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여주라고 했잖아요! 2
목차
6. 발현자가 아닌 ‘테고’ 리테루온(2)
반면, 테고의 속사정 따윈 짐작조차 못 한 아이네는 속으로 조금 안도했다. 책빙의자라는 사실을 들키진 않은 것만이 중요했다.
“네, 그럴게요.”
그러나 왜인지는 몰라도…….
지금 그가 꺼내려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 말이란 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보통이라면 주인공의 내밀한 속마음을 듣는 건 지양해야 할 테지만. 저런 표정과 저런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데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그래, 결국 친구가 못 된다고 해도 이 정도는 괜찮지. 자기 입으로 잊어달라고 하잖아.’
무엇보다 테고는 남자도 아니니까.
아이네는 불안한 생각으로 작게 뛰는 가슴을 애써 꾹 눌렀다.
테고가 잠시간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러다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토해냈다.
“난, 나는 항상 내 인생은 덤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다른 목적을 위해서 그저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고.”
“…….”
아이네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차마 아니란 말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테고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지금 시점에선 여자로서의 본인 인생은 완전히 지워진 셈이니까.’
그래서 그녀는 섣부르게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숨만 죽였다. 그가 어떠한 대답을 듣고자 꺼낸 말이 아니란 걸 알았다.
“8년 전에도, 실은 지금도 내가 대신 그렇게 됐어야 하는 건 아닐까. 왜 나 혼자만 살아남았을까. 차라리, 차라리…….”
가려진 눈 아래 피부는 여전히 메마르고 건조했다. 헌데 아이네는 어쩐지 그가 울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워낙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기에 몰랐다. 그리고 그녀는 원작을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 알고는 있었는데…….’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처음에야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쇼윈도 남매니 뭐니 실없는 소리까지 했었다.
그러나 아이네는 금방 잊고 나딘과 다시 평소처럼 익숙하게 투덕거리며 지냈다.
제 것이 아닌 타인의 고통이란 이토록 쉽게 무감각해지는 것이어서.
여기엔 나중에 테고가 남자 주인공과 결국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는 믿음이 있어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아침에 부모와 하나뿐인 남매를 잃은 원작 이전 시점에 불과하다.
그때의 테고는 고작 열네 살일 뿐이었다. 그렇게 겨우 열네 살부터 원래 리테루온 공작이 되었어야 할 오빠를 대신해서 지금껏 오빠의 이름으로 오빠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여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이 들지 않았을 리가.
‘텍스트랑 실제는 이렇게나 다른 거였구나.’
왜 그저 원작 남주인 대공과의 사랑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을까. 그 서사를 위해 테고가 원작 시작 전 겪어야 했던 고통은 진짜인데.
“…….”
아이네가 머뭇거리며 손을 들었다.
여기서 그를 위로해주어야 하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 와중에 참으로 간사하게도 자신은 여전히 전개를 신경 쓰고 있으니까.
하지만 푹 숙여진 채 잘게 떨리는 그의 머리로 손끝을 가져다 대고야 말았다. 몰랐으면 모를까, 이대로 외면할 수가 없었다.
‘먼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없이 졸랐던 건 나니까.’
잠시 테고가 작게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손을 떼진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에 더 힘을 주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지금, 아직은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요.”
아이네는 잠시 숨을 골랐다.
빙의자인 자신은 어디까지 말해주어야 하는 걸까. 방관자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당신이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이유가 다른 누구의 ‘대신’이라서는 아니에요. 이거 하나만은 믿어도 돼요.”
결국, 테고의 가려진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뒤이어 목이 꽉 멘 듯한 거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고맙습니다.”
아이네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자그마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서툴게 그저 쓰다듬어 주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였다. 게다가 어차피 겨우 말 한두 마디로 무언가가 바뀔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테고에게 진짜로 필요한 건 더 이상의 죽은 오빠 행세가 아니라 본인의 인생이다.
그리고 그건 아이네가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딱 1년만 참고 기다려봐요.’
한편, 테고는 불안하게 쿵쿵거리던 심장이 천천히 안정을 찾는 걸 느꼈다.
비록 이어지는 말은 없었지만 다른 것보다도 서툰 손길에서 위로를 받고 있었다.
8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땅에 발붙이고 있지 못하던 제 존재를 제대로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 * *
그리고 아이네와 테고는 여전히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마을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모닥불 앞에서의 춤이지요. 이렇게 하면 기분이 좋거든요.”
중년의 부인이 검지를 치켜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까 라즈베리 과실주를 따라주던 바로 그 마을 주민이었다.
혹시, 호옥시 나중에 돌아갈 때 과실주 한 궤짝이랑 모닥불 모형 같은 거 사서 가야 하는 거 아니겠지?
아이네는 굉장히 오랜만에 익숙한 피라미드식 영업의 향기를 느꼈다.
“아, 아니. 저희는 이만.”
“어허, 일단 아까 그 과실주를 마셨으면 춤까지 춰야 완성되는 거라니까요. 그냥 가면 내년 이맘때까지도 애인이 안 생긴다는 전설이 있어요.”
유난히 전설이 많은 마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테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아이네의 위기감만큼은 정확히 저격하는 시의적절한 멘트였다.
“그렇다면, 반드시 추고 가야겠군요.”
“그렇지, 그렇지!”
“…….”
그 모습을 지켜보는 테고는 곁에 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중년의 부인이 곁에서 맞장구를 치며 그를 힐끔거렸다.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는 아닌가? 세상에, 이렇게 잘 어울리는데! 남자 쪽은 푹 빠진 거 같고. 여자 쪽이 아직이네.’
커플 성사 성공 100여 회에 빛나는 부인의 심장이 사명감을 담아 뛰기 시작했다.
처음엔 멀찍이 앉아 좀처럼 중앙으로 나오지 않는 젊은 외지인 남녀를 위한 오지랖이었다.
커다란 여관은 최근에 생겼지만 마을은 새 도로가 나기 전부터 존재하던 곳이다.
귀족들 간의 교류는 적었어도 예전부터 베룸 영지로 들어가는 크고 작은 상단이 심심치 않게 거쳐 갔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외지인에 꽤 익숙했다.
하지만 그런 주민들이 보기에도 아이네와 테고의 외모는 심상치가 않았다.
“와, 제이든. 저 사람들 좀 봐. 귀족인가? 어떡해!”
“뭘 어떡해. 귀족이면 귀족인 거지. 왜, 왜 여기까지 왔대?”
귀하게 생긴 두 남녀의 등장에 모두가 긴장했던 것은 잠시였다. 잔디밭에 털썩 앉는 모습을 보고 다들 안심했다.
“귀족 나리들은 절대 맨바닥에 앉지 않는 거 아니었어?”
“당연하지! 비싼 옷에 풀물이라도 들면 안 되니까. 우리 삼촌이 자작님 댁에서 일해서 잘 알아.”
아무래도 조금 부유한 평민 정도인 모양이라고.
“에이, 어쩐지. 근데 저렇게 생긴 사람이 귀족이 아니면 진짜 귀족들은 얼마나 더 대단한 거야?”
“그, 글쎄?”
기껏해야 중앙에 피워둔 모닥불과 달빛만으로도 눈에 띄는 남녀였다. 영주성 밖의 변방 마을에선 쉽게 볼 수 없는 미남 미녀의 조합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내가 술 주면서 가까이서 봤는데 말이야.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 맞나 싶더라니까?”
마을 대표로 그들에게 잔을 건네고 온 촌장 부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마을 입구 밖의 여관에 묵는 그 일행분들이겠지요?”
“나도 가까이서 보고 싶다.”
하지만 주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두 남녀는 가장자리에 앉아 좀처럼 모닥불 가까이로 다가오지 않았다.
결국, 다시 한번 나선 건 아까의 그 부인이었다. 그리고 아이네와 테고를 광장 내부로 데리고 오는 데에 성공했다.
“술도 마셨는데 이만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이참, 그 정도는 음료수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네의 볼은 여전히 조금 불그스름했다. 테고가 무어라 말하려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
그녀에게 팔을 잡혔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테고는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가기만 했다. 여전히 온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세운 채로.
광장 중앙의 모닥불 주위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있었다.
덕분에 주민들은 둘의 얼굴을 가까이서 힐끗 훔쳐볼 수 있었다. 그들이 가까워짐에 따라 이어진 충격으로 광장은 삽시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타인의 기감과 움직임에 민감한 테고는 진작에 이들의 호들갑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가 작게 혀를 찼다.
‘이래서 굳이 중앙까지는 나오지 않으려 했는데.’
그녀를 향한 순수한 경탄이 담긴 시선마저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특히 마을 청년들의 눈빛은 그에게 상당한 불쾌감을 일으켰다.
그래서 일부러 아이네에게 가까이 허리 숙여 속삭였다. 그게 질투에서 기인한 거라고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음에도.
“이런 춤도 출 줄 압니까?”
“아까부터 눈으로 봐서 대충은 익혔어요. 제게 부족한 건 체력뿐이니까요.”
“…….”
거듭 말하지만 아이네에게 부족한 건 체력만이 아니었다.
단조롭고 서툰 선율이 흘러나오자 아이네가 먼저 두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테고는 얼떨결에 제 손을 그 위로 올려놓았다.
“테고 경은 아니겠지만 저는 내년 이맘때까지 못 기다려요.”
“……무슨 말입니까.”
원작이 보장하는 짝이 있는 사람은 몰라도 돼!
나는 이제 원작도 찾았으니 연애도 하고 싶다고.
아이네는 이번엔 굳이 설명해주지 않고 샐쭉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어느 춤이나 그렇듯 남자 쪽의 리드로 시작하는 건 같았다. 게다가 아까 지켜본 바에 따르면 왈츠에서 변형된 춤인 듯했다.
그렇게 아이네는 선뜻 시작하지 못하는 그를 잡아끌며 씩 웃었다.
“못 하겠으면 내가 남자 파트로 춰줄까요?”
이건 또 무슨 소릴까.
“됐습니다.”
테고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교본에도 없는 춤이었으나 간단하고 단순한 동작이 반복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눈썰미 하나만큼은 타고난 기사였다. 금세 어렵지 않게 스텝을 익혀나갔다.
“와, 방금 잠깐 보고 다 파악한 거예요?”
“저한테는 체력까지 있어서 말입니다.”
아이네의 감탄을 들은 테고의 목소리엔 능청스러움이 섞였다. 아까와는 달리 어쩐지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대꾸에 아이네가 잠시 입을 벌렸다가 이내 입술을 비죽였다.
‘웬일이래? 아까까지만 해도 울기 직전이었으면서.’
즉석에서 외운 동작만으로도 둘의 움직임은 금세 우아하고 능숙하게 이어졌다.
비록 아이네에게 먼저 손을 내어주긴 했지만, 어느새 리드하기 시작한 건 테고였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손은 가볍게 맞닿아 있을 뿐이었다. 워낙에 간단한 동작들이라 더 이상의 접촉은 불필요했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테고는 문득 그게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소의 그는 연회에서 몇 번이고 춤추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굳이 각종 파티장을 쫓아다니는 치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엔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이런 기분이군.’
벌써 여름 초입에 들어선 시기였다. 그래도 북부에 가까워서인지 이곳의 밤공기는 아직도 제법 서늘했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모닥불 주위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따뜻했다.
“제이든! 또 내 발 밟았지!”
“아니, 네가 먼저 동작을 틀렸잖아. 자꾸 나한테 안기니까 놀라서 그런 거지.”
“이 바보!”
또 다른 남녀가 티격태격 다투는 소리부터.
“와하하하! 여기, 누가 술 한 잔만 더 줘.”
“안 된다니까요. 오늘은 그만! 당신은 만든 술보다 마신 술이 더 많을 거예요!”
애정을 담아 타박하는 목소리까지.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웃음과 대화 소리가 그렇게 덥혀진 공기를 타고 파고들었다.
테고는 그제야 자신이 이 축제라는 것을 눈과 귀로 온전히 느끼고,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단 걸 깨달았다. 겨우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아까와는 모든 게 달라졌다.
늘 텅 비어있던 마음 한구석에 비로소 무언가가 차오르기 시작한 듯 간질간질했다. 필사적으로 채워 넣으려고 해도 자꾸 어디론가 빠져나가기만 했었는데…….
그러니 지금 이 상황에서 테고에게 아쉬운 건 단 하나였다.
“이거, 왈츠보다 더 재미있지 않아요?”
공녀가 춤에 서투르기라도 했다면 그걸 핑계로 힘주어 잡아 볼 수 있을 텐데.
아쉬웠다.
“그렇군요.”
장담했던 대로 그녀는 운동신경 하나는 타고난 모양이었다. 제법 여유 있게 발이 움직였다.
그러나 테고의 아쉬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곳은 귀족 가문에서 열리는 연회가 아니었으니까.
춤에 서툰 이들이나 흥에 겨워 다소 과한 몸짓을 보이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딱히 흠이 되지 않았다.
테고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 그녀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으앗.”
그러자 아이네의 등 뒤로 다른 커플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이었다.
테고는 뒤이어 한쪽 손을 놓고 아이네의 허리를 잡았다. 조금 더 깊게 당겨 안아서인지 제 몸이 살짝 들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착지는 한 바퀴 돌아 천천히 이루어졌다.
그 바람에 조끼 아래 실크 치맛자락이 둥글게 펄럭이며 테고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끝자락에 옅은 풀물이 들긴 했으나 그건 꽤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휴, 놀라라.”
“괜찮습니까?”
“우리, 딱 한 곡만 더 추고 들어가요. 딱 한 곡만!”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올려다보는 아이네에게 차마 위험하니 이만 들어가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위기가 지나간 이후에도 테고는 굳이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한번 깊어진 접촉과 손길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돌릴 순 없어서.
그러기엔 이미 늦어있었다.
문득 가슴이 답답해져 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응시했다.
‘이건, 술에 취한 건가. 아니면 분위기에 취한 건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새싹 같은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부글부글 끓었다.
계속해서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과 싸우는 그때, 아이네의 손가락이 테고의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렸다.
고개를 내려보니 맑은 두 눈동자가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거봐요, 나오길 잘했죠?”
“글쎄요.”
테고는 실소를 흘리며 바람 빠지는 것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근심과 걱정을 사라지게 해준다더니.’
순 거짓말만은 아니었나.
다만, 한 가지 결심만은 확고하게 섰다. 바로 보고서에 무엇을 넣고, 무엇을 빼야 할지에 대한 판단.
폐하께선 분명히 제 판단에 맡기겠다고 하셨으니.
이대로는 제출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한 상태에서도 아이네의 시선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뭐가 그리 보고 싶은 것도, 궁금한 것도 많은지.
그 모습을 고스란히 바라보는 테고의 새파란 눈동자엔 춤추듯 일렁이는 모닥불이 그대로 옮겨 붙어 있었다.
* * *
그 뒤로 아이네의 방문 경호는 물샐 틈 없이 단단해졌다. 왜인지 모르게 호위를 맡은 아론 경은 테고만 보면 어깨를 주무르며 몸을 움찔거리기 일쑤였고.
무엇보다도 겨우 닷새밖에 되지 않는 마차 이동이지만 아이네는 벌써 시들거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밤 외출을 꿈꾸긴커녕 저녁을 먹기 무섭게 곯아떨어지기 바빴다.
‘요샌 체력이 좀 붙어서 방심했다. 흑흑.’
예전보다는 확실히 건강해지긴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장기 마차여행을 견딜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거기다 테고 역시 저녁 이후로는 방 안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하느라 몰두하는 듯했으니까.
그렇게 닷새가 훌쩍 지나가고 벌써 황도가 목전이었다. 어느덧 지금이 황도행 일정의 마지막 휴식시간인 셈이다.
‘이제 황도에 가면 데뷔탕트 때까지는 테고를 못 보게 되는 걸까.’
첫날 마을 축제 이후, 테고는 낮에도 종종 멍해 보였다.
말을 걸면 무뚝뚝하게나마 답은 해주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러고 나선 그녀를 보며 골똘히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네는 테고가 고뇌에 빠질 법한 경우를 손가락으로 꼽아보기 시작했다.
‘숲에서 그 이상한 존재는 나만 만났을 거고.’
그가 경계 안에서의 일을 모른다는 건 확실했다. 애초에 테고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능숙하게 숨길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럼 갑자기 왜 그러지?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단둘만 남을 기회도 없고 이야기를 꺼내기도 여의치 않았다.
테고는 밤마다 거의 잠을 못 자는지 안 그래도 날렵한 턱선이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그런데도 미모만큼은 더 청초하게 물이 오르고 있다.
다시 한번 체험하는 여주인공 버프! 역시 여주인공이란 존재는 작가의 최애임이 틀림없나 보다.
그런 사정으로 아이네는 테고와 친구가 되겠다는 계획을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괜찮아, 그래도 사이가 나빠지거나 한 건 아니니까.’
그녀는 내심 원작의 벽이 높다는 걸 실감했다.
비록 끝까지 곁을 내주진 않았어도 그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원작 여주라서가 아니었다.
테고는 첫인상과는 달리 꽤 다정한 면모도 갖고 있었다.
습관처럼 미간을 찌푸리거나 잔소리를 덧붙이면서도 아이네가 조르면 결국엔 들어주곤 했다.
다음에 원작이 끝나고 또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친구로 삼고 싶었다. 그때는 같은 여자로서 말이다.
‘으휴, 저 외모에 저런 매너까지 갖췄으니 영애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끌리지.’
시원한 바람이 부는 언덕 위에 그와 나란히 앉아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저기 아래에 보이는 곳이 분명 황도일 테지.
처음의 다짐과는 다르게 이왕이면 황도에 쭉 머물면서 원작의 결말까지 보고 가고 싶었다.
원작에서 벌어졌던 전쟁과 반란은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떠나기 전보다 그 위기감이 많이 희석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혼란한 상황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주와 남주가 끝내버렸던 것 같거든.
곁에서 겪어본 테고는 능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기사였다.
‘흠, 아니야. 그래도 데뷔탕트만 치르고 나면 다시 그 숲에 가보는 게 우선이지.’
아이네는 자신이 변수라고 했던 말 못지않게, 살았어야 할 사람이 있다는 말도 신경 쓰였다.
‘살았어야 할 사람이라니, 그건 원작에선 결국 죽었다는 소리잖아!’
그때 자신이 조금만 더 침착했다면 전개를 어디까지 비틀어도 되냐고 물어봤을 텐데.
말이 쉽지, 전개를 비튼다는 건 상당한 위험부담을 떠안는 일이었다.
그러니 제 안위가 위협받는 게 아니고서야 다른 책빙의 주인공들도 핵심 전개는 건들지 않는 거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이네는 눈을 떴다. 바람을 만끽하며 생각을 정리하느라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는 언제부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을지 모를 그에게 방긋 웃어주었다.
“테고 경 생각이요.”
정확히는 원작이 모두 끝나고 여자란 게 밝혀져 있을 미래의 그였지만.
“…….”
테고는 또다시 소리 없이 한숨을 삼켜냈다.
자각 없이 내뱉는 저런 말과 웃음이 언젠가부터 그를 괴롭게 했다. 정작 공녀에겐 별다른 의도가 없다는 걸 알아서 더 잔인하게 느껴진다.
‘발현자’들은 저런 성격인가.
테고는 잉태되었을 때부터 누구보다 라니엘과 가까운 존재였다.
그러나 아주 어려서부터 따로 자랐던 탓에 함께한 기억은 희미했다.
만날 수는 없어도 부모님이나 측근으로부터 일족의 땅에 보내진 라니엘의 이야기는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들었던 라니엘의 성격이 아이네와 비슷했던 것도 같다.
‘라니엘이 테고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더구나. 쌍둥이라 서로 끌리는 게 있는 모양이지?’
‘그 좁은 상투아리움 안에서도 투정 한번 없이 씩씩하게 수련하신다고 합니다.’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너희 둘은 똑 닮았어.’
‘만약 라니엘이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날 밤, 아이네에게 작은 위안을 받은 테고는 더 이상 ‘나 대신’이라는 말을 붙여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8년 넘도록 습관으로 굳어진 사고의 흐름이었다. 아직 라니엘을 완전히 떨쳐버리긴 어려웠다.
대신, 예전처럼 스스로의 존재가 부정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숨 쉬는 게 죄스럽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테고는 앞으로 자신이 자신인 채로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달라진 점이 있었다.
자꾸 가정을 하게 되는 마음속 세계에서 라니엘의 자리가 좁아지고 있었다. 대신 공녀가 그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럼, 라니엘과 공녀가 만났다면……. 아니, 이제 이런 생각은 그만하자.’
테고의 시선이 큰 나무 그늘 아래 나란히 앉은 아이네에게로 향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찍이 보이는 황도를 구경하다 어느새 또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공녀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면 바로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것처럼 굴었다.
‘너무 경계를 안 하는 것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니군.’
테고가 커다란 손으로 제 뺨을 쓸어내렸다. 역시 남자치곤 곱상하다는 평을 듣는 외모가 문제인가.
황제나 주위 측근들이 안다면 기함할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테고 경, 제가 지금 여기서 새로운 약초를 발견하는 건 너무 개연성이 없는 전개겠죠?”
“……또 뭘 보고 있는 겁니까.”
옆자리에 돋아난 풀을 바라보는 아이네의 얼굴이 자못 진지했다. 그리고 테고는 이제 그녀의 뒤통수만 보아도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테고는 반쯤 몸을 일으켜 아이네의 눈길이 닿은 곳을 응시했다.
“중부에선 흔하게 볼 수 있는 잡초입니다.”
“아, 역시……. 약초꾼 여주물도 아닌데 혹시나 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리는 그녀다. 그러나 아이네가 무심코 흘리는 이야기들을 테고는 모조리 마음에 주워 담고 있었다. 비록 그 의미는 모를지라도 말이다.
‘으응, 인생이 그리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여기서 갑자기 불치병을 치료할 약을 찾아내는 것도 황당하고.
원작에서 죽었을 사람을 살린다기에 아이네가 제일 먼저 떠올린 건 그자가 병들었을 경우였다.
결국엔 전쟁이나 반란에 엮인 인물 중 하나일 테다.
방금 전까지 들풀을 구경하느라 쏟아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아이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자신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던 테고와 눈이 마주쳤다.
“아…….”
불시에 가까이서 마주친 테고의 얼굴에 아이네의 하늘빛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잘생기긴 참 잘생겼어.’
굳건했던 성적 지향성까지 뒤흔드는 파괴적인 미모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흑흑.
아이네는 문득 이렇게 자꾸 눈만 높아지다가 웬만한 남자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을 거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제 외모 취향에 부합하냔 말이다. 제일 중요한 성별만 빼고!
‘테고 경 당신에게서 벽이 느껴지네요, 정말.’
그 벽의 이름은 완벽.
그렇게 그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테고의 잘난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훑어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버티지 못하고 먼저 몸을 물린 건 테고였다.
‘늘 그렇듯 계속 쳐다보다가 또 친구 하자고 조르겠지.’
제가 먼저 시선을 피한 건 그 때문이다. 잘은 몰라도 그 이유인 게 틀림없다.
어째서인지 테고는 그 ‘친구’라는 게 썩 마뜩잖았다.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딱 잘라 거절하지도 못했다. 그리 순수하지만은 않은 망설임이 마음 한구석에 눌어붙어 있는 게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예를 들자면…….
친구 하자며 조르고 저를 쫓아다니는 공녀의 모습에 묘한 희열이 들었다던가.
이성적 호감은 아닐까 의심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한 그런 감정은 이렇게까지 음습하지 않았다. 게다가 공녀와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하, 이게 무슨 기분이지.’
이런 감정을 도대체 어떻게 공녀에게 설명한단 말인가. 자신조차 이해가 안 되는데.
“있잖아요, 테고 경. 아니, 공작님.”
그때, 매번 꼬박꼬박 친근하게 이름을 붙여 부르던 공녀가 자신을 다르게 불렀다.
갑자기 거리를 두는 듯한 호칭에 테고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 들어봐요.”
“뭘, 말입니까.”
왜 테고 경이 아니라 공작님이라 부르는 겁니까. 그 말이 테고의 목 끝에 간신히 걸려있었다.
“나중에 다, 전부 다 끝나고 나면요. 베룸 영지에 한번 들러줄 수 있어요?”
“예?”
당연히 친구 하자는 말이 나올 줄 알았던 그였기에 목소리가 살짝 튀듯 높아졌다.
“그냥 이쯤에서 미리 인사를 해두고 싶어서요. 오빠도 일만 마치면 곧 뒤따라 올 테니까요. 그리고 황명도 데뷔탕트 때까지 아니에요?”
“그건, 그렇…… 그렇습니다.”
테고는 간신히 입을 움직여 대답했다. 잠시지만 멍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제 입으로 들먹였던 황명 운운하던 걸 그대로 돌려받은 탓이다.
충격에 빠진 테고를 알 리 없는 아이네는 침음성과 함께 말을 이었다.
“으음, 그리고 저도 데뷔탕트가 끝나고 나면 아마 곧 베룸으로 돌아가야 할 거 같기도 하고.”
“아…….”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라 이번엔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 애초에 공녀는 황제의 명으로 데뷔탕트만 치르러 황도에 오게 된 거였다.
자신은 그런 공녀를 곁에서 호위하며 수행하는 임무였고.
왜 지금껏 그래왔듯이 계속 함께일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것도 당연하게.
‘설마 이제 곧 황도에 도착하니 호칭을 바꿔 부른 건가.’
테고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다 못해 바닥에 차갑게 내동댕이쳐진 느낌이 들었다.
이름이 아니라 리테루온 공작으로 불릴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겨우 한 달도 되지 않는 동안 베룸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졌나 보다.
그런데 이게 마지막일지 모른다니.
그건 황태자와 공녀를 나란히 세워두고 상상할 때와는 또 다른 불쾌한 기분이었다.
“……돌아간다고요?”
“그렇죠? 제 집은 베룸 영지니까요.”
나무 밑에 앉아서도 여태 단정했던 그의 자세가 서서히 흐트러졌다.
앞으로 데뷔탕트까지는 겨우 일주일 남짓. 둘 사이에 남은 시간도 그뿐이라는 건데.
그래, 공녀가 싫은 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친구라는 틀 안에 서로의 관계를 가두기가 망설여졌을 뿐이다.
“아, 그렇지. 오징어 싸게 구하고 싶을 땐, 디도 상단 알죠? 거기에 ‘라비’의 친구라고 말만 하면…….”
그랬던 주제에 이제는,
“공녀, 친구가 되자는 말은 아직도 유효합니까?”
테고의 성마른 음성이 아이네의 말을 끊었다.
“네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아니, 당연하죠!”
어떻게든 공녀와 다음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는 비겁한 마음의 발로였다.
아직도 이런 제 마음을 무어라 해야 할지 실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아닌 사이로 남기에는 아쉬웠다.
왜일까.
등 뒤의 나무에 몸을 기대며 테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가슴팍 위에 머문 채였다.
계속 시선을 마주하다가는 제 눈동자 너머 진득한 미련을 들킬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법한 이유를 찾았다.
“베룸의 영지에선 배울 점이 많지 않습니까.”
끝까지 솔직하지 못하게도.
하지만 아이네는 환한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까지 쳤다.
“뭐어, 우리 영지가 좀 그렇긴 하죠. 진짜로 우리 친구인 거예요, 그럼! 나중에 무르기 없어요!”
여전히 눈을 꼭 감은 그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목소리만으로도 공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우린 친구니까 다음에 보면 편하게 이름 부르기로 할까요? ‘아이네’라고 불러도 돼요!”
“……그건, 생각해보겠습니다.”
하지만 테고에겐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녀에게서 ‘경’마저 빠진 이름으로 불리는 건 어쩐지 낯간지러웠다. 그리고 그가 공녀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는 것 역시…….
아직까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치이, 역시 아직은 안 되나.’
아이네는 입을 삐죽거리며 그가 앉은 나무둥치에 등을 기댔다. 그러자 테고가 슬쩍 가늘게 눈을 뜨고 그녀를 곁눈질했다.
‘또, 그 조그맣고 통통한 입술을 내밀며 툴툴거리고 있겠군.’
제 예상대로였다.
입가가 아주 약간, 허물어지려다 그대로 굳었다. 방금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은데…….
아이네의 뾰로통한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엔 이내 싱글벙글한 웃음이 걸렸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역시 지성이면 감천이랬어. 드디어 첫 친구가! 그것도 원작 여주라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이네의 장점은 사소한 일을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 않는 점이었다.
황도행 마지막 날에 드디어 목표 하나를 달성했다. 그것도 이만 포기하려던 여주와 친구 되기를!
아이네가 속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원래 이런 말 쉽게 안 하는데. 에잇, 기분이다.
“있죠, 다음에 베룸 영지에 놀러 오면요. 오징어 요리 좋아하죠? 제가 실컷 먹게 해줄게요.”
배시시 웃으며 조잘거리는 아이네의 모습을 테고는 오래오래 눈에 담았다.
‘친구가 되면, 매일 볼 수 있나?’
지금의 테고는 이 빌어먹을 ‘친구’ 선언 때문에 꽤 오랫동안 고통받을 미래의 자신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황도의 베룸 공작저가 어디에 있었지?’
한발 앞서나간 기대감으로 쪼그라들었던 테고의 가슴이 부풀었다.
미혼의 영애가 홀로 머무는 저택이라 조심해야 한다는 건 미처 떠오르지도 않았다.