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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발현자가 아닌 ‘테고’ 리테루온 (6/29)

5. 발현자가 아닌 ‘테고’ 리테루온

열흘이나 걸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아이네의 황도행 기간은 절반으로 단축될 예정이었다. 마침 황도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도로가 완성된 덕분이었다.

일정이 짧아졌다고 해서 노숙을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때 발생하는 부실한 숙소 문제 또한 생기지 않았다.

이게 가능했던 건…….

“굉장히 적절한 위치에 마을을 조성했군요.”

테고의 진심 어린 감탄에 아이네는 뿌듯한 표정으로 가슴을 폈다.

“이런 면은 황도보다 훨씬 낫죠?”

솔직히 말해 황도와 비교하는 것조차 무의미해 보일 정도였다. 베룸 영지의 이런 면을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게 더 놀라웠다.

‘다들 어떻게 이걸 모를 수가 있지?’

그가 알기로 베룸 영지 하면 잘 닦인 도로와 오징어가 유명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테고가 베룸 영지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된 건 겨우 근래 들어서였다.

지금 이 도로만 보아도 그랬다.

단순히 길만 닦은 게 아니었다. 구간마다 적절한 간격으로 숙박 시설도 배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통행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치안에도 꽤 도움이 되었다.

테고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이네를 바라보았다. 그저 겉모습만 귀여운 공녀인줄 알았는데, 제법이다.

사실 이건 아이네가 빙의 전 살던 세계의 고속도로 휴게소를 카피한 거였다.

‘뭐 어때. 어차피 아무도 모를 텐데.’

그러나 최초로 아이디어를 낸 아이네도 간과한 점들은 있었다.

당시 그녀는 고작 열두 살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그런 아이네의 의견이 어떻게 금방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

단순한 아이디어와 이미지만으로 어떻게 단 한 번의 시행착오도 없이 성공할 수 있었는지.

베룸 영지의 관료들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하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치 알 수 없는 힘이 밀어주기라도 하는 듯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도로가 완성되는 시점이 반드시 지금이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가씨, 내부에서 정리가 모두 끝났다고 합니다. 모시겠습니다.”

“응! 테고 경은 내 옆방으로 해줘.”

테고가 다른 기사들과 여관 주위의 지형을 둘러보러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마차 안에서 대기하던 아이네에게 다른 공작가 기사가 다가와 보고했다. 이번 황도행의 호위를 맡게 된 아론 경이었다.

“예? 아……. 그럼 아가씨와 테고 경의 침실 외에는 3층을 모두 비우겠습니다.”

조금 의아해하던 아론은 황실 기사인 테고의 지위를 떠올리고 납득했다. 어차피 아가씨의 방 문 앞은 밤새 자신이 지킬 테니까.

첫날 일행이 묵게 된 여관은 꽤 크고 호화로웠다. 성 밖 마을에서 보기 힘든 무려 3층 규모의 건물이었다.

이제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한 테고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건물 밖의 지리를 대강 익힌 그가 1층 로비로 들어섰다.

‘영주성이 있는 대도시도 아닌데…….’

옛길을 통해 베룸 영지로 오느라 그는 처음 보았다.

편한 잠자리만 보장되어도 여행의 난도는 훨씬 낮아지는 법이다. 거기에 깨끗하게 잘 닦인 넉넉한 도로까지.

상단을 키운 것도 그렇고, 베룸은 전 대륙의 유통에까지 손을 뻗으려는 걸까.

바로 옆에 붙은 영지인데도 테고의 영지와 발전 양상이 극과 극이었다.

“테고 경! 뭐 먹을 거예요?”

아이네가 그의 눈앞으로 메뉴가 적힌 종이를 밀어 넣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알 수 있게 그림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여관의 1층은 보통 그렇듯 식사를 하는 공간이었다. 방 안에서 저녁을 먹을 수도 있었지만 아이네는 식당을 택했다.

‘로판 읽을 때마다 이건 꼭 체험하고 싶었어!’

흔해빠진 다른 영주의 성 같은 거 말고 정석적인 모험 분위기가 팍팍 나는 곳은 역시 여관이지!

기껏 빙의해서도 공작성 안에 내내 갇혀 살아야 했다. 가끔 신분을 감추고 성 밖에 다녀오기는 했지만.

그것도 그래봤자 영지 안이었으니까. 그녀의 망상과 기대감이 무럭무럭 자라기엔 시간마저 충분했다.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네를 보며 테고는 피식 작은 미소를 흘렸다.

‘확실히 심심하진 않군.’

게다가 그런 식으로 흐뭇한 표정을 짓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네를 수행하기 위해 따라온 기사들과 하인들까지 그녀만 보고 있었다.

“그럼, 나는 수프랑 크로켓으로 할래.”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영애님. 마침 저희 여관에는 신선한 고기도 준비되어 있거든요.”

여관주인이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활짝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긴장으로 젖은 손바닥이 축축했다.

하룻밤 동안 여관 전체를 빌린다는 예약에 쾌재를 부르며 승낙했다. 그저 어느 거대 상단이라도 거쳐 가는가 싶었는데, 도착한 손님은 그 이상이었다.

‘진짜 귀족이다. 그것도 대귀족!’

비록 가문의 인장을 가린 마차이지만 상당한 규모의 일행에 기사까지 거느렸다.

필시 신분이 높은 귀족 일행임이 분명했다.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일까. 고만고만한 상단 무리만 보다가 고위 귀족 손님은 처음이었다.

‘귀족 나리들을 대접할 때는 첫째도 서열, 둘째도 서열이랬는데……. 어느 쪽이 두 번째인 거지?’

이 중에서 가장 고귀한 이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이는 제일 어려 보여도 눈에 띄는 고급 재질의 드레스를 입은 영애님이란 건 분명했다.

거기다 옷차림 때문이 아니어도 모두의 시선과 관심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다만, 귀족 영애님을 제외하고는 다들 차림새가 비슷비슷한 기사들이라는 게 문제.

“그럼, 이제 다음은 어느 분…….”

그러자 다른 이들이 테고를 눈으로 가리켰다. 가장 신분 높은 공녀가 메뉴를 골랐으니 다음은 황도에서 온 황실 기사의 차례였다.

그 눈길을 따라 여관주인도 아이네의 곁에 앉은 테고에게 시선을 돌렸다. 테고를 가까이서 보게 된 여관주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귀족 나리들은 외모도 서열 순인가.’

유난히 발달한 체격에 얼굴만은 섬세한 붓으로 그린 듯한 미청년이었다. 웬만한 여자들은 곁에 서기도 송구스러울 정도로.

그렇지만 큰 키와 누가 보아도 남성적인 체형 덕에 여자로 보이진 않았다.

“이것과 그 아래로 다섯째 줄까지 쓰인 음식 전부 주게.”

이번엔 아이네의 입이 벌어졌다.

테고는 과연 범상치 않은 여자주인공이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를 식당에서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기사님. 이 정도면 장정 일곱이 먹고도 남는 양인데요.”

“…….”

곤란해 보이는 여관주인과 테고 사이로 그녀가 급히 끼어들었다.

“괜찮으니까 일단 시키는 대로 다 갖다 줘요.”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아이네는 대식가 테고에게도 꽤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짐작대로라면 저것도 남들의 이목을 의식해서 적게 시킨 편일지 모를 일이다.

대신 메뉴판을 넘겨주며 그녀가 은밀히 여관주인에게 속삭였다.

“혹시, 여기에 특산주라든가 그런 건…….”

“안 됩니다.”

말없이 앉아 있던 테고가 단박에 막아섰다. 아무리 작게 속삭이려 해도 그의 귀에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워, 원래 이런 곳에 오면 마셔주는 게 예의라고요.”

“그런 예의는 난생처음 듣는군요. 아무튼, 안 됩니다. 이분께는 과일주스를 갖다 드리게.”

테고의 단호한 말에 그녀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성인인데 뭐 어때서 그래요.”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마시고 내일 일어나지 못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그러면서 그의 시선이 여전히 가늘기만 한 아이네의 손목을 힐끔 훑었다. 보이는 것만큼 연약한 신체였다.

고작 수프와 크로켓 몇 조각으로 배가 부를 허약한 몸에 술이라니.

그 정도면 테고에겐 간식조차 되지 못할 식사량이었다. 그는 왜 나딘이 아이네의 식사를 챙기지 못해 안달인지 완전히 납득한 상태였으니까.

술도 그랬다. 물론 제국에선 미성년이라고 해서 술을 마시지 말란 법은 없다. 오히려 아이 티만 벗으면 적당히 마실 줄 아는 게 미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것도 술을 이겨낼 수 있는 건강한 자 한정이지. 공녀는 아직 안 돼.’

테고의 생각과는 달리 아이네는 한두 잔 정도는 버틸 수 있는 몸이었지만. 그는 나딘이 맡긴 보호자 역할에 점점 과몰입하고 있었다.

‘안 돼, 아이네! 술은 성년이 되어서 마셔도 늦지 않아.’

아이네는 여태 나딘의 과보호에 막혀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이전 세계에서의 경험으로 그녀 역시 미성년 시기의 음주는 조금 꺼려지기도 했고.

‘하, 정말……. 내 안의 유교걸.’

비록 지금은 성년이 지났지만 자신의 주량을 모르는 아이네로서는 테고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고집부리지 않고 금방 포기했다.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어.’

테고에게 아이네란 아기 새를 다루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알았어요. 혹시라도 나 때문에 일정이 늦어지면 안 되니까.”

모처럼 참견쟁이 나딘이 없는 김에 마셔볼까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번부터 새로운 나딘이 하나 더 생긴 기분이었다.

맥주든 과실주든 새로운 곳에 가면 한 번씩 맛보는 게 모험물의 정석이란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한때 병약했던 저를 향한 테고의 걱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 역시 발현자 특유의 마력 폭주로 아팠던 시기가 있었을 테니까.

“휴.”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시무룩해진 아이네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테고가 달래듯 말을 이었다.

“황도에 가면 공녀가 마실 만한 걸 추천해주겠습니다.”

“앗, 그 말은 황도에 도착해서도 나랑 만나겠단 소리죠?”

“…….”

미혼 남녀가 만나다니. 또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만한 소릴.

물론 그는 아이네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잘 알았다. 아마 얼마 전까지 매일 조르던 저와 친구 하자는 소리의 연장선상이겠지.

하지만 다 알면서도 묘하게 술렁이는 마음을 막기는 어려웠다. 결국 테고는 이번에도 일부러 딱딱하게 대꾸해버리고 말았다.

“추천 정도는 굳이 만나지 않아도 가능합니다. 저택의 집사에게 전해두면 되겠군요.”

아이네의 눈이 새초롬해졌다. 처음엔 친구 하자는 말에 어찌할 줄 모르더니, 이젠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는 게 얄미웠다.

그래서 그녀는 대식가 테고가 서운해할 만한 말로 갚아주었다.

“됐어요! 내 크로켓 나눠 먹을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

누군가와 음식을 나눠 먹다니…….

그는 날 때부터 대귀족이었다. 따라서 맹세코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네가 그렇게 말해서일까, 이상하게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좀처럼 솔직하지 못했던 죄로 테고는 식사 시간 내내 그녀에게 외면당해야 했다.

* * *

똑똑.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볍게 통통 구르는 발걸음과 이어 들리는 미약한 노크 소리.

“들어오십시오.”

테고는 이제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게 누군지 알았다. 뒤이어 그의 시선이 커다란 창가로 향했다.

달이 밤하늘 한가운데로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라면 몰라도 테고는 이미 잘 알았다. 공녀가 제게 불순한 의도로 찾아왔을 리가 없다는 걸. 그동안 쌓인 경험이 있어서 그는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마을 광장에 함께 나가보자는 말이겠지.’

딱딱해진 분위기를 못 이기고 식사 말미에 여관주인이 귀띔해준 이야기가 있었다.

‘영애님, 기사 나리님들. 마침 딱 적당한 때에 오셨습니다요. 오늘 저희 마을 광장에서 모닥불 축제가 있습죠.’

‘모닥불 주위에서 춤추고 마시는 그런 축제요?’

‘영애님이 보시기엔 별거 아닐 수는 있지만……. 예예.’

‘흐응.’

호기심 많은 공녀 성격에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문 쪽으로 향하려다 테고는 문득 멈칫했다. 어느새 그녀에 대해 이만큼이나 파악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사이, 아주 약간의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와, 나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그야…….”

대답과 함께 테고는 무심코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표정이 완전히 무너질 정도로 당황하고 말았다.

“헤헤, 아론 경한테 우유 좀 부탁하고 잠깐 빠져나왔어요.”

“…….”

정신이 들자마자 테고는 그녀의 팔을 끌어 재빨리 제 방 안에 들였다. 그러고는 누가 볼세라 문을 급히 닫았다.

그의 눈길이 아이네의 옷차림을 따라 스윽 내려갔다. 그렇게 가슴 부근까지 이르자 더는 견디지 못하고 결국 억지로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지금 이 꼴로 광장이라도 가자는 건…….”

아니겠지요, 라는 뒷말을 테고는 간신히 억눌렀다.

베룸 영지보다 남부인 황도로 향하면서 날씨는 점점 더 따뜻해졌다.

이동 일정이 그리 길지 않은 여정이었다. 갈아입을 여분의 옷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뒤따르는 짐마차에 실려있었다.

하지만 준비된 여름용 드레스는 평민들 사이에선 너무 튀었다. 그래서 아이네가 택한 게 드레스 바로 안에 받쳐 입는 일종의 속치마였다.

겨울이 긴 영지에서 만들어진 옷인 터라 속이 비치거나 노출이 과하지는 않았다. 사실 끝단에 잘게 매달린 레이스만 제외하면 단순한 디자인의 외출복으로 우겨볼 수도 있을 법했다.

아주 정숙한 복장은 아니어도 정색하고 낯빛을 바꿀 정도는 아니란 소리다.

그러나 문제는 옷감이었다. 잠옷과 같은 실크로 만들어져 움직일 때마다 몸의 굴곡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하…….’

그건 며칠 전 그 굴곡을 직접 겪고 매일 밤 고뇌에 시달리는 누군가에겐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다른 드레스는 죄다 짐마차에 있어서 번거롭잖아요. 아직 황도도 아닌데 일단은 이렇게 입고…….”

“안 됩니다!”

매사에 과묵하고 조용하던 테고가 목소리를 높였다.

“으앗,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요. 갈수록 나딘스러워지는 거 알아요?”

아이네는 그가 소리치는 걸 처음 들었다. 그래서 나딘스럽다는 심한 말까지 입에 담고야 말았다.

그래서일까. 슬쩍 올려다본 테고의 눈빛이 형형했다. 그녀는 빠르게 철회했다.

“으응, 나딘스럽다는 말은 취소……할게요.”

하지만 힘이 단단하게 들어간 테고의 아래턱은 여전히 풀릴 기색이 없어 보였다.

‘말이 너무 심했나.’

아이네의 작은 어깨가 다시 조금 움츠러들었다.

“…….”

테고는 아랫입술을 슬며시 물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그는 사전적 의미로만 알고 있던 ‘환장’이라는 단어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도 뭐가 문제인지 몰라 엉뚱한 소리만 내뱉는 공녀 때문에!

테고를 겪어본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한 가지가 있었다.

‘리테루온 공작은 괴물이다.’

그건 검술에 대한 재능과 힘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지나칠 정도로 초연하고 침착한 성정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요 며칠 겪는 급격한 감정 변화는 테고 본인에게도 낯설기 그지없었다.

“잠시만 기다려보십시오.”

그리고 스스로가 낯설어진 딱 그만큼 테고는 아이네를 알게 되었다.

어차피 그가 밤새 방문 앞을 지키지 않는 이상 공녀는 어떻게든 제 목적을 이루려 할 테다.

그럴 바에는 제가 직접 데리고 나갔다 오는 편이 나았다.

“이게 뭐예요?”

“제 베스트입니다. 갑갑해도 참으십시오.”

짙은 밤색의 남성용 조끼가 아이네의 몸 위로 걸쳐졌다. 그의 눈엔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보이는 상체의 윤곽이라도 대강 가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테고 경 옷이에요? 와, 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테고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어쩌면 이렇게 번번이 좋지 않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는 기껏해야 허리춤까지밖에 오지 않는 조끼였다. 그러나 아이네가 입으니 허벅지 절반까지 넉넉하게 내려왔다.

게다가 그에게는 꼭 맞았던 어깨 부분이 아이네에겐 팔뚝 부근까지 축 늘어졌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단지 그녀에게 제 옷이 좀 헐렁할 뿐이었다. 그뿐인데…….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자주 입던 자신의 옷에 감싸인 공녀의 모습이 만족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만족스럽기도 하고.

어떻게 완전히 반대인 두 가지 감정이 함께 느껴질 수가 있는 걸까.

늘 구분이 명확하던 테고의 세계는 이렇게 번번이 무너져 내렸다.

“이러면 속치마인 거 아무도 모르겠다, 그쵸?”

헤헤 웃으며 아이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

속치마인 걸 알면서도 입고 나가려고 했다고?

“우리 더 늦기 전에 나가요. 이런 이벤트 놓치면 나중에 후회한다니까요?”

그러나 테고에게는 이제 더 이상 화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여관 전체를 통째로 빌린 게 다행이었다. 덕분에 아이네의 옷차림을 본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사실에 테고는 안도했다.

사라와 나딘이라는 통제 수단이 부재한 지금, 그의 어깨가 조금 더 무거워졌다.

“아가씨, 저한테는 우유 데워오라고 하셨으면서…….”

테고의 방에서 나온 그들은 아이네의 방 앞에서 망연한 표정의 아론을 맞닥뜨렸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끝이 살짝 구겨진 쪽지가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어? 아론 경, 생각보다 빠르네요.”

“광장에 놀러 가고 싶으시면 저한테 말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래도 아가씨 호위는 저인데…….”

아가씨가 호위를 따돌린 적은 처음이었다. 아론은 쪽지를 본 이후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단순하게 그녀의 일탈 때문이 아니었다.

‘로윈 경의 말대로, 설마. 설마……?’

황도로 출발하기 전, 로윈 경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황실 기사라는 그 작자가 보통이 아니야.’

아론의 시선이 아이네의 뒤에서 단단하게 버티고 선 테고에게로 가 닿았다. 조그마한 아가씨와 가까이 있으니 커다란 체격이 유독 눈에 띄었다.

늘 무표정한 그의 미간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거기다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조금 노려보는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실력은 대단하긴 했어.’

황실 기사인 데다 종종 연무장에서 보인 그의 무위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가씨와 격이 맞는 상대는 아니지 않은가.

어디 기사 나부랭이가!

같은 기사인 아론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테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에 힘을 주었다.

“응? 아니, 아론 경? 요 앞에 잠깐, 아주 잠깐 나갔다 올 건데…….”

아이네는 살짝 당황했다. 그저 황도에 가기 전, 테고와 조금이라도 더 친밀해질 기회를 노렸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동행인과 행선지도 모두 밝혔고, 테고만 한 실력자는 흔치 않으니까.

“아론 경이 잘 몰라서 그렇지, 테고 경은 아직까진 별다른 사건이 없을 사람이야.”

저건 또 무슨 소리인가.

가만히 듣고 있던 테고가 아론의 손에 들려있던 쪽지를 낚아챘다. 거기엔 테고 경과 마을 광장으로 놀러 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 아이네의 필체로 적혀있었다.

“황명에 따르면, 공녀의 호위는 데뷔탕트가 끝날 때까지입니다.”

이번에도 테고는 황명을 들먹였다. 이어서 쪽지의 구겨진 부분까지 잘 펴서 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아이네의 어깨를 앞으로 아주 살짝 밀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만 혼신의 힘을 다한 힘 조절이었다.

“나라면 호위대상을 두고 경계를 소홀히 한 기사는 믿을 수 없을 것 같군요.”

그 말에 아론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나딘 공자님이나 선배인 로윈 경의 귀에 들어간다면 질책받을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입이 궁색한 변명을 내뱉으려는 찰나, 아이네가 멋쩍게 웃었다.

“아론 경을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알죠? 우유는 갔다 와서 마실 테니까 먼저 쉬어요!”

그렇게 그녀가 먼저 층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 아가씨……. 윽!”

그때, 아이네를 부르며 손을 뻗으려는 아론의 어깨를 잡는 손이 있었다. 테고가 손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언제부터 호위가 주인의 말에 일일이 토를 달았지? 이런 식으로 어설프게 호위할 거면 차라리 나한테 다시 맡겨.”

그렇게 제 할 말만 하고 테고는 바람소리가 날 만큼 매몰차게 아론의 곁을 지나쳤다.

몇 걸음 걷지 않아도 그는 금세 아이네를 따라잡았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뒤에 붙어서서 함께 여관을 나섰다.

“아니, 저기.”

아론은 슬슬 아려오기 시작하는 어깻죽지를 주물렀다.

무슨 힘이 이렇게 세?

그의 얼굴에 억울하단 표정이 뒤늦게 차올랐다. 잠시 테고의 페이스에 휘말려 잊었지만 자신이 아무 생각도 없이 자릴 비운 건 아니었다.

“어차피 여관은 우리가 다 빌린 거라 입구만 지키면 된다고요.”

게다가 층계마다 교대로 지키는 기사까지 이미 여러 명이었다. 그뿐일까. 커다란 여관 건물을 구역별로 불침번 서는 기사도 여럿이다.

그건 아까 낮에 기사들과 인근을 함께 둘러본 테고 경도 이미 아는 일이 아닌가.

“나딘 도련님도 이렇게까진 안 하시는데, 정말.”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공허한 한탄에 불과했다.

* * *

도시는 아니어도 공작성과 한나절 거리의 가까운 마을이었다. 그래서인지 생각보단 축제 규모도 꽤 크고 참여하는 인원도 제법 많았다.

“저희 마을에서 수확한 라즈베리로 담근 술이에요. 모든 근심과 걱정이 싹 사라진다는 전설이 있답니다.”

“고마워요.”

아이네는 두 손에 잔을 받아들며 마을 주민에게 방긋 웃어주었다.

굳이 이 마을에서 만든 술이라서가 아니라 모든 술이 다 그렇지 않을까. 취하면 근심 걱정뿐 아니라 이성도 잃게 되겠지만.

“…….”

곁에 앉은 테고가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 눈빛에 담긴 메시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애써 무시하며 그에게도 작은 나무잔을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변명처럼 덧붙였다.

“괜찮아요, 원래 이런 축제용 술은 애들도 마실 수 있다고요.”

마을 주민들이 나눠주는 약간의 과실주까지 거절할 순 없지 않은가.

“그래도 다 마시면 안 됩니다.”

테고의 잔소리에 아이네는 잔을 입에 댄 채로 구시렁거렸다.

‘이젠 뭐만 하면 안 됩니다, 안 됩니다. 가만 보면 나딘보다도 더해.’

비록 과일주스나 다름없을 만큼 도수가 약한 음료지만, 아이네로서는 빙의한 후로 처음 마셔보는 술이었다.

“캬!”

미약하긴 해도 혀끝에 남은 알싸한 알코올 향이 무려 8년 만의 감탄사를 불러왔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습니까.”

테고는 제 손에 잡힌 나무잔을 만지작거렸다. 잔에는 자잘한 흠집이 많이 나 있었다.

아니, 외형의 문제가 아니다. 이전에 누가 마셨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공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잔에 입을 대고 술을 마셨다.

문득 전방에 있던 시절이 생각났다.

으레 최전선이 다 그렇듯 상황은 열악했다. 그런 곳에서 3년간 기사나 병사들과 함께 굴렀다. 그래도 테고는 리테루온 공작가의 마지막 직계였고, 그에 맞게 대접받았다.

다소 조악한 것이라 해도 그 혼자만 사용하는 은잔이 있었다. 규모가 작더라도 그가 잠드는 곳은 개인 막사였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계급은 존재했으니까. 그리고 여태껏 테고도 그걸 당연하다고만 여겼다.

‘공녀는 꼭 별세계에서 떨어진 것 같군.’

베룸 영지가 좀 독특하긴 해도 신분제는 엄연히 작동하고 있었다. 나딘 공자도, 집사장도, 하다못해 아까의 그 기사까지 정해진 질서에서 벗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공녀의 행동들은 다소 소탈한 성정의 귀족 수준을 넘어있었다. 지금 이렇게 잔디밭에 아무렇게나 앉으면서도 전혀 거리끼는 기색이 없는 걸 보면.

그렇다고 평민 같다는 말은 아니다. 제게 주어진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다가, 비굴한 구석은 일절 없었으니까.

그저 별세계라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타닥타닥-

잘 마른 나무 냄새와 모닥불의 후끈한 열기가 코앞까지 풍겼다. 테고의 눈에 불빛으로 발갛게 익은 아이네의 옆모습이 보였다.

“참은 게 아니라 참을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묘한 대답이었다.

그때, 마을 주민 중 누군가가 연주하는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섬세하게 조율한 악기가 아니라서인지 중간중간 음이 튀었다.

그래도 날것 그대로의 즉흥적이고 생생한 선율이었다.

음악에 맞춰 아이네가 가만히 몸을 까딱였다. 그녀의 시선은 광장 중앙에서 피어오르는 모닥불에 붙잡힌 채였다.

그러다 눈을 돌려 테고를 힐끔 훑었다.

하지만 주위의 흥겨운 분위기와 대비되게도 그의 자세는 꼿꼿하기만 했다.

광장 전체에 가득한 열기를 못 느끼는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저렇게 무심한 성격으로 도대체 어떻게 남주랑 썸을 탄다는 거야.’

그때 가만히 앉아만 있던 테고가 웬일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이제는 안 참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어째서입니까? 성년이 되어서?”

여기서 이렇게 기억 폭행을요? 게다가 지금 이 축제가 한창 달아오른 거 안보여요?

빙의했다는 이유를 제외하고라도 제가 아파서 두문불출하느라 친구가 없단 걸 뻔히 알면서 말이다.

심지어 꼬치꼬치 캐묻는 듯한 말투였다. 아이네는 그를 약간 흘겨보았다.

“평소에 눈치 없다는 말 안 들어요? 분위기 파악 못 한다든가?”

“아…….”

테고는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번부터 공녀가 툭툭 던지는 아리송한 발언들에만 골몰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아이네가 다 들으라는 식으로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나랑 친구 해줄 것도 아니면서…….”

그리고 테고는 그제야 제 질문이 공녀의 아픈 과거를 묻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단 걸 깨달았다.

‘그래서 눈치 없다는 소리를 했군.’

그도 그럴게 누가 감히 리테루온 공작에게 눈치 없다고 말할 것인가.

그런 친밀한 핀잔을 해줄 위치의 부모가 살아있을 때조차 그는 귀한 리테루온 공자님이었다.

하지만 테고는 굳이 그런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모든 관심을 모조리 독차지한 건 공녀이지, 이런 흔한 축제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도.

‘확실히 검보단 사람이 어렵군.’

이윽고 테고의 시선이 조금 붉어진 아이네의 볼 위로 닿았다. 사위가 어두워서 뒤늦게야 눈에 띈 모양이다.

괜찮다고 하더니 역시 술에 약한 듯했다. 더 늦어지기 전에 데리고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들고 있던 나무잔을 빤히 바라보다 끝내 한입에 털어 넣었다. 싸구려 술 특유의 텁텁한 단맛이 썩 기껍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어때요. 입에 맞아요?”

아이네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닌 척 곁눈질로 그가 술잔을 전부 비우는 걸 지켜보던 참이었다.

“글쎄요.”

“……어휴.”

자신과 같은 감탄사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감상을 기대했던 마음이 팍 식어버렸다.

아이네가 두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그러자 모른 척 먼 곳을 보는 것 같던 테고의 고개가 돌아왔다.

“춥습니까?”

“아뇨. 그냥 이게 편해서.”

마치 겉옷을 벗어주기라도 할 듯 테고는 손가락으로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그러자 여전히 뾰로통한 표정이던 아이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저기, 지금 입은 거 셔츠 한 장뿐인 거 같은데요.

“아.”

테고도 그제야 더는 벗어줄 옷이 없단 걸 알았는지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그래, 테고도 교류할 친구가 없어서 서툰 거지.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닌걸.

‘이렇게 자기 조끼도 선뜻 빌려주고.’

아이네는 어깨를 조금 더 움츠려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조끼가 은근히 부드럽고 따뜻해서 춥지 않았다.

미약하지만 포근한 이 나무 향은 테고의 옷에서 나는 걸까.

그나저나 이 정도면 친구 하자는 말 나올 때도 됐는데 말이죠.

아이네가 세운 무릎 위로 갸우뚱하게 턱을 괴었다. 마침 테고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짜 나랑 친구 안 해요? 지금 하면 내 1호 친구인데!”

“…….”

테고의 표정이 어딘가 마뜩잖다는 듯 굳었다. 이번에도 아닌가 보다.

그럼, 친구가 아니더라도 같은 편이라고 생각될 만한 관계가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아이네는 최후의 카드를 던져보았다.

“그럼. 음, 날 동생처럼 생각하는 건 어때요?”

친구가 싫으면 여주의 여동생 입양물 하나 찍지, 뭐. 요새 보니 나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던데.

“그건 좀…….”

친구 하자 할 때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던 테고가 티 나게 눈가를 찌푸렸다. 그때와는 또 다른, 명백한 거절이었다.

‘그래, 졌다. 졌어.’

여전히 나무잔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이제 원작이 시작되면 이런 데 데리고 와준 것도 나중에 다 잊어버리겠지?’

아이네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포옥 하고 새어 나왔다. 그제야 그녀는 제가 조금은 뜨거운 숨을 내뱉고 있단 걸 깨달았다.

‘어쩐지 기분이 좀 들뜨더라니.’

그래도 술은 술이라고 딱 기분 좋을 만큼 취기가 올랐나 보다. 덕분에 약간 대담한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친구도, 동생도 싫다고 하니, 황도에서 또 언제 만날지도 모르고…….’

그래서 아이네는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던 말을 대뜸 그에게 풀어놓고 말았다.

“있죠, 나 데리러 와줘서 고마웠어요.”

진심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어떤 세계에 오게 되었는지 알려주어서.

그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공작성 안에서 매일매일 마음만 졸이며 지냈을 테니까.

“딱히……. 황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테고는 나무잔을 힘주어 꾹 잡았다.

예상 그대로의 반응에 아이네는 살풋 웃어버렸다.

아마 제 말이 무슨 뜻인지 그는 원작이 끝나더라도 모를 테지.

“으음, 테고 경만 가능한 그런 게 있어요. 아무튼, 고마워요.”

거기까지 말하자 테고가 다시금 이상하게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아차, 여기까진 말하지 말걸.

아이네는 술기운에 또 실수하기 전에 일어나려 했다.

“그, 그럼 이제 슬슬 들어갈까요?”

“잠깐.”

테고가 그녀에게 입힌 제 조끼 자락을 슬쩍 잡아 제지했다.

아까도 그랬지만 공녀가 발현자라는 걸 알기 전부터 이런 식의 발언들이 늘 신경 쓰였다. 과거든 미래든 뭔가를 내다보고 알고 있다는 듯한 특이한 화법.

“나만 가능하다는 건, 내가 아니면 안 됐다는 뜻입니까?”

……눈치 없다는 말 취소.

아이네의 커다란 눈이 옆으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사정을 모르는 그가 듣기엔 확실히 이상한 말이었을 테다.

“아니, 그게……. 흐음.”

하지만 그녀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어쩐지 간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거짓말로라도 그렇다고 해줘야 할 것 같았다.

‘기분 탓인가. 은근히 아닌 척하면서 자기 얼굴을 적절하게 잘 써먹는단 말이야.’

테고 정도의 미인이 이렇게까지 매달리는데 누군들 냉정하게 외면할 수 있을까.

아이네는 다시 주저앉았다.

그녀가 앉자 그제야 테고의 손가락이 머뭇거리며 떨어져 나갔다.

“네. 테고 경이 아니면 안 됐어요.”

아이네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르게 응시했다. 거짓말은 아니었으니까.

맑고 곧은 눈동자 안에 테고의 얼굴이 오롯이 담겼다. 거기까지 의식한 그의 눈이 오히려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하필 공녀일까. 이 시점에…….’

부모님과 라니엘의 원수를 갚자마자 제 앞에 나타난 사람이었다. 그것도 라니엘과 같은 ‘발현자’일 게 분명한.

자신은 그저 흔하디흔한 직계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둘 중 하나만 살았어야 했다면 제가 아닌 라니엘이어야 했다.

테고의 손이 다시 한번 왼쪽 귓불에 달린 아티팩트를 어루만졌다.

혼자 남은 그에게 아무도 네가 대신해서 죽어야 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되돌아온 아티팩트를 제 귓불에 끼우는 순간, 그는 막연하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직감했다.

찰나에 느꼈던 이질감이 영 기억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홀로 살아남은 건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니고, 선택할 수도 없는 일이란 걸 안다. 하지만 테고는 8년 내내 끌어안고 살았던 이 부채감을 더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제 와서 돌아가신 부모님께 여쭤볼 수도 없지 않은가.

자신과 라니엘 중에 누굴 저울질하고 계셨는지, 그랬다면 당신들의 선택은 누구였는지.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답을 갈구했다.

‘비겁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누군가 한 사람쯤은…….’

이러한 내막까지는 모르는 공녀다. 심지어 8년 전, 그녀는 겨우 열한 살인 데다 꽤 아팠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발현자’라는 가능성 하나만으로 테고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되어버렸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가 괜찮다고 하면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결국, 테고는 커다란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손 아래로 보이는 입매가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그냥, 지금 이 순간만 듣고 잊어주실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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