 먼저 다가와 말을 걸지도 모르니까.
결국 그가 별관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아이네는 뒤를 따르기만 했다.
‘설마 안까지 들어오려고 하겠어?’
본래대로면 테고를 시중드는 사용인이 한둘쯤 배정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지난 삼 년간 반란군 토벌 현장에서 굴렀던 그였다. 때문에 반란군들의 게릴라 공격에 늘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나딘 공자와 집사에게 저녁 이후로는 사용인을 물러 달라 부탁했다.
몇 년간 몸에 새겨진 습관이 하루아침에 없어질 리가.
잘 때는 더욱 예민해지는 감각이 아직도 날카롭게 벼려진 채였다.
‘나밖에 없는 별관에 조용히 숨어들어오는 공녀라…….’
그것도 이 야밤에 말이다.
“어?”
“…….”
조심스레 별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테고는 착잡함 반, 뜻 모를 감정이 반쯤 차오르는 걸 느꼈다.
순진하게 웃으며 ‘친구’를 하자고 그렇게 조르더니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나.
요즘 자신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벽을 더듬어 조명을 밝히려는 아이네의 손을 다소 거칠게 잡아채 밀었다.
‘아…….’
레이피어를 휘두르는 걸 도와줄 때도 느꼈지만 참으로 조그맣고 가냘팠다.
한 손에 잡히고도 남는 가느다란 손목에, 정수리는 제 가슴팍에 겨우 찰까 말까 했다.
새삼스레 체감되는 작은 체구에 더 기가 막혔다. 도대체 뭘 믿고?
‘순진한 것도 정도가 있지.’
뜻 모를 감정이 분노였나 보다.
절로 이를 꽉 악물게 되는 걸 보면.
이 순간에도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맑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이젠 가슴 언저리 어딘가가 뜨거워졌다.
오냐오냐 길러져 세상천지 무서운 것도 모르는 공녀가 아닌가.
안 그래도 자신을 마치 제 오라비라도 되는 양 경계심 없이 다가오는 게 어딘지 거슬렸는데.
분명 어느 때는 나딘의 심정과 같은 걸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녀에게 남매 취급만은 받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노릇인지.
그래도 지금은 아까와는 달리 자신이 느끼는 감정 중 하나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어, 어어. 테고 경, 방에 안 들어갔어요?’
허탈함.
절로 한숨이 나왔다. 조금쯤 겁을 줘볼까 생각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엉뚱하기 그지없는 물음.
그래서 테고의 입에서는 짓씹듯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의식한 건 아니었으나 ‘남자 혼자’라는 단어까지 넣어서.
“……어디 겁도 없이 남자 혼자 묵는 건물에 따라 들어옵니까?”
“아, 그게. 내일 언제 출발할지 약속을 아직 안 잡았잖아요. 우리.”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며 테고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서서 아이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테고의 속은 다시금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겨우 그걸 말하겠다고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왔다고?
“다마스커스 검 보여 달라고 할 땐 언제고! 설마 잊고 있었어요?”
조금씩 저릿해지기 시작한 제 손목을 매만지며 아이네가 입을 비죽거렸다.
그 손목에 힐끔 시선을 주는 테고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
“원래대로면 약속은 오늘 아닙니까.”
기억하긴 기억하고 있었구나.
내내 언급도 안 하길래 저는 그가 깜박 잊기라도 한 줄 알았다. 그것도 아니면 자신과 친구하자는 조건 때문에 포기했거나.
“그럼, 왜 묻지도 않고…….”
“지금 이 상황에 그게 중요합니까?”
아이네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하마터면 정체가 들킬 뻔한 상황이었다. 그에 비하면 약속을 다시 정하는 문제는 별 게 아닐 수 있지.
“하긴, 그렇죠?”
아이네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테고는 뭔지 몰라도 아이네가 단단히 잘못 짚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이 공녀는.’
하지만 역시 그걸 표현해낼 만한 말재간도 없고 감정 처리도 미숙해 그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렇게 테고는 답답한 심정을 그저 억누르려 애를 썼다.
그러는 동안 아이네는 저 홀로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별관엔 얼씬도 하지 말아야겠다.’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이야. 그렇다고 갑자기 이렇게 겁을 주는 게 어딨담. 힘세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잠깐 잡혔을 뿐인데도 손목이 뻐근했다. 아이네의 표정이 불만에 가득 차 금세 부루퉁해졌다. 자연히 목소리는 퉁명스럽게 새어 나왔다.
“아무튼 내일 아침 먹고 나면 그때 안내해줬던 후원 알죠? 온실 앞으로 오세요.”
말을 이어가면서도 아이네는 계속해서 제 손목을 주물렀다. 그러자 거기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긴 테고의 미간이 조금씩 좁아졌다.
분명, 세게 잡진 않았는데…….
‘잠시 손목 좀 보여달라고 해볼까.’
그러나 그런 마음과는 달리 테고의 입은 전혀 다른 소리만 내뱉었다.
“검이 온실에 있습니까?”
“그건, 아니고. 좀 멀리까지 걸어야 해요. 전에도 말했지만 오빠한테는 절대 비밀이에요!”
손목 한번 잡아보기는커녕 여성과 필요한 용건 이외의 대화를 하는 것조차 테고에겐 낯선 일이었다.
거기다 여기사들은 고사하고, 보통 귀족 영애들과 비교해도 아이네는 너무 자그마했다. 뭐라고 말을 붙여봐야 할지도 막막했다.
“…….”
그렇게 뚱한 표정의 테고 앞에서 속사포로 제 할 말만 쏟아낸 아이네는 도주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그럼, 저는 이만…….”
아이네가 드디어 등을 돌려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 참이었다.
살짝 열렸던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다시 닫혔다.
“응?”
그녀의 시선이 어깨 위로 뻗어진 채 문에 닿아 있는 커다란 손으로 옮겨갔다.
“이게 뭐 하는…….”
조급한 마음은 늘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법. 다급해진 테고는 아이네를 조금 더 붙들어 놓을 방법으로 이것밖에 떠올리질 못했다.
그래서 아이네가 오해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제 질문에 아직 대답 안 하지 않았습니까.”
비밀스럽게 낮아진 목소리에 아이네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거기다 지금은 아까와는 또 상황이 달랐다. 조금 전엔 마주 보고 있었으나 이번엔 일방적으로 그녀가 갇힌 형국이니까.
바로 며칠 전의 어느 날처럼 그녀의 등 뒤로 가까이 다가온 묵직한 열기가 이번엔 어쩐지 낯설었다.
무슨……, 무슨 질문?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등을 굳혔다. 시야에서 테고의 모습이 사라지자 이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각한 탓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조명이 켜지지 않아 어둑한 별관 로비에는 테고와 그녀 둘뿐이었다.
‘이 치명적인 분위기 도대체 뭐야.’
차마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아이네는 바짝 얼었다. 완벽하게 중저음인 목소리와 등 뒤의 열기 때문에 순간이지만 테고가 정말 남자처럼 느껴졌다.
침착하자, 아이네! 책빙의자는 이런 거에 흔들리면 안 돼.
정신없이 기억을 되짚던 그녀가 테고의 질문 중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말을 기억해냈다.
설마, 설마 지금 이거 ‘그’ 상황이야?
아이네가 제대로 떠올린 게 맞는다면,
‘……어디 겁도 없이 남자 혼자 묵는 건물에 따라 들어옵니까?’
정말로 이거라고?
그녀는 다시금 이 원작 소설이 고전 로판이라는 걸 실감했다.
이거 그거잖아. 지나치게 남자를 경계하지 않는 여주에게 가짜 위기감을 조성해주는 클리셰.
작가님, 요새는 이런 거 잘 안 나와요!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벽치기도 상황 봐가면서 하는 거지.’
아이네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이 소설의 경우엔 그런 남자 역할을 맡은 게 여주이니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었다.
물론 테고가 의도한 게 뭔지는 잘 알았다. 자신이 머무는 공간에 함부로 숨어들지 말라는 경고였을 테다.
‘내 생애 첫 벽치기의 주인공이 여자라니.’
그리고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놀란 감정 외에도 조금쯤 설레고 말았다. 원작을 아는데도 시각적 효과의 힘은 이다지도 위대했다.
아이네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파닥파닥 뛰던 심장이 점차 식어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잠시 잊고 있던 손목의 시큰거림이 되살아났다. 그러자 아이네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의도가 어땠든 간에 힘으로 약자를 겁박하는 건 비겁한 짓이다. 그녀가 보기에 그건 여자건 남자건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테고의 이 무지막지한 힘은 본인의 것도 아니지 않나. 다 아티팩트에게 빌려 쓴 거지.
아이네는 여태껏 정말로 테고의 남장에 협조하려고 무진 애를 써왔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
그러니 원작의 여주를 아끼는 입장에서 따끔하게 한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정말이지, 웬만하면 장단을 맞춰줄까 싶었는데 흥이 다 깨져버렸잖아, 책임져.
아이네가 홱 하고 몸을 돌려서 그와 마주 보았다.
“에휴, 그래서 경이 저한테 하려는 건 뭔데요.”
마침 테고는 계속해서 신경 쓰이던 그녀의 손목 쪽으로 문을 짚지 않은 손을 뻗던 참이었다. 그러나 아이네가 돌아보는 바람에 허공에서 손이 미끄러졌다.
“뭐?”
당황하여 반말이 튀어나온 테고의 모습에 아이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보니 기사 집단에서 오래 부대끼다 보니 반말이 익숙하다는 원작 설정 때문이었구나. 이런 걸 보면 원작 여주가 맞긴 맞는데 말이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어.’
아까 아이네가 느꼈던 설렘은 그렇게 의식의 수면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역시 겉모습이 너무 완벽한 남자라 일어난 해프닝일 뿐인 거다.
“손목 잡은 거까진 내 잘못이니 그렇다 쳐요. 그래서 날 여기 억지로 가두고 뭘 어떻게 하려고요?”
“억지로 가두다니…….”
그렇게 아까와는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아이네는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서 테고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이 뒤로는 뭘 하려고 했나 들어나 보자.
‘어느 정도까진 모른 척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이건 식상해도 너무 식상하잖아.’
같은 여자한테 두 번이나 설레서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그런 아이네의 반응에 괜스레 당황한 건 테고였다.
“…….”
뭘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니, 억지로 가두다니. 맹세코 그럴 생각은 추호도…….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려는 그의 손목을 아이네가 재빨리 움켜쥐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잡힌 이후로 테고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그저 가느다란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모를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어딜 가요.”
“아니…….”
결국, 어쩔 줄 몰라 입을 꾹 다물어버린 테고를 바라보며 그녀가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자, 봐요! 이렇게 마음대로 손목 잡히니까 테고 경도 기분이 좋은가요?”
테고는 제 손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 잡히지도 않았다. 작디작은 그녀의 한 손으로 움켜잡기엔 무리였던 모양이다.
‘이게 무슨 기분인 거지?’
공녀에게 잡혔다는 걸 인지하자 맞닿은 손목 부근에서 빠르게 맥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서히 몸집을 불린 열기가 핏줄을 타고 퍼져나갔다.
할 말도, 생각도 잊은 테고에게 아이네가 빠르게 쏘아붙였다.
“내가 맞혀볼까요? 어차피 테고 경은 나한테 진짜로 손댈 생각 같은 거 없죠?”
손을 대? 누구에게? 그게 무슨 뜻이지?
순식간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게 된 테고가 두 눈만 천천히 깜박이며 시선을 올렸다.
그러고는 마주친 아이네의 엄한 표정에 저도 모르게 고개만 끄덕였다.
어쩐지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하늘빛 눈동자와 눈을 마주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테고는 괜스레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저 그녀가 조금 얄미웠을 뿐이었다. 저를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공녀는 혼자서 너무나 태평해 보여서.
애초에 이렇게 작은 여자에게 겁을 주는 일을 즐길 리가.
자신이 생각해도 저는 여자와 단둘이 있는 걸 기회로 파렴치한 짓을 할 위인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거봐요. 다른 남자면 몰라도 경은 안 되지.”
아이네가 작게 덧붙인 말에 테고는 눈에 띄게 멈칫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여태 자신의 심장을 불편하게 찌르고 있던 가시의 존재를 새삼 자각했다.
그는 지금 황제 폐하의 명으로 차기 황태자비 후보 중 하나인 공녀를 관찰하는 중이 아닌가.
요 며칠간 보고서를 작성해보려고 그답지 않게 무진 애를 썼다. 이상하게 그때마다 마음이 답답해지고 다른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한 줄도 쓰지 못하고 내버려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미뤄둘 수만은 없다.
‘황도로 돌아갈 날이 얼마나 남았지?’
이어서 금발의 미남자인 황태자의 수려한 낯이 떠올랐다.
‘공녀의 입지를 생각해볼 때, 황태자비는 되어야 할 거 아니겠느냐.’
‘그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내가 다 알면서 공녀에게 그러면 안 되지.’
벽을 짚고 있던 테고의 손에 힘이 들어가 희게 질렸다. 그걸 본 아이네는 약간 소심해졌다.
너무 몰아붙였나? 진짜로 위협하려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따지고 보면 몰래 따라온 자신이 잘못한 거기도 하고.
“내일…… 내일 온실 앞에서 봐요! 친구 하자는 건 시간을 더 줄 수도 있으니까 부담되면 말……하고요.”
“……예.”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자각하기도 전에 거대한 벽에 부딪힌 테고의 목이 잠겨들었다. 지금 그는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모를 만큼 상심한 상태였다.
그렇게 오늘도 오해는 순조롭게 깊어갔다.
* * *
마침 운도 완벽하게 따르는 날이었다. 누군가 계획이라도 미리 짜둔 것 같았다. 그 숲에 가려면 바로 오늘이라고!
그리고 아이네는 오늘도 아침 식사 자리에서 오징어가 들어가지 않은 메뉴만 골라 먹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딘이 어김없이 한입 크기로 썰어놓은 스테이크 접시를 밀어주었다.
“…….”
이를 지켜보던 테고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또다.
심지어 두 사람 모두 이런 일이 일상이라는 듯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게 보통인가? 베룸 영지에 있다 보니 여태 알고 있던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게 재정립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네를 먼저 챙겨주고 나서야 나딘은 제 몫의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여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징계 위원회 열기로 했어.”
“왜? 무슨 일 생겼어?”
아이네는 포크로 조각을 콕 집어 들고 잘린 단면을 유심히 살피며 대꾸했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소고기 스테이크더라도 방심은 금물이다. 공작성의 주방장인 제럴드의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교묘하게도 내부에 오징어를 채워 구운 게 한두 번이어야지.
‘아무리 잘 숨겨도 어디선가 티가 나게 되어있다 이 말이야. 바로 누구처럼!’
요즘의 그녀는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는 법을 실전에서 훈련 중이었으니까.
“저번의 그 올리브 세금 문제 말이야. 수입업자들이랑 짜고 친 자들을 색출해냈거든.”
오, 벌써?
자신이 문제를 물어오면 말끔하게 해결하는 역할은 보통 나딘이 맡았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오빠 놈 일 처리 빠른 건 인정.’
하지만 괜히 아침부터 그를 우쭐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무릇 참된 여동생의 마음이란 이런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네는 잘게 썰린 스테이크 조각을 우물거리며 부러 우는 소릴 내었다.
“오빠는 로버트한테 월급 많이 줘야 해. 불쌍한 로버트……. 오빠 밑에서 일만 하다가 같이 노총각으로 늙어갈 거야. 흑흑.”
“야! 이번에는 내가 거의 다 했거든? 로버트는 서류 작업밖에 안 했어.”
“그게 제일 어렵고 귀찮은 건데, 뭘.”
변함없이 나딘과 투덕거리며 그녀의 입에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럼, 오늘 나딘은 하루종일 바쁘겠네?’
징계 위원회에 후속 처리까지 하려면 제아무리 나딘이라도 내일까진 정신이 없을 테다. 앞서 운이 좋다고 한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렇게 테고와 저는 넉넉하게 저녁 전까지만 공작성으로 다시 돌아와도 되겠다는 계산이 섰다.
“…….”
다만 오늘따라 테고가 이상했다. 이젠 그들 남매의 다툼에 익숙해져 무슨 소리가 오가든 묵묵하게 식사를 마치던 그였는데.
처음에 몇 번 시선이 마주치더니 그 뒤론 영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제 일을 마음에 걸려 하기엔 서로 좋게, 좋게 잘 헤어졌는데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쩐지 피곤한 듯 푸석푸석한 낯으로 오징어 수프를 겨우 두 그릇밖에 해치우지 못했다.
‘평소 먹던 양의 절반도 안 되잖아?’
아이네의 예상대로 그는 베룸 영지민들만큼이나 오징어 요리를 좋아했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알아낸 게 있었다.
테고는 복잡하고 우아한 정통 예법을 선보이면서 동시에 엄청난 양을 먹을 수 있는 대식가였다.
그녀는 여태까지 공작가 기사단의 공인된 먹보 란돌 경보다 많이 먹는 사람은 처음 봤다.
“테고 경, 오늘은 내부 일정이 있어서 도움을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루 정도는 쉬시면서 저번에 말한 보고서 작성이라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예.”
보고서라는 말에 테고의 낯빛은 더욱 거멓게 죽었다.
워낙에 말도 별로 없고 얼굴에 감정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였다. 그래서 순식간에 어두워진 분위기가 확연히 도드라졌다.
나딘이 아이네에게로 고개를 돌려 테고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테고 경 오늘 왜 저래?’
아이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도 몰라.’
결국, 그의 눈치를 보며 아이네와 나딘은 모처럼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아침 식사를 마쳤다.
* * *
가까이서 본 테고의 얼굴은 더 가관이었다. 눈 밑이 새카맸다.
‘자고로 미인은 병약해 보일 때가 제일 매력적이라지만.’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싶을 정도다. 쉽사리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를 이토록 동요하게 만들 일이란 뭘까.
“으음.”
아이네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딘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테고를 자신에게 떠맡긴 채 진작에 줄행랑을 친 뒤였다.
성격 좋은 나딘으로서도 다크 버전 테고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자고로 서브남의 역할이란 여주가 힘들어할 때 수호천사가 되어주는 것인데.
‘이래서 나딘은 서브남주도 못 되는 거야.’
졸지에 서브남의 사명감까지 등에 업은 아이네는 계속해서 테고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면서 제가 테고를 절망에 빠뜨릴 만한 말을 했나 다시 한번 되짚어보았다.
사실상 어젯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던 건 자신이었으니까.
‘내가 어제 좀 세게 나오긴 했어도 여자인 거 알고 있다고 티 내진 않은 것 같은데. 정체를 들킨 것 같아서 고민한 건 아닌 것 같고…….’
생각에 잠긴 아이네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여전히 우울한 낯의 테고가 그녀를 졸졸 쫓아왔다.
“응? 어디까지 같이 가려고요?”
“공녀가 온실로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생각해보니 아까 나딘의 말에 짧게 대답한 이후 그의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잔뜩 가라앉아서 성대를 긁듯이 나오는 탁한 목소리도 제법…….
아니,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지.
“지금 저랑 나란히 같이 가겠다고요?”
아이네는 황당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딘 몰래 가는 것이니만큼 온실 앞에서 따로 만나자는 뜻인 게 당연했다. 보통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나?
“…….”
다시 한번 아이네의 손목 부근을 힐끔 훑은 테고가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표정이었다. 아이네는 이제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 표정의 의미를 알았다.
당연히 문제가 있지. 눈치 좀 챙기세요! 당신, 지금 겉모습은 영락없는 남자라고요.
아이네가 이마를 짚었다. 그런 그녀의 팔을 향해 테고의 눈길이 따라붙었다.
“……공녀.”
“왜요?”
오늘의 아이네는 소매가 팔랑팔랑 넓게 퍼진 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손목엔 면적이 넓은 두꺼운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혹시, 어제 손목은…….”
조심스레 묻는 테고의 얼굴빛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응? 손목?
“아!”
혹시 이거 때문이었어?
아이네가 양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풀어냈다. 그러자 왼쪽 손목에 옅게 남은 손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본 테고의 눈가가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잠깐이지만 후회의 빛도 스쳐 지나갔다.
“어제는 좀 아렸는데 괜찮아요. 피부가 약해서 손자국이 좀 남은 거예요.”
아이네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손목을 슥슥 돌렸다. 이 공녀의 몸, 그러니까 이제 그녀에게 익숙해진 이 몸은 정말 약했다.
지금은 그저 조금 연약하기만 할 뿐인 걸 감사히 여겨야 할 정도로.
아침이 되자 손목의 뻐근한 느낌은 사라졌다. 하지만 유난히 흰 피부라서일까. 선명하게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사라와 나딘의 불필요한 호들갑을 피하려고 팔찌를 낀 거였다. 정작 당사자인 자신보다 더 아파하는 표정을 보는 건 겪어도, 겪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회복이 점점 빨라지나 봐요. 이번 거는 저녁이면 자국도 다 없어지겠다.”
아이네는 빙긋 웃으며 손목을 들어 보여주었다. 어쩐지 아침부터 우중충하더라니 테고 역시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이거였구나, 아침부터 우중충했던 것이 제 손목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나보다.
원작에서 나온 대로 다정한 성정의 여주다웠다. 테고의 표정이 자괴감으로 점점 더 일그러지자 아이네가 손을 휘휘 저었다.
“이제 이건 됐어요. 그건 그렇고, 이렇게 대놓고 따라오면 어떡해요.”
나딘은 물론이고, 사용인들의 눈까지 피해야 해서 아무도 오지 않는 온실 앞에서 만나자고 한 건데!
“내가 어제 오빠한테는 비밀이라고 말했잖아요. 우리 둘만 가는 거라고요.”
“아.”
테고의 얼굴이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아주 약간 밝아졌다.
“그거라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이 근방에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은지 꽤 되었습니다.”
아니,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아이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테고의 새파란 눈동자에 따뜻한 색채가 섞여들었다.
‘비밀’이라는 단어와 ‘우리 둘’이라는 단어.
특히 그 두 단어가 그의 심장을 더욱 간지럽게 만들었다.
‘비밀이라는 말이 이렇게까지…….’
훤한 대낮인데도 어제보다 더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아 테고는 괜스레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한편, 아이네는 테고의 옷차림을 쭈욱 훑었다.
“흐음.”
첫날 정복을 입고 나타난 이후로 그는 단출한 셔츠와 바지 차림을 유지했다.
재질이 좀 고급일 뿐 평민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옷을 입고도 테고는 온몸으로 귀티를 내뿜고 있었다.
‘하긴 좀 잘생겨야지. 거기다 키도 크고 몸도 좋으니까.’
문득 떠오른 그의 설정에 그녀의 표정이 새초롬해졌다.
사실 단순히 아티팩트 덕분이라고 하기엔 여자로서의 원래 테고도 시원시원하게 생긴 미인이었다.
게다가 몸에 밴 그 분위기는 아티팩트 할아버지가 와도 연출해주진 못할 테다.
기껏해야 귀엽다는 소리나 듣는 아이네는 그 점이 퍽 부러웠다.
한참 걸어도 지장이 없어 보이는 편한 옷차림에선 흠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의 시선이 테고의 발끝까지 내려갔다. 손도 그렇게나 크더니 발도 항공모함 수준으로 컸다.
새까만 신발의 반짝이는 앞코가 눈에 띄었다.
아침마다 닦기라도 하는 걸까. 기사라 그런가, 부지런하네.
아이네는 테고가 불면의 밤을 보내는 와중에도 내심 오늘을 기대하고 있었단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신발 오래 걸어도 편한 거예요?”
온몸을 샅샅이 훑는 듯한 시선을 견디다 못한 테고의 인내심이 점차 한계에 달했다.
“도대체 어딜 가기에 장소도 알려주지 않는 겁니까.”
“후원 뒷문에서부터 삼십 분은 걸어야 하니까 불편한 신발이면 바꿔 신고 오세요.”
그러자 그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
“……공녀가 그 정도 거리를 걸을 수 있습니까?”
“뭐라고요?”
근육통 사건도 그렇지만 어제 일까지 포함해서 그는 아이네가 영 못 미더웠다. 어젯밤 가까이서 체감했던 왜소한 체구나 가는 손목은…….
여성과 가장 가까이 있어본 경험이 여기사와의 대련뿐인 테고에겐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냥 걸어 다니는 종이 모형 정도로 생각하는 게 더 편할 정도다.
금세 분기탱천하여 씩씩거리는 조그만 머리통을 지켜보던 그가 결단을 내렸다.
“차라리 제가 말을 가져오죠. 약속대로 온실 앞에서 기다리십시오.”
“좋아요!”
그녀로서도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그때의 아이네는 제가 그렇게 쉽게 말을 번복하게 될 줄 몰랐다.
테고가 당연하다는 듯 두 필의 말을 끌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저기, 그런데 왜 말이 두 마리예요?”
“그야, 공녀가 탈 말과…….”
“전 말 못 타는데요?”
“…….”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네 앞에서 그는 잠시 말을 잊었다.
하지만 테고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쉽게 납득했다.
승마는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많은 운동이다. 제대로 된 자세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근육을 사용해야 한다.
레이피어 한 번 제대로 휘둘렀다고 몸져누웠다. 게다가 그리 세게 잡지 않았는데도 손목에 벌겋게 자국이 남는 공녀이니.
솔직히 그녀가 말고삐나 제대로 당길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차라리 자신의 통제 안에 두는 게 안전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테고는 자신의 기준을 점차 아이네에게 맞춰 가고 있었다.
“그럼, 말에 오를 줄은 압니까?”
“어……. 가르쳐, 줄래요?”
“…….”
“그래도 다들 저더러 운동신경은 좋다고 했어요!”
물론 그녀의 해맑은 뻔뻔함에는 조금 더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테고가 미간을 슥슥 문질렀다. 그러고는 남은 말 한 필을 근처 나무에 묶었다.
그걸 바라보던 아이네의 표정이 뾰로통해졌다. 갈수록 자신을 하찮게 생각하는 티가 너무 노골적으로 나서다.
어쭈, 이제는 표정 관리도 안 해?
그건 그녀가 테고의 세세한 표정까지 알 정도로 친밀해졌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아직 아이네와 테고 모두 거기까지 알아채기엔 풀어야 할 오해가 너무 많았다.
‘언젠가부터 테고가 미묘하게 제2의 나딘이 되어가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아이네가 몇 살만 더 어렸어도 테고의 과보호를 기껍게 받아들였을지 몰랐다. 뭐니 뭐니 해도 원작의 설정상 검술 천재에 해피엔딩이 보장된 인물이니까.
하지만 이왕이면 동등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 사라가 말했던 대로 그가 좋은 역할이라서, 앞으로 닥칠 위기의 보험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같이 있으면 즐거웠다.
과연 원작의 주인공이 될 만한 매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여주의 보호만 받아야 하는 민폐 캐릭터가 되는 건 내키지 않았다.
“저 진짜로 그 정도는 걸을 수 있다니까요.”
“거의 다 됐습니다.”
어느새 테고는 성큼성큼 걸어와 남아있는 말의 옆에 섰다. 그러고는 날렵하고 가벼운 동작으로 훌쩍 올라탔다.
와중에도 긴 다리가 안장을 넘어가는 모습이 자로 잰 듯 우아하고 깔끔했다.
‘와아…….’
아무리 주인공에게 모든 후광을 몰아주는 법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너무 심한 거 아닐까. 환하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의 테고는 그 자체로 반짝이고 있었다.
멍한 얼굴로 멀찍이서 바라만 보는 아이네에게 테고가 손짓했다.
“일단 여기 등자 위로 발을 올리고 나서 제 손을 꽉 잡으십시오.”
말 위에서 커다란 손을 내미는 테고의 모습에도 아이네는 선뜻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이상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나 왜 이래.’
아이네가 제 가슴을 꾹 눌렀다. 그러고는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건…….
여태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나딘의 과보호로 인해 말 가까이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예전에 어떤 책에 빙의했는지 몰라 할 수 있는 공부는 다 해봤다고 했지.
하지만 몇 가지 예외가 있었고 그중 하나가 바로 승마였다.
‘그래, 난 말 처음 타보잖아.’
뭐든 처음 경험하는 일 앞에선 두근거리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다행히 이유를 찾아낸 아이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등자에 자그마한 발을 걸쳐 올리며 테고의 말대로 팔을 뻗었다.
사실 판타지 하면 승마인데 이제야 드디어 할…….
“히약!”
몸이 쑥 들어 올려지는 감각에 그만 이상한 소리를 내버렸다.
테고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팔과 허리를 잡아 가뿐하게 안아 제 앞에 앉혔다.
놀라서 가빠진 호흡을 고르며 겨우 진정한 아이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시야가 탁 트이는 느낌.
갑갑한 마차와는 달랐다. 사방이 뻥 뚫린 높은 곳에서 세상을 조망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바로 해방감이라고 부르는 거겠지?
이래서 한번 말을 타기 시작하면 계속 말만 타는구나.
처음으로 타보는 말 위라 아이네는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까 테고에게 느꼈던 수상한 설렘은 그렇게 잊혔다. 어느새 그녀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몸까지 들썩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테고는 잠시 제 손을 쥐었다 폈다.
‘너무 가볍고, 또…….’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이상한 감각이 다시 그를 덮쳐왔다.
가슴께가 뻐근한 통증과는 별개로 테고의 시선은 제 앞에 놓인 자그마한 정수리에 끌리듯 꽂혔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미소가 숨길 수 없이 맴돌았다.
* * *
테고는 정말로 천천히 말을 모는 중이었다.
어릴 적 망아지 위에서의 첫 승마 이래로 이토록 조심스레 움직여본 일이 없었다.
승마가 처음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아이네는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지만 용케 균형을 잃진 않는 게 퍽 신기했다.
‘확실히 운동신경은 좋군. 그래도 너무 가늘고…… 약해.’
이미 그녀를 깨어지기 쉬운 유리구슬쯤으로 생각하는 테고의 눈빛에 불안함이 가득 담겼다.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금방 후회할 발언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냥…… 제게 기대십시오.”
“뭐어, 그럼 그럴까요?”
단 한 번의 사양도 없이 아이네는 냉큼 그에게 제 몸을 붙였다.
아마 테고가 진짜 남자였다면 극구 사양하거나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텼을 테다.
‘그치만 같은 여자끼리 뭐 어때.’
그렇게 그녀의 작달막한 어깨와 등이 제 품 안에 들어오자마자 테고는 깊이 후회했다.
차라리 좀 불안해 보이더라도 서로 몸이 닿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 모르는데.
“아, 편하다.”
“…….”
또, 또 저렇게 속 편한 소릴.
아무리 뭘 몰라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무방비할 수가 있나?
이젠 화도 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화를 낼 여유가 없었다.
얇은 셔츠 한 장 위로 닿아오는 말랑한 여체를 의식하지 않으려 테고는 무진 애를 썼다.
간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몸이고 정신이고 의지대로 되지가 않았다.
거기다 가까이 있어서일까.
늘 은은하게 나던 좋은 향기가 바로 아래서 그를 자극했다.
밀폐된 공간이든 트인 곳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의든 타의든 여성과 이런 종류의 접촉을 처음 해본 테고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후원 뒤는 테르미누스 산맥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여긴 아무나 못 들어와요. 아, 이제 이대로 쭉 달리면 돼요.”
“…….”
맙소사, 맞닿은 몸으로 그녀가 말을 할 때의 잔잔한 떨림까지 전부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렇, 습니까.”
아이네의 설명이 끝나자 그는 아무렇게나 대꾸하곤 급기야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차라리 빨리 달려 도착하는 게 낫겠어.’
테고는 천천히 오래 고통받는 것보다 시간이라도 단축해 보겠다는 잘못된 결정을 했다.
“조금 속도를 내겠습니다. 무서우면 제 팔을 잡으시면 됩니다. 이랴!”
“네에, 꺅!”
정말로 여태껏 최대한 아이네의 편의를 봐주었다는 듯 그가 속도를 높였다.
이 역시 초심자인 그녀를 배려해서 아주 빠르게 달린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테고는 곧바로 잘못된 판단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윽.”
이번엔 불시에 튀어나온 신음을 숨기지도 못했다. 갑자기 빨라진 속도에 아이네가 그의 팔을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테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들보다 기민한 자신의 감각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승마가 처음인 그녀를 밀쳐낼 수도 없는 노릇.
좁디좁은 말 등 위에서 그가 달리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이건 공녀가 아니라 팔에 매달린 모래주머니다.’
테고는 이를 악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 품에 안긴 채 팔뚝에 부드럽게 뭉그러지는 감각을 느끼지 않으려 그 어느 때보다 필사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