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베룸(Verum)의 이면
누군가에게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처음 겪는 승마의 짜릿한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아이네가 도착했다고 말해주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테고는 먼저 알아채고 말고삐를 잡아끌었다.
아니, 그가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멈출 수밖에 없었을 테다. 말이 더 이상 안으로 진입하는 걸 거부하고 멈춰 서버렸으니까.
“어떻게 이런 곳이…….”
“리테루온 영지의 테르미누스 산맥 경계와는 완전히 다르죠?”
눈앞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그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테고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마법입니까?”
“저, 일단 좀 내려주시겠어요?”
“아.”
더 이상 못가겠다며 투레질을 하는 말을 달래가며 그가 먼저 훌쩍 뛰어내렸다.
“공녀, 손을…….”
이번엔 아까와는 다르게 아이네의 팔과 허리를 아주 살짝만 잡아 내려줄 작정이었다. 처음이라면 모를까, 한번 손에 익힌 무게감을 제어하는 데엔 자신이 있었으니까.
“읏차.”
그러나 테고는 또다시 실패했다. 그녀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못한 탓이다.
몸에 힘이 풀린 아이네가 테고에게 매달리듯 안겨들었다. 그 바람에 지나칠 정도로 품속 깊이 그녀를 안고 말았다.
“……흡.”
순간, 숨이 막혔다.
누군가 자신의 명치 깊숙하게 주먹질이라도 한 느낌이었다.
‘이건 모래주머니다, 모래주머니.’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테고에게는 정말, 정말로 좋지 않은 자극이었다.
“말을 타고 오니까 진짜 금방이네요! 우리 돌아갈 때도 금방 가겠다.”
금방……이었나? 모르겠다.
전장에서는 며칠간 새우잠만 자고도 싸우는 데에 큰 지장이 없었다.
게다가 테고는 불리한 상황에서 순수한 자신의 역량만으로도 연전연승을 이끌어낼 수 있는 뛰어난 기사였다.
“…….”
그러나 이젠 다마스커스 검이고 뭐고 지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아이네가 팔랑팔랑 걸어 ‘경계’ 앞에 섰다.
“어떤 마법인지는 몰라도 이건 일종의 결계더라고요.”
신이 난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테고는 제 턱을 쓰다듬었다.
테르미누스 산맥을 따라 퍼져있는 ‘경계’에 대해선 그도 잘 알았다.
경계는 반란군과 숨바꼭질하듯 전투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던 사항 중 하나였다.
하지만 마치 이건.
‘이곳의 안과 밖은 완전히 다른 세계라도 된 것 같군.’
무릇 어떤 곳이더라도 자연 상태에서 이토록 뚜렷하게 식생이 나뉘는 일은 없었다.
굳이 경계 안과 밖의 식생을 비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잔디밭부터 색이 완연하게 달랐으니까.
“이런 거 처음 보죠?”
느이 영지에는 이런 거 없제?
아이네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이곳이 바로 원작의 배경인 동시에 베룸 영지에서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장소였다. 테르미누스 산맥을 감싸는 여타의 경계 내부는 짙은 회색빛 안개로 가려져있었다.
만약 이 미지의 영역이 그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면 ‘결계’나 ‘벽’으로 불렸을 테다. 하지만 ‘경계’라고 일컬어지는 건 들어갈 수는 있되, 나올 수 없는 공간으로 알려져 있어서였다.
‘신기하군.’
그러나 오직 한 곳, 베룸에서만은 그 짙은 안개가 모두 걷힌 상태였다.
“이런 곳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아이네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원작의 작가는 알지도 모르지만.
“모르겠어요.”
칼로 자른 듯 분리된 공간을 바라보던 그에게 아이네가 손을 내밀었다.
“설마, 검이 있다는 곳이 이 안입니까?”
드물게도 테고의 얼굴 위로 경악한 표정이 덧씌워졌다. 그런 그에게 아이네가 씩 웃었다.
“우린 들어가 볼 수 있다는 거, 테고 경도 알잖아요.”
“…….”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았으나 경계 출입이 가능한 예외가 있었다. 바로 고대 일족 가문의 직계만이 그러했다.
경계가 왜 생겼는지, 경계 너머엔 뭐가 있는지 알려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아티팩트를 착용할 자격이 있는 자들만 잠시나마 경계를 드나들 수 있었다.
하지만 테고는 난색을 표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백여 년도 더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직계라 한들 이젠 피가 너무 옅어졌습니다.”
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테고는 직계 중에서도 드물다는 발현자가 아닌가. 그러니 원작에서도 최종 악역을 따라 경계 안으로 뛰어들어도 무사할 수 있었다.
‘흠, 그치만 아직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
그래서 아이네는 최대한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예시를 들어 설득했다.
“그거라면 걱정 말아요. 저랑 오빠는 이미 들어가 본 적이 있는걸요.”
“하…….”
그걸 말이라고.
순진하기 그지없는 말에 테고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말, 이 남매는 겁도 없이…….
경계의 또 다른 이름은 ‘불가침 영역’이었다. 오죽했으면 흉악범이나 반역자라도 경계의 영역까지 몰아붙이는 건 금지되었을까.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인 테고의 반응에 아이네는 조금 머쓱해졌다.
“그, 그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봐요. 제가 얼른 들어가서 검 하나만 갖고 올게요.”
경계 너머로 막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아이네의 앞을 테고가 급히 가로막아 제지했다.
“이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가겠다는 겁니까? 혼자 들어가 본 적은 있습니까?”
“다람쥐밖에 없던데요? 으음, 혼자 가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여기까지 걸어오는 것만 해도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으니까.
‘아이네, 약속해. 앞으로도 절대 혼자서는 이렇게 먼 곳까지 오지 않겠다고.’
‘알았어! 대신 오빠도 혼자 가지 말고 나 꼭 불러야 해.’
그때는 그게 마지막이 될지 모르고 한 약속이었다.
치사한 나딘 같으니. 필시 베룸 영지에선 그가 아니면 아버지 외의 직계는 없다는 걸 알고 한 말일 테다.
그런 아이네의 표정에서 답을 읽은 테고는 다시 한번 나딘에게 동지애를 느꼈다.
“좋습니다. 차라리 같이 가는 게 더 안전하겠군요.”
“헤헤, 그렇죠?”
“…….”
테고의 눈앞에 하얀 손이 내밀어졌다. 선뜻 잡지 못하는 그에게 아이네가 재촉했다.
“잡아요. 아무리 테고 경이라도 여긴 베룸이잖아요.”
물론 아이네의 말은 테고가 ‘발현자’라도 여기는 리테루온이 아닌 베룸 영지의 경계이니 무언가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라니엘에 비해 미약한 이능만 지닌 테고에겐 다르게 들렸다.
‘공녀가 정말 베룸의 발현자라면…….’
이미 그 핏줄이 흐려질 대로 흐려진 고대의 네 가문 중 베룸만이 여전히 특별했다. 그런 베룸의 직계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이가 아이네 공녀였다.
테고는 또다시 습관적으로 왼쪽 귓불에 달린 아티팩트를 어루만졌다.
‘저 안으로 들어갔다 오면 무언가가 달라질까?’
잠시 잊고 살았던 이능에 대한 갈망이 다시 그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자신이 발현자가 되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혼자가 되었던 열넷. 그리고 스물두 살이 된 지금.
이능이 없어도 테고는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이룬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제가 가진 것에 만족하기보다 언제나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하는 법이었다.
그건 때로는 사물이 되기도 하고, 사람 자체가 되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부에서 들끓기 시작한 새파란 욕망이 발끝에서부터 그를 천천히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직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은밀한 감정이었다.
고요히 가라앉은 테고의 시선이 제게 내밀어진 아이네의 손으로 향했다. 하필 왼손이었다.
팔찌가 없이 드러난 맨살에 어제 그가 남긴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았다. 그걸 보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고양감이 테고를 사로잡았다.
‘잡아요.’
그가 아이네의 제안을 뿌리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테고는 홀린 듯 그녀의 작은 손을 마주 잡았다.
이건 마치…… 그녀의 세계로 초대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 * *
“어때요? 불가침 영역에 들어와 본 소감이.”
“경계 안을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아이네의 손을 잡고 발을 들여놓은 경계의 내부는 마치 신비로운 원시림 같았다.
하지만 안으로 향할수록 빽빽하게 들어찬 수목들 때문에 조금은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테고의 기분 탓인지 몰라도 이 기이한 숲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보였다.
꼭 아이네를 환영해 길을 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녀가 내딛는 발걸음을 따라 옅은 빛까지 비치고 있었다.
‘정말로 공녀가…….’
거기다 그저 기분 탓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무수한 시선들이 아까부터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계를 넘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달라붙은 기운이 온몸의 감각을 쭈뼛 서게 만들었다.
마치 탐색하는 것처럼 훑어 내리며 언제든 옭아매려 집요하게 기회를 엿보는 느낌.
그 미묘하고 불쾌한 짙은 공기는 아이네가 테고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신기루처럼 흩어져버렸다.
“아, 그런데 여기 있는 과일은 따 먹어도 되더라고요. 신기한 게 조금만 먹어도 금방 배가 불러요.”
“……확인되지 않은 과일은 먹으면 안 됩니다.”
“으음, 맛있기만 하던데. 나중에 발견하면 하나 따줄게요. 테고 경은 단 거 좋아하죠?”
“어떻게 알았습니까?”
테고는 사실 단 음식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다만 가리는 음식 없이 고루 잘 먹는 데다 기사의 이미지를 지키려 굳이 티 내지 않았을 뿐.
“네? 어, 어. 그러게요? 전에 말한 적 있지 않았나요.”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런 그의 식성을 아는 건 어릴 적부터 곁에 둔 측근 정도가 다였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네가 당연하다는 듯 언급하기에는 확실히 좀 부자연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공녀가 근육통으로 앓아누웠을 때 나딘 공자와 지나가듯 나눈 이야기가 있었다.
그녀가 먼저 레이피어를 골랐다는 말에 공자가 혀를 차며 이렇게 물었더랬다.
“혹시 아이네가 ‘이런 상황에서는 역시 레이피어지.’ 같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비슷……하긴 합니다.”
그에 나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작게 혼잣말했다. 아마도 그에겐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여간 조심할 줄을 몰라.”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라 그저 그대로 넘겼다. 하지만 그녀가 발현자라고 가정하면 어귀가 맞았다.
베룸 일족의 이능은 ‘진실의 눈’이라는 이름을 지녔다.
그러니까, 그건 방금 자신의 식성을 잘 알고 있다는 식의 발언도 마찬가지일 거고.
심지어 그를 잠 못 이루게 했던, 어젯밤에 한 그 말도 되짚어보면 뭔가 미심쩍었다.
‘거봐요. 다른 남자면 몰라도 경은 안 되지.’
꼭 제가 이곳에 온 목적을 꿰뚫어본 것만 같았던 말.
당시 알현실에는 황제 폐하와 저뿐이었는데…….
완전하진 않지만 몇 개의 퍼즐 조각들이 차례로 그의 손에 들어오고 있었다.
“좀 전의 말도 그렇고. 공녀, 어젯밤에 말입니다.”
“네?”
아이네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역시 자신이 어제 무언가 실수라도 한 걸까. 아니면 방금 그의 음식 취향을 알아챈 게 너무 의심스러웠나?
마침 그때 아이네를 구해줄 무언가가 타이밍 좋게 나타났다.
“아앗! 다람쥐! 테고 경, 제가 아까 다람쥐 있다고 했죠? 오랜만이네.”
갑작스레 말을 돌리려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매우 수상했다.
아이네가 다람쥐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에게 한쪽 손을 잡힌 테고도 별수 없이 엉거주춤하게 몸을 굽히려던 참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다람쥐가 왜 여기에?’
말조차 들어오길 거부한 결계의 내부였다. 그런 곳에 다람쥐라니.
순식간에 잡고 있던 손으로 그녀를 일으켜 제 뒤로 감춘 테고가 기세를 끌어올렸다. 동시에 재빨리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다.
아뿔싸, 검을 들고 오는 걸 깜박했다.
몇 년간 잘 때조차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는데…….
베룸 영지에 온 뒤, 여러모로 빈틈없던 그가 며칠 만에 이토록 해이해졌다. 테고는 제 안이함에 이를 악물고 조용히 속삭였다.
“물러서십시오. 아마 마물일 겁니다.”
“마, 마물이요?”
마물이라는 소리에 테고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아이네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다.
저 주먹만 한 다람쥐가 마물이라고? 설마 몇 년 사이에 마물의 정의가 바뀐 건 아닐 텐데……?
아이네도 마물이 뭔지는 알았다.
몇 년에 한 번 꼴로 테르미누스 산맥의 경계를 넘어 인근 영지를 습격하는 마물은 사람과 가축을 가리지 않았다.
딱딱하고 질긴 가죽에 날카로운 이빨, 포악하고 잔인한 성정까지.
마물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그대로였다. 직접 본 적이 없다고 해도 그 정도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귀여운 마물이 어딨어요.”
“본디 상급 마물일수록 모습을 감추는 데 능합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까맣고 동그란 눈을 깜박이는 자그마한 녀석인데. 그런 다람쥐와 대치 중인 커다란 기사라니요.
‘하여간 은근히 허술한 구석이 있어.’
아이네는 조금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마물이 없는 세계관은 아니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닐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작은 생명체 앞에 선 테고가 지나치게 비장했다. 이래서야 도무지 긴장감도 위기감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금세 흥미를 잃은 아이네의 표정이 조금 심드렁하게 변했다.
몇 년 전이긴 해도 나딘과 함께 와본 곳이다. 그때도 이 숲에서 다람쥐를 마주친 기억이 있었다.
그럼, 그때 봤던 다람쥐의 후손의 후손쯤 되려나.
깊은 숲속에서만 자라서인지 사람을 보고도 도망갈 줄 모르는 순진한 애들인데.
“저기, 테고 경. 잠시만요.”
아이네는 테고의 손은 놓지 않은 채 서로의 틈 사이로 몸을 비집고 나왔다.
‘혹시 손을 놓으면 그때 나딘 처럼 힘들어 할 수도 있으니까.’
그 바람에 강경하게 막아섰던 그의 몸 근처로 아이네가 한층 가까워졌다. 거대한 산 같았던 테고의 몸에 힘이 빠져 허물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아…….”
물론 아이네의 안중엔 작은 탄식을 내뱉는 테고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이네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내 그녀의 손에 작은 견과류 뭉치가 닿았다.
혹시나 싶어 챙겨 왔는데, 역시 잘한 선택이었나 보다.
“옳지, 옳지. 이리 온.”
그녀가 허리를 숙여 손짓을 했다. 그러자 까만 눈망울을 데룩데룩 굴리던 다람쥐가 쪼르르 다가왔다.
아이네가 내민 주먹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다 금세 제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테고 경, 베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요? 앗, 간지러워.”
그녀가 간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손바닥을 폈다. 그러자 다람쥐가 재빨리 호두 조각 하나를 낚아챘다.
그 자리에서 입 안에 욱여넣고 오물거리는 귀여운 모습에 아이네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한참 미소를 짓던 그녀가 여전히 버티고 선 그에게도 땅콩 한 알을 건넸다.
“베룸에는 건국 이래로 마물이 나타난 적이 없는걸요.”
“…….”
그 말에 테고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래, 그랬다. 지금은 예전처럼 마물 떼가 쏟아지진 않았다. 그래도 산맥의 경계 근처에선 여전히 가끔 마물이 출몰하곤 했다. 그건 테고의 영지인 리테루온도 마찬가지였다.
‘왜 베룸에서만 마물이 출몰하지 않는 거지? 그것도 제국 건국 당시부터라니. 어째서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고…….’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베룸 역시 다른 국경 영지들과 마찬가지로 산맥에 인접한 곳이 아닌가.
가장 이상한 건 그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달은 자신이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머릿속에 드리우고 있던 얇은 막이 한 꺼풀 더 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겪을수록 이상한 영지.
볼수록 이상하고 수상한 공녀.
그리고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방향으로 변해가는 저 자신까지.
“테고 경, 잠깐만 앉아봐요.”
혼란에 빠져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손을 아이네가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그의 빈손에 무언가 작고 동글동글한 걸 쥐여 주었다. 땅콩이었다.
결국, 엉거주춤하게 몸을 구부린 테고는 머뭇거리며 다람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새카만 눈으로 그를 빤히 응시하던 다람쥐가 급하게 땅콩을 채갔다. 아이네에게 애교스럽게 굴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흐흥, 경은 덩치가 크니까 무서운가 보다.”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 순진한 소동물이라니.
……꼭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다.
“이렇게 작고 귀여운 것도 엄청 좋아하시잖아요. 저기 보세요. 다른 다람쥐 가족도 나타났어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테고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작고 귀여운 걸 좋아한다고?
자신도 모르는 취향이란 게 존재할 수 있나?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조우한 다람쥐가 퍽 귀엽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공녀도 제법 귀여……. 아니, 아니다.’
머뭇거리던 다람쥐 가족들이 결국 아이네가 가져온 견과류를 모조리 입에 넣었다.
“미안, 이제 없어.”
치맛자락에 손을 닦으며 일어선 그녀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테고와 눈이 마주쳤다.
“거봐요. 마물 아니죠?”
“…….”
여전히 확신할 순 없다.
하지만 베룸 일족이 지닌 이능의 명칭이 ‘진실의 눈’이라는 점. 네 가문 중 오직 이들에게만 따로 전해지는 아티팩트가 없다는 점.
마지막으로 공녀를 처음 만난 날 보았던 기이하게 반짝이던 눈동자까지 생각해보면 그녀가 발현자가 아닐 가능성을 헤아리기가 더 어려워 보였다.
‘그런 공녀가 하는 말이니 마물은 아닌 건가.’
그리고 그런 생각과 동시에 테고는 제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 중 하나를 상기했다.
예비 황태자비 관찰 보고서.
평소의 그라면 이 모든 걸 기록했을 테다. 그리고 모든 최종 판단은 폐하에게 맡겼을 터였다.
그게 황실에 충성하는 기사로서, 황제 폐하의 대자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만약, 그러면 공녀는 어떻게 되는 거지?’
폐하에게 보고한 이후의 일까지 가늠해보는 건 어딜 가나 고지식하고 원리원칙주의자라는 말을 듣는 그답지 않았다.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는 황태자비가 될 거다.
고대 일족의 직계인 발현자에 적통 공녀라는 신분까지. 어느 것 하나 차기 황후로서 부족한 점이 없었다.
거기다 갓 성년을 넘었다고는 해도 어엿한 성인이 된 영애다.
올해 스물셋인 황태자의 나이를 고려해볼 때 당장 혼사를 진행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테고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체한 것처럼 명치끝이 아릿하고 답답하기까지 했다. 이번엔 도저히 저번처럼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테고는 폐하의 명령을 다시 한번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가서 네가 직접 보고 아르비드에게 어울릴 만한 아이인지 판단해 오거라.’
분명히 ‘판단’이라고 하셨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잖아.’
그러니 조금 더 지켜보는 거다. 그래, 그래도 늦지 않다. 어차피 보고서는 황도에 도착해서 제출하게 될 테니까.
그러나 테고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사감만으로 어떠한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판단인지.
본인의 약혼 문제만 제외하면 늘 황제가 이끄는 대로 군말 없이 따라왔던 테고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다른 선택지를 고른 최초의 순간이었다.
* * *
테고는 이제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완전히 잊어버렸다.
다마스커스 검? 이제 와서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솔직히 말해서 그는 무기 욕심이 대단한 편이었다. 더 좋은 장비와 수련 방법에 관심을 갖는 건 기사의 숙명과도 같은 일이니까.
그런데 이곳까지 온 목적인 다마스커스 검은 어디로 가고 다른 것이 그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테고의 시선은 이제 신비한 숲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눈앞의 자그마한 정수리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제 손 안 놓치게 조심해요. 혹시 밀리는 느낌이나, 이상한 기분이 들면 꼭 이야기 하고요.”
“…….”
그게 무슨 소리지?
테고는 그제야 아이네에게 일방적으로 잡혀 있는 제 손으로 눈길을 주었다. 몸도 손도 워낙에 깃털 같은 공녀다.
그래서 맞잡고 있다는 실감도 잘 안 났었는데…….
조금 더 세게 쥐어보면 그녀가 느껴질까?
그가 아주 약간 힘을 주어 보았다.
“악! 그렇게 세게는 말고요.”
한참 아래에 있던 아이네가 고개를 한껏 젖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테고는 슬그머니 손에서 힘을 뺐다.
“아픕, 니까.”
그럼, 그 솥뚜껑만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잡는데 안 아프겠어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겨우 삼킨 아이네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테고가 덩치나 힘으로 자신을 압도할 때마다 그녀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 모습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는 자신보다 키도 크고 힘도 셀 테다. 하지만 아티팩트의 힘을 빌린 테고는 정말 남자 같아서 가끔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서 부러 더 큰 목소리로 다그쳤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렇게 살살은 말고요. 내가 무슨 작은 다람쥐라도 되는 줄 알아요?”
“…….”
이번에도 테고는 현명하게 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 * *
“똑바로 보고 잘 따라와요. 다른 데 한눈팔다가 길 잃지 말고요.”
테고는 걸음마를 할 수 있게 된 이후로 길을 헤매거나 잃어 본 적이 없었다.
‘누가 들으면 내가 길눈이 형편없는 사람인 줄 알겠군.’
게다가 지금 이 상황에서 한눈을 팔 수 있을 리가.
아이네가 다시 고개를 내리자 테고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향했다. 씩씩하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풀빛 정수리는 마치 숨이라도 쉬는 것 같았다.
제가 표현에 서툴러서 그렇지, 단순한 풀빛이라기엔 뭔가 오묘한 색의 머리카락이었다. 햇살을 머금고 각도에 따라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결 좋은 머리카락이 허리쯤에서 흔들리는 걸 보며 테고는 묵묵히 그녀의 속도에 맞추어 걸었다.
“참, 테르미누스 산맥 말이에요. 다들 산에는 드래곤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요.”
아이네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테고의 발걸음이 멈칫하며 조금 느려졌다.
“……그렇다고 배웠습니다.”
한번 이상하다고 생각하니 아이네의 화법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마치 숨겨진 진실을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
“흐응.”
등 뒤에 선 테고의 눈빛에 복잡한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는 것도 모른 채 그녀는 오두막을 향해 걸었다.
종종 현대의 지구와 다른 상식을 접할 때마다 아이네는 자신이 정말 책 속에 빙의했다는 걸 실감했다.
여기서 판의 이동이나 지반의 융기 같은 걸 말하면 분명히 이상한 사람 취급받겠지.
“나딘 말로는 여기부턴 밀리는 느낌이 더 든댔어요. 무섭다거나 혹시 성으로 다시 가고 싶어지면 꼭 말해요.”
아이네는 관대하고 인자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누군가의 반응을 토대로 학습한 배려였다.
“공자와 마지막으로 온 게 도대체 언젭니까.”
“으음, 그때 오빠가 열네 살쯤이었던가.”
“…….”
테고의 나이는 올해 스물둘이었다.
‘확실한 건 공자도 이 저항감을 느꼈다는 거군.’
그리고 그녀는 느끼지 못했다는 거고.
마침 공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기의 흐름이 묵직하게 바뀐 참이었다.
짐작했던 대로 아이네이스 공녀는 최소한 ‘발현자’이거나 이능을 짙게 타고난 듯했다.
몸 전체를 슬그머니 누르는 압박감과 더불어 심장이 꽉 조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여기다.”
꽤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을 지나자 낮게 자란 잔디가 펼쳐진 공터가 나왔다.
그리고 그곳엔 의외의 것이 존재했다.
‘……오두막?’
테고는 말없이 미간만 모았다. 그러고는 주위에서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재차 확인했다.
오두막을 보고 경계하는 그와는 달리 아이네는 잔뜩 신이 난 기색이었다.
“이런 거 보면 되게 전형적이지 않아요? 딱 사냥터지기가 쓸 거 같은 산장이잖아요.”
아이네가 가리킨 건 투박한 석조로 된 외관이 몹시 평범한 오두막이었다.
“…….”
뭐가 전형적이고 뭐가 사냥터지기의 산장 같은지 테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뻥 뚫린 초원 한가운데에 짓는 사냥터지기 오두막이 어디 있단 말인가.
테고가 그런 생각을 하건 말건 아이네는 나무로 된 문을 밀어 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그녀의 등 뒤로 테고가 바짝 따라붙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정신을 바짝 차리는 건 제 몫인 듯했다.
“와! 그때랑 완전히 그대로네?”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조잡한 벽난로 쪽으로 아이네가 반색하며 다가갔다.
여전히 그녀에게 잡혀 끌려가며 테고는 오두막 내부를 살폈다.
‘이게 무슨……?’
겉보기엔 내부 역시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테고는 금세 이상한 점들을 눈치챘다.
‘외부와 내부의 구조가 다르군.’
벽의 두께나 가구 배치, 공간 분할 방식에 따라 내부가 밖에서 보는 것보다 좁아질 수는 있다.
그러나 반대로 내부가 더 넓어질 수는 없다.
이 오두막의 정체가 무엇이든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거기에다 테고의 예민한 감각에는 조금 전까지 누군가 머물다 간 듯한 생활감마저 느껴졌다.
“경계 내부가 전부 이상하지만 여기가 제일 이상해요. 꼭 시간이 멈춘 곳 같지 않아요?”
그래서 테고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 불가해한 공간을 설명해줄 단 하나의 존재.
“혹시 여기가 드래곤의 레어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드래곤 레어요?”
아이네의 표정이 묘해졌다.
‘드래곤까지 나오면 장르가 달라지는 거 아니야? 이거 그런 소설 아닌데.’
산에 드래곤이 잠들어 있다는 건 이 세계의 전설인 줄만 알았는데, 진짜로 있을지도 모른다고? 원작엔 이런 얘기 없지 않았어?
그리고 무슨 로맨스 소설에 드래곤이 나와. 그냥 배경에 깔린 설정이면 몰라도…….
이러면 스케일이 갑자기 너무 커진다. 이건 남장한 여주인 테고와 대공이 티격태격하면서 사랑을 확인해나가는 로맨스 소설이니까!
언뜻 복잡해 보이는 네 일족에 대한 설정도, 전쟁과 반란도, 심지어 여자주인공에게는 불행인 가족들의 죽음까지.
전부 여주와 남주의 관계성을 위해 안배된 것일 뿐이었다.
이 관계성에 드래곤은 굳이 필요도 없는데다 원작에선 등장하지도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아닐 거예요.”
원작을 아는 자로서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그러나 테고가 의문을 표할 틈도 없었다. 어쩐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며 그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까 말이 경계 근처엔 오지도 않으려고 했던 것도 그렇고. 이 흐름은…….”
남들보다 기감이 발달한 기사인 그였다. 그래서 아까부터 짙고 빽빽한 공기가 맴도는 걸 느끼고 있었다.
분명히 드래곤이라는 말을 꺼낸 직후였다. 공기의 밀도 자체가 달라졌다. 마치 압축된 거대한 마나가 달려들어 테고의 입을 막는 기분이었다.
그 기운이 누르는 힘이 누그러진 틈을 타 그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후, 확실히……어린 공자가 울었을 법하군요.”
“앗, 나딘이 운 거 어떻게 알았어요?”
아이네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것 뿐 아니라, 이 공간 자체도 이상하다고 말하려던 테고는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
잘 훈련된 기사인 자신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한 압력이었다. 이 작고 여린 공녀가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다.
‘이걸 못 느낀다고?’
점점 더 거세어지는 압박감에 테고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아이네와 잡고 있는 손이 아닌 반대쪽이었다.
“윽.”
입을 열면 신음이 절로 나올 듯한 압도적인 감각에 테고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그가 기묘한 무언가와 싸우고 있을 즈음, 테고의 침묵이 불편했던 아이네는 눈치 없이 툭,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는 어떤 사람이에요?”
그녀가 황태자를 입에 담자 거짓말처럼 촘촘하게 짜여있던 마나의 흐름이 거짓말처럼 옅어졌다.
그리고 그 농밀한 마나의 짓눌림을 대신한 건 기묘한 불쾌감이었다.
“하, 황태자…… 말입니까.”
원작의 서브 남자주인공이었던 금발 황태자에 대해 묻자 테고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졌다.
응? 아무래도 메인 남자 주인공인 대공은 만나기 전이라 이미 알고 있을 황태자에 대해 슬쩍 떠본 건데.
너희, 원작 시작 전에 사이가 별로 안 좋았던가?
아, 황녀가 중간에 다리 역할을 했었지.
역시 책빙의는 이게 문제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아는 척 말실수하는 것으로 전개가 꼬이기도 하니까.
“아, 아뇨. 그냥 하도 잘생겼다고 소문이 자자하기에 물어본 거예요.”
“…….”
대강 얼버무린다고 했던 말에 그의 기분이 더 저조해진 듯했다.
어휴, 아예 말을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놈의 입방정.
* * *
“자아, 이 상자거든요? 기대해도 좋아요.”
아이네는 서둘러 지난날 검을 봤던 상자 앞으로 그를 이끌었다.
“…….”
아침에 봤을 때보다도 더 피곤한 얼굴이 된 테고의 표정은 여전히 펴질 줄을 몰랐다.
“짠! 어때요?”
“아니, 보관을 왜 이렇게…….”
그 안을 들여다본 테고는 탄식을 금하지 못했다.
경계 밖에선 억만금을 줘도 구하기 힘든 귀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상자 안에 그 검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규격도, 종류도 제각각인 데다 어떤 것은 검날의 완성도에 비해 칼자루가 형편없기도 했다. 그러나 검날만큼은 척 보기에도 최상급의 다마스커스 검들이었다.
하나하나가 국보로 지정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검날을 따라 소용돌이치는 문양이며 제련 상태가 완벽했다.
너무 완벽해서 도저히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라면 적절한 표현이 될까.
그러나 놀라움과 별개로 한번 가라앉은 테고의 기분은 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자신이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자, 봐요. 검날의 무늬도 그렇고 최상급 맞죠?”
아이네가 상자 안을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 선 테고는 그저 슥 훑어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군요.”
저번의 눈을 빛내며 달려들던 그와는 완전히 딴판이 되어버렸다. 아이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큰일 났네. 지금 시기의 테고는 황태자랑 사이가 많이 안 좋았나 봐.’
눈치 없는 아이네도 알 정도였다. 황태자를 언급한 이후 테고는 어딘가 풀이 죽어있었다.
원작의 황태자는 남장여주물의 전형적인 서브남 캐릭터였다.
남자주인공보다 부드럽고 온화한 외모의 미남에, 아쉬울 것 없이 다 가질 수 있는 신분과 배경. 여주의 정체를 남주보다 먼저 알아채고 뒤에서 다정다감하게 챙겨주는 성격까지.
“끙.”
아이네가 상자 앞에 쪼그려 앉은 채로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원작 시작 전은 난도가 높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시장에 데려가서 딸기 바나나 오징어 주스라도 한 번 더 사줄 걸 그랬다.
그때 테고는 정말 행복해 보였는데…….
그러다 상자 내부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아이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와! 이거 제가 산 단검이랑 비슷한 거 아니에요? 앗.”
무작정 검을 잡으려던 그녀의 손이 날카로운 검신에 베여 피가 솟았다.
“……공녀!”
그리고 그때까지 심드렁하던 테고가 아이네의 손을 잡아채 대뜸 제 입으로 가져갔다.
“어, 어어?”
손잡는 것도 우물쭈물하던 사람이 이렇게 쉽게 스킨십을 시도한다고?
이내 아이네의 손가락에 따뜻하고 말캉한 촉감이 와 닿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세게 빨리는 느낌이 이어졌다.
“자, 잠깐만요. 테고 경!”
저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네가 그의 입술에 물린 손가락을 빼내려 시도했다.
“흡, 퉤!”
“…….”
그리고 짧았던 그녀의 망상은 테고가 피를 빨아냈다 뱉는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몇 번을 반복하던 그가 제 셔츠 밑단을 망설임 없이 부욱 찢어 아이네의 손가락을 둘둘 말았다.
“도대체 조심성이라곤 없습니까? 독이라도 발려 있으면 어쩌려고……!”
“모, 몰랐어요.”
“그게 아니더라도 오래된 검은 함부로 만지는 게 아닙니다. 다행히 이번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지만.”
손 많이 가는 막냇동생을 보는 듯한 눈빛에 아이네의 어깨가 수그러들었다.
“이만 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 일은 나딘 공자와 따로 이야기하지요.”
“응? 우리 이거 비밀로 하기로 약속했잖아요.”
“공녀도 처음부터 불가침 영역 내부라고 말하진 않았잖습니까.”
언제 시무룩했나 싶게 테고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실수를 하자마자 이번에도 과묵한 모습을 어디론가 던져버린 모습이었다.
“힝.”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앞장서십시오.”
울상을 짓는 아이네의 팔을 잡아 자신의 앞으로 세웠다. 그렇게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테고는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닦아냈다.
뒤늦게 눈을 질끈 감은 그의 귓가가 미미하게 붉었다.
그때, 오두막 안이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라도 난 듯 집 전체에 강력한 진동이 느껴졌다.
“공녀! 이쪽으로.”
아이네는 커다란 무언가가 제 어깨를 감싸 안는 감각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동시에 어디선가 나타난 새하얀 공간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 * *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감각은 정말이지 겪어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 허약한 몸뚱이 같으니.’
막 불평을 시작하려는 아이네의 의식 틈바구니로 낯선 무언가가 끼어들었다.
[제법이군요. 나도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이런 방법도 있었을 줄이야. 과연 당신은 다르네요.]
귀에 들리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대고 직접 말하는 것 같은 기묘한 음성이었다.
“뭐야, 이건……. 누구세요.”
눈을 뜬 그녀의 시야에 잡히는 건 오로지 흰색뿐인 수상한 공간이었다.
[이야기가 시작될 때까진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테고 경? 테고 경은 어딜 갔지.
아이네는 그제야 꼭 잡고 있던 손이 허전해졌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무사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치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니, 이건 오히려 그쪽에서 제게 말을 거는 것에 가까우니까요.]
그제야 아이네는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실재하되, 실재하지 않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무중력 상태에 있는 듯 한없이 몸이 가벼워지는 부유감하며, 이토록 눈이 시릴 듯한 아공간이라니.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아하, 이런 상황 알지, 알지.
아이네는 원작을 모르던 지난 8년간 이런 돌발 상황까지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요즘 소설엔 잘 안 나오지만 초창기 빙의 소설에선 이런 장면이 빠지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곳의 원작은 꽤 오래된 고전 로판이 아니던가.
“그럼 혹시, 신이에요?”
[당신이 믿질 않는데 그런 게 있을 리가요.]
의식의 흐름 끝에 나온 아이네의 침착한 대응을 들었는지 목소리엔 작은 웃음소리가 배어들었다. 그걸 알아챈 아이네의 음성이 조금 퉁명스러워졌다.
“그것도 아니면……. 원작 속 등장인물이신가?”
[설마 했는데,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군요. 그 원작을 말하는 거라면, 오히려 반대에 가깝죠.]
스무고개도 아니고 아리송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묻는 대로 성실히 대답해주는 존재에게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죠.”
두 가지를 동시에 묻는 말이었다. 하나는 이곳에 책빙의한 이유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만 이 공간에 끌려온 이유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의문의 존재는 바로 대답했다. 예상하지 못한 이 상황까지도 역시 의지에 따른 결과일 테니까.
[당신이 내 ‘변수’니까요. 어차피 당신한테 바라는 건 하나뿐입니다. 살았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는 결말.]
다만, 지금은 하나만 답해도 충분하겠지. 곧 또다시 만나게 될 테니.
의문의 존재는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대답을 들은 아이네는 머리를 짚었다.
이거 봐. 역시 목적 없는 책빙의는 없다니까. 이럴 줄 알았어.
그래도 악역이 직접 소환한 경우는 아니었나 보다. 다행인…… 걸까?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해요?”
이번만큼은 존재도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그대로 두세요.]
“네?”
[흘러가는 대로 두면 되지 않을까요?]
아니,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
[…….]
공간 안에는 적막함만이 맴돌았다.
신도 아니고, 등장인물도 아니라면 도대체 이 사람은 뭐야? 아니, 사람이긴 한가?
점점 의심으로 가늘어지는 아이네의 눈가에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이 두 눈으로 잘 보고, 내게 전해주세요.]
약간의 미안함과 일말의 절박함까지 담긴 어루만짐이었다.
[나와 시선을 주고받아주세요. 그리고…….]
증명해주세요, 나의 마지막 선택이 옳았다는 걸.
마지막 말은 아이네에게 전해지지 않은 채로, 잠시 내려앉았던 온기가 천천히 멀어져갔다.
그녀도, 한때는 인간이었던 저도……. 단지 서로의 시간 속에 실재하면서 그 부름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대답하는 것뿐일 테니까.
* * *
아이네의 눈이 갑작스레 팟, 하고 뜨였다.
이번에 보인 건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이 둘. 아니, 하나는 눈동자구나.
아까와는 달리 곁에 테고가 있다는 안도감에 그녀는 한숨을 토해냈다. 가까운 거리에서 제 얼굴에 대놓고 내뱉어진 숨결에 그의 미간엔 실금이 갔다.
그것을 본 아이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윽.”
“……혹시 내가 하는 말 들었어요? 음, 그러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이라든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테고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공녀와 거의 동시에 눈을 뜬 참이라. 그보다는……. 아니, 아닙니다.”
“네?”
그제야 아이네는 자신이 테고의 몸 위로 반쯤 올라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잔뜩 흐트러진 채였다. 잔디밭에 완전히 쓰러지지 않으려 애를 쓰느라 허리가 반쯤 들려있었다.
어정쩡하게 그녀를 품에 안은 그의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아, 무겁죠? 미안해요, 내려갈게요.”
“잠깐! 버둥대지 말고.”
테고의 간절한 외침은 다음 순간, 너무나도 간단하게 묵살당했다.
“맞다! 손! 손 주세요.”
“손을……?”
그때까지도 허공에 망연히 떠 있던 테고의 손에 아이네가 깍지를 끼듯 손을 얽었다. 그런 후에 안심했다는 듯 그녀는 제 몸에 힘을 빼고 늘어졌다. 그러나 테고는 소리 없는 비명을 간신히 삼켜내야 했다.
“경계 안에서는 손을 놓으면 안 된다니까요?”
“……!”
그녀의 만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는 그의 눈가를 아이네가 가볍게 쓸었다.
“역시 테고 경은 오빠랑 다르게 울진 않는구나. 어라, 근데 다크서클이 없어졌네?”
아침까지만 해도 테고의 눈 밑에는 거뭇하게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게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거기다 원래 티끌 하나 없이 곱고 흰 피부였지만 숫제 얼굴에서 광이라도 나는 것처럼 보였다.
“공녀……. 여긴, 경계, 밖입니다.”
어딘가 괴로워 보이는 테고의 목소리에 아이네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아까 그 오두막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요?”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흣, 공녀! 잠시만. 잠시면 되니까 가만히 좀…….”
역시 지난밤에 잠을 못 잔 게 문제일까. 아니, 어쩐지 푹 잔 것처럼 몸은 개운하기만 했다.
문제는 신체의 모든 부분이 막 일어난 상태와 다름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공녀가 그 위로 깔고 앉았다는 거고.
애석하게도 그녀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른다는 사실이 테고를 더욱 절망하게 했다.
자신이야 원하든 원치 않든 아침마다 겪는 감각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녀는 왜 모르지? 모를 수가 없을 텐데. 이래 봬도 나름대로…….
‘아니다, 지금 이 상황에 이런 생각을 옳지 않아.’
슬금슬금 바닥에 댄 엉덩이를 뒤로 빼며 테고가 제게 얽힌 공녀의 손가락을 떼어냈다.
“그보다 저한테 설명해야 할 게 있는 것 같군요.”
그가 아이네의 손가락에서 이미 반쯤 풀려 흘러내리고 있던 셔츠 자락을 풀어냈다.
“어……?”
검신에 베였던 손가락의 상처가 깨끗하게 나아있었다.
흰 천에 약간이나마 배어들었던 핏자국까지 오간 데 없었다.
마치 경계 안에서 베인 적도 없다는 듯이.
“저도 모르겠어요. 왜 상처가 사라졌는지…….”
아이네는 거기까지는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다 번쩍 고개를 들어 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그림자는 얼마나 짧아졌는지를 살폈다. 그녀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지나갔다.
“오늘은 일단 돌아가야겠어요.”
“그럼 역시 경계 내부는.”
시간마저 멈춘 듯한 공간을 채운 빽빽한 마나까지. 역시 드래곤과 관련된 공간일 가능성이…….
테고가 그녀의 뒤를 따르며 제 추측을 이야기하려던 순간이었다.
“…….”
그의 발치로 작은 땅콩 한 알이 도르르 굴러왔다. 어딘가 눈에 익은 땅콩이었다. 그리고 테고는 유달리 좋은 시력과 청력으로 그것이 날아온 방향을 단번에 찾아냈다.
그리고 그가 목도한 건,
‘다람쥐?’
아까 아이네와 함께 먹이를 챙겨주었던 다람쥐 중 한 마리였다. 그 다람쥐가 경계 내부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작은 동물은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 보았듯 포도알처럼 동그랗고 까만 눈은 여전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미묘하게 달랐다. 마치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테고 경?”
서로 눈싸움하듯 한참을 들여다보다 공녀의 부름에 그가 시선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순진무구한 외모에 조그맣던 다람쥐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면서 날카로운 이빨이 여러 겹으로 다다닥 돋아났다가 사라졌다.
“아니, 무슨…….”
역시 마물이었다.
그것도 정체를 능숙하게 감췄다가 드러낼 능력이 있는 최상급의 마물.
테고도 여태 구전으로만 들었지, 실제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굴러온 땅콩이 멈춘 자리엔 아까 아이네의 손가락을 스쳤던 다마스커스 강으로 만들어진 나이프가 있었다.
여긴 도대체 어떻게 된 영지야?
* * *
이곳으로 올 때처럼 아이네는 테고의 앞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품에는 아까와는 달리 천으로 둘둘 말린 나이프가 안겨 있었다.
“흐음.”
다행히 테고는 자신이 아공간에서 나눴던 대화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걸 들었다면 이렇게 침착할 리가 없지.’
아이네가 고개만 살짝 돌려 그를 힐끔 바라봤다.
벌써 8년이나 되었지만 아이네는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란 사실을 늘 잊지 않았다.
그건 원작을 모를 때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이 제가 읽었던 책 속이라는 사실을 들켜선 안 된다는 걸 본능처럼 알았다. 이래저래 닥쳐올 파장이 클 게 뻔했다.
진실을 밝히고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모를까.
‘너무 늦게 알았어. 거기다가…….’
만약 테고가 평범한 성장 과정을 거친 여자주인공이었다면. 그랬다면, 모든 걸 털어놓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에 오빠까지 전부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는데. 그게 이미 정해진 운명이란 걸 알아봐.’
안 돼. 흑화하기 딱 좋은 전개야.
“후우.”
아이네는 한숨을 내쉬며 자연스럽게 등을 기댔다. 그리고 품 안의 검을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이 검이야말로 그녀가 진짜 책빙의자라는 증거였다. 그녀만이 알 수 있는.
“윽, 공녀!”
기대기가 무섭게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그녀는 불퉁하게 대꾸했다.
“친구끼리 이 정도 기대면 어때서요.”
엄밀히 말해서 그는 이번엔 기대어도 된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테고가 지적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저절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고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작게 읊조렸다.
“……저는 공녀와 친구가 되겠다 한 적이 없습니다만.”
온몸에 힘을 빼고 기대어 있던 그녀가 이번에는 고개를 끝까지 돌렸다. 테고를 힘껏 노려보는 눈길이 제법 매서웠다.
“다마스커스 검 보여줬잖아요! 약속 왜 안 지켜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테고는 오늘부로 여태 추측에 불과했던 가정 하나를 기정사실화했다.
‘역시 공녀가 베룸의 발현자인 거야.’
오두막에서는 왜 정신을 잃었는지, 상처는 어떻게 다 나았는지 물었지만 아이네는 자기도 모르는 일이라며 딱 잡아뗐다.
정말로 억울해하는 표정을 볼 때, 그건 진실인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보았다.
자신의 품 안에 안겨 있었으니 햇빛 때문에 잘못 본 것도 아니었다.
함께 밀려난 경계 밖에서 눈을 뜬 그녀의 눈동자는.
‘반짝였어, 그때처럼.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공녀가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다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전 확답한 적도 없는데 공녀가 먼저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와, 다 봐놓고 이렇게 나오기예요?”
“……됐습니다.”
“치이.”
시작은 다마스커스 검이었을지 몰라도 이제 테고에게 중요한 건 고작 검 따위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그 다마스커스 검에 손조차 댈 수 없었다.
아까 다람쥐인 척하는 마물이 알려준 검에 먼저 손을 뻗은 건 테고였다. 비록 흔적은 남지 않았지만 공녀가 베인 검이었다.
작아도 위험한 물건이니 그가 들고 있다가 성에 도착하면 건네주려는 심산이었다.
그랬는데…….
“읏!”
나이프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찌릿찌릿한 감각과 함께 왼쪽 귓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끝내 견디지 못하고 테고는 검을 잔디 위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녀는 너무나 손쉽게 그걸 손에 쥐었다.
“엥? 이게 뭐야.”
나이프를 들고 가까이서 살피며 아이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칼날이 다마스커스 강이라는 사실만 빼면 역시나 눈에 익었던 탓이다.
그렇게 테고는 그녀가 ‘발현자’일지 모른다는 두 번째 증거를 목격했다.
주인의 피를 먹고 반응하는 마검. 고대와 달리 마법이 쇠퇴한 까닭에 전설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배웠다.
현재도 수집가들이 다마스커스 검에 열광하는 건, 그 마검들이 다마스커스 강으로 만들어져서인 이유도 있을 테니까.
그 귀한 광물로 단검보다도 작은 나이프를 만든 경우는 처음 보았지만.
“이거 들고 말 타다가 찔리면 어떡하죠? 그냥 여기에 버리고 갈까요?”
한 번 베인 경험 때문일까. 공녀가 꺼려 하자 테고는 묵묵히 제 셔츠의 아랫단을 길게 찢어냈다.
이제 셔츠는 팔을 조금만 더 위로 들면 배가 보일 만큼 밑단이 짧아졌다.
마치 그의 정신을 보는 것처럼 너덜너덜하기까지 했다. 아침엔 분명히 새 옷이었는데.
그러나 이런 세기의 보검을 두고 가기에 테고의 무기 사랑은 작지 않았다.
물론 지금의 그가 필요 이상으로 과묵하게 구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공녀와의 말싸움에 할애할 정신적 여유가 바닥난 상태였으니까.
그녀가 ‘황태자’에게 관심을 보였을 때도 저도 모르게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극도로 예민해진 건 그렇게 막연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정신 차려라, 테고 리테루온. 모래주머니다, 모래주머니. 뭐라도 좋으니까 다른 생각을 해. 그래, 베룸 가문에 대해 기억나는 걸 떠올려야…….’
조금 더 현실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그런, 문제.
결계 밖으로 튕겨 나온 이후로 신체의 모든 기능이 지나치게 활성화되어 있었다. 이 상황에서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 부분까지 말이다.
그것도 상당히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
그렇게 이제 테고는 대꾸도 없이 묵묵히 말만 몰았다. 아이네는 과묵해진 그와 계속해서 실랑이를 벌이기보다 정체 모를 이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어보았다.
‘죽지 않았어야 할 사람이 사는 엔딩이라니, 그게 뭐야.’
원작에서 누가 죽었더라? 최종 악역이 죽은 건 확실한데. 하지만 그를 살리면 흘러가는 대로 두라는 말과 모순이 된다.
역시 원작이 일어나는 황도로 가봐야 하나 보다.
그래도 누군가 자신에게 목적을 알려주니 마음이 한층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만이 아니다.
이상하게 아까 이후로 한숨 푹 잔 것처럼 몸이 너무 개운했다. 약간 남아있던 근육통마저 싹 사라졌으니까.
확실히 아까 그 존재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건 맞는 듯했다.
‘음, 신도 아닌데 그런 공간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존재가…….’
로맨스 소설에 웬 드래곤이냐 싶긴 하지만, 신을 제외하면 남는 건 정말 드래곤 정도인데.
“어?”
갑작스레 깨달은 사실에 아이네가 손바닥에 주먹 쥔 손을 맞부딪쳤다.
뒤에 앉은 테고가 조금 놀라 움찔했다. 하지만 아이네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빠져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아티팩트 기능이 딱 폴리모프잖아?’
여자주인공의 신체 여기저기를 세심하게 남자로 바꿔주는 그 기능.
희대의 사기템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드래곤이 존재한다면 폴리모프급 아티팩트가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그것도 오래전 고대인들이 남긴 유산이라고 하니 가능성이 더 커져.
얼마나 신빙성 있는 가설일지는 모르지만 염두에 두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진짜 대단한 아티팩트네.’
그걸 제대로 구동해서 이렇게 훌륭한 남장에 성공한 테고도 대단하고.
변장술 정도로는 만들어내기 힘든 목울대도 그렇게 감쪽같이 구현했으니 말이다.
어느새 테고의 남장에 생각이 미친 아이네는, 문득 전에는 미처 관심 두지 않았던 점을 떠올렸다.
‘그럼, 이미 있는 여주 가슴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났으니 분명 테고도 신경 쓰였을 텐데.
남장여주 소설들에선 흔히 여자주인공들이 가슴을 붕대로 감아서 가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럼, 아티팩트로 이미 있는 가슴을 없는 것처럼 납작하게 구현할 수도 있나?
‘가능할 거 같긴 하지만…….’
저번부터 자신과 가까이 붙는 걸 경계하는 테고를 보면, 가슴은 못 줄이는 걸지도 모른다.
아이네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궁금증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테고에게는 참으로 안 된 일이지만 그녀는 궁금한 것을 그다지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네는 그에게 기댄 자세 그대로 꼼지락거리며 슬쩍 몸을 비볐다.
“…….”
안 그래도 바짝 짧아진 셔츠였다. 여차하면 그녀의 몸과 맨살이 닿을까 싶어 테고는 팔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중이었다.
거기에 공녀와 닿아 있는 감각을 떠올리지 않으려 테고는 다른 생각을 하려 애쓰던 참이 아닌가.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떼고 날개뼈와 등으로 자신의 가슴을 더듬는 그녀의 행동이 위에서 훤히 보였다. 침착함과 무심함의 화신이었던 테고는 이제 피가 거꾸로 솟았다.
아이네가 그를 파악한 만큼, 테고도 그녀를 어느 정도는 알았다.
다른 여자였다면 그를 유혹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아이네는 아니었다.
그런 쪽으론 잘 모르는 자신이라고 해도 이렇게 맥락 없고 상대의 반응 따윈 안중에도 없는 유혹은 들어보질 못했다.
분명히 제 시선 아래 보이는 저 작은 머릿속에서 또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런 걸 알면서도 테고는 어쩔 수 없이 입 안의 살을 슬며시 지르물었다.
‘공녀, 제발 이제 그만 좀.’
그렇다고 이전처럼 속도를 내어 말을 몰 수도 없었다. 제 팔을 또 아까같이 꽉 껴안는다면…….
“하아.”
그만두라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어른스럽게 꾹 참아낸 테고의 손이 괜히 말고삐만 잡았다, 놓았다, 반복했다.
그래, 이게 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애초에 제가 먼저 편하게 기대라고 했는데 도대체 뭐라고 변명하며 이 둔한 공녀를 떼어놓을 것인가.
아까부터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의식되니 좀 떨어지라고?
그런 말을 하느니 테고는 차라리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말 터였다.
결국 그는 지금껏 그랬듯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아니, 하려고 노력했다.
공녀가 지금 본인의 행동이 남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면서도 그러는 거라면 정말이지…….
‘악질이군.’
한편, 최대한 티 나지 않게 그의 가슴팍을 더듬던 아이네는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아티팩트가 원래 있던 가슴을 남자처럼 평평하게 만들어 준다고 가정해도…… 보통 여자 몸은 이렇게까지 단단해지지는 않는데.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하나였다.
‘어떡해. 원작 여주는 절벽인가 봐.’
납작한 수준을 넘어 지나치게 딱딱했다. 어쩐지 원작에서 가슴 이야기가 거의 안 나오더라니.
아이네는 실제로 그런 여성 하나를 잘 알았다, 지나치리만치.
‘8년 전, 여기로 오기 전의 나.’
그래, 너무 커도 검을 쓸 때 거슬릴 테니 이런 설정이 더 현실성 있지.
그건 그렇고 테고의 가슴이 어떠한지만 신경 쓰느라 방금 깨달은 건데…….
‘아래에는 너무 큰 걸 넣은 거 아냐? 욕심이 좀 과한 거 같은데.’
아니면 아티팩트로 이렇게까지 구현이 되는 건가?
뒤늦게 느껴지는 엉덩이 부근의 감각에 아이네의 얼굴 위로 질색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 * *
그날의 외출은 테고가 말을 몰아준 덕분에 훨씬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에 심통이 났는지 몰라도 그는 이후로 아이네를 피해 다니는 눈치였다.
그래도 최후의 수단으로 딸기 바나나 오징어 주스를 언급했을 때는 좀 흔들리는 것 같았는데…….
‘끝까지 안 넘어왔어.’
그렇다고 그날의 일에 대해 나딘에게 말한 기색은 더더욱 아니었다.
‘비밀은 지킵니다. 그럼, 바빠서 이만.’
테고는 그녀의 들이댐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남은 기간 동안 나딘의 곁에서 행정업무도 배우고, 보고서도 작성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말이 사실이었는지 테고의 얼굴은 나날이 수척해져 갔다.
뭐, 그렇다고 아이네도 매일 그렇게 한가한 건 아니었다. 원작에서 죽은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떠올리느라 머리에서 쥐가 날 지경이었다.
‘다시 물어보러 숲까지 가기엔 시간이 너무 없어. 난 혼자서는 말도 못 타니까.’
기왕 가기로 한 거 일단은 황도행에 집중해야 했다.
빠듯하게 잡힌 황도행 일정 때문에 이전처럼 드레스를 새로 맞추는 일 외에도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물론 본디 그런 일정을 준비하는 건 귀족 본인이라기보다는 그들을 모시는 사용인의 몫이었다.
그래서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사라가 그만 탈이 나고야 말았다. 그것도 출발 전날에.
“으헝, 사라. 죽지 마. 미안해.”
“그 정도 몸살감기로 죽는 사람은 없어, 아이네. 오버하지 마.”
심한 몸살감기에 시달리는 사라에게 미안해서 아이네는 여러 번 병문안을 시도했다.
하지만 공작가 내에서의 그녀는 공공연한 최약체로 취급된다는 게 정설이었으니.
“안 돼, 아이네.”
“안 됩니다, 아가씨.”
나딘은 물론이고 공작가의 모든 사용인들이 둘의 접촉을 철저히 막았다.
사라 역시 다음 날 황도로 떠나야 하는 아가씨에게 감기를 옮길 수 없다며 아이네의 방문을 거절했다.
그녀의 전담 메이드인 사라 없이도 공작가 사용인들은 빠르고 정확하게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들을 감독하는 나딘 공자의 성향이 그러하니 닮아가는 건 자연스러웠다. 심지어 아이네에게는 유난히 약한 면모를 보이는 점까지.
그래서 그녀는 출발 전날에도 지독하게 따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결국 아이네가 심심함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나딘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기에 이르렀다. 겸사겸사 오랜만에 테고도 볼 겸.
“오빠,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어?”
제가 아쉬워서 찾아왔으니 아이네는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목소리를 꾸며냈다.
“제일 바쁠 때는 데뷔탕트 준비한다고 도망갔잖아. 이번에는 왜 안 어울리게 공녀처럼 말하는 건데. 공녀 컨셉이야?”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딘은 그 목소리를 듣고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원래 공녀인데 무슨 공녀 컨셉이야.”
“황도 가면 다른 영애들 좀 봐라. 어디에 너 같은 공녀가 있나.”
평소에는 나딘의 말을 얄밉게 받아치고도 남았을 그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커다란 눈으로 흘겨보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본 나딘은 378차 남매전쟁의 승리를 예감했다.
그러고는 더욱 확실한 승리를 위해 오늘도 같은 자리에서 묵묵하게 무언가를 읽고 있는 테고에게로 또다시 화살을 돌렸다.
“테고 경이 쟤한테 말 좀 해주세요. 황도의 영애들은 도대체 어떤지…….”
“…….”
그랬다, 이번에도 그렇지만 언제나 그가 쉬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테고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이네가 미리 큰소리를 쳤다.
그동안 자신이 테고에게 귀족다운 생활과는 먼 모습만 보여줬다는 건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지, 뭘!”
사교계도 안 나가고 친구도 안 만든 게 원작이 뭔지 몰라서라는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해야 해?
아니, 나딘에게는 말한 적이 없지, 참.
아무튼 이제 원작도, 책빙의 목적도 알게 된 자신은 예전과 달랐다.
‘황도에 가면 분명히 다른 등장인물들도 등장할 거야.’
심심했던 아이네는 습관처럼 새로운 가설을 잔뜩 세워두었다. 테고와 그랬던 것처럼 그들과도 마주치면 무언가가 떠오를지 모른다. 어쩌면 기억이 보일지도.
『살았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는 결말.』
물론 여기서 결말은 원작처럼 여주와 남주의 해피엔딩을 말하는 거겠지? 그러면 그걸 사수해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게 영 마음에 걸렸다.
“테고 경도 내일 같이 출발해요?”
“……그렇습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과 자신을 향한 질문에 테고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한 박자 늦은 대답이 나왔다.
하지만 나딘과 아이네 둘 다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기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테고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맹세코 그날 공녀에게 음흉한 생각을 품어서 몸이 그렇게 된 게 아니었다.
신체 건강한 남자인 이상 그런…… 자극이 계속되다 보니 마음과는 달리 반응해버렸을 뿐.
그러나 그녀에게 들키지 않았다 해도 스스로에게 깊은 자괴감이 드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아이네를 피해 다닌 건 자신이 남성으로서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이곳에 처음 오게 되었을 때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공녀가 발현자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들.
‘어릴 때 아팠다는 건 아마도 마력 폭주 때문일 거고. 이렇게 생각하니 전부 아귀가 맞아 떨어져.’
지금까지는 두고 보면서 판단하겠다며 미루어두었다. 하지만 이젠 슬슬 결정을 해야 했다. 황도행이 벌써 내일이다.
다른 것도 아닌 발현자다.
심지어 베룸의 발현자는 마지막으로 나타난 게 언제인지 제대로 된 기록도 없었다.
‘더 이상 공녀의 일과 관찰이나 쓰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내일부터 황도로 떠나긴 해도 밤에는 숙박을 하게 될 테다. 그럼, 그러면 조금 더 시간이 있으니까…….
아이네가 등장한 이후로 그가 읽고 있던 책은 한참이나 단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역시 누구도 테고에게 오래 시선을 두지 않았기에 들키지 않았다.
“그런데 오빠, 이거 왜 추정치로 계산한 거야?”
“뭐? 지난 분기 기록인데 추정치로 했을 리가…….”
서류를 다시 살피던 나딘의 기세가 급격하게 고요히 가라앉았다.
“하, 로버트! 로버트!”
그저 중요도에 따라 서류를 정리하는 일만 도와주던 아이네가 중대한 오류를 찾아냈다.
순식간에 야차로 돌변한 나딘이 무섭게 제 보좌관을 불러댔다.
지금은 행정관 나딘 모드라는 걸 직감한 아이네가 테고를 이끌고 집무실을 나섰다.
“왜 저까지…….”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거예요.”
최대한 빠르게 집무실에서 멀어지려는 찰나, 그들은 헐레벌떡 뛰어온 멀끔한 인상의 젊은 남자와 마주했다.
“헉, 공녀님. 이번에는 어느 정도일까요……?”
테고는 이제 겨우 두 번째 보는 남자였다. 그 남자는 절로 동정심이 드는 간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이네가 엄지를 아래로 향하게 손짓을 했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엄지를 아래를 꺾자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코드 블랙이야. 어획량이랑 입항횟수 기록까지 전부 새로 해야겠더라.”
“안 돼!”
뛰어오느라 조금 흐트러졌지만 단정했던 머리카락을 로버트가 쥐어뜯었다.
“공녀니임. 저번처럼 조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응, 안 돼. 미안하지만 난 내일 황도로 가야 하거든. 그러게 처음부터 실수하지 말았어야지. 그럼, 수고해.”
아이네는 어느 때보다 활짝 웃으며 로버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이미 반쯤 실성한 표정으로 집무실 문고리를 잡은 그의 등은 힘없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문을 연 순간, 아직도 발도 들여놓지 않은 로버트에게 나딘의 잔소리가 비처럼 쏟아졌다.
아이네는 질린 얼굴로 집무실 문을 마저 닫고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 * *
어라, 아니. 저기, 잠깐만요. 이게 인과응보, 아니, 업보라는 건가요?
로버트의 울부짖음을 외면한 대가는 너무도 빠르게 되돌아왔다.
“과세 기준에 관련된 서류라서 당장 고쳐야 할 것 같아. 일단 먼저 황도에 가 있으면 이것만 처리하고 사라까지 데리고 뒤따라갈게.”
“그럼 나랑 테고 경만 먼저 출발하라고?”
아이네가 자신과 테고를 번갈아 가리켰다. 요즘 들어 좀 어색한 사이가 됐는데 말이지. 비록 테고 쪽에서 일방적으로 피하는 거긴 하지만.
“너 이번에도 데뷔탕트 안 치르면 황실에서 청혼서라도 넣을지 몰라. 안 그렇습니까, 테고 경?”
우연이었으나 나딘의 추론은 사실에 완전히 근접했다. 그에 테고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안 그래도 며칠간 그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던 사안 중 하나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베룸의 발현자가 혹시 두 명인가.
“안 돼!”
테고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아이네가 빽 소리를 질렀다.
황태자는 서브 남주인데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꼬이는 건 곤란했다.
백번 양보해서 같은 조연이나 엑스트라끼리면 몰라도 서브 남주는 너무 주요 인물이었다.
그녀는 이제 결말을 사수해야 하는 몸이다.
그러니 책빙의한 목적이 따로 있는 이상 그 외엔 무조건 이야기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게 제일이지.
아이네는 비록 원작에서의 제 역할이 존재감 공기 수준일 뿐이라도 기꺼이 순응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아이네의 고함에 귀를 가렸던 손을 떼어낸 나딘은 퉁명스럽게 핀잔했다.
“누가 진짜로 그렇게 한대? 네 데뷔탕트 파트너는 나니까 그전에는 갈게. 그때까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그러나 그녀는 이번만큼은 나딘의 어린애 취급에 발끈하지 않았다.
왜냐고? 이젠 뉴 아이네로 다시 태어났거든.
“오빠, 모든 걸 알게 된 나는 예전의 아이네가 아니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딘은 정말로 제 동생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혼자 보내도 되는 걸까.
* * *
결국 사라와 나딘 없이 아이네와 테고가 먼저 황도로 떠나는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아이네를 피하려는 노력의 일환 덕에 테고는 어느새 뜻하지 않게 나딘과 꽤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여전히 한쪽이 일방적으로 말하고 한쪽은 듣기만 하는 관계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딘은 아이네 몰래 그에게 제 동생을 부탁했다.
“테고 경, 아니, 공작님. 번거로우시겠지만 제가 갈 때까지만이라도 우리 아이네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처음에 은근히 테고를 경계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였다.
“……알겠습니다.”
나딘의 말을 들은 테고는 저도 모르게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황도에 도착하면 각자의 저택에서 머물 터였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아이네를 만나기 어렵게 된다.
‘하지만 공자가 부탁까지 하니 어쩔 수 없지.’
애써 태연한 척하는 낯과 달리 테고는 저도 모르게 나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